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외국생활을 많이 했다. 영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구사하고 몇 개 국어를 능통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예술에 조예가 깊고 머리가 영특한 학생이었다. 평소 토론을 즐기는 A와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코미디가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몸 개그’를 위주로 하는 저급한 수준과 막장드라마의 폐해를 이야기한 것 같다. A가 외국에서 살 때 직접 체험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려주다가 이런 말을 했다.
“외국 코미디에는 게이들의 이야기가 소재로 참 많이 등장해요.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특별하지 않게 그려지고 있어요.”
나는 그 이유가 뭘까 궁금했고 그에 대한 A의 생각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그런 소재가 우리나라와 외국에서 다르게 그려지는 이유가 뭘까? 넌 그게 왜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A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말을 더듬고 어물어물했다. 평소 사고가 논리적이고 순발력이 뛰어난 A답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나중에 A가 예민하게 반응을 보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나의 질문 속에 있던 ‘왜’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왜’라는 단어가 그녀에게 공격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하니?”에서 ‘왜’가 공격적이라니…… 나는 처음에 그 점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A는 외국에서 학교 다닐 때 얼굴색이 노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편견과 질시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넌 왜 그런 것도 모르니?” “웃긴다. 넌 왜 그걸 그렇게 사용하니?” “왜? 그게 어째서?” 아이들이 A를 괴롭힐 때마다 사용한 단어가 ‘왜’였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왜(어째서)’와 ‘어떻게’라는 단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단어들을 사용할 때의 어감과 뉘앙스에 따라 어떤 차이점이 느껴지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너는 그걸 어떻게 생각해?’와 ‘넌 그걸 왜 그렇게 생각해?’라는 질문을 예로 들어 보자. ‘어떻게 생각해?’는 방법론에 대한 질문이다. 그에 비해 ‘왜 그렇게 생각해?’는 이유나 원인에 관한 질문이다. 즉 ‘어떻게’는 앞으로 진행될 방법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므로 미래지향적이라면, ‘왜’는 그 일이 발생한 이유나 원인을 묻는 것이므로 과거지향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왜’라는 단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공감할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오해의 소지가 있다. 게다가 ‘왜’라는 단어는 공격적이고 따지는 느낌이 강해서 ‘어째서’라는 의미로 확대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A가 내 질문 속에 들어 있는 ‘왜’라는 단어를 ‘어째서’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 아닐까 싶었다.
심리학에서는 의사소통 기술 중 중요한 기법으로 질문보다는 서술을, 즉 ‘왜’보다는 ‘어떻게’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느낌을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사전》에서 ‘왜’와 ‘어떻게’를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장애물이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람이 보이는 최초의 반응은 대개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거지? 이게 누구 잘못이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잘못을 범한 사람을 찾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에게 부과해야 할 벌이 무엇인지 찾는다. 똑같은 상황에서 ‘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까?’라는 사람과 ‘어떻게 하면 일이 제대로 되게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생길 것이다. 현재 인간세계는 ‘왜’라고 묻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어떻게’라고 묻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베르베르는 ‘왜’라고 질문하면서 잘잘못을 따지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일을 ‘어떻게’ 잘 처리할 것인가 하는 데 집중하자는 의미에서 ‘왜’와 ‘어떻게’를 비교하고 있다. 즉 이미 일어난 일의 이유와 원인을 묻느라고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좋은 방법과 대안을 찾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왜’와 ‘어떻게’라는 단어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간 행동의 양태까지 규정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왜’라고 묻고 ‘어떻게’에도 답을 주신 분이다.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처음 설법하신 가르침은 고집멸도(苦集滅道), 즉 사성제(四聖諦)이다. 첫째, “미혹인 이 세간은 모두가 고(苦)다.” 하는 이것을 고성제(苦聖諦)라고 한다. 둘째 “고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끝없이 구하여 마지않는 애착과 집착이다.”라고 하는 것을 집성제(集聖諦)라 한다. 셋째 “애착과 집착을 완전히 없게 한 것이 고가 없는 진실한 경계이다.”라는 것을 멸성제(滅聖諦)라고 한다. 넷째 “고가 없는 경계로 나아가자면 팔정도(八正道)를 닦아야 한다.” 하는 것을 도성제(道聖諦)라고 한다.
여기서 고(苦)와 집(集)은 미망의 세계의 원인을 밝히고 있으며, 멸(滅)과 도(道)는 깨달음의 세계의 결과를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고’와 ‘집’은 ‘왜 고통스러운가?’에 대한 질문이고, ‘멸’과 ‘도’는 ‘어떻게 고통을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다. ‘왜’는 철학적 질문이고 ‘어떻게’는 윤리적 대답이다. 부처님의 설법 내용을 살펴보면 ‘왜’에 대한 질문보다는 ‘어떻게’에 대한 답변이 더 많다. 이는 과거의 일에 연연하기보다는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문장의 내용뿐 아니라 단어 하나 때문에 상대방이 상처를 입거나 큰 분란이 발생하는 경우를 한 번쯤 겪었을 것이다. 나는 A와의 일을 경험하면서 문장뿐 아니라 단어를 사용할 때도 거듭 신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또한 말하는 사람의 어조나 뉘앙스에 따라 상대방이 받아들이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함으로써 그 문제점이 시작된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현명하게 의문을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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