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지난 5월 4일 ‘대승불교의 전법정신과 전법론’이라는 주제로 열린 불광연구원 제17차 학술연찬회에서 발표된 발제문이다.

 

1. 시작하며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는 동서문화교류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비교적 단편적인 차원으로 접근되어 왔다. 즉 기원전에 이루어진 장건(張騫)의 서역경영 등을 통해 동서교류의 서막이 열리고, 이를 통해 불교 역시 자연스럽게 동아시아로 전해진 것이라는 지극히 보편적인 차원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에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을 사실이겠지만, 단순히 역사적 배경으로 그 출발점을 이해해야 하겠느냐는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료의 부족과 전파 과정에 놓여 있는 지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보편적 역사 배경을 근간으로 하되,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을 지리적 차원과 ‘전법’이라는 주제 속에서 이를 밝혀보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곧 인도 및 서역에 존재해 있던 기존 불교교단의 전법의지와 연결되고 동시에 이들의 적극적인 전법에 의한 것이었다면 동아시아 불교의 출발점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학계에서는 불교 전파냐 혹은 수용이냐라는 측면으로 그 용어를 달리하며 동아시아 측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왔다. 그러나 초전기 활동했던 승려들의 행적과 그들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통해 과연 그 시각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측면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보는 시도를 해보도록 한다. 그 방법에서 구마라집 이전 시기까지 불교가 전파되는 시기에 한정 짓는다. 전법승들의 직접적 활동 장소라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국한되어 살펴봄으로써 동아시아 초기불교가 자리매김할 수 있는 원동력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물론 위진남북조 시대, 수당 시대의 역경승을 비롯한 여러 방식의 전법승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기록에서는 더욱더 구체적인 행로가 제시되어 있음에도, 본 논문에서는 초전기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해 나아갔다.

왜냐하면 전법행과 관련하여 연구가 진행된 바 없기 때문에 앞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데 있어 시대별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초전기에 한정 지었다. 또한 초전기의 전법 성격이 규명되어야만 이후의 연구가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전법행을 위주로 한 측면에서 다루어진 연구 활동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시도는 전법에 대한 개념 이해를 달리할 것으로 기대되며, 더불어 초전기의 발전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불교 전파 시기, 전법승들이 주로 이용했던 중앙아시아의 루트를 따라 대표적인 고승(高僧)들의 행적을 밝히며 그 과정에서 파생된 전법행들을 짚어본다. 그리고 많은 전법승 가운데 특히 전파 초기, 순수한 불법 전파 측면과 대중교화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처럼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보고자 하는 이유는 인도와는 확연하게 다른 사회구조 및 가치관을 어떻게 극복하고 전법을 실현했는가를 보고자 함이다. 범위를 한정 짓는다 하더라도 과거 수많은 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전법승인데다가 사료(史料)의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시론적(試論的) 입장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2. 경전의 번역과 전법

불교경전의 번역은 궁극적으로 불교의 법(法)을 인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 알리고자 했던 중요 사업이다. 이는 알리고자 하는 주체가 존재했던 것과 동시에 불교를 알고자 했던 주체가 동시에 존재했던 것으로 두 주체의 뜻이 모여 성립된 사업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그러나 전파 초기의 경전 번역은 전자의 의지가 좀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시점에 관해서는 그 학설이 매우 분분하지만, 대략 기원 전후의 시점 혹은 훨씬 이전부터 중국에 불교가 전파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고유 사상이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던 중국에 후한 시대의 환제(桓帝) 건화원년(建和元年, 147) 지루가참(支婁迦讖)과 이듬해 안세고(安世高)가 중국 낙양(洛陽)에 당도하여 경전을 번역했다는 점은 불교가 자리 잡는 데 있어 첫 번째 시도가 바로 역경(譯經)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현재의 사료로 확인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전법승이 바로 역경 활동에 동참하고 있어 경전의 번역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대단히 시급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을 추측해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장(章)에서는 경전을 번역했던 전법승을 위주로 살펴본다.

