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禪 수행, 그 전개와 변용의 연구》(2013)를 요약한 글이다.

1. 들어가는 말

미국에서 ‘선(禪: Zen)’이란 말은 대중 문화적 측면과 수행적·역사적 측면이 있다. 먼저 대중적 측면에서 볼 때 선은 최근 미국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문화적 주류 안에 들어옴으로써 큰 유행어가 되었다. 선은 불교라는 종교와 무관하게 대중적으로 《활쏘기의 선》 《선과 오토바이 정비술》 같은 책 제목에, ‘선과 초콜릿 만들기의 기술’ ‘선과 설거지의 기술’ 같은 마케팅 분야에, “You look so Zen today.”처럼 일상 언어에 사용되기도 한다.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선은 ‘명상’ ‘자유로움’ ‘자연스러움’ ‘세상과의 합일’을 상징하기도 하고, 인테리어 잡지 등에서는 ‘미니멀리즘의 공간’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신선함’ ‘고요함’ ‘맑은 정신’ ‘집중의 원천’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적인 선의 개념은 더 이상 아시아의 특정한 불교전통을 가리키지 않고 보다 더 일반적인 생활의 한 방식이 된 것 같다.
두 번째로 선은 수행적·역사적 측면이 있는데, 본 논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영역이 바로 미국 선의 수행적인 측면이다. 20세기 중·후반의 미국 지식인들은 소비주의와 유물주의에 저항하면서 자연과 정신으로부터 소외가 심화됨을 개탄하던 중 선을 접하고 이상적이고 대안적인 생활방식으로 수용했다. 그리하여 선은 1950~60년대 미국사회에서 붐이 일어나며 의미 있는 종교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는데, 그러한 영향력은 그 이후로 현대까지도 유효하다. 주류 문화에 반항하던 1960년대의 반문화(counterculture) 세대는 선을 서양의 영적(靈的)인 풍경 일부로 정착시킨 주역이었다. 1960년대 이래로 일본, 한국, 베트남의 선사들이 미국으로 들어가 선 수행의 씨를 뿌렸고, 그 토양 위에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선 수행은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선은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비판을 받기도 했고, 대형 선원의 선사들이 성추문, 권력남용 등 여러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존립의 기반이 흔들리는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수행단체들은 자신들의 수행문화를 성찰·반성하고 전면적으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오히려 위기를 발전의 기회로 삼기도 했다.


2. 미국의 선 수행 개요

미국인들은 선 수행을 받아들인 이래로 선원(Zen Center)이라는 새로운 수행공간을 만들어내고, 수행과 일상생활을 결합하는 등 최적의 수행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여러모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그 결과 주거 겸용 선원, 농장, 사업체 등 새로운 제도와 관습이 창안되었다. 오늘날에도 선은 지속적으로 미국의 문화적 환경에 맞게 변용해가고 있으며, 수행에 참가하는 개인과 단체들도 증가하는 추세다. 미국에는 역사상 유례없이 일본선, 한국선, 중국선 등 아시아 선이 모두 들어와 있다. 그뿐 아니라 선은 티베트 명상과 위빠사나 같은 불교명상과도 활발하게 교류·혼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증유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교명상이 탄생할 것이란 기대감도 확산되고 있다.
아시아의 전통선이나 미국에서 전개되는 선은 수행의 목적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즉, 그것은 수행을 통해 에고(ego)의 집착에서 벗어나 얽매임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엄밀히 본다면 이러한 목적이 서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얽매임 없는 삶’ 즉 ‘자유’ 혹은 ‘해탈’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둘 다 욕망과 집착의 근원은 에고이고, 이 에고는 다른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근원적으로 실재하지 않으며, 서로 의존하면서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불교의 가치관은 공유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아시아의 전통선과 미국의 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된다. 큰 틀에서 보자면 전자는 대체로 그 수행의 주체가 승가공동체이고 후자는 재가자들이다. 선 수행의 장소는 전자가 주로 한적한 사찰이라면, 후자는 도시의 선원이다. 전자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가부장적 시스템 안에서 전개된 선이라면, 후자는 민주주의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서양의 제도 안에서 전개되는 선이다. 전자는 제도화된 종교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선이라면 후자는 세속의 삶 속에서 선의 통찰을 적용해가는 취지의 선이다. 전자는 오랜 전통 속에서 제도적, 이론적, 의례적 측면을 망라하는 정교한 사유체계가 구비되어 있는 선이라면 후자는 그러한 이념적 틀이 형성되지 않은 실천적, 행동적 선이다.
