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외치는 용기로 약한 이의 편에 서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은 인간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며, 극단적인 이기심에 사로잡혀 차마 하기 힘든 일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반면, 희생하고 헌신한다. 죄악에 휩싸이며 그로부터 벗어나 고귀하게 살아간다. 무명과 번뇌에 얽혀 있지만 문득 마음을 돌려 지혜와 자비심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인간을, 인생을, 정신을 단언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 혼돈과 불투명을 뚫고 한눈에 그의 삶과 마음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다. 그리하여 세상의 사표가 되고 혼란 속의 이정표가 된다. 2013년 만해평화대상 수상자 중 한 분인 김성수 대한성공회 대주교가 그런 이다.

시상의 이유는 지적 장애인 재활시설 ‘우리마을’을 세우고 촌장을 맡아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깥으로 내비친 그것만이 그에게 상을 주어야 할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좋은 삶을 살아왔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다해 세상을 섬겼을 것이다. 그 쌓아온 공덕과 마음 씀이 봉사의 삶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세상은 그런 이들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절망의 역사가 이어져도 파탄으로 끝나지 않는 것 또한 그런 삶의 빛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김성수 대주교는 1930년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서 태어났다. 고향 선산에 그의 조부와 부친이 영면에 들어 있고, 그는 선산 앞 선대가 물려준 땅에 ‘우리마을’을 세워 머물고 있다. 생명을 받아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 여생을 보내는 셈이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성공회가 처음 뿌리내린 곳이다. 그의 조부는 그 첫 세대 신자 중 한 명이다. 어린 김성수는 가족을 따라 자연히 성공회를 종교로 삼았다. 성공회 신명(神命)은 시몬. 집안은 유복했다. 공부를 시키겠다는 어머니의 욕심에 그는 소학교부터 서울로 진학했다. 서울 교동 소학교 입학에 실패하고 고향에서 한 학년을 마친 후 전학에 성공한다. 어머니의 바람인 경기중학교 대신 사립 배재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학창 시절 온갖 운동에 통달한 스포츠맨이었다. 당시의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주먹깨나 쓰고 성격이 괄괄하여 개뼈다귀란 별명을 가졌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건강하던 그에게 운명은 병마를 주어 삶의 목적을 일깨웠다. 배재중학교 졸업반 시절 아이스하키 경기 중 각혈을 했다. 의사의 진단은 폐결핵 3기.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고 그는 죽음과 마주 섰다. 당시엔 대책 없이 죽을병이었다. 8년을 앓았다. 때마침 한국전쟁이 터졌다. 세상은 전쟁의 아수라장으로 지옥이 되어 있었고 그는 병고의 지옥에서 싸우고 있었다. 골방에서 사람과 만남도 피한 채 오직 의사가 시키는 대로 약만 먹고 누워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병든 몸이라 인민군 의용군 징집도 피해 갔다. 친척들조차 그를 멀리했다. 오직 고립과 고독과 병마만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 시절에 대한 회고에서 병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를 분명히 밝혔다. “병을 앓던 시절 많이 외롭고 힘들었지만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욕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임을 사무치게 알게 됐다.”

청년 김성수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대학에 들어갔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강권에 의해서다. 단국대학교 정치학과. 학업을 하며 부친 회사의 수원 지사에서 일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배운 전공과 무관하게 일생을 결정지을 인연을 만나게 된다. 성당의 방 한 칸을 빌어 숙소로 삼던 중 그곳 부설 성베드로 보육원 아이들을 돌보아주었다. 대부분 전쟁으로 남겨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과 어울린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신부가 될 것을 권유했다. 이전까지 결코 생각해보지 못했던 길이다. 병마의 경험과 전쟁과 어려운 아이들의 모습이 그를 생각지 않던 운명의 길로 이끌었다. 절망 앞에 굴복하지 않았으니 새로운 길을 연 것이다.

서른한 살 늦은 나이에 신부가 되기 위해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미카엘 신학원에 입학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도 함께 수료했다. 당시 성미카엘 신학원장을 맡고 있던 미국 출신 대천덕(戴天德, 루벤 아처 토리 3세, 1918∼2002) 신부는 언제나 ‘노동은 기도이며, 기도는 노동’임을 강조했다. 신학생들에게 밭일부터 배우도록 했다. 신학생 시몬은 성서와 함께 무 배추 기르는 일을 배웠다. 신학원장은 기른 작물을 몸소 팔러 다녔다. 대천덕 신부의 이런 가르침은 훗날 그의 행적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김성수 대주교는 신학생 시절을 돌이켜 잡담이나 즐겨하고 그다지 신실한 신학생은 아니었다는 회고담을 남긴 적이 있다. “신학원에 다니는 동안 하느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신부가 된다면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은 굳어졌다.”

