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례 이대로 좋은가

1. 들어가는 말

인도에는 불교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종교가 있었다. 그것은 사제계급 바라문(brāhmaṇa)이 제식(祭式)을 집행하는 바라문교(婆羅門敎, Brāhmaṇism)이다. 이 종교는 신(deva)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식을 통해 인생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했다. 신에 대한 제사(yajña)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다. 중요한 제사의식 중에는 말을 산 채로 희생물로 신들에게 바치는 마사제(馬祠祭, aśva-medha-yajña)라든가 산 사람을 희생물로 바치는 인신희생제(人身犧牲祭, puruṣa-medha-yajña)가 있다.

바라문교에서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천상에 태어나는 것[生天]이다. 이들은 희생제로 많은 공덕을 쌓으면 천상세계로 가서 태어난다고 믿었다. 이처럼 바라문교는 베다에서 브라흐마나 시대(서력 전 1200~1000년 무렵)까지는 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였다. 이후, 아란야까(Āraṇyaka) 시대에서 우빠니샤드(Upaniṣads) 시대(서력 전 1000~300년 무렵)에 이르면 종교는 제식을 통한 ‘신 중심의 종교’에서 인간 스스로 진실한 자아를 자각하면 모든 인생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인간 중심의 종교사상’으로 전환하게 된다.

인도에서 불교는 중기 우빠니샤드 시대에 등장한다. 물론 불교가 발생한 지역과 우빠니샤드가 발전하고 있던 지역이 아주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불교는 그것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빠니샤드의 사상은 붓다의 깨달음과 많은 점에서 내용이 흡사하다. 그러나 두 종교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관점이다. 우빠니샤드는 실재적 실체로서 아뜨만(Ātman)이나 브라흐만(Brahman)을 내세우지만, 불교에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 또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을 말한다. 이런 차이점은 붓다가 우빠니샤드 사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붓다의 깨달음이 우빠니샤드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라면 붓다의 깨달음은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지금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그만큼 타당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불교가 바라문교에서 희생제를 통한 인생의 목적 실현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우빠니샤드의 방식은 일부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빠니샤드 사상은 바라문교의 제사 중심의 종교의례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참된 자아인 아뜨만과 보편적 자아인 브라흐만이 다르지 않다[梵我一如, Brahmātmaika]고 깨치면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붓다가 깨친 내용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붓다는 바라문교의 희생제 중심 제식주의의 병폐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붓다가 열반에 들면 다비식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아난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출가수행자는 관여하지 말고 재가신도들에게 맡길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이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듯이, 붓다는 열반할 때부터 의례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예견하고 수행자는 간여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종교의례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던 불교가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일반사회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전통적 인도의 종교의례나 관습을 수용하고 변용했다는 전제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인도에서 불교의례는 어떤 과정을 겪으며 발생하였을까? 물론 붓다가 재세할 때 수행자들의 수행 일환으로서 의례는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승불교 시대에는 힌두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불교의례가 있었다. 그래서 먼저 종교의례란 어떤 의미가 있고, 불교의례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알아보고, 인도의 불교의례 발생 과정을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중국에서 불교의례는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 발전되었는지 논의할 것이다. 중국의 의례는 가장 왕성하게 불교가 융성했던 당(唐) 시대와 그 전후 시대를 중심으로 논의해 나갈 것이다.

2. 인도불교의 의례 발생 과정

1) 종교의례의 의미

종교란 속된 것(俗)으로부터 성스러운 것(聖)으로 초월하려는 신념체계이다. 따라서 종교 의례는 속에서 성으로 전환시키는 체계이며, 일정한 형식을 지닌 행위가 반복되어 정형화되고, 전승된 것을 의례라고 한다. 그것은 종교 행위의 의미체계로서 상징적 성격을 지니며, 종교적 가르침[敎義]을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 의례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교의를 몸소 체험하여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갖는다.