전통선의 정교한 사유체계를 미국의 선에서 중시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선 수행과는 본질적으로 무관한 아시아 문화의 산물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미국의 선은 선의 통찰을 수용하면서 사유체계는 다른 여러 불교 형태에서 차용하여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 이와 같은 탈전통의 추세는 미국 선의 원류인 아시아 전통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단적이고, 비정통적이라는 비판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서양의 학자들은 전통선의 시각으로 미국의 선을 비판하는 태도야말로 아시아의 정신문화를 우월시하고 서양의 그것을 열등하게 보는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서양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선에 대한 비판적 담론은 확대 재생산되면서 선 수행의 가치와 정체성이 약화되는 경향도 있지만, 미국 선 수행의 주요한 양상은 동아시아 전통선의 이념적 틀보다는 실천적 행동을 중시하는 성향이다. 미국인들의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볼 때 제도, 의식, 교리로서 선은 문화적 요소일 뿐 진정으로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결국 미국인들이 선 수행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은 삶에 직접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요소는 그렇지 않은 요소에 비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장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른 선불교가 아시아라는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 미국에 들어갔고, 또 시간적으로 포스트모던의 현대 미국사회 속에 확산되면서, 마치 새롭게 태어난 유기체처럼 선은 이제 새롭게 미국문화 속에 자리 잡고 성장, 발전하고 있다. 미국에서 전개되는 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미국의 선이 동아시아의 선 전통과 정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선이라면, 그것은 비정통적이고 이단적이며, 타락한 선인가? 아니면, 동아시아 선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창의적이고 새로우며 혁신적이고 대안적인 선인가?
미국 선과 선 수행의 성격을 어떤 식으로 규정할 것인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 현재 한국불교계에서 미국인의 선 수행이나 미국불교에 대한 학술적 연구결과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또한 현재 상황에서 미국의 선 수행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거나, 혹은 이미 기정사실로 된 일련의 문화변용 현상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자칫 오해와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 그들은 왜 ‘깨달음’보다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선적 통찰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겼을까? 경책의 사용, 절 수행, 여러 가지 의식들은 왜 반대하는 것일까? 이런 일련의 문제는 선 문화의 원천적인 제공자인 아시아인의 시각이 아니라 수용자인 미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미국에서 활발하고 거침없이 전개되고 있는 선은 아시아의 선불교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 논고의 목적은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선을 고찰함으로써 선의 현대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역사가 일천하고, 수련생도 거의 대다수가 엘리트 계층이고, 명상 위주로 진행되는 미국의 일반적인 선 수행 경향만을 통해서 선의 현대적인 의미를 규정하기에는 논리의 비약과 선의 가치관을 왜곡할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미국의 사례는 현대 선의 향방에 큰 의미를 던져준다고 본다.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선은 아시아에서 유래했지만 시간, 공간,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미국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례는 선과 현대사회라는 담론에 한국선이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또한 대중화·세계화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한국선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3. 선의 전래와 전개

미국에 도입된 선은 동아시아의 전통선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1893년 시카고 종교의회(Parliament of the World’s Religions) 당시에 미국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일본의 선불교는 19세기 말의 역사적 상황의 산물로서, 그것은 일본의 전통 선불교가 아니라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1889) 시대의 근대화된 신불교(新佛敎) 운동의 산물이었다. 19세기 말 미국사회는 기독교의 가치관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되면서 종교 다원화에 대한 요구가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 선불교의 만남은 불교를 근대화, 국제화, 보편화하고자 했던 일본의 신불교 운동 세력과 미국 대중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종교 간 논의의 장을 마련해준 절묘한 합작품이었다. 선불교를 전달한 주인공은 당시 신불교의 주창자이며 임제종 선사였던 소엔 샤쿠(釈宗演, 1860~1919)였다.