1) 초전기의 전법 의지

초전기 중에서도 150여 년의 기간 동안 불교경전을 번역한 출가자의 숫자는 55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목록에 입각한 숫자이고, 실제 활발한 활동과 더불어 전기(傳記)가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역경승의 숫자는 불과 20~30여 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기록상 구마라집 이전인 4세기까지 중국에서 활동한 천축 및 서역 출신 역경승의 출발은 섭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기록 및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대한 진위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어 이마저도 허구라 본다면 그 숫자는 도안(道安)이 제시한 역경승의 숫자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이들 이후에 중국에서 본격적인 역경 활동에 참여한 인물은 안세고(安世高)이다. 안세고는 안식국(安息國)의 왕족 출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안세고가 낙양에 당도한 것은 기원후 148년으로 이후 20여 년의 기간 동안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음지입경(陰持入經)》 《대도지경(大道地經)》 등 34부 40여 권을 번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향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안현(安玄)의 경우에는 엄불조(嚴佛調)와 함께 《법경경(法鏡經)》을 번역하였다.

안식국은 각주 4번의 내용과 같이 아르사케스(Arsakes)가 건국한 파르티아(Parthia)의 중국 명칭으로, 장건이 처음 국명을 사용한 이후 남북조 시대에 이르는 시기 동안 여러 사서에서 안식국으로 명명되고 있다. 즉, 중국과의 관계는 후한 장화원년(章和元年, 87)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안세고가 중국에 관한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로 보인다. 안세고가 중국에 관해 알고 있는 상태에서 경전을 들고 온 것은 그 행위 자체에서 이미 전법을 결심하고 서역을 거쳐 중국에 당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안현은 출가자가 아닌 상태로 중국에 들어와 일단 교역에 종사하며 경전을 번역하였다.

당시 카라반 출신이면서 동시에 불교신자였던 이들도 생업에 종사함과 동시에 경전의 번역이나 불교 신앙의 형태를 중국에 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안현 한 사람의 예로 초전기의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으나, 기록의 부재(不在)와 이 시기 중국에서 활동한 이들의 예가 극히 적은 것을 본다면, 이러한 예는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대변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안현과 같이 출가자 신분이 아닌 상태에서 이국인으로서 당시 이국 종교라 할 수 있는 불교를 경전의 역출만이 아닌 실생활에서 이질적 느낌을 최소화하는 활동을 했을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어 이 당시 대단히 적극적인 전법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전법 활동은 비단 안식국 출신의 역경승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승전》에서 중천축 출신으로 소개된 담가가라(曇柯迦羅)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담가가라가 중국에 들어온 시점은 사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대략 가평(嘉平) 연간인 3세기 중엽에 낙양에 들어온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담가가라에 관해서는 주로 계율과 관련된 연구만 진행되었다. 초전기 불교교단 및 사회상을 해석하는 데 있어 담가가라의 계율 관련 행적 및 역경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이러한 측면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면 바로 담가가라의 전법 의지라는 부분과 그의 행적 부분이다.

담가가라의 출가계기는 25세에 이르러 어느 승방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법승(法勝)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보게 되면서이다. 법승의 《아비담심론》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설일체유부의 후기 논서에 해당하나, 정확히 어디서 지어진 것인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런데 이 시기 설일체유부의 주요 활동 지역은 카슈미르 지역이다. 그렇다면 담가가라가 카슈미르 지역에서 출가했다는 가정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천축, 즉 인도 출신인 담가가라였기 때문에 인도 내부에서 논서를 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여기서 ‘일승방(一僧坊)’이라는 부분에 잠시 눈을 돌려보자. 인도 내부에도 물론 수많은 사찰이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론에서 승방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승방이라는 말과 정사(精舍)라는 공간의 차이점은 명확치 않다. 《십송율(十誦律)》을 비롯한 많은 경전에서는 두 가지 용어가 함께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보운경(寶雲經)》에서는 승방과 탑사(塔寺)를 연이어 쓰고 있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탑 혹은 불상이 존재하는 사원의 개념이 승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보운경》의 이와 같은 예는 정사와 승방이 미묘하게 다른 용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승방과 정사의 분포가 지역마다 차이 나는 부분을 현장(玄奘)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는 카슈미르나 간다라와 같은 서북인도 지역에 관한 기록에서는 주로 가람(伽藍) 혹은 승가람(僧伽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중인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가람 혹은 정사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인도 내륙에서는 동일한 사원에 대해 주로 정사의 개념이 강했고 서북인도 지역에서는 승방의 개념이 강한 사원이 건립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담가가라가 인도 내륙에서 출가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서북인도의 간다라 혹은 카슈미르 지역에서 출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담가가라는 이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적극적인 전법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동행(東行)한 것으로 보인다. 담가가라의 전기를 보면 그는 “항상 돌아다니며 교화시키는 일을 귀히 여겼으며,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출가지였던 서북인도 지역을 벗어나 서역 지역을 통해 중국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설일체유부의 전통에서 출가하였으나 이에 얽매이지 않고 전법행을 하면서 동시에 계본을 입수하여 이를 전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행로를 추정해본다면 아마도 서북인도에서 천산남로에 위치한 쿠차를 통해 동쪽으로 이동했던 것 같다. 그가 번역했던 《승기계심》을 비롯해 다양한 계본이 쿠차에 존재했고, 철저히 계율에 입각한 교단이 운영된 대표적인 서역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렵 쿠차와 중국은 이미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중국에 관한 정보 역시 입수하여 결국 교단운영에 필요한 계본을 가지고 낙양으로 향했던 것 같다. 즉, 그의 전법 의지는 곧 《승기계심(僧祇戒心)》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가 중국 낙양에 도착하기 이전 중국 전역에 불교가 자리 잡고 있었으나 좀 더 자세한 계율에 입각한 교단의 운영이 절실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담가가라가 번역한 경전은 곧 낙양교단의 발전적 양상을 낳게 된 것이다. 이로써 후대 “담가가라가 오고 난 후 부처님의 가르침이 크게 행해졌다”라는 그에 대한 평가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전법 의지를 지니고 역경에 참여한 승려들은 다수 존재하지만, 지면 관계상 3세기 이전의 전법승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최초기 역경은 현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불교사상 전반에 걸쳐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경전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당시 중국에서 불교가 자리 잡는 데 있어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각 부분들이 해소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를 이끌었던 역경승이 전법 의지를 가지고 경전을 번역했다. 이는 단순히 당시 서역과의 교류라는 측면을 통해 불교가 자연스럽게 전파되었다는 동서교류사적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2) 역경을 통한 전법의 기초