종교의 성립 요소는 일반적으로 교의, 의례, 교단 세 가지를 일컫는다. 첫째, 종교의 교의는 종교체험을 체계화한 것[이념적인 면]이다. 둘째, 의례는 실천 행위를 통해 신앙의 확증과 심화를 가져오는 것[행위적인 면]이다. 셋째, 교단은 신앙의 공통체로서 똑같은 믿음의 공동체를 갖도록 하는 것[공동체적인 면]이다. 이들 셋은 서로 깊은 상관관계를 맺으며 종교를 지탱해 주는 핵심 요소들이다. 교의와 의례 그리고 교단이 조화롭게 융합할 때 종교는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종교의 신앙은 그 종교가 지니는 신념체계에 바탕을 둔 관념이라고 한다면, 의례는 인간이 몸을 사용하여 외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오늘날 의례의 역기능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의례의 형식주의와 주술적 미신적 의례행위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된다. 종교의례가 너무 지나치면 무용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럼에도 물질을 물질로만 대응하는 물질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현실에서 물질에 정신을 스며들게 할 수 있는 수단은 종교의례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인간생활의 목적의식이 공업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정보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문명적 수준에서 문화라는 현상으로 환원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의와 의례 그리고 교단이 조화롭게 융합될 때 온전한 종교가 성립할 수 있게 된다.

2) 불교의례의 종류

앞에서 종교를 성립시키는 요소는 교단, 의례, 교단의 세 요소이며, 이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 세 요소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발생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 먼저라고 확실하게 단정하여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각기 다른 견해들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의의 뒷받침이 없는 의례가 되면 단지 육체적 생리적 동작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의례를 수반하지 않은 교의는 비현실적이고 구체성이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교의가 먼저냐 의례가 먼저냐를 따지기보다는, 교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의례가 필요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교의가 신앙의 체계화를 이룬 것이라면, 의례는 인간의 근원적인 심리적 생리적인 면을 통해 종교를 보편화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고, 또 신앙의 영속성을 유지하게 해준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의례는 인간을 참된 존재인 붓다에게 이르게 하고, 또 참된 존재로 하여금 인간의 길로 나서도록 한다. 붓다로부터 자비를 구하는 방법이 된다. 종교의례가 바르게 행해질 때 비로소 붓다와 인간이 올바른 결합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의례는 신앙적 요소를 반드시 지녀야 한다. 이처럼 종교의례야말로 경건함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정서를 내포함으로써 일상적 행위도 종교적 행위가 되게 하며, 또한 이와 같은 행동이 정형화되고 권위가 주어짐에 따라 비로소 올바른 의례가 성립될 수 있다.

거의 모든 보편 종교에서 의례의 유형은 기도형 의례(祈禱型儀禮)와 선정형 의례(禪定型儀禮)로 나누어진다. 기도형 의례는 다시 자행의례(自行儀禮)와 타행의례(他行儀禮)로 구분된다.

첫째, 기도형 의례는 자연발생적인 종교와 절대 신격의 계시형 종교로 다시 나뉜다. 전자는 소박한 다신교 형태를 취하거나 통일적 다신교 형태를 띠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인도의 바라문교를 들 수 있다. 후자는 유일신 종교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원칙인데, 기독교나 이슬람교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어떤 형태를 취하든 기도형의 종교는 모두 종교의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론적 형태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형태의 종교에서 의례는 인간이 절대 신격에 대한 의사전달은 오직 의례의 집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기도형 의례 가운데 먼저 자행의례는 상구보리(上求菩提)를 위한 수행 의례이다. 출가수행자인 스님들이 수행 중 행하는 각종 의례, 또는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예불의례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의례는 자신의 마음을 향상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타행의례는 재가신도들의 부탁을 받아 스님들이 행하는 각종 기원의례와 회향의례를 말한다. 이 의례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위한 의례로 볼 수 있다. 이 의례는 불보살 앞에 육법공양을 하고 기원하는 불공(佛供), 또는 각종 재(齋)가 끝난 뒤나 불탄일 등의 법회에 선망부모나 그 밖의 외로운 혼령을 위해 음식을 올리며 경전을 읽는 시식(施食)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의례를 통해 쌓인 공덕은 의례를 의뢰한 재가신도들에게 돌리는 형식을 취하므로 회향의례(回向儀禮)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기도형 의례는 일상생활과 의례 행위가 엄격하게 분리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 의례를 행할 때는 일상생활과 전혀 다르게 목욕재계하고 옷차림도 새롭게 하며, 불단에 올리는 공양물도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불보살에게 기도를 올릴 때 사용하는 언어도 일상 언어가 아닌, 신성하고 신비한 기도문구(mamtra)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상시적으로 행하는 의례인 아침저녁 예불이나 각종 불교의식 등은 모두 기도형 의례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또 기도형 의례는 부처님의 가호, 제천선신(諸天善神)의 가피력을 입어 현세와 미래세의 이익을 위해 재앙을 없애고 모든 악행을 없애며 복을 부르는 의례들도 포함된다.

