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례 이대로 좋은가

1. 불교개혁론과 의례

1876년 개항을 맞아 한국사회는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불교계 역시 개항을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명과 사상 그리고 기독교를 위시한 새로운 종교를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 무렵 불교계는 오랫동안 발전을 막아섰던 도성출입 금지령이 해금되는 등 근대적 발전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기회에도 불교계는 별다른 개혁의 기운을 모색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불교계를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조직화할 종단이 없었다는 사실이 큰 문제였다.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 서구 종교의 큰 파도 앞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조직과 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차치하고라도 같은 불교인 일본불교의 확산에도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국가와 사회는 이미 근대의 격랑 속에 놓였지만, 불교계는 여전히 중세적 사고와 의식에 머물고 있었다. 근대 초기의 이러한 정체 혹은 중세로의 역주행은 사실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보편적 흐름이었다. 봉건적 질서를 고수하려는 수구세력의 힘 앞에 근대화를 앞당기려는 개화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에서 보듯이 맥없이 붕괴되었다. 더욱이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쟁탈전에서 정부는 올바른 방향을 세우지 못하고 헤매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에서 불교계의 근대적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불교는 근본적으로 깨달음과 수행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이를 위해 세속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의 억불정책은 수백 년 동안 불교를 현실과 유리시켰다. 오랜 억불의 시대를 지나 겨우 도성 출입이 가능했던 불교계가 근대사회로의 빗장이 열렸다고 해서 당장 변화와 발전을 수용할 역량을 갖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불교를 흔히 ‘산중불교’라고 한다. 세속과 떨어진 산중에서 깨달음과 수행을 위해 전통적인 경전 강독과 참선 수행, 그리고 기도와 제사로서 면면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문 밖에서는 근대문명이 밀어닥치고 외래 종교가 급증하였지만 여전히 불교는 중세적 전통과 가치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중세성을 탈피하고 새로운 근대불교를 위한 개혁안이 제시되었다. 한용운을 선두로 권상로, 이영재, 백용성, 박중빈 등의 선각자들이 잇따라 불교의 변화와 혁신을 역설하였다. 이 글은 이들의 개혁안 가운데 불교의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선각자들은 의례의 개혁을 단순히 의식(儀式)과 의궤(儀軌)의 변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위한 당면 문제라고 인식하였다. 즉 의례의 개혁은 근대불교를 앞당기는 선결 과제였으므로 이를 통해 근대불교의 다양한 노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용운과 이영재의 의례개혁론

근대사회가 시작되었지만, 불교의 근대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특히 불교의례는 여전히 과거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불교계 안팎에서 비판과 개혁의 목소리가 높았다. 대표적인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 진관사를 가니 여러 중이 종이를 오려 각색 가화를 만들며 그림도 그리며 부적도 쓰거늘, 물으니 서로 주저하여 잘 가르쳐 주지 않고 어떤 중은 대답하기를 아무 대신 집에서 재 올린다고 하며 어떤 내인이 재 올린다고 하다가 그 주장하는 중 월욱의 말이 지금 서흥 군수 모 씨가 그 조상을 극락세계로 가게 하려고 삼천금 재산을 들여 불공한다 하니, 그 군수가 정성은 갸륵하나 아까운 재산만 허비하는 것이 당초에 그 조상의 영혼이 지옥에 빠질 것 같으면 어찌 돈 삼천 냥 가지고 그 혼을 구제하리오. 사람이 생전에 옳은 일을 하였을 것 같으면 돈 아니라도 그 혼이 복을 누리고 극락세계라도 가려니와 악한 일을 하였으면 돈을 북악만큼 들이더라도 쓸데없으니(중략) 우리 동포 형제들은 헛된 일 말고 실상 일하여 보세 하였더라(원문은 한글 고어체이므로 필자가 현대문에 맞게 고침)

나) 북촌 모 대관 집에서 무슨 기도를 하는지 백미 10석과 전 1만냥을 동문밖 어느 사찰로 보내고 어떤 일을 기축(祈祝)한다 하니, 수명의 장단과 관직의 대소와 자식얻기를 그곳 관세음보살이 역력히 감응할는지. 이 같은 세계에 개명적(開明的) 사업은 재물을 아끼고 하지 않으면서 공불반승(供佛飯僧)은 재물이 들지 않는지 한번 묻고 싶노라.