앞서 언급한 역경승들의 예는 주로 전법의 의지를 가지고, 당시 중국에서 필요로 하는 부분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통해 전법 활동을 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법 대상의 사회, 불교에 대한 시각이 변화함에 따라 정법(正法)을 알릴 필요성이 생기면서 차츰 역경 대상의 불교경전 성격도 분명해진다. 이는 시기적으로 3세기 이후가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구마라집 시대가 되면 이러한 현상이 극에 달하는 셈이 된다. 그런데 라집이 대승불교에 초점을 맞춰 전법을 하게 된 이면에는 이전 시대의 전법승 활동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라집의 역경사업이 완성되는 배경에 관해 살펴보도록 한다.
라집의 활동 시기 이전에 본격적인 역경의 시작은 축법호(竺法護)라고 할 수 있겠다.

축법호는 구마라집 출현 이전, 최대의 역경승으로 기록되고 있다. 축법호가 중국 장안에 당도한 시점은 대략 270년 전후로 추정된다. 축법호의 전기를 통해 보면 중국에 당도했을 당시의 나이가 50여 세로 추정되는데, 그 기간 축법호는 둔황(敦煌)에서 서역, 다시 둔황으로 돌아와 종국에 장안으로 들어오는 긴 여정을 적어도 20여 년 동안 이룬 것으로 보인다. 8세에 출가한 축법호는 방등부 경전이 총령 밖, 즉 서역에 있음을 알고 뜻을 세워 36개 국어에 통달함과 동시에 경전을 중국에 들여오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전기 상에는 서역의 어떤 국가를 경유했는지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의 대표적인 역경목록에 《반야경》 《정법화경》 《현겁경》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대략적인 추정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야경》의 경우에는 비슷한 시기인 감로 5년(257) 주사행(朱士行) 일행이 호탄에서 입수한다. 물론 당시 반야경 계통은 서역 각국에서 유통된 흔적이 보이기는 하지만, 3세기 중엽 반야경 계통 경전들에 대해서는 호탄에서 그 범본 혹은 호본을 구한다는 일종의 공식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축법호가 《반야경》을 구하기 위해 사막남도로의 구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반야경》뿐만 아니라 《현겁경》 역시 당시 서역 각국에서 상당히 유행하고 있던 현겁천불신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경전의 입수 역시도 동일 경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정법화경》의 경우에는 다시 천산남로로 길을 우회한 것인지, 아니면 서북인도 부근에서 천산남로행을 이어간 것인지에 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쿠차에서 입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법화경》의 유통이 쿠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외에도 쿠차와 《법화경》이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정황에서 드러나고 있다. 축법호(竺法護)에 의해 태강 7년(286) 《정법화경》 번역이 이루어지고, 이에 대한 교정 작업이 10여 년 후에 구자국 출신 백원신(帛元信)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축법호는 호탄을 거쳐 카슈가르로, 다시 천산남로의 길을 거쳐 쿠차에 입성했거나 혹은 호탄에서 곧바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거쳐 쿠차로 입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의 경우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 어려운 여정은 아니었겠지만, 당시의 여건에서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정은 개연성이 낮아 보인다. 오히려 전자의 경우 호본을 구하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감안해 본다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축법호의 서역행의 종착지는 장안이지만, 둔황을 비롯해 양주 일대에서 입수한 경전으로 사상의 전개, 새로운 불교신앙의 소개, 수행방식의 전수 등을 통한 전법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가 생을 마칠 무렵인 영가(永嘉) 2년(308) 천수사(天水寺)에서 《보요경(普曜經)》을 번역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축법호 말년에 머물렀던 천수사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진 바 없다. 그런데 현 감숙성 천수 지역에 맥적산 석굴이 존재하는 등 과거 양주 지역으로 분류되던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석굴군이 자리 잡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축법호와 구마라집의 본격적인 활동 시기 사이에 석굴사원이 완성 혹은 개착되고 있다는 점과 이들의 장안행 경로에서 이 지역을 거쳐 간다는 점은 축법호가 말년에 이 근방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해준고 하겠다.