그런데 미국 선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엔 샤쿠의 재가제자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선불교는 재가자에게 선을 가르치는 개혁을 단행했었다. 그는 20세기 초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 일본의 선불교를 전파한 주역이었는데, 그가 서구에 소개한 일본의 선불교는 전통적인 선불교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스즈키가 서양에 제시한 선은 역사의식이 없고 신비적, 낭만적, 환원주의적, 이상적인 선이었는데, 서양의 지식인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더불어 스즈키의 선은 미국의 대중문화에도 여과 없이 수용되어 가면서, 미국 대중들은 스즈키의 선이 선의 전부인 것처럼 오해하기도 했다. 
1950~60년대 미국에는 선의 붐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젊은 비트세대(beat generation)가 미국의 전통 가치관, 소비 자본주의, 물질만능의 분위기에 반발하면서 선은 미국사회의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 부상했다. 주로 문학과 예술 분야에 종사하던 이 젊은 지식인들은 동양의 영성에 매료되면서 선을 통해서 현실도피적인 자유를 맞본다.
비트세대에 이어서 1960년대의 미국에는 주류 문화에 저항하던 반문화세대(counterculture generation)가 사회운동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 히피 반문화세대는 ‘평화와 반전’을 외치면서 기성세대에 반항했고, 당시 미국사회를 휩쓸고 있던 페미니즘 운동과 발맞추어 개방적, 퇴폐적, 환각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LSD를 비롯한 환각제를 즐겨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약물들은 그 약효에 일관성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들은 선의 깨달음 상태를 LSD의 환각상태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당시 미국사회에 생겨나고 있던 선원으로 몰려들었다. 이 히피 반문화세대는 미국에 선이 대중화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중반, 미국에 유입되던 이민의 수를 제한했던 이민법이 철폐되면서 아시아로부터 이민들이 몰려 들어왔고 더불어 이민 민족불교도도 급증했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의 선사들과 선불교 종파들이 미국 땅에 들어와서 선원을 건립했다. 당시 선 수행에 관심을 둔 미국인들은 주로 반문화세대의 젊은이들과 여성들이었다.
1950~60년대 선의 붐은 1970년대의 확장기로 이어지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가다 1980년대가 되어서 위기가 찾아든다. 그동안 선 단체들에 내재해 있던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갈등의 진원은 선사와 여성 제자 사이의 성추문이었으나 금전 문제, 알코올중독 문제도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미국의 불교명상 단체들을 위기로 몰아넣은 문제의 근원은 포괄적으로 보아서 아시아와 미국의 문화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아시아의 선 수행 문화에서 선사는 깨달은 자로서, 붓다의 경지에 이른 이상화된 존재로서 수행의 위계구조에서 최상위를 차지한다. 초창기 미국에는 이러한 일본선의 권위주의적 위계질서가 여과 없이 이식되었고, 1980년대가 되면서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그 실체를 드러냈던 것이다.
수행단체 지도자들의 성추문으로 촉발된 논쟁은 선사의 무소불위의 권위와 수행문화의 위계질서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통선의 권위와 위계질서 문제를 미국식으로 해결하기 위한 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수행 공동체들은 개혁에 돌입했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개혁 드라이브의 바탕으로 삼아, 수행 단체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수직적·위계적이지 않고 평등하고 수평적인 방향으로 개혁해갔다. 스승의 권한은 여러 사람에게 분산되었고 위계질서에 기반을 둔 아시아의 전통문화는 미국식으로 변용되거나 버려졌다. 또한, 선 수행문화에 잠재해 있는 아시아 특유의 문화적 더께를 벗겨 내는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개혁은 주로 페미니스트 불교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선 단체들은 위기를 잘 극복하고 개혁에 성공하면서 선은 다시 대중들에게 다가갔으며, 지금은 출판, 연예, 일상생활 등의 대중문화에 넓게 확산되었다.