둘째, 선정형 의례는 선정삼매의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계발하는 형식이다. 기도형 의례와 달리 일상생활이 곧바로 의례 행위가 된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의례와 같다는 특질을 지닌다. 이때 일상생활이란 백장청규 등과 같은 청규에 따른 규범이 있는 생활을 말한다. 이러한 규범생활에서는 일상이 곧 의례 행위이라는 의미이다. 이 의례에 속하는 것으로는 안거, 자자, 포살, 사경, 득도식 등을 들 수 있다.

또 상구보리를 실현하는 의례의 하나로서 보은의례는 불조(佛祖), 종파조(宗派祖) 등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한 의례로서 4월 8일의 관불회, 12월 8일의 성도절 법회, 2월 15일의 열반절 법회와 각 종파의 조사나 개산조의 기일(忌日) 등이 이에 속한다. 붓다 시대에 시행된 불교의례는 이 수도형 의례였다고 한다면, 시대가 지나면서 실행된 대부분의 의례는 기도형 의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종교의례가 세속화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3) 불교의례의 시원과 기원

불교의례의 외적 시원은 예경(禮敬)과 반승(飯僧)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에서는 깨달은 자[佛, buddha]에게 존경의 의미로 ‘깨달은 자의 발등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거나 또는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도는’ 행위를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경 형식이다. 현장의 《대당서역기》(大正藏 51, 877c)는 인도에서 상대방에게 예경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아홉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깨달은 자[佛, buddha]뿐만 아니라 깨달은 진리의 내용[法, dharma]이나 그 진리를 깨치려고 따르는 무리[僧, saṅgha]에 이르기까지 대상이 확산되어 삼보에 대한 예경[삼귀의례]의 의미가 정착하게 된다.

또한 반승은 인도에서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수행자에게 음식물을 공양하면 공덕을 쌓게 된다고 믿어 행해졌던 의식이다. 이것은 공양을 베푸는 사람, 또는 죽은 사람의 넋의 업(karma)을 청정하게 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붓다가 반승을 행했던 기사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삼보에 대한 예경과 수행자에 대한 음식물을 공양하는 반승은 초기 불교의례부터 고유한 형태로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경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곧 붓다가 열반에 든 뒤 사리탑이나 부처님의 상징으로서 보리수, 불족석, 법륜 등의 형상에 대한 예경과 함께 붓다의 생애 가운데 기념이 될 만한 사건들을 묘사한 팔상도(八相圖) 등에 대한 숭배로 예경의 대상이 확산되어 갔다. 또 각 시대의 교리 발전에 따른 다양한 불보살의 등장과 교학과 선학의 발전에 따라 조사나 선사 등에 대한 다양한 예경 대상들이 설정되기도 하였다. 또한 불교가 인도 밖으로 전파되면서 각국의 고유 신앙과 접촉하여 무수한 신앙 대상과 그에 따른 의례 형식이 생겨났다. 예컨대 한국의 산신신앙(山神信仰), 독성신앙(獨聖信仰), 가람신앙(伽藍神仰)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예경이나 반승에 내재한 의미 가운데 공덕을 통한 현세구복이나 업의 청정을 통한 극락왕생의 희구라는 긍정적, 또는 부정적 이미지를 구축해 가기도 한다.

이와 함께 불교의례의 실제적인 시원의 전거로 들 수 있는 포살의식(upoṣadha, poṣadha)은 이미 부처님 재세 시에 거행되기도 하였음을 중아함 포리다품(大正藏 1, p.772c)에서 알 수 있다.

