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는
만족해서 앉아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본다 해도
역시 만족해서 앉아 있다.
무엇보다 큰 한 세계가 알아보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며 그것으로 충분한 그런 마음의 상태는 하나의 경지다. 존재의 한 경지를 드러내는 이런 글을 읽는 동안 나의 존재 또한 커다랗게 확대된다. 휘트먼의 시를 읽으며 문득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가 떠올랐다.
산은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일 뿐인데 산과 물에다 우리의 분별심은 이런저런 수식을 보탠다. 만나는 대상마다 분별하고 판단하며 우리는 점잖은 사람, 야비한 사람, 느끼한 사람, 똑똑한 사람, 멍청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 하며 꼬리표를 단다. 대상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렇게 꼬리표 다는 일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단지 물일 뿐인데 대상에게 달아놓은 우리의 꼬리표는 편견으로 상대를 몰아세우기도 하고, 근거 없는 친밀감으로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이런저런 꼬리표를 가져다 붙인다 해도 산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며 물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흘러갈 뿐이다. 누가 나를 알아봐 준다고 해서 원래의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서 원래의 내가 더 못해지지도 않는다.
타인이 내게 붙여놓는 꼬리표에 의해 내 인생의 희비가 엇갈린다면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내게 꼬리표를 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붙여놓는 꼬리표에 의해 나는 기뻐하다가 슬퍼하다가 희비를 거듭하는 노예가 되는 것이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알아볼 줄 아는 경지에 가면 존재 그 자체로 우리는 풍요로울 수 있다. 내게 있는 무엇보다 큰 한 세계, 그것이 바로 신성이며 때 묻지 않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그 한 줄의 깨달음과 흡사한 게송을 이큐 선사는 이렇게 남기고 있다.

차고 기울고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래도 다시 떠오르는 달
보면 언제나 있는 그대로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그대로 붉은데 그저께 가득 찼던 만월은 조금씩 차오르다가 마침내 기울며 사라진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고, 자연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거듭되는 변화 속에 찼다가 기울고, 또 찼다가 기우는 삶. 인간의 삶은 우주의 커다란 원리를 따라 그렇게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어느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무상한 인생, 그 어디에다 꼬리표를 붙일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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