불교의례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절에서 조석으로 행하는 일상예불도 넓은 의미에서 의례에 속하지만, 이 시기 비판의 대상은 일상의례가 아닌 공양과 재의식 등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지신제, 산신제, 용신제, 군황제, 국사제, 성황제, 영산재, 수륙재, 천도재 등이었다. 이와 같이 각종의 불공과 제사는 낡은 구시대의 폐습으로 비난받았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 보듯이 “개명 사업에는 재물을 아끼고, 공불반승(供佛飯僧)에는 아끼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문물과 사상을 근대적으로 개혁해야 할 시점에서 구복제사에 몰두하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불교의례에 대한 비판 기사는 대부분 〈독립신문〉과 〈매일신보〉 등에 게재되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들 신문은 국민의 개화와 계몽을 목적으로 발간하였다. 특히 〈독립신문〉의 발행인 서재필은 일찍이 미국에 망명하여 기독교에 귀의한 인물이다. 기사 대부분을 직접 썼는데 위의 인용문에는 전통적 무속신앙과 조상신앙을 부정하는 기독교관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전통신앙을 부정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근대적 개혁을 위해 구습을 버려야 한다는 취지임은 분명하다. 또한, 신문이 지니는 공공성을 생각할 때,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요소를 부각시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보인다.

근대 시기 불교의례에 대한 비판과 부정은 한용운(1879~1944)의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용운은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1913년 출간)을 집필하여 한국불교의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한 ‘불교유신’은 중세불교의 부조리를 탈피하고 새로운 근대불교를 맞이하기 위한 불교계의 각성과 개혁을 촉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가운데 불교의식에 관한 개혁 논의는 〈불가에서 숭배하는 불상과 탱화에 관한 논(論佛家崇拜之塑繪)〉 〈불가의 각종 의식에 관한 논(論佛家之各樣儀式)〉의 두 항목에 집중되어 있다. 〈불가의 각종 의식에 관한 논〉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그의 의례개혁론을 단적으로 대변한다.

조선 불가의 백 가지 법도가 신통치 않아서 하나도 볼 것이 없거니와, 그중에서도 재공양의 의식(梵唄四勿·作法禮懺 등)이라든지 제사 때의 예절 따위의 일(對靈·施食 등)에 이르러서는 매우 번잡 혼란하여 질서가 없고 비열·잡박(雜駁)해서 끝이 없는 상태이다. 이것을 모두어 도깨비의 연극이라고나 이름 붙이면 거의 사실에 가까울 듯하니, 지금은 말하는 것도 부끄러운 까닭에 가리어 논하지는 않으련다. 그리고 기타의 평시의 예식(巳時佛供·朝夕禮佛·念誦·誦呪 등)도 혼란해 진실성을 잃고 있는 터인즉, 대소의 어떤 예식을 막론하고 일체를 소탕한 다음에 하나의 간결한 예식을 정해 시행하면 될 것이다.

한용운은 이와 같이 재공양과 제사의식을 ‘도깨비의 연극’으로 규정하고 일체를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의례개혁론은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그 배경에는 자신이 지닌 불교개혁의 방법론이 ‘생산불교’에 있었던 때문이라 생각된다. 즉 그는 전통불교의 폐단을 승가의 잘못된 시주 활동에서 찾았다. 시주를 통해 재원을 조달하는 전통적인 시주 생활을 버리고 그 대안으로 승가의 자립생산 활동을 제시하였다. 사찰은 역사적으로 많은 산림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조림사업 등을 통해 각종의 과일, 차, 뽕나무 등을 생산할 수 있다. 또한 승려는 수십·수백의 대중이 운집생활을 하므로 이들의 노동력으로 주식·합자·합명 등의 회사를 설립하여 공동경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불교의 건설을 위해 한용운은 무엇보다도 전통불교의 주 수입원이었던 각종의 재공양과 제사의 폐지를 제창하였다.

