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똑같은 물을 천계에 사는 신들은 보석으로 장식된 연못으로 보고, 사람은 물로 보며, 아귀는 피[血]로 보고 물고기는 머무는 장소로 본다는 말이다. 물의 입장에서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모습을 드러내지만 보는 자의 마음이 다르면 각각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비단 네 가지 견해만이 아니라 보는 주체에 따라서 더욱 다양하게 전개되어 간다. 물을 물로 보는 사람에게도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청정하다고 보는 사람과 오염되었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많다거나 적다거나, 차갑다거나 따뜻하다거나, 쓸모 있다거나 쓸모없다고 여기는 등 다양한 견해가 생겨나고 각각의 입장에서 그 견해마다 그럴싸한 이유를 지니고 있어서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견해를 만든 것은 각자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과 지식 등 기억에 저장된 영상이 현재 내가 바라보는 대상에 겹쳐지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었고 각자는 바라본 대로 그 이미지를 이해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자신과 동일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각자의 지나온 업력(業力)이 다르므로 다양한 인식주체들은 하나의 사물에 대해 저마다 다른 입장에서 다른 견해를 지닐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해서 구성된 세상에 대한 견해는 오로지 자신만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세상을 다르게 본다고 해서 다른 이가 바라보는 세상을 뒤집어놓지 않는다. 아귀가 물을 피로 본다고 해서 물고기가 머무는 장소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거나 사람이 물로 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물은 누가 무엇으로 보든지 물로 있으며 여러 견해가 하나의 공간에 겹쳐지더라도 그로 인해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 탄력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보면 세상은 무수한 다른 견해가 층층이 겹쳐지며 조우하는 무한대의 공간이다.
그중에서 어느 누가 다른 이의 견해를 수용한다면 자기만의 세계에 색다른 요소를 추가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아귀나 물고기에게는 어렵고 주로 다른 이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와 타인 사이에 겹쳐지는 이미지를 공유하게 된다. 그 겹쳐짐이 많을수록 우리는 동질감을 느끼며 동포라든가 가족, 친구, 동료라는 의식을 갖고, 겹쳐짐이 적을 때에 타 지역사람이나 외국인, 타인이라는 동떨어진 생각을 갖고 멀리 보게 된다. 겹쳐짐이 적은 사이일수록 만남에서 ‘다르다’는 느낌은 강하게 다가올 것이다. 먼저 언어부터 시작해서 식생활과 가치관 등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상대와 맞출 수 있는 일은 적을 것이다.
여기에서 영향을 많이 주고받아 겹쳐짐이 많을 때에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적고, 겹쳐짐이 아주 적을 때에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틀리다’고 까지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나와 타인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두 사람이 동일한 나무에 열린 사과를 바라보고 사과라고 말한다 해도 두 사람이 동일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없으므로 보는 각도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 사과는 완전히 동일한 사과가 아니다. 다만 두 견해에서 겹쳐지지 않아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이 지극히 적은 사과일 뿐이다. 이것을 역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틀리다’고 말하는 것도 두 개념의 겹쳐짐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고 해도 기본적인 면에서 동일성을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은 땅이라고 하는 토대 위에 자신의 중력을 얹어놓고 산다. 나의 발자국이 지구에 조그마한 진동을 불러일으킨다면 지구 위에 사는 그 누구에게라도 미미하기는 하나 그 진동은 전달되어야 한다. 내가 허공에 외친 목소리는 그 진동이 단절되지 않는 한, 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미세해서 알아차리지 못할지언정 전달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이미 지구 상의 모든 사람에 대해서 각자의 존재를 알려왔다. 이 말을 확대해석하면 자신이 지니는 견해에 이미 무수한 다른 존재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고, 나 또한 무수한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견해를 알려왔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아주 이질적이고 나의 견해와 완전히 ‘틀리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어느 부분에서는 자신과 겹쳐지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옳다.
이렇게 본다면 ‘틀리다’와 ‘다르다’에도 두 의미의 겹쳐짐을 보게 되며,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겹쳐짐의 어느 정도까지를 ‘틀리다’고 할 것이며, ‘다르다’고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의견조차 수많은 견해들이 겹쳐 있으므로 정확하게 통일하여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중고등학교 시험에 나오는 4지선다식 문제가 아닌 한, 완전하게 ‘틀리다’는 현상이나 견해는 성립하기 힘들다. 대개의 경우는 동일성보다 이질감을 더 느낄 때에 ‘다르다’고 한 표현의 과장이 ‘틀리다’가 되며, ‘다르다’는 부분이 적은 것을 ‘같다’거나 ‘맞다’고 하는 것일 뿐이다. 네 가지 의미 또한 겹쳐지므로 우리는 세상을 선(善)·악(惡)이나 시(是)·비(非)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틀리다고 보는 저 상대방에게도 나와 공유하는 면이 있으며, 내가 옳다고 본 저 견해에도 나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은 어떻게 어느 정도로 겹쳐질 수 있는가를 발견하고 이를 통하고자 할 때에 조화를 이룰 준비를 이미 갖추고 있다. 또한 아무리 겹치게 한다고 할지라도 각자의 개성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기에 다양성을 지닌 더욱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짐을 알아차릴 때에 ‘다르다’거나 ‘틀리다’는 데에서 오는 갈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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