4. 선 수행 현황

미국에 뿌리내린 불교명상 전통들은 선, 티베트 명상, 위빠사나가 대표적인데, 그 중에서 선은 성공적으로 정착한 최초의 아시아불교이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1997년 미국과 캐나다의 불교단체 중 약 40퍼센트가 선과 관련된 단체라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 미국에는 일본선, 한국선, 베트남선, 중국선 등 아시아의 모든 선 전통이 들어와 있다.
일본계 선은 미국 진출의 역사가 가장 길며 임제종, 조동종, 삼보교단(三宝教団, 1954년 야스타니가 임제종과 조동종의 전통을 결합하여 창종) 등 세 종파가 활동하고 있다. 이 중 임제선은 무사도와 관련된 전통 때문인지 ‘사무라이 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조동선에 비해 귀족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수행 스타일은 사사키 조슈(佐々木承周, 1907년생) 노사(老師)의 경우처럼 공안참구를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엄격한 수행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남성적인’ 수행 분위기는 삼보교단의 설립자 야스타니 하쿤(安谷白雲, 1885~1973)의 제자였다가 결별하고 독립종파를 이룬 필립 카플로(Philip Kapleau, 1912~2004)의 로체스터 선원(Rochester Zen Center)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하여 미국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선원(San Francisco Zen Center)의 설립자이자, 《선심초심(Zen Mind, Beginner’s Mind)》의 저자인 조동종 선사 스즈키 순류(鈴木俊隆, 1904~1971)의 조동선은, 임제선보다도 덜 귀족적이고 분위기도 부드럽지만 의례는 더 많이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숭산행원(崇山行願, 1927~2004)의 관음선종회로 대표되는 한국계 선은 일본계보다 더 절충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특징은 숭산 대선사가 대한불교조계종의 통불교적 전통을 공안수행과 함께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음선종회는 미국 내에 35개 선원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선승 중에는 삼우 스님(三愚, 1941년생)도 있다. 그의 선련사(禪蓮寺)는 1967년 맨해튼의 아파트에서 창립되었는데 1990년 북미자혜불교회(Buddhist Society for Compassionate Wisdom)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단체는 북미에서 다원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종교 간 대화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삼우 스님은 보편적 구제라는 원력을 실천하고자 1985년부터 3년 과정의 미륵상가대학(Maitreya Buddhist Seminary)을 개설하여 한국불교 해외포교사를 양성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자혜불교회는 다섯 곳의 지부를 운영하고 있는데 각각 앤아버(Ann Arbor), 시카고, 뉴욕시, 토론토, 멕시코시티에 자리 잡고 있다.
베트남계 선의 전파는 미국에서 주로 틱낫한(Thich Nhat Hanh, 1926년생)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스타일은 한국계나 일본계와 많이 다르다. 즉, 그가 중국 임제종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하지만, 수행 스타일은 한국계와 일본계보다도 훨씬 더 부드럽고 절충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고 또한 일상생활의 마음집중(mindfulness)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독특하다.
현재 미국의 선은 그 원천인 아시아 선불교와 많이 달라졌다. 미국의 선은 아시아의 그것처럼 대승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많은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우선 수행의 주체가 재가자 위주로 변한 점이 가장 큰 변화인데, 이 점은 앞으로도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즉, 수행의 방향이 재가자의 삶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선 수행이 한적한 수행처에서 내면의 탐구에 몰두했던 것에 비해 미국의 선 수행은 수행과 사회참여를 연계하는 역동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수행의 중심에 도시형 선원(Zen Center)이 자리 잡고 있다. 아시아의 선찰이 선 수행과 불교신행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면 미국의 선원은 선 수행과 다양한 사회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선은 이제 미국사회의 저변으로 점점 더 많이 확산되면서 대중의 삶과 밀착되고 그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어 가며, 위상을 점점 더 확고히 해가고 있다. 물론 그 선이 정통선이냐 아니면 비정통선이냐는 논의는 차치하고 말이다.