불교계의 의례 비판과 개혁 주장은 계속되었다. 1922년 이영재(李英宰, 1900~1927)는 〈조선불교혁신론〉이라는 장문의 개혁안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총 2개월간 28회에 걸쳐 ‘불교개혁의 기운’ ‘ 개혁의 준비’ ‘본말제도의 타파’ ‘사찰령 폐지 운동’ ‘말사 주지의 단결’ ‘법국(法國)의 건설’ ‘포교’ ‘교육’ ‘경전의 번역’ ‘교재기관 및 교보발행’ ‘사회사업’ 등 불교의 거의 전 분야에 걸친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약관의 23세 승려의 글을 28회나 중앙 일간지에 연재한 일은 당시의 사회상에서 보면 파격적인 시도였다.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그의 혁신론이 지닌 주장과 논리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영재의 혁신론은 불교를 대상으로 하였지만, 포교의 구체적 방안으로 역사의식을 갖춘 포교사를 선발해야 한다는 등 그 밑바탕에는 불교사상의 확산이 독립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소신을 지닌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이영재의 혁신론은 한용운의 유신론을 계승하여 보다 구체적, 체계적으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런데 불교의례에 대한 개혁안은 한용운의 주장을 그대로 계승하는 차원에 그쳤다. “교단의 형식인 수행방법과 법요의식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 현재 조선불교와 같이 무의미한 이상이 상반(相伴)하지 않고 순형식화(純形式化)하여 원래의 뜻을 잃은 각종 의식이 번다한 것은 비교할 사례가 없다. 불교에 숭배하는 소회(塑繪)와 각종 의식에 대해서는 한용운 선생께서 이미 십여 년 전에 통철하신 선견을 발포하셨으므로 별로 우견(愚見)을 피력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비종교적, 미신적 의식과 불합리, 부자연한 의식은 전부 금지하고 순실(純實)한 정법이 그대로 형식, 의식에 표현되도록 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그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각사 본당에 석가모니불의 존상 1위만 봉안하고 나머지 불보살상·신상 등은 일체 철폐하여 한 절에 1위의 불상만 봉안하게 할 것이다. 현존 불상신회(佛像神繪) 중에는 신앙상으로 보다는 예술상으로 중대한 가치가 있는 것이 많으므로 이것을 잘 감별하여 보존의 가치가 있는 것은 전부 별전에 수합하여 귀중품으로 보관할 것이요, 결코 숭배공의(崇拜供儀)하지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용운의 유신론 이후 10년이 지나서도 이처럼 불교의례에 대한 개혁론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런데 불교계 안팎의 이러한 비판은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불교의례가 성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조선시대 오랜 억불의 시대에서도 불교는 백성들의 변함없는 신앙이었고, 오히려 서민대중과 긴밀한 유대를 통해 전통신앙으로서 기반을 굳게 다질 수 있었다. 근대사회에 들어서도 이 흐름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즉 의례개혁론은 불교계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3. 권상로의 의례개혁론

근대기의 불교개혁론 가운데 한용운 다음으로 널리 언급되는 인물이 권상로(1879~1965)이다. 권상로는 김룡사 출신으로 1912년 《조선불교월보》를 발행하였고,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불교》를 발간하였다. 잡지에 많은 글을 발표하여 불교사상의 진리를 홍보하고, 대중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912년 4월부터 1913년 7월까지 총 12회에 걸쳐 〈조선불교개혁론〉을 《조선불교월보》에 발표하였다.