“만일에 선남자, 선여인이 성팔지재(聖八支齋)를 지키면 목숨이 다할 때 타화락천(욕계의 다섯 번째 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에 녹자모 비사가가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 부처님을 향해 아뢰길, 세존이시여! 성팔지재는 매우 기이하고 독특한 것입니다. 이것은 큰 이익과 과보가 있고, 큰 공덕이 있습니다.”

포살의 산스끄리뜨어[梵語]인 우뽀샤다(upoṣadha)는 재계(齋戒), 뽀샤다(poṣadha)는 정진(精進), 정진일, 성일(聖日), 청정계(淸淨戒), 청정재계(淸淨齋戒) 등으로 의역되고, 포살(布薩)로 음역되며, 간단히 재(齋)로 한역되기도 한다. 여기서 팔지재란 매월 음력 14, 15, 23, 29, 30일의 여섯 번의 성스러운 날(六齋日)에 “산 생명체를 죽이지 말라, 주지 않는 물건을 훔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먹지 말라, 꽃다발 쓰거나 향 바르고 노래하고 풍류 잡히지 말며 가서 구경하지 말라, 높고 넓고 큰 잘 꾸민 평상에 앉지 말라, 때아닌 때에 먹지 말라”고 하는 8재계(八齋戒)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여덟 가지 계를 지키면 큰 공덕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의례의 기원은 수행을 통해 해탈을 얻기 위한 외적 표현 행위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한국의 대표적 불교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宗憲)을 보면(1962년 3월 22일 제정), “본종의 의식은 불조(佛祖)의 유훈(遺訓)과 전래의 백장청규(百丈淸規) 및 예참법(禮懺法)에 의존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더 포괄적인 의미로 보면, ‘불조의 유훈’은 경, 율, 논의 삼장 가운데 율장 및 전래의 백장청규와 예참법에 의존하여 불교의례를 행함으로써 붓다가 걸었던 길을 따라 해탈이라는 궁극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불교의례의 시작은 율장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붓다 재세 때부터 존재했던 율장에서 불교의례를 찾는 것은 불교의례가 붓다 재세 때부터 있어 왔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때의 기록은 아니지만, 4~5세기에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법현은 《남해기귀전》에서 포살, 자자 등이 행해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시대에 이미 인도에서는 불교의례에 상응하는 행사들이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무용, 가곡, 음악을 비구가 보는 것은 악작(dukkaṭa, duṣkṛta, 突吉羅)이 된다고 모든 율전에 기록되어 있다. 또 오가빈방위간계(汚家賓謗違諫戒)에는 비구가 속가에서 추방되는 원인이 되었던 악행 가운데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등 승려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비구니에게는 가무관청계(歌舞觀廳戒)가 있어 무용, 가곡, 음악을 보면 악작(惡作)보다도 중죄인 파일제(波逸提, pācittiya)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근본유부율(根本有部律)》에서는 가무관청계에 해당하는 계목이 존재하지 않고, 오가빈방위간계는 비구뿐만 아니고, 비구니에게도 적용됨을 밝히고 있다.

경전의 독송이나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에 대해서는 율전마다 많이 다른 대응을 보이고 있다. 가령 《빨리율》과 《근본유부율》에서는 장조의 노랫가락으로 법을 암송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다만 《근본유부율》에서는 대사(大師)의 공덕을 찬탄할 경우와 삼계경(三啓經)을 독송할 때는 소리를 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분율》 《오분율》 《마하승기율》 《십송율》에서는 소리를 내어 경전을 독송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예컨대 《사분율》에서는 너무 지나치게 큰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소리를 내어 경전을 독송하는 것에는 율전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향, 꽃, 회번개(繪幡蓋) 등의 장엄구를 불탑이나 불상에 공양하는 것에 대해 《빨리율》에서는 특별히 주목해야 할 기술이 없다. 이것은 아마도 붓다 재세 때는 불탑이나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사분율》 《오분율》 《마하승기율》 《십송율》에서는 탑을 세우거나 부처님의 형상을 제작하여 공양하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허락하고 있다. 다만 그 어떤 것도 그것들을 공양하는 중심은 재가신도이지 출가비구들이 아니었다. 출가비구들이 지시하여 각종 공양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비구가 직접 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십송율》의 〈오백결집삼장품(五百比丘結集三藏品)〉에는 아난존자가 스스로 부처님의 사리를 꽃, 향, 음악으로 공양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근본유부율》에는 대회(大會) 때에는 예외로 비구가 음악공양에 직접 관련되어 있고, 법회 방식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각 율전의 성격에 따라 예외적인 사례도 있었음이 주목된다.