미국에는 선뿐 아니라 티베트명상, 위빠사나도 큰 세력을 이루고 있는데, 이 세 가지 수행법은 미국에 들어온 지 수십 년에 불과하지만 수행자의 수는 수천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오늘날 이 세 가지 명상수행은 각기 비슷한 세력을 이루면서 대중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 명상불교의 원천인 아시아에서는 불교의 확장이 정체되어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이렇게 유례없이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수행의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의 선, 티베트명상, 위빠사나는 모두 비종파적이고, 열린 태도를 보이면서, 서로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교류하고 있다. 티베트명상은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 전개되기 시작하여 1970~80년대에 대중화되었는데, 수행법이 매우 다양하다. 선과 유사한 비분별적(비개념적, 비분석적) 명상인 마하무드라(mahamudra)와 족첸(dzogchen)이 있는가 하면 개념적인(분별적, 분석적) 특징을 지닌 분석명상도 미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가장 늦게 미국에 전개·발전되기 시작한 위빠사나는 선과 티베트 명상과 다르게 미국인들이 직접 동남아시아로 가서 그곳 상좌부불교 명상 스승으로부터 배워 와서 미국에 전파시켰다. 그래서 그런지 가장 미국적 색채가 짙고 수련생들은 업, 윤회, 재생 등의 불교 교리에 대한 신앙도 거의 없는 편이다.


5. 선 수행 문화의 특징

미국에서 선 수행은 아시아의 전통을 벗어나서 유례없이 독특하게 변모하면서 미국문화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곧 아시아의 전통선이 미국문화와 습합되면서 미국화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미국화는 재가 수행자 중심, 남성 중심의 탈피, 사회참여, 민주화라는 상호의존적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재가 수행자 중심’은 동아시아의 전통 선불교가 출가승단 위주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미국에서는 독신으로 살면서 출가 승려의 길을 가는 전통이 없고, 그런 것은 사회적으로도 존중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위계질서에 바탕을 둔 출가–재가의 이분법적인 상가(sangha)의 구조는 불교를 종교보다는 철학이나 삶의 방식으로 여기는 미국인들에게 호소력이 없다. 아시아에서는 선이 대승불교의 한 종파로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되었다면, 미국에서는 그보다는 붓다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는 수행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미국에서 선 수행의 목적은 내세보다는 현재의 삶에서 욕심을 벗어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세속적 목적을 가진 선 수행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특징을 보이며, 출가승려가 되는 것도 원치 않으며 또한 출가승단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도 않게 된다.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재가자 지향의 선 수행은 미국인들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선 수행 자체가 재가자 지향적으로 재편된 이후에 미국에 도입된 결과이기도 하다. 일본계 삼보교단의 선은 특히 강한 개혁성향을 보이면서 재가선을 강조하였으며, 다수의 재가불교도뿐 아니라 가톨릭 사제에게 제자를 배출할 수 있는 인가(印可)를 내리기도 했다.