불교의 정신과 승단, 교육 등에 관한 현실을 진단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하였지만 완결된 글은 아니었다. 개혁론을 통해 승단의 체계적 조직과 승가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의 개혁론은 근대불교를 향한 적극적인 포교와 대중화를 앞당기려는 성찰과 고민이었다. 그런데 이 개혁론에는 의례에 관한 언급이 없다. 원고가 미완성으로 중단되면서 불교의례에 관한 견해를 피력할 기회도 없어졌다. 《조선불교개혁론》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그는 불교의례에 관한 여러 글을 남겼고, 순 한글 의례집인 《조석지송(朝夕持誦)》(1932년) 등을 편찬하였다. 이들을 통해 의례에 관한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선학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의 의례관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전통적인 공양과 제사의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찬불가를 작곡하고 한글 의례집을 편찬하였다.

전자의 예로는 《불교》에 수록한 의례 관련 내용이다. 재의식의 의미를 묻는 독자에게 권상로는 재의 의미를 강조하고 권장하였다. “부처님은 열반의 저 언덕에서 생사해(生死海)를 굽어보시며 중생을 접인하시는 삼계의 대도사요, 사생의 인자한 어버이[慈父]이시라 만일 죽은 사람이 자기의 지은 복으로 좋은 곳을 갔다 할지라도 재의 공덕으로 더욱 좋은 곳[樂趣]에 오를 것이고 만일 죄가 있어 나쁜 곳[惡趣]에 떨어졌다 하면 재의 공덕으로 괴로움의 세계[苦界]를 벗어나게 됩니다. 즉 해탈을 얻지 못한 자는 해탈을 얻게 하고 해탈을 얻은 자는 극락왕생[超昇]이 있게 하고 극락왕생이 있는 자는 물러섬[退轉]이 없게 하는 의미에서입니다.”라며 극락왕생을 위한 재를 역설하였다. 또한 다른 글에서도 의례와 범패의 연원을 자세히 설명하는 등 전통의례에 대한 가치를 중시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안진호의 《불자필람(佛子必覽)》과 《석문의범(釋門儀範)》 편찬 과정에서 교열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두 책은 전래하는 의례에 관한 문헌을 집성한 의례집이다. 의례집의 간행에 참여하면서 그는 전통의례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고 보급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권상로는 불교의 근본정신을 구세주의로 인식하고 여기에 입각하여 근대사회에서 불교가 해야 할 역할을 모색하였다. 그 방안이 포교와 대중화였고, 구체적으로 찬불가의 작곡으로 나타났다. 1925년 〈찬불가〉를 시작으로 모두 15편의 찬불가를 만들었다. 그는 법회와 각종 의식에서 노래를 통해 불법을 칭송하면서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순 한글의 《조석지송》을 편찬하였다. 〈천수경서문〉 〈조석염불선후송절차〉 〈관세음보살영험록〉 〈천수다라니경언해〉 등을 한글로 편찬하여 의례의 대중화, 현대화에 기여하였다. 아마도 《석문의범》 교열에 참여하면서 불교의 대중화는 어려운 한문 보다는 쉬운 한글이 효과적이라 판단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4. 백용성의 의례개혁과 대중화

근대불교의 여러 의례개혁론 중에서 크게 주목하는 인물이 백용성(白龍城, 1867~1940)이다. 대부분의 개혁론이 ‘논(論)’ 즉 이론과 주장에만 머무른 반면, 스님은 현실불교에서 의례를 직접 개혁하고 포교 일선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다. 스님의 의례개혁 실천운동은 《대각교의식》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책은 당시 사찰에서 널리 행하는 주요 의례 문헌을 순 한글로 편찬한 것이다.

