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건 그 시대를 묘사하는 단어가 있다. 최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이 시대의 명제는 불통(不通)인 듯싶다. 불통인사, 불통정부를 넘어 불통의 장벽, 불통의 시대라는 표현도 보인다. 어느 공직자의 치명적 실책에 대해서도 불통의 결과라는 지적이 있다. 비단 최근의 일 뿐 아니라 지난 정부에 대해서도 불통에 대한 비난이 드물지 않았다.
불통이란 그야말로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사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대개는 힘, 권위, 권력을 가진 자일수록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다. 지시에 따른 상명하복을 강조하고 ‘나를 따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주장한다. 말하자면 불통 또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다. 다만 타인의 의사는 듣지 않을 뿐이다. 전체주의 국가 또는 총수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재벌기업의 경우 이런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보통은 이를 비민주적이라 비판하나 사회가 경직될수록 이런 일방적인 의사소통을 강요한다.
불통의 반대 개념은 소통(疏通)이지만, 종교적 관점에서는 소통을 넘어 원통(圓通)을 지향한다. 그 뜻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두루 통한다는 의미이다. 관세음보살을 일러 원통대사(圓通大士)라 칭한다. 관세음보살의 원이 세상 모든 이들의 소리를 두루 듣겠다는 것이며, 그 바라는 소리를 자재하게 성취시키겠다는 것임을 일깨우는 칭호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의 이름이 원통전(圓通殿)인 데도 그런 뜻이 담겼다.
《수능엄경(首楞嚴經)》은 관세음보살이 깨달음을 얻은 수행법은 세상의 소리를 두루 막힘 없이 듣는 이근원통(耳根圓通)임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귀를 통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다른 감각의 수행 또한 두루 통한다 했다. 다른 이의 소리를 듣는 것을 수행의 첫머리에 놓은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하기 힘든 것을 해낼 때, 그 성취 또한 클 것이다. 하물며 중생의 어려움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이에게도 어려울진대 세상 모든 이의 위에 섰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자에게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세상 이야기에 가장 귀를 잘 기울인 이를 꼽으라면 단연 부처님이시다. 성도하신 이후 열반에 이르기까지 평생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대부분의 경전은 부처님께서 탁발에 돌아오시면 늘 머무시던 나무 아래 선정에 들었다가 찾아오는 이들을 맞았음을 전해주고 있다. 그야말로 거의 모든 부류의 인사들이 찾아왔다. 견해를 달리하는 외도, 왕과 부자, 걸인과 살인자, 존경받는 학자와 몸을 파는 이까지. 그들의 질문 또한 다양했다. 삶의 고단함과 마음속의 어둠, 진리에 대한 열정과 부처님에 대한 증오까지 그야말로 속내를 쏟아놓았다. 부처님께서는 대부분 조용히 들으시고, 고요히 답하셨다. 그 정경들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한 초기경전들은 부처님의 대답을 들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기뻐하며 그 가르침을 받아갔다[歡喜奉行].”고 전한다.
무엇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을까? 그들은 과연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었을까? 혹은 그랬을 것이고 누군가는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쁘게 그 가르침을 받아갔다. 아마도 그 위대한 성인이 자신의 하잘 것 없는 푸념을 진심으로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기뻐할 만했을 것이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안았던 마음의 응어리가 해소된 것이다. 세상 모든 진리를 깨친 분, 그 누구보다 지혜로우신 분께서 사람을 가려 대하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자들만을 만나셨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절망에 더 큰 원망을 쌓았을 것이다. ‘세상을 이끄는 스승이시며, 뭇 중생의 자애로운 어버이[三界導師 四生慈父]’라는 칭호는 공연한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어려움과 문제를 가져도 그를 들어주고 답을 줄 이가 계시다는 믿음은 그야말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힘이다. 삶이 아무리 참혹해도 어딘가에는 연꽃이 피어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생존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 앞에 나아가 자기의 이야기를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법을 펴신 기간은 달리 말하면 세상의 이야기를 들어준 시간들이다. 누구나 문제가 생기면 부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신분의 고하도 문제의 내용도 상관없는 일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신기한 일이 벌어졌는데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그가 머물던 곳으로 찾아가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속삭였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평소 그분께서 명상에 드시던 나무 밑으로 가서 마치 그이에게 하듯이 속내를 털어놓았단다. 그 일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됐고 불탑인 스투파가 세워진 곳에서도 그런 일이 자연히 벌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오늘 법당에 나아가 이런저런 번뇌를 부처님께 고하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이 필요하다.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일수록, 성직의 옷을 걸친 이들일수록, 학식이 높은 자일수록, 부유한 자들일수록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더 귀하게 만드는 첫걸음이다.
예전 동티베트 캉딩[康庭]에서 구십 넘은 린포체 노스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멀리서 온 여행자에게 “관세음보살처럼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 슬퍼하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길을 걷다 쓰러진 이를 보면 일으켜줄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관세음보살처럼 산다는 것은 결국 그이가 수행하신 대로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될 것이다. 집안 아이의 울음소리, 시장 상인의 말, 비탄에 빠진 이의 폭언까지 듣기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라 믿는다. 절망의 시대를 넘어 현세가 원통의 시절에 이르기를 바란다. 내가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우일 때, 남도 나의 말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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