둘째, 남성 중심의 탈피다. 불교는 교리상 여성 차별적인 부분이 있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명백히 평등을 주장했다. 선불교가 대중에게 알려지던 1960년대 미국에서는 제2의 페미니즘의 물결이 일어났다.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양성평등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였으며 선불교가 기독교 등 다른 종교보다도 차별이 없다고 보고 선 수행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성들이 보기에 선불교는 아시아 유교문화의 위계질서와 가부장적 요소를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전통선의 문화 속에 잠재된 가부장적 남녀차별 요소들을 지적하며 양성평등에 입각하여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 결과 여성들은 선 수행과 관련된 모든 면에서 양성평등을 지향한 개혁을 추진하여, 이제는 지도자의 역할에서도 남성과 대등한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여성들은 실제 수행 현장에서도 차별을 거의 느끼지 않고 있다고 보고하기도 한다. 선 수행에서 페미니스트의 입장을 반영하는 개혁이 진행되고 여성 지도자가 다수 배출되면서 여성 주도적인 수행문화가 나타나고 있는 점도 두드러진다. 특히 전통적으로 형식적이고, 엄격하고, 딱딱한 남성적 스타일의 수행문화로부터 부드럽고, 여성적이고, 대안적 성과 가족문제 등을 다루는 부드러운 수행문화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셋째, 사회참여 현상이다. 베트남의 선승 틱낫한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참여불교는 수행과 계율을 바탕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는 반전, 인권, 경제정의, 환경보호, 사회봉사 등의 사회참여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마음집중을 행하는 수행이다. 미국인들은 전통 선불교와 달리 활발히 사회참여를 하면서 수행에 임하는 편이다. 미국인 노사 중에는 적극적인 사회참여 활동을 위해 소속 종파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 조동종 선사 타이잔 마에즈미(前角博雄, 1931~1995)의 제자 버니 글래스맨(Bernie Glassman, 1939년생)과 삼보교단의 지도자 야마다 코운(山田耕雲, 1907~1989)의 제자 로버트 아이트켄(Robert Aitken, 1917~2010)이 바로 그들이다. 이 두 사람은 각자 계보를 떠나서 재가자로 돌아와서 각각 선평화단(Zen Peacemakers)과 불교평화친교단(Buddhist Peace Fellowship)을 설립하여 선불교의 통찰에 바탕을 둔 사회참여불교를 실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선의 사회참여 사례는 아시아의 장구한 선불교의 역사 속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의 사회참여 문화에 동화되는 현상은 선이 이질적인 문화와 큰 갈등 없이 습합되는 유연성을 드러내는 사례로 볼 수도 있다.
넷째, 선 수행문화의 민주화다. 미국에서 전개되는 선 수행의 민주화는 미국 민주주의의 전통과 아시아의 선 수행문화가 융합되면서 나타난 탈전통적 수행문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민주화 현상은 수행의 보편화, 평등화, 탈위계화, 개방화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보편화란 승려 위주에서 남녀와 출·재가 구분 없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보편적 수행으로 바뀐 현상을 가리키고, 평등화란 미국적 실용주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남녀 간의 평등한 관계를 말한다. 탈위계화란 사제간 위계질서의 수평화를 가리키고, 개방화란 미국의 선이 전통선에서 결여된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로 나서고 있다는 의미다. 개방성은 교도소, 호스피스, 빈민구제, 환경 등의 영역으로 선 수행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고 수행방식을 창의적으로 변용하여 미국에 적합한 새로운 선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가족수행과 일상 활동에 대한 마음집중 수행을 선 수행의 영역 안에 도입한 것이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개방성은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에 입각하여 타 전통을 인정하고 창의적으로 변용하여 수용하는 새로운 추세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미국 선 수행에서 이 같은 열린 태도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6. 선 수행에 대한 전망

미국 선 수행의 전망을 수행의 지향성, 지속가능성, 비(非)종파성 및 통합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행의 지향성에 대해서 알아보면, 미국 선 수행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필립 카플로의 《선의 세 기둥(The Three Pillars of Zen)》과 스즈키 순류의 《선심 초심》에 기술된 깨달음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들에 기술된 선 수행의 목적은 아시아 전통선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즉 연기, 무아, 공에 기반을 둔 반야지(prajna)의 체득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가 지나가면서 선 수행의 중점은 일상생활의 마음집중(mindfulness)과 윤리 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인다. 성추문의 여파로 아시아 선사들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가 깨졌고, 수행문화의 미국화가 진전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수행의 중점이 바뀌면서 당연히 내면의 통찰을 통한 해탈이라는 선 수행 본연의 목적도 약화되었다. 미국문화 속에서 수행의 궁극적 지향점이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적어도 아시아의 방식으로 회귀하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아시아의 선승들에서 미국인들로 지도자의 세대교체가 거의 완료되면서 선 수행문화의 탈전통적 미국화가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 선의 지속가능성 문제다. 미국 땅에서 선 수행은 아시아의 전통 선불교와 확연하게 달라졌으며, 대승불교의 선불교 전통에서 명상적인 요소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불교적 의례와 의식 등 명상 이외의 요소는 아시아 문화의 더께라고 제거했다. 그런데 선 수행의 문화를 이와 같이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기를 씻기고 나서 그 씻긴 물만 버리는 게 아니라 아기까지 함께 버리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비유는 선 문화를 수용하면서 아시아의 문화적 더께를 벗겨 내다가 정작 선 문화의 본체까지도 벗겨 내 버릴 수 있다는 우려를 말해준다.