신학생 시절 그는 노동판에 취업하여 일한 적이 있었다. 세상의 어둠을 알기 위해서였다. 영산강 간척사업장과 탄광촌에서 몇 달 동안 막노동을 했다. 그곳에서 보고 배운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좌표가 됐다. 사람들은 깊이 모를 암흑 속에서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었다. 격한 노동에도 꽁보리밥 한 그릇에 생된장 하나만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게 힘든 세상을 보고 와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다 같은 하늘 밑에 살고 있지만 이제껏 보지 못한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그도 그들도 동등한 하나님의 자식이라면 평생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진 순간들이었다.

1964년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공회 사제로 서품되어 성직의 길을 걷는다. 몇 해 뒤 봉사활동을 위해 일본에 들렀다가 평생 도반인 프리다 여사를 만났다. 영국 출신의 선교사로 일본에 와 있던 그녀와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을 가졌고, 말보다 먼저 마음이 통하여 며칠 만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겨우겨우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한국에 한 번 나오라.”는 인사치레에 그녀는 덜컥 한국으로 건너왔다. “사랑은 서로 쳐다보기만 해도 좋은 것이다.”라는 그의 말대로 전등사 길을 함께 걸으며 결혼을 결심했다. 성공회 신부는 결혼을 선택할 수 있다. 본디 독신으로 평생을 지내는 수사(修士)가 되려 했지만 당시 국내에는 수사를 위한 성공회 수도원이 없었다. 나이 서른아홉에 결혼은 그렇게 운명이 됐다. 결혼 초 벽안의 아내에게 한국의 문화와 이웃종교를 알리려 전등사에 방 한 칸을 얻어 지낸 적도 있었다.

김성수 대주교에겐 그의 나이와 엇비슷한 80년 된 양복이 있다. 결혼 무렵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옷이다. 소매 끝과 앞섶을 가죽으로 덧대어 장인이 30여 년을 입었고, 그가 50년 가까운 세월을 더 입었다. 선사들의 누더기와 다를 바 없이 청빈과 검약을 드러내 보이는 옷이다.

성공회의 본고장 영국에서 유학을 마친 후 그는 인천 성공회 성당을 맡았다. 신혼방은 청년들이 들이닥쳐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젊은 송창식이며 이장희 조영남 양희은 등 젊은 패거리들이 교회 사택을 드나들었다. 밤새 떠들고 술을 마셔도 기꺼이 수발을 들어 주었다. 그렇게 막역히 대하면서도 청년들에게 한 번도 교회에 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파격으로 회자된다. 그들이 기억하는 김성수 대주교는 길 가다 행실 나쁜 이를 보면 버럭 화를 내길 주저치 않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고매하기보다 평범하고 사람 대하길 격의가 없었다. “신부도 사람이다.”가 당시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니 가여운 이들에겐 마음을 내주어도 악한에게 화를 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시절 김성수 대주교 부부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키우던 때였다.

결혼생활은 남 보기엔 평화롭고 성공적인 모습이었다. 아들딸은 잘 컸고 스스로의 삶에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였다. 그들 부부 또한 소소한 부부싸움을 겪어냈다고 한다. 처염상정(處染常淨), 속진을 떠나지 않아도 성스러운 모습을 잃지 않는 법이다. 그는 신도가 와서 인생사를 물어봐도 결혼과 양육, 부부싸움까지 모두 경험하였으니 그야말로 적절한 조언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1974년부터 그는 교회 밖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국내 최초의 지적장애인 대상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 초대 교장직을 맡아 10년을 봉직했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이 없던 시절이라 성공회 유지재단의 학교 설립은 우리 교육의 질과 단계를 한 차원 높인 계기가 됐다. 그가 교장을 맡아 기틀을 세우고 제자리를 잡도록 애썼다. 그의 아내 프리다 여사도 학교를 위해 헌신했다.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은 ‘특수교육의 대모’―부창부수를 여실히 보여준다. 프리다 여사는 장애 유아를 위한 장난감 도서관과 유치원인 레코텍 학교를 만들었다. 남편의 종교 사회 활동에 평생토록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 부부가 유독 장애인에게 마음을 쏟는 이유는 ‘장애인들은 가난과 장애라는 이중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섰으니 그를 믿는다면 반드시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아내가 월급을 받아 생활비로 쓰고 그는 자신의 급여를 고스란히 모아 성베드로학교와 음성 나환자 복지시설인 성생원에 보냈다. 아내가 월급을 받지 못한 시점이 되어서야 자신의 수입에서 생활비를 내놓았다. 청빈이 종교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성베드로학교 교장을 맡던 중에도 그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직을 맡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이 연속으로 터지던 시기였다. 게다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에 주저하지 않던 단체이다. 권력의 독재와 맞선 교회의 양심 세력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가 회장을 맡으면서 시도한 일은 일면 비정치적이었지만, 여러모로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일 년에 한 차례씩 회장단은 함께 눈을 가리거나 휠체어를 타고 종로 거리를 통과했다. 장애인의 고통은 몸소 체험치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낮은 곳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성직자뿐 아니라 세상을 이끄는 지도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파국과 불행이 닥친다.

