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기회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외식을 할 때, 그 식당의 위생상태가 불량하거나 심지어는 음식에 이물질이 섞여서 난감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혹시 그랬을 때 사람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실까. 대개 나는 식당의 관계자를 불러서 그 사실을 알려 준다. 물론, 그 점 때문에 종업원이 당혹할까 봐, 나로서는 특별히 부드러운 태도로 지적한다. 만약 그들이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면 나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서 “사업이 더 잘되라고 말씀드린 거다”고 격려의 말을 보태곤 한다. 그러나 만약 식당 종사자들이 자기 잘못을 시인하기는커녕 다른 핑계를 대기에 급급하면, 속으로 화가 나고 그런 집에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 자리에서 나와 함께했던 친지들 가운데는 나의 그런 ‘시시비비(是是非非)’가 불편하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 식당이 더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말한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으려는 친지들이다. 그들은 그저 내가 퍽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내 성질이 본래 못되어서 그런 것인가 하고 돌아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식당이 어쩌다 청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혹은 음식에 이물질이 끼어 있다 하더라도, 책임자들에게 일단 그 사실을 알려주고 나서, 내가 스스로 치우거나 이물질을 골라내고 식사를 마저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특별한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들에 참여하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주로는 불교계 조직에서의 활동이었는데, 그 안에서도 역시 비슷한 경험들이 있다. 내 주위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무엇인가가 잘못 돌아간다 싶을 때에도, 비판적인 자기 생각을 선명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고, 얼핏 ‘시시비비’의 대립 자체를 혐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좀 더 알고 보면, 그들이 사적(私的)으로 삼삼오오 모였을 때는 분명히 자기주장을 한다. 그러니까, 공식적인 회의 같은 자리에서 한 말씀을 요청하면 ‘묵언수행’이지만, 각자가 속한 조직의 안팎에서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은 나름대로 많더라는 것이다.
왜 그들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점을 직접 드러내서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굳이 드러내서 말하고 싶었을까.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리하지 말게 하는 것일까…… 그런데 나의 부처님은 나에게 바른말을 하라고 가르치신다. 평소에는 자주 혼자서 조용히 지내고 말수가 적은 것 같은데, 공적(公的)인 일에 임하면 목소리조차 너무 크고 강하게 말하곤 하는 내 모습을 스스로 돌아볼 때, 솔직히 후회한 적도 많았다. ‘내가 먼저 나서서 주장하지 말 걸 그랬다’고……. 하지만, 나의 부처님은 바른말을 하는 것이 불자(佛子)의 도리이고, 불교수행에 중요한 과업의 한 가지라고 가르치신다.
그 식당에서, 불교계 일에서 내가 왜 그렇게 드러내서 지적했는가 하면, 나로서는 그것이 그 인연(因緣)을 위하고 사랑하는 길이라고 느낀 것 같다. 누군가 돈을 벌고자 식당을 한다면 돈이 잘 벌리도록, 나는 그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 그래서 식당을 좀 더 청결히 하고 음식을 더욱더 정성으로 대접하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교가 좋고 불교계의 일이 좋아서 택한 것이니까 나는 언제든지 거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일을 찾고자 한다. 설령 불교계의 일을 지적할 때도 그 일에 관계되는 사람들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아니어야 한다). 그 도반들이 한 그 어떤 ‘일’의 잘못을 바로잡자고 하는 것이다. 금생에 불자로 만난 인연이 소중해서, 그만큼 그 인연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만약 누가 하는 어떤 비판이라도 이렇게 듣고 이렇게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 동네는 건강하게 잘 돌아가는 곳이고 반드시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본다. 내가 말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듣기’인데, 혹시 반연(絆緣)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우물우물 등 뒤에서 불만을 흘리지 않고, 앞에서 명확하게 말해줌으로써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큰 공덕이 아닌가 싶다. 서로가 말하는 만큼 듣게 되고(들어야 하고), 들은 만큼 이해하게 될 것이므로, 시도 때도 없이 누구든 필요하면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피차에게 훨씬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이런 참에 사랑이 다 무어냐고 되물으신다면, 인간만사 잘할 때나 잘 못할 때나 좋을 때나 싫을 때나, 서로 간 인연을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한결같이 돕는 그 마음이라고 답하겠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자란 중생들의 세상일이다. 그 속에서 어떤 반연이 실수하면, 그래서 필경 자기 자신에게도 해로운 업을 짓는 것을 자세히 본다면, 누구나 마음이 짠할 것이다. 그처럼 옳지 않은 사실을 보고 저절로 연민하면서도, 반연이 그러지 않도록 나서서 ‘지적해주기’를 회피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다기보다 오히려 자기 편안만 챙기는 이기적 속성이 아닌가.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싶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상대방보다도 나 자신에게 백배 천배 더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멀고 가까운 반연들로부터 가끔씩 내 사랑이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것을 알았고, 섭섭한 때도 적지 않았다. ‘까다롭다, 주장이 드세다……’ 섭섭하지만 이해는 된다. 사랑을 하기에도 좀 더 나은 방법이라는 게 있을 터이고, 아마 나는 그 최선의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시인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기서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가 싶어서, 평소에 눈을 크게 뜨고 잘 보고 목소리도 잘 가다듬어서, 때에 맞춰 올바른 말을 해야 하겠다. 앞으로도 쭈~~욱, 사랑이 아니면 죽음이기 때문이다. ■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