사실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선은 그 역사가 10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속가능성을 논의하기가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속가능성을 논의하면서 아시아의 전통선 패러다임을 고수한다면 미국 선의 탈전통적, 혁신적, 현실참여적인 모습은 너무도 생경하고 이질적으로 보일 것이다. 따라서 지속가능성 논의는 전통선의 패러다임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탈피하고, 미국 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선 수행의 양상은 아시아의 전통선에 비교적 충실한 일본계 임제선으로부터 미국문화에 한층 더 밀착된 존 타란트(John Tarrant, 1949년생)의 태평양선협회(Pacific Zen Institute)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미국 선의 짧은 역사를 고려할 때 지속가능성 역시 현재로서는 속단할 수 없으나, 선이 현대 미국인의 절박한 필요에 부응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전통선의 이데올로기와 그 간격을 지속적으로 넓혀가면서 새로운 형태의 미국 선으로 태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셋째, 미국 선 수행의 비(非)종파성과 통합성이다. 미국의 선 수행자와 수행 단체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실용주의적인 기준에 의거한 절충적, 선별적인 성향이다. 이런 성향이 미국의 선 수행 단체에서 나타나는 비종파적 태도의 근간이 된다. 이러한 태도는 각 전통 간의 수행들을 혼합하고 공유하는 식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상대방의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종교적 다원주의, 더 나아가서 불교 통합운동(ecumenism)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서양불교에서 이와 같은 통합불교의 주창자는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이 대표적이다. 종교다원주의 역시 불교의 다양한 전통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불교와 기독교, 불교와 유대교 같은 불교 외적인 전통들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미국 선에서 보이는 이러한 비종파적, 개방적 태도는 상대 종교의 장점을 인정하고 배울 수 있는 불교적 상생의 태도이며, 향후 미국 선 수행이 더욱더 탈전통적이고 미국 친화적인 모습으로 변용되는 원천이 될 것으로 보인다.


7. 나가는 말

한병철의 《피로사회》(문학과 지성사, 2012)에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이 20세기 말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으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긍정성 과잉의 성과사회가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성과주체는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스스로를 마모시키며 피로라는 만성질환을 앓으면서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한병철이 통찰한 포스트모던의 피로사회에서 선은 어떤 식으로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현대의 선이 스스로를 마모시켜며 분주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존재의 의미를 음미할 기회를 주고 있을까? 미국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현대인에게 필요한 선은 세련된 이론도 아니요, 종교적 격식이나 의례도 아니요, 세상일에 초연하고 홀로 고상한 자태도 아니다. 그것은 권위와 위계라는 부정성의 패러다임에 기반을 둔 것도 아니요, 무턱대고 우리 것이 최고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공허한 레토릭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탈전통의 패러다임으로 재편된 현대사회에서 삶의 의미를 성찰하고, 현대사회의 문제들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위해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장은화
동국대 강사.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 졸업(박사). 역서로 《중국인의 삶과 불교의 변용》(도서출판 씨아이알, 2012)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일본계 미국선의 ‘여성참여’와 ‘사회참여’ 그리고 간화선 세계화의 담론에 대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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