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 딜레마
성미가 급한 편이라고 여긴 적은 없지만 금오 스님의 〈끊지 말고 풀어라〉라는 법어를 읽고 보니 많이 성급한 쪽이구나 생각하게 됐다. 새 물건이나 우편물을 받았을 때 차근차근 풀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반가운 편지나 선물은 얼른 펴보고 싶어 재빨리 가위로 봉투나 싸맨 줄을 잘라 버리기 예사다. 정크메일이나 뻔한 문구가 담긴 선거철 우편물 같은 것은 그것대로 시답지 않게 여겨져 함부로 뜯어낸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그 ‘끊지 않고 푸는’ 문제를 우리 인생사와 연결해 말씀하셨다. 한낱 물건도 그렇게 끊어 버릇하면 모든 일에서도 그렇게 된다고 경계한 말씀이었다. 문득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성질’이 크게 작용하는 대인관계가 생각나 뜨끔했다. 친구를 좋아하지만, 두루두루 사귈 만큼 사교적인 사람은 못 된다. 그렇기에 굳게 믿었던 친구가 어느 날 돌변한 모습을 대하면 가타부타 따지는 일 없이 관계를 끊어버렸다. 사실 인간관계만큼 복잡하고 조심스러운 게 없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이것 역시 쇼펜하우어가 얘기한 ‘고슴도치 딜레마’의 일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추운 겨울날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추위를 견디기가 힘들어 서로 몸을 마주 대고 추위를 녹이려다 뻣뻣한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는 상황…… 이처럼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게 되고, 너무 멀면 서로의 따뜻한 온기를 나누지 못해 추위에 떨어야 하는 딜레마, 어쨌거나 ‘고슴도치 딜레마’는 여럿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 존재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구명보트 안에서 호랑이와 단둘이 마주할 확률
우리 중에 동물원 아닌 곳에서 벵골 호랑이를 만나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는 조각배 안에서 호랑이와 단둘이 살아남을 확률은 얼마쯤일까.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중국계 이안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그렇게 황당하고 믿을 수 없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사실 주인공 파이와 리처드 파커란 이름의 호랑이는 캐나다행 일본 상선을 타기 전, 소년의 아버지 소유 동물원에서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랬다고 한들 호랑이는 이미 약육강식의 본능대로 우연찮게 보트에 올라탄 동물원 옛 가족인 오랑우탄, 얼룩말, 하이에나를 소년의 눈앞에서 가차 없이 먹어 치운다. 이제 좁디좁은 구명보트 안에 남은 건 파이와 호랑이 단둘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말도 안 통하고 눈물로도 호소가 안 되는 야수와 마주한 일촉즉발의 상황, 죽을힘을 다해 호랑이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든가 헤엄치기도 능란한 맹수의 기세에 눌려 지레 투항하든가 양자택일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파이는 호랑이는 배에 태우고 자신은 뗏목으로 대피하는 위험한 공존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맹수가 탐식 본능을 유발하는 일이 없도록 먹잇감을 미리 마련해주며 227일간의 기묘한 항해를 계속한다. 중간마다 위기는 많았다. 그러나 적이라고 여겼던 호랑이가 지루한 표류 기간 동안 삶의 끈을 놓지 못하도록 하는 긴장감을 파이에게 부여했다. 호랑이 역시 나날의 먹이 조달을 위해 파이가 필요한 존재임을 간파했으리라. 여기에서 이안 감독은 우리에게 ‘적과의 공존’이라는 거대한 화두를 던져 놓고 있다.

우군(友軍)이 적으로 바뀌는 순간
“모든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명언이 있지만 타인과 부대끼는 일상이 곤혹스럽게 여겨질 때가 많다. 증오와 상처도 남에게서 비롯되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으니 문제다. 바깥일이나 부부 관계나 아이들의 진학문제 등이 그런대로 잘 나갈 때는 주변에 우군이 많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잘 나가던 일이 삐걱거리고 어느 순간 궁지(窮地)에 몰리게 되면 그토록 호의적이고 친밀하게 대하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적대적으로 변하는 걸 볼 수 있다. 평소에 친하지 않은 사람이야 당연히 그러리라 예상하지만 우군으로 믿었던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몹시 당황스럽다.
그럴 때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을 부처님은 일찍이 팔고(八苦)에서 말씀하셨다. 단순한 친소관계라면 일방적으로 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직장관계, 사업관계 더욱이 가족관계라면 당장 마음에 안 든다고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상대가 욕심 많고 이기적이고 무례하고 비열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는 어느 글에선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나의 일부를 미워하는 것이다” -맙소사, 싫어하는 상대의 그 역겨운 성격적 결함이 나의 내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니- 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대목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개봉됐을 때도 영화 속에 인간의 양면성 문제가 깊이 있게 암시돼 있다는 해석이 심심찮게 나왔다. 망망대해 가운데서 호랑이와 마주칠 확률에 대한 얘기를 했지만 파이는 정말 구명보트에서 동물들과 만났던 것일까. 리처드 파커란 호랑이가 처음부터 타지 않았다면,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인 것이 오랑우탄, 얼룩말, 하이에나 등이 아니었다면, 차마 그 참극을 해명하기 힘들었던 파이가 사람들이 아닌 동물들로 대체했으리라는 가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이안 감독도 이 대목에 대해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심지어 파이 자신도-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아리송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채식만을 즐기던 온화한 소년 파이’가 동물성 먹거리뿐인 바다 가운데서 혼자 살아남았다. 거기에 227일 동안의 항해를 증언하는 자 역시 파이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은 인간으로서 상상을 불허하는 어떤 사건이 구명보트 안에서 돌발했었음을 암시한다.
 호의적으로 우리 주위를 에워쌌던 사람들이 영원히 우군일 수 없듯이 나라는 존재 역시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며 너무나 다층적이라서 단순하게 한가지로 규정할 것이 못됨을 새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타인은 모두 지옥이다’라며 손사래를 치기 전에 내 안에 자리 잡은 지옥부터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일 법하다. 이래저래 ‘끊지 말고 풀라’는 말씀은 두고두고 풀어내야 할 화두임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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