또한 서진(西晋) 시대 전후로 중국이 혼란기에 있기 때문에 전법승들의 주 활동무대가 낙양에서 장안으로 전환된다. 다시 말해서 장안과 지리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감숙 지역이 동전(東轉)과 서전(西轉)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사회상과 지역상 그리고 전법사(傳法史)가 어우러져 불교가 급속도로 다양한 지역에 전파된 것이다.

축법호와 같이 전법의 뜻을 품고 중국에 들어온 승려로 승가발징(僧伽跋澄), 담마난제(曇摩難提), 승가제바(僧伽提婆), 담마야사(曇摩耶舍)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모두 구마라집이 장안에 들어오기 20~30여 년 전에 장안에서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때문에 축법호를 비롯한 이들의 활동은 구마라집이 본격적으로 역경을 하는 것, 그리고 경적(經籍)을 채택하는 데 있어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가운데 계빈(罽賓) 출신 승려는 승가발징, 승가제바, 담마야사로 이들의 전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출가→수행→교화의 순서를 통해 중국으로 이동하고 역경에 참여한다는 점이다. ‘교화’를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온 승가발징의 역경은 《아비담비바사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그의 전기에 보면 “항상 여러 곳을 돌아다니겠다는 의지를 갖고 풍속을 관찰하고 널리 교화하였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동일 국가 출신인 승가제바 역시 “남을 가르치는 일에 힘써 진실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부씨의 건원 중에 장안으로 들어와 법으로 널리 교화를 펼쳐 나갔다.” 담마야사 역시 30세에 이르러 정진하다가 문득 교화에 뜻을 두게 된다.《고승전》의 기록에 의해 보면 “꿈에서 박차천왕(博叉天王)이 ‘사문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널리 교화를 시켜서 중생구제를 늘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하거늘 어찌 소소한 일에 얽매여 자기만을 착하게 할 뿐인가?’”라는 현몽을 통해 도를 전수코자 여러 나라를 거쳐 동진 융안(隆安) 연간(391~401)에 중국에 들어왔다.

이에 비해 도거륵(兜佉勒) 출신인 담마난제는 10세 이전에 출가하여 각국을 돌다가 고비사막을 넘어 건원 연간(365~385)에 장안에 들어왔다. 그의 전기에서는 “어릴 적 많은 나라를 두루 돌아보고 항상 일컫기를 홍법의 체를 아직 듣지 못한 곳에 마땅히 널리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멀리 사막의 위험함을 무릅쓰고 보배를 품고 동쪽으로 들어왔으니 부씨 건원 중(365~385) 장안에 도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장안에 들어온 것은 오로지 불교를 전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위의 기록에서 상세히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중국에 전해준 불교는 주로 아함 계통의 경전들로 이전에 소개되지 않았던 분야를 최초로 중국에 이식시킨 인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축법호를 제외한 전법승들의 출신은 주로 서북인도에 치우쳐 있다. 당시 서북인도는 설일체유부의 성향이 강한 지역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전법의 의지를 내세우는 일은 그 당시 정서와는 부합된다고 보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4세기 이전까지의 중국 내부는 혼란이 가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그들의 행적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역경을 통한 전법 활동은 위의 기록들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여기에는 그 어떤 강압도, 정치적 문제의 개입도 없는 순수한 전법 의지의 발로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와 축법호의 역경사업 등은 1세기 무렵이 지난 시점의 구마라집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축법호 이전에도 역장(譯場)의 개념은 존재했다. 그러나 축법호가 쿠차 등지에서 필수, 교정 작업을 할 사람들을 직접 데리고 들어와 함께 작업한 것은 본격적인 역경사업으로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구마라집에게까지 이어져 많은 경적이 번역될 수 있었다고할 수 있겠다. 