향례(香禮)·성공절차(聖供節次)·원각경문수장(圓覺經文殊章)·반야심경·구병시식·혼례·상례 등 12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일체의 한자 원문을 생략하고 한글 번역문만을 실었다. 모든 경전과 의례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었던 현실에서 과감히 한글만으로 의식집을 편찬하였다. 백용성은 3·1 운동에 참가한 이후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때 기독교의 각종 한글 포교서책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불교도 새 시대를 맞아 많은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경전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결과 삼장역회를 조직하여 30여 종의 번역서를 간행한 것이다. 스님의 번역서는 한자 원문을 있는 그대로 직역하는 것이 아니라 한글만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중복 내용을 과감히 생략, 요약한 것이 특징이다. 원문의 글자에 구애되지 않고 요점을 추려서 번역하는 이른바 ‘창의적’ 번역이다. 스님의 번역에 대한 원칙은 《대각교의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마치 원래 우리말로 된 경전인 듯 의역하고 음률까지 맞췄다.

《대각교의식》의 각종 의례문은 대각사의 각종 법회와 의식 등의 포교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되었다. 스님은 1916년 무렵 대각사를 창건하여 도심포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어린이 포교, 의식집의 한글화, 불교음악의 보급, 일요학교의 설립, 해외포교당의 건립 등 다양한 방법을 전개하였다. 1913년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시작된 의례개혁론은 1920년대까지 여전히 그 당위성과 원칙만을 제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용성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현실불교에서 몸소 실천에 옮겼다. 어려운 의식문을 고심하며 우리말로 옮겼고, 65세 나이로 피아노를 치면서 어린이들과 함께 찬불가를 불렀다.

대각교운동은 한국 근대불교의 전개에서 대단히 높은 위상을 지닌다. 민족의 주권을 상실한 시대에서 불교를 바르게 배우고 실천하는 노력은 이른바 민족불교의 정체성을 수립하는 길이었고, 나아가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는 지름길이었다. 그 중요한 단초가 의례의 개혁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까지 스님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 5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근현대를 아우르는 불교계의 거목이라 칭송할 만하다. 이들 가운데 스님의 의례개혁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이 고광덕(高光德, 1927~1999)이다. 광덕 스님은 백용성 스님을 의례개혁의 비조라 칭송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글 의례의 현대화에 노력하였다. 《우리말 법회요전》(1983)을 편찬하여 전통의례가 지닌 번잡함과 난해함을 현대식으로 변용하였다. 이 책은 불교의식이 단순히 종교적 제의가 아니라 보살이 이웃과 겨레로 더불어 만나는 창조적 장이라는 스님의 안목이 집약되어 있다.

5. 안진호의 전통의례와 현대의례

1935년 안진호(安震湖, 1880~1965)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의례서와 의식집을 망라하여 한국불교 의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석문의범》을 편찬하였다. 이 책의 간행은 당시 불교의례의 성행 사실을 여실히 반영한다. 안진호는 《석문의범》에 앞서 《불자필람(佛子必覽)》을 발간하였다. 당시 최취허(崔就墟, 1852?~?)가 불문의 초입자들이 지송할 수 있는 의례집 편찬을 의뢰하였다. 안진호는 불과 한 달 만에 초고를 완성하였고, 권상로와 김태흡의 교정을 거쳐 발간하였다. 이 책은 발간되자마자 인기리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전까지의 의례집은 대부분 조선시대 이래의 목판본이나 베껴 쓴 필사본이 전부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활자본 의례집은 큰 인기를 끌었고, 더구나 한글이 병기되어 있어 누구라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불자필람》은 불과 2년을 못 넘겨 품절되기까지 적지 않은 책이 유통되었다. 품절된 이후에도 국내는 물론 일본과 만주에서도 주문이 몰려들어 안진호는 답장 쓰기에도 바쁠 지경이었다고 한다.