이윽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한성공회와 성공회 서울본당과 김성수 주교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린 사건이 일어났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민주화 요구에 대해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헌법이 정당하다는 호헌조처를 발표했다. 정권 연장을 꾀하려는 군부 출신 세력에 국민의 저항이 시작됐다. 항거의 움직임이 있자 권력은 온갖 수단을 다해 국민의 움직임을 막으려 했다. 광장은 폐쇄되고 억압과 감시가 더해졌다. 6월 10일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순간, 전국적인 반정부시위가 시작됐다. 그날 정오 서울 정동 성공회 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당시 낭독된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6^10 민주항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김성수 주교는 1984년부터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교구장을 맡고 있었다. 그날 정오 김성수 주교의 집도로 ‘4^13 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가 열렸다. 그는 종교인을 비롯한 양심 세력과 함께 정치권에 국민의 뜻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 일에 대해 김성수 대주교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자란 사람이다. 젊은 신부들이 하자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고 몸을 낮추었다. 종교가 세상의 마음을 움직이는 길은 화려한 성전(聖殿)을 통해서도 요란한 행사를 통해서도 아니다.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진실을 외치는 용기와 약한 이의 편에 서는 헌신을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그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이후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대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주 거점 무대가 됐다.

그 사건을 인연으로 성공회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높아졌다. 우리나라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백여 년, 5만 남짓한 조촐한 신자 수, 150여 개의 교회, 3개의 교구. 거대 교회도 없고 막강한 교세도 없지만 성공회는 묵묵히 종교가 해야 할 일을 실천하고 있었다. 교회마다 저소득층을 위한 나눔의 집이 있고, 교세에 어울리지 않게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정신지체아 교육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음성나환자 복지시설도 운영하고 있었다. 1992년 결의를 거쳐 이듬해 선교 103주년이 되어서야 영국 캔터베리 관구 소속이던 대한성공회는 독립관구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초대 관구장으로 김성수 대주교가 추대됐다. 독립관구는 성공회 내에서 독립성과 독자성을 인정받는다. 대한성공회가 일정 부분 성장했음을 확정받은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아시아에서 네 번째 독립관구가 됐다.

1995년 대한성공회 관구장에서 물러나면서 김성수 대주교는 여생의 위업에 헌신한다. 유산으로 받은 고향 선산을 기증하여 ‘우리마을’을 세웠다. 김성수 대주교가 ‘우리마을’을 세운 것도 성베드로학교와 인연의 연장에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갈 곳이 없어지는 지적 장애인들에게 일하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장애인을 위한 최고의 복지는 일할 곳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곳에서 약 50여 명의 지적 장애인들이 밭을 갈고 콩나물과 버섯 등을 키운다. 불편한 몸놀림이지만 집중력과 성실함으로 극복한다. 반 정도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그 나머지는 출퇴근하며 일하는 삶을 배우는 곳이다. 김성수 대주교의 공식 직함은 촌장(村長), 마을을 이끄는 어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장애인 시설을 기피하는 세간의 분위기와는 달리 계획을 발표하자 강화도 그의 고향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없었다. 그는 “선대나 내가 크게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고 했다. 덕분에 큰 마찰 없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땅은 기증하였지만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정부의 지원도 받았고, 한 푼이라도 기금에 보태기 위해 한때 정동 주교좌대성당 앞에서 직접 커피를 타서 팔았다. 500원짜리 커피는 인근 직장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스스로 “오죽 답답하면 그랬겠느냐.”고 하지만 대주교의 커피는 금세 입소문을 탔다. 그곳에만 손님이 몰리자 근처 커피 파는 아줌마들이 몰려와 데모까지 했다는 후일담도 있었다. 사람들은 작은 일을 통해 선행에 동참했다.