3. 대중교화를 통한 전법

중국은 기존 고유의 사상과 신앙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가 정착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사회적 배경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방면으로 입증된 바 있는데,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대중교화’적 성격의 전법론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에는 이러한 기본적 배경이 아닌 좀 더 특수한 배경이 대두되어야 할 것이다. 즉, 한족(漢族) 중심이 아닌 북방의 유목민족이 한족의 주 무대였던 중원을 지배하는 시기에 불교가 이들을 대상으로 펼쳐낸 전법방식인 것으로 이해돼야 할 것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불교가 북방 유목민족 출신의 왕들에게 사상적 차원에서 중원 정복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불교에 우호적이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전개되는 내용상 북방 유목민족과 남쪽의 한족이 갖고 있었던 불교에 대한 시각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 단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호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전파 초기에 활동했던 고승들을 중심으로 좀 더 근원적인 문제로 다룸과 동시에 이들이 과연 전법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들의 전법행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었는가에 관해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때문에 이 장에서는 신이승(神異僧)이라 불리는 고승들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해보도록 한다. 신이승들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연구나 평가가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역경이나 의해 등 불교사상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는 고승들에 대해서는 언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신이승들이 주도해 나아갔던 불교 전파방식이 어떤 시각에서는 저급하게 평가되는 경우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전법행’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함으로써 초전기에 이들이 이루어낸 불교의 대사회적(對社會的) 교화 활동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신이승(神異僧)의 출현과 전법행

불교가 전파되는 초기 시점이라 할 수 있는 기원 전후의 시기는 중국 내부뿐만 아니라 서역 각국 역시 극심한 혼란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장건(張騫)의 서역정벌행이나 반초(班超 32~102)와 그의 아들 반용(班勇)의 서역에서의 활동을 보면 기원 전후 서역에 대한 중국 측 입장을 분명하게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서역경영 이면에는 ‘흉노(匈奴)’라는 분명한 정벌대상이 존재하였다. 다시 말하면 서역경영이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흉노정벌이 일차적 목표였고, 필요에 의해 서역에 대한 경영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이와 같은 중국과 흉노의 대치 속에서 서역의 각국은 혼란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즉, 흉노의 빈번한 침략과 흉노에 맞서는 중국 사이의 갈등에서 서역 각국은 흉노의 통제하에, 혹은 중국의 지배권 아래서 위정자들의 잦은 교체와 더불어 끊임없는 전란 속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역의 국가 대부분의 왕족들은 자국(自國)에 머물지 못하고 서쪽의 카슈미르(Kashmir)나 카슈가르(Kashgar) 지역 또는 인도 및 서북인도 지역의 국가로 유학을 떠나는 일이 속출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왕족을 배경으로 한 인물들이 승려가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앞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여러 국가의 풍속과 정치적 상황을 익히면서 동시에 출가 생활을 이어간 경우가 상당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 바로 신이승이라 보인다. 물론 역경이나 의해승들도 이러한 사회변화 과정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활동이 사상적인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반면 신이승들의 활동은 지극히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차원이어서 사회변화상과 함께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이승의 시초는 불도징(佛圖澄)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불도징의 활발한 활동에 비해 그의 생애에 관한 연구는 활발하지 않았다. 불도징이 어느 국가 출신인가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진서(晋書)》에 의거하여 천축 출신이라는 것, 두 번째는 《고승전》 기록에 의거하여 쿠차국 출신이라는 것이다. 논자 역시 《고승전》 기록에 의거한 쿠차국 출신이라는 점에 좀 더 무게감을 두고 있다.