《불자필람》의 예상 밖 호응에 고무된 안진호는 새로운 의례집 간행을 기획하였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편집한 《불자필람》을 확대, 개편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석문의범》은 4년 뒤인 1935년에 간행되었다. 《석문의범》은 예상대로 절찬리에 판매되었다. 책의 출간을 위해 설립한 만상회는 《석문의범》 하나로 인하여 출판의 발판을 다졌고, 이후 경전 번역과 불교용품 판매로 상당한 재산을 형성할 수 있었다. 〈석문의범》은 안진호의 독창적 저작이 아니라 전래하는 각종 의례집과 의식문을 발췌 수록한 편집서이다. 그런데도 크게 호응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의례집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았고, 이는 곧 불교의례의 성행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의 전신인 《불자필람》의 간행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한용운이 이 책의 발간에 재원을 시주하였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한용운은 불교의례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어조로 재공양 등의 불교의례를 ‘도깨비놀음’이라며 모두 철폐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랬던 그가 왜 ‘도깨비놀음’의 교과서가 되는 의례집의 간행을 후원하였을까? 그 이유는 한용운이 평생 외쳤던 불교대중화를 위해 의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던 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한용운은 1931년에 《조선불교유신론》의 뒤를 잇는 개혁론으로 〈조선불교의 개혁안〉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산간에서 가두로, 승려로서 대중에”가 조선불교의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며 불교의 대중화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 중에는 불교의례에 관한 일체의 언급이 없다.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에서의 의례에 대한 생각과 1931년 〈조선불교의 개혁안〉에서의 생각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서 승도는 산간에서 가두로 나아가 대중과 함께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대중과 직접 교감하는 불교의례의 중요성을 만해는 인식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 구체적 생각이 《불자필람》의 간행 후원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석문의범》은 조선시대 이래 전래하는 의례, 의식문을 집성하여 전통불교의 의궤를 중시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의식과 의례의 변화를 위해 옛것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장례의식을 간소화하고, 무주고혼을 천도하는 추도의식을 새롭게 바꿀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의례와 포교에 대한 열린 생각은 불전에서의 혼례식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부부의 출발점인 혼례를 사찰에서 치름으로써 평생의 불자가 될 수 있고, 그 2세들 또한 불자가 된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찬불가를 보급하여 포교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취지에서 참선곡, 회심곡, 백발가, 몽환가, 권왕가, 원적가, 왕생가, 신년가, 신불가, 찬불가, 경축가, 성탄가, 성도가, 오도가, 열반가, 월인가, 목련가, 권면가 등의 곡에 직접 가사를 쓰거나 기존의 가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안진호는 전통 의례집의 집성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현대적 의례와 의식의 변화를 적극 권장하였던 것이다.

6. 근대 불교의례의 성행

억불의 시대를 헤쳐 온 불교의례는 근대사회가 되었다고 해서 한순간에 바뀔 수 없었다. 이미 민족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관습으로서 굳게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계의 입장에서도 천도재와 각종 제사는 사찰을 유지하는 재정 수입의 중요한 수단이었으므로 대체 방안 없이 일시에 중지할 수도 없었다. 근대 신문과 선각자들의 개혁 주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교 잡지에서는 재공양과 의례의 공덕을 강조하고 있었다.

근대시기 불교의례의 성행 사실은 범패의 번성과 의례집 간행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범패의 번성이다. 1912년 일제는 ‘각본산사법’을 제정하여 불교 전반에 걸친 제한, 금지사항을 규정하였다. 이 중 제7장 ‘법식’에서 “법회 의식의 방법은 종래에 거행하던 청규를 따른다. 다만 화청(和請)·고무(鼓舞)·나무(鑼舞)·작법무(作法舞) 등은 일체 폐지한다.”고 하여 범패를 금지시켰다.

일제가 화청과 작법무 등의 범패를 금지한 이유는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를 유추해보면 범패 등이 단순히 불교의례에 그치지 않고 한민족의 문화전통으로서 민족성을 발현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불교의례는 집단이 지닌 공통 감정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의례를 집행함으로써 집단의 결합력을 굳게 하는 기능을 지닌다고 한다. 즉 일제는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한민족의 결속을 강화하는 불온한 불교의례를 일체 금지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인다.