‘우리마을’에서 키우는 콩나물과 채소는 강화도에서 판매된다. 전등사는 그 착한 뜻에 동참하여 절에 필요한 콩나물을 ‘우리마을’에서 구입한다. ‘우리마을’ 생산품을 선전하기 위해 김성수 대주교는 방송에 콩나물을 한 보따리 들고 출연하기도 했다. 그런 덕에 이제는 제법 알려져 있다. 정신지체아들은 일한 대가로 한 달에 수십만 원까지 월급을 받는다. 돈보다 더 중한 것은 직업인으로서 자긍심을 갖는 일이다. 함께하는 식사시간에 그들이 외치는 기도는 ‘우리마을’의 꿈을 분명히 들려준다. 김성수 대주교가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우리는”이라고 외치면 ‘우리마을’ 식구들은 “최고다!”로 화답한다. 그의 지론은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만한 사랑을 베풀 줄 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를 통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자비롭게 하는 길이 된다.

김성수 대주교가 대중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선 것은 2000년 성공회대학교 총장을 맡고부터이다. 성공회대학교 이사회가 그를 총장으로 임명한 이유는 “민주교육과 인권교육 평화교육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돼 총장으로 선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임명의 변에서 성공회대학이 지향하는 바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고 김성수 대주교는 그 일을 성취했다고 평가받는다. 그가 목표한 좋은 학교는 ‘구성원들이 가슴속 이야기를 터놓고 나눌 수 있는 곳’이다. 그것은 아마도 학교뿐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곳에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그가 총장으로 취임한 후 처음 한 일은 총장실 개방과 3천만 원 남짓한 판공비를 장학금으로 돌린 것이다. 학생들이 서먹하여 총장실을 찾아오지 않자 교정으로 식당으로 학생들에게 다가섰다. 학생들 밥을 사주다 카드 펑크의 위기도 겪었다. 잘못된 일을 보면 성심을 다해 꾸짖었다. 진실한 마음의 훈계는 상처가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학생들은 그를 총장님이란 호칭보다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됐다. 덕분에 생긴 별명은 ‘할아버지 총장’과 ‘장미꽃 총장’이다. 학생들이 총장에게 식권을 달라고 하고 축제 때 스스럼없이 사진을 찍자며 다가오며 매달 15일에 생일잔치를 함께했다. “총장은 높은 사람이 아니다. 학생의 심부름꾼이고 가까운 사이이므로 내가 먼저 다가가서 손을 붙잡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학부생 2천5백 명, 대학원생 5백 명의 작은 규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모든 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성공회대학의 교육철학인 ‘한 사람의 일등보다 더불어 살 줄 아는 열 명의 사람을 가르치는 것’임에 충실한 결과다. 외적 성장과 팽창이 학교 발전의 척도가 되고, 더 많은 돈을 끌어오는 것이 학교 경영자의 능력으로 치부되는 세간의 기준과는 다른 길이 그곳에 있었다. 김성수 대주교는 늘 학생들을 믿는다고 했다. 학생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기억했다. 자신의 학생들을 일러 “참으로 성실한 이들이다. 세상은 결국 그런 이들이 바꾼다.”고 했다. 총장 임기를 두 차례 채우고 그는 이임식 없이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떠나 ‘우리마을’ 촌장으로 살면서 그가 전력하는 일은 장애인 재활전문 병원을 세우기 위한 비영리 공익재단인 푸르메 재단 일이다. 2005년부터 시작한 이 일은 2012년 첫 결실을 보아 재활치료기관인 세종마을 푸르메 센터가 문을 열었다. 서울 상암동에 어린이 재활병원을 짓고 그 영역과 사업을 확대시킬 계획을 지녔다. 참으로 어려운 일들만 골라 한길을 걸어온 삶이다. 앞으론 ‘우리마을’에서 일하다가 쉰 살이 넘어 그곳을 떠나야 할 때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요양원을 세우는 일도 목표로 삼는다고 했다. 성베드로 학교의 인연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큰 원이다.

현대의 고승 한 분은 깨달음의 경지를 묻자 ‘내외명철(內外明徹)’이라 단언했다. 마음이 밝아지면 그 빛을 감출 수 없어 바깥까지 환해지고 주변을 비추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이다. 빛은 가둘 수 없고, 착한 의지는 신을 대리하여 세상을 위해 헌신한다.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 선한 의지와 실천은 결국 우주 끝까지 환히 비추는 힘이 된다. 세상이 종교인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그 빛이다. 그 빛을 따라 세속의 혼란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바르게 살면 그 앞이 환히 트인다. 마음이 정직하면 즐거움이 돌아온다.(시편 97장 11절)” 김성수 대주교가 가장 좋아한다는 성경 구절. 그의 삶의 모습과 꼭 닮았다. ■

 

김천
자유기고가.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한국방송(KBS) 작가와 불교TV 프로듀서로 일했다. 저서로 《행복한 사람들》이 있으며 영화 〈동승〉의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2003 상하이 국제영화제 최우수 극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맥스웹 프로덕션 대표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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