그의 전기를 보면 역경을 했다거나 사상을 전개한 것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신주를 외워 귀신을 부린다거나 방울소리로 운세를 미리 알려주는 일, 혹은 전장에서 승패를 점치는 일이 그의 전기 내용의 대부분이다. 이러한 그의 행적이 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대단히 이단적인 행동이며 오히려 불교에 관해 극단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국가적 정황을 생각하면 불도징의 이러한 행적은 오히려 승려의 국사 참여가 불교교단을 위해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단사적 차원에서 불도징의 국사 참여를 평가하거나 이로 인해 중국불교사 전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이 아닌 그의 신이행 가운데 특히 대중적 차원으로 전법행을 했던 부분 역시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해석 방식은 지극히 위정자적인 측면에서 보아온 것이기 때문에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 즉 대중적 차원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불도징 활동 당시 석륵이나 석호에 대한 교화 활동이 곧 백성을 위한 것이었음은 기본적으로 회자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대중이 이러한 교화 활동을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접적인 교화 방식이었다고 보인다. 오히려 직접적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그의 치병 활동인 것 같다. 《고승전》에 그에 대한 기록 가운데 “석호(石虎) 아들 빈(斌)이 죽은 지 이틀이 지났는데 도징이 버들가지를 갖고 와서 주문을 외우니 잠깐 사이에 죽은 사람이 일어났고 얼마 후에는 예전 상태로 회복하였다” 이 사건이 있었던 후, 석륵은 전국의 아이들이 절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했으며 초파일마다 아이들을 위해 발원했다. 석륵의 치세는 그다지 평화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일 이후, 아이들을 위해 발원하고 절에서 지내게 했다는 점은 불교를 대중적으로 더욱 성장시킬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불도징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단도개(單道開)는 둔황 출신으로 그 역시 석호의 비호를 받았던 인물이다. 다만 불도징과 차이점이 있다면 단도개는 석호의 호의로 받은 물자를 모두 보시하였고, 국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단도개 역시 치병 활동에는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약을 사용한 눈병치료에 명성이 높았던 것 같다. 또한 천축 출신인 기역(耆域)은 동진 시대 낙양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역시 기이한 치병 활동으로 명성을 날렸다. 기록에는 “청정한 물 한 잔과 버들가지 하나를 갖고 와서 곧 버들가지로 물을 뿌리고 손을 들어올려 등영문을 향해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하기를 3번 반복하고 이어 손으로 등영문의 두 무릎을 끌어당겨 일어서게 했더니 곧 일어나 걷는 모습이 예전과 같았다.”고 전한다.

기역과 동일하게 동진의 낙양에서 활동했던 가라갈(訶羅竭)의 경우에는 개개인을 상대로 치병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전염병을 다스리거나 또는 물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는 방식이 드러나고 있다. 전염병을 다스릴 때에는 주로 주문을 외워 치료했고, 물이 없는 석실에서 좌선하는 그를 위해 사람들이 물을 대고자 노력하니 석실에서 물이 샘솟게 하는 신이함을 보였다. 그리고 그 물은 배고픔, 갈증, 질병이 제거되는 것으로 이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라갈의 경우는 앞에서 언급되고 있는 신이승에 비해 좀 더 다수를 위한 치병 활동을 펼쳤지만, 다른 신이승과의 차이점은 주로 산에 기거하다가 발병했을 때 활동한 모습이 보여 비교적 소극적인 전법을 행했던 것 같다.

가라갈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승려가 바로 안혜칙(安慧則)이다. 기역이나 가라갈을 이어 활동했던 안혜칙은 그 출신국가나 성씨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가라갈과 상당히 유사하다. 《고승전》에서는 “천하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그는 밤낮으로 기도하며 천신이 약을 내려 만민을 치유케 해달라고 발원했다. 어느 날 절문을 나서다가 항아리 모양을 한 2개의 돌을 보았다. 의아해 집어보니 신비한 물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병자들이 이 물을 마시니 모두 치유되었다”라고 전한다.

위의 예시들과 같이 200~400년 사이 200여 년의 기간 동안 중국에서 활동한 신이승들은 국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것 이외에 치병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치병하는 데 있어 공통점은 모두가 물을 사용하거나 혹은 버들가지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관음보살의 형상과 동일한 점인데, 이들이 이미 관음신앙을 접하고 이러한 신이행을 행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이러한 치병 활동은 결과적으로 불교가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줌으로써 민간신앙에 깊숙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나 400년 이후부터 이 같은 활동보다는 불교적으로 신이 활동의 의미가 더 큰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곧 초전기 중국의 신선사상과 맞닥뜨리면서 전법 방향을 우회적으로 선회하며 이러한 정서를 크게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접근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초전기 중국에서 활동한 신이승들은 불교에 호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나아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구법행을 통한 전법

구법행이 곧 전법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초전기 중국 내부 정서로 보았을 때, 중국인 출신의 승려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불교에 대한 인식이나 인지도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여기에 구법을 하기 위해 당시 군사지역 혹은 난행의 길이라 여겨지는 서역으로의 구법행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교화적 차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구법승이 이러한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구법행을 감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지극히 현대의 관점에서, 전법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렇지만 구법승의 구법행과 그 이후의 교화는 결국 전법행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러한 현대적 관점이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구법승에 대한 전기, 행적, 당시의 관점 등을 분석해보도록 한다.