의례의 방식에 대해서도 율전마다 차이가 발견된다. 먼저 《빨리율》이 가장 무관심하였고 《근본유부율》이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사분율》 《오분율》 《마하승기율》 《십송율》은 중간이었지만, 각각 미세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사분율》은 탑에 관한 기술이 다른 율전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중학법(衆學法)의 100조 가운데 24조까지가 탑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사분율》을 전지(傳持)한 법장부의 특징임과 동시에 가장 일찍부터 예배의례의 대상이었던 불탑에 대한 예배의례의 관심도 그 정도로 높았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예배의례는 불교 본래의 것이 아니다. 붓다는 ‘자신의 장례에 비구는 관여하지 말고 다만 최고선으로 권장하라’라고 유언한 바 있다. 그런데도 교단이 이런 의례를 행한 것은 재가자들의 요청, 또는 교단 내부의 요청 등, 다양한 원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지만 율전에 따라 다르게 전지되고 있는 것은 그 율전을 전지한 부파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시대가 내려가면서 노래나 춤 등의 요소를 예배의례로 더 많이 받아들이는데, 이는 불교가 힌두교의 의례를 받아들여 힌두화된 일례로 생각된다. 아마도 힌두교의 대표적 예배 형식인 뿌자(pūjā, 존상 숭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인도의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의례가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이지만 꾸준하게 행해져 왔던 것들이 있었다. 먼저 정기적으로 행해진 불교의례로는 포살(布薩), 안거(安居), 자자(自恣) 등이 있다. 또 정기의례이면서 불보살을 장엄하는 장엄의례로는 초파일 법회, 성도절 법회, 열반절 법회 등이 있다. 그리고 부정기적인 의례로는 통과의례인 수계의례가 있다. 이들은 모든 율전에서 언급되고 있는 의례들이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대승불교로 이행되면서 힌두교의 영향 아래서 비밀스럽게 밀교화되어 갔다. 이는 불교의례가 점점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의례적 색채가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포살, 안거, 자자 등과 같은 초기불교에서 행해졌던 수도형 의례에서 기도, 불공, 재(齋) 등과 같은 기도형 의례로 변질됨으로써 의례의 순수성도 점점 사라져갔다. 그 결과 무병장수나 재난극복 등, 현실 생활의 불완전함을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 극복하지 않고 기복 형태를 띤 의례로 대신하게 된다.

3. 중국에서 불교의례의 발전 양상

중국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은 인도에서가 아니라, 서역(지금의 중앙아시아)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인도불교에 서역문화가 더해져 약간의 변화를 거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북조 시대인 동진(東晋, 317~419년)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인도불교가 중국과 교섭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인도 스님들이 직접 중국으로 건너오거나, 또는 중국 스님들이 인도로 직접 가서 인도불교를 들여오게 된다.

1) 중국에서 의례의 발달 과정

중국에서 불교의례는 동진(東晋) 시대부터 차츰 성행하여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정비가 이루어졌다. 한(漢) 나라 때 처음 불교가 전래된 이래 삼국 시대가 되면 불교가 교단 형식을 보이게 되고, 여기서 의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처음에는 서역에서 온 스님들에 의해 인도의 불교의례 또는 서역의 불교의례가 전해졌지만, 그 뒤에는 점차로 교단의 실권이 중국인으로 옮겨지면서 의례도 중국인에 의해 제정되고 행해지게 된다. 이 무렵의 의례에 관한 역사적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진행 절차는 분명하지 않지만, 형식은 매우 간단하다.