금지령으로 인해 범패는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1920년대 불교계에는 범패를 전문으로 하는 의식승(儀式僧)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1929년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는 “근년까지 경성 교외 백련사(白蓮寺)에 만월(滿月)이라는 노승이 범패로 유명하였다. 원래 경성의 동서산(東西山)에는 각각의 만월이 있어 아름다운 소리가 서로 대등하였다. 이 만월은 서만월(西滿月)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근대기에는 전문적인 범패승들이 활동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전수와 교육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전문적인 범패승들의 활동으로 불교의례의 번성이 계속되었다. 1930년대 범패 등으로 가장 유명한 사찰은 경기도 장단의 화장사(華藏寺)와 서울의 화계사 등이었다. 화장사에는 범패와 작법무에 능한 승려들이 많았고, 각종 재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화계사에는 얼마나 재가 많았는지 “화계사에서 부목을 하면 공양재를 할 줄 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불교의례 가운데 널리 행해진 의식이 3일간 개설하는 영산재, 즉 삼일영산(三日靈山)이었다. 3일 중에서 첫째 날은 전국에서 초빙한 범패승들이 도착하여 각각 순서에 따라 걸영산을 한 자락씩 한다. 둘째 날은 많은 범패승이 밤낮없이 염불 작법을 시연하는 일대 장관이 펼쳐진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범패승들의 인도에 따라 영가를 동구 밖 시련터에 봉송하였다. 이러한 대규모의 영산재에 많은 범패승들이 참여하면서 서로가 배움의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범패의 경합장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송암(松岩, 1915~2000)의 범패는 당시 평양까지 퍼지고, 벽응(碧應, 1909~2000)의 범패는 개성의 재공양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7. 의례개혁론과 불교대중화

근대사의 시작과 함께 다양한 개혁의 목소리가 사회 전반에 울려 퍼졌다. 봉건왕조의 모순과 낡은 구습을 철폐하고 새로운 시대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근대적 지향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였다. 불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왕조 수백 년 동안 억압과 차별에 방치되었던 불교는 근대를 맞아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었다. 서구열강의 권력을 등에 업은 기독교와 근대적 종단체제를 갖춘 일본불교의 활동은 불교계의 일대 위기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회 전반에 불교의례를 개혁,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매일신보〉 등은 근대적 계몽의 일환으로 중세적 관습의 철폐를 주장하면서 불교의 천도재와 재공양, 각종 제사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불교계 내에서도 한용운을 시작으로 강도 높은 의례개혁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불교의례는 단순한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문화와 전통이었고 삶의 일부였다. 억불의 시대에도 영산재와 수륙재가 꾸준히 계속되었고, 사월초파일의 연등회는 세시풍속으로 정착되었다. 근대사회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이러한 문화전통을 일시에 중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권 상실기 일제는 사찰령으로 한국불교의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화청과 작법무 등의 의례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서슬 퍼런 무력의 압제하에서도 불교의례는 여전히 성행하였고, 그 핵심인 범패는 전문 의식승들의 전수와 교육으로 지역적 계보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 근교의 유명 사찰은 일 년 내내 각종 재공양과 제사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불교의례의 대표적 사례인 수륙재는 불교가 대중화하고 사회화하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1903년 원흥사, 1914년 봉은사의 수만 명이 운집한 대규모 수륙재는 포교와 신앙의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고, 일제하의 고단한 일상에서 민족문화를 발현하는 좋은 기회였다. 일제는 사찰령으로 범패를 금지하면서까지 대중의 운집과 결속을 경계하였지만, 수륙재는 망국의 백성들에게 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기쁨을 주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례는 단순한 종교의례에 머물지 않고 민족문화와 정신의 함양에 기여할 수 있었다.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선각자들은 의례의 개혁을 강도높게 주장하였지만, 결국 전통의례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즉 이들은 전통의례가 지닌 원형의 가치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의례를 창안하여 불교대중화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

 

한상길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동국대 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박사). 주요 논문으로 〈개화기 일본불교의 전파와 한국불교〉 〈한국 근대불교의 형성과 일본, 일본불교〉 〈한국 근대불교의 대중화와 석문의범〉 등과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 《마곡사》 역서로 《역주 조선불교통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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