중국불교사에서 첫 번째로 기록되고 있는 구법승은 주사행(朱士行)이다. 주사행에 대한 기록은 《고승전》 《출삼장기집》 《대당내전록》 《불조통기(佛祖統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불조통기》에서는 구법에 대한 언급 이전에 정원(正元) 원년(254) 조에서 “대승(大僧)과 사미의 구별이 없다가 담마가라(曇摩迦羅)가 안식국 사문 담제(曇諦)와 수계법을 낙양에 들고 온 이후 담무덕이 4분계본을 역출하였다. 이후 10인이 갈마법에 의해 계를 받았는데 주사행이 그 시초가 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담마가라’는 앞서 살펴보았던 ‘담가가라’를 의미한다. 그런데 담무덕파의 갈마법에 의해 수계를 받은 인물에 관해서 위의 기록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수계작법이 중국에 소개된 시점이 위(魏) 가평 연간(250~253)인 점과 주사행이 계를 받는 시점이 정원 원년(254)인 연관성을 고려해본다면 위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정식 수계절차를 밟아 출가한 첫 번째 중국인이 행한 것은 바로 구법이다.

주사행이 범본 《반야경》을 구하기 위해 호탄으로 가는 배경과 경위, 결과에 관해서는 많은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사행이 지금의 섬서성 및 감숙성 지역인 옹주(雍州)를 출발하여 지금의 호탄으로 향한 시점은 위 감로(甘露) 5년(260)이다. 수계 받은 장소가 낙양이라 간주해본다면 주사행은 장안, 하서회랑 지역을 거쳐 사막을 끼고 누란을 통과해 호탄에 도달하는 경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범본 반야경을 입수하여 중국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정작 자신은 귀국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훗날 그에 대한 전기를 비롯해 그의 구법 정신을 여러 사료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후 동아시아의 여러 구법승을 탄생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법승으로 기록되고 있지는 않지만 주사행의 구법행 이후 강법랑(康法朗) 역시 구법행을 실현했다. 《고승전》에서는 법랑이 유적을 우러러보기로 하고 4명과 함께 장액을 떠나 서쪽의 유사를 지나다가 옛 절이 길가에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서 머물며 도업을 닦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법원주림》에서는 그 시기가 진 영가(永嘉) 연간(307~313)으로 기록되어 있어 주사행보다 약 35년이 지난 시점에 서역으로의 구법행에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법랑 또한 주사행과 마찬가지로 사막남도, 즉 호탄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동행했던 사람들과 헤어져 서쪽으로 이동해 경론을 찾아 연구, 후에 다시 입국했는데 수백 명의 문도가 형성되었다. 법랑의 구법은 귀국 후 곧바로 전법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어서 주사행이 경전을 중국으로 보내주는 것보다 한층 더 발전되고 적극적인 전법에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사행과 강법랑과 같이 구법을 위해 서쪽으로 이동했던 예와는 달리 장안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오히려 둔황을 이동해 전법행을 했던 예도 보이고 있다. 축법승(竺法乘)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축법호에게 사사하고 출가한 축법승은 둔황에서 절을 세우고 학도들을 초청, 교화활동을 시작했다. 법승의 이러한 행적과 더불어 《고승전》에서는 “이리나 승냥이와 같은 사나운 족속들의 마음을 혁신시키고 오랑캐 무리들로 하여금 예의를 알게 하여 교화가 서쪽 땅에서 크게 이루어진 것은 법승의 힘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법승이 활동했던 시기에 관해서는 축법호와의 관계를 고려해 추정할 수 있다. 《출삼장기집》에 의거해보면, 동진 혜제(惠帝, 재위 290~306) 때에 활동했던 축법호 문하로 들어가 두각을 나타낸 것이 법승 13세 때의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은 동일하게 《고승전》에서도 보인다. 또한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에서는 법승을 명제(明帝) 시대의 인물로 분류하고 있다. 명제는 323~325년간의 재위기간을 유지했는데, 이때 법승은 앞서 기술했던 둔황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둔황은 불교가 정착되기 시작하는 단계이면서 동시에 후한 시대부터 연이어 혼란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법승은 대략 30여 세에 혼란기에 있는 둔황에서 교화활동을 본격적으로 함으로써 불교가 역으로 서전(西轉)하는 데에 힘을 쏟은 승려로 재평가받아야 한다고 보인다.

5세기로 접어들기 직전, 우리에게 익숙한 구법승이 출현한다. 바로 법현(法顯)인데 그는 동진 융안(隆安) 3년(399), 장안을 출발하여 고비사막, 총령을 넘어 천축으로 구법행을 시작한다. 그의 구법행은 《불국기(佛國記)》로 기록되어 현존하고 있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지금까지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혹은 지역불교사에 많은 자료를 제시해주기도 한다. 법현 이전의 구법승들이 특정 경전을 구하기 위한 구법행을 했던 것에 비해 법현은 경률을 구하겠다는 뜻으로 천축에 이르는 서역 국가에서 구법을 했다. 이후 현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구법승이 탄생한 데에는 법현의 뜻과 귀국 후의 전법 활동이 중국사회 전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특정 경전이나 혹은 경론을 구하기 위해 혼란기에 있던 서역제국으로 뛰어든 것만으로도 당시 중국 사회에서 불법에 대한 갈망이 높았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구법승들의 귀국 후 활동은 역경이나 사상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았기 때문에 불교가 사상적으로나 종교·문화적인 측면에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4. 마치며

전법(傳法)의 사전적 의미는 ‘법을 전한다’이며, 구법(求法)이란 ‘법을 구한다’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보면 두 가지 용어는 상대적 개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불교가 전파되고 그로 인해 구법을 하는 행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확인한다면, 이는 상대적 개념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중국을 비롯해 동아시아에 불교가 전해지는 방식은 전법승(傳法僧)에 의한 전법행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불교를 전해 받은 측에서는 불법에 대한 갈구가 곧 구법승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훗날 구법승들은 귀국하여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전법을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전적 의미에서 상반된 개념이 서로의 의미를 끌어안아 지금까지 불법이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구법 활동은 중국에서 인도로, 한국에서 중국 및 인도로, 일본에서 한국, 중국 및 인도로 이루어졌고, 다시 반대로 전법이 이루어졌으니 비단 여기서 다루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국한된 개념은 아니다.

중앙아시아를 통한 동아시아로의 불교 전파 방식은 전법과 구법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주지한 바와 같이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전법의 방식이 역경을 통해 정석대로 이루어진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쨌든 동아시아로의 불교 초전기부터 이루어진 전법과 구법 활동은 꾸준히 지속되었고 불교의 정착, 발전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상당히 높게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으나 구마라집에 대한 사서의 기록은 전법승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북위 효문제 태화 21년 5월에 조칙을 내려 구마라집의 도행을 칭찬하고 라집이 상주하던 사찰의 유적지에 3층탑을 세울 것을 명했다. 또한 라집이 처첩을 강요당했으므로 자손이 있을 것이니 그 자손을 찾아내어 관위를 주고 우대할 것을 명했다.

구마라집 활동 이전까지의 전법행이 갖는 의미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초전기에는 출가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역시 전법행을 목적으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로 이동했으며, 이들은 생업을 이어가면서 이국인으로서 이국 종교인 불교를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둘째, 구역(舊譯)을 완성한 구마라집의 활동은 이전 시대 전법승들의 전법 의지, 교화 활동, 역경 활동을 통해 사회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역할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그들이 중국인들의 불교사상에 대한 갈구가 조성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 역시 불교발전의 본격화를 촉진시킨 것으로 작용하였다.

셋째, 5세기 이전까지 신이승들은 국사관여와 더불어 대중적인 치병 활동에 앞장서면서 중국 사회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용이한 조건을 이끌어갔다. 정착 이후 신이승들은 불교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초기 신이승들은 지극히 대중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양상은 곧 특정한 전법방식으로, 계획된 신이행이 존재했다고 보인다.
넷째, 전법승들에 의해 불교가 소개되면서 구법승이 출현하게 되고, 구법승들의 귀국 후 활동은 이후 사상 및 신앙의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활동은 현시대의 전법 활동에서도 구법과 전법이 동일한 개념이란 것을 각인시켜 주는 것이어서 초전기 구법승들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

 

 

한지연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서역의 불교발전과 교류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주요 저서로 《서역불교 교류사》가 있고 〈동아시아적 전환 시발점으로서의 돈황 불교에 대한 고찰〉 〈불상조성의 교리적 근거와 공덕〉 〈고승전 역경편으로 본 중국 초기불교의 전개〉 등의 논문이 있다. 현 한국미술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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