남북조 시대 무렵이 되면, 불교는 국가의 보호라든지 귀족들의 존숭(尊崇)에 의해 영향력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의례 또한 복잡한 형식을 지니게 된다. 의례는 북쪽은 위나라, 남쪽은 양과 진나라에서 성행했다. 양나라의 무제가 행했던 무차대회(無遮大會)와 같은 의례는 규모가 컸다. 수나라는 약 30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문화사적으로 남북조 시대와 당 시대의 과도기적 시기여서 중요시할 필요는 없지만, 불교의례에서 보면 남북조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당 시대 이후의 의례를 보면 오대(五代)는 당나라 말의 내란으로 국내 질서가 충분히 유지되지 않았고 불교교단도 쇠퇴기였으므로 당 시대의 그것을 답습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송 대에는 중국이 통일되어 다시 문화가 왕성하게 일어나 번창하면서 이에 따라 불교도 흥성하게 된다. 송 시대에는 선종이 번창하였기 때문에 선종의 의례가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또 이 시대에는 의례를 행하는 목적, 또는 동기가 바뀌어 어떤 의례는 종교적 의의를 잃고 연중행사의 하나가 되든지, 아니면 현실적인 물질적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물론 본래의 목적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정신보다는 형식에 치우쳐 불교의 참된 정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 불교의례는 당 시대를 전후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2) 당나라를 전후한 의례의 발달과 전개

당나라는 수나라가 망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국력이 강성하게 되면서 주변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인도나 서역문화가 수입되면서 그것이 이전의 한민족 문화와 결합하여 당 시대의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불교도 또한 그런 문화의 하나에 해당한다. 특히 의례는 당나라 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당나라 시대의 불교의례는 여러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오오타니(大谷光照)의 연구에서는 당나라 불교의례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국가적 색채가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둘째, 종파적 차이가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 셋째, 당 이전 시대의 의례와 비교하면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넷째, 불교의례의 본래 목적은 잃어버리고 기도의 목적이 이것을 대신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당 시대의 불교의례는 국가의 발전과 함께 여러 외국에도 전파되는 등, 중국 불교의례의 절정에 다다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불교의례를 크게 정기적인 의례와 부정기적인 의례로 나누어 더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⑴ 정기적인 의례

정기적인 불교의례로는 불탄일, 성도절, 열반절 등과 같이 석가모니 붓다를 기념하는 생애와 관련된 행사, 그리고 인도 초기불교 시대부터 행해져 왔던 포살, 안거, 자자와 관련이 있는 우란분절, 그리고 천자(天子, 천왕)의 생일과 제삿날(忌日) 등의 의례가 있다.

① 불탄일

불탄일의 의례는 이미 인도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의례에는 행상(行像)이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보물로 마차를 장엄하고 그 안에 불상을 안치하여 일정한 곳을 순례하는 의식이다. 《고승법현전》 권 1에는, 마가다국의 빠딸리 성에서 매년 4월 8일에 마차를 장식하고 불상을 안치하고 성 안을 순례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사실로 보아 이 의례는 인도 각지에서 널리 행해졌던 불교의례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 무렵에 성행되었고, 당나라는 물론 송 시대에도 이 의례가 해마다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 불탄일에 행해진 정기적인 의례로는 관불회(灌佛會)를 들 수 있다. 붓다 탄신일에 여섯 마리 용들이 향수로 목욕했다는 전설에 바탕을 둔 이 의례는, 원래 인도에서 행해졌지만 중국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행해졌던 것 같다. 후조(後趙, 319~351)를 세운 석륵(石勒)이라는 왕이 이 의례를 행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조 때 불교가 흥성하고 그에 따른 불교의례로 일찍부터 행해진 것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고승 불도징(佛圖澄, 232~348)의 감화 때문으로 보인다. 또 송의 효무제(孝武帝)가 462년에 내전에 관불회를 마련하였다는 기록을 두 곳에서 볼 수 있다. 당나라 때의 관불에 대한 자료는 거의 발견할 수 없고, 다만 《속고승전》 권 22에 해마다 2월 8일에 행해졌다는 기록만 볼 수 있다. 이 기록은 수 시대와 당 시대의 교체기에 해당하므로 당 시대의 불탄일에 행상과 마찬가지로 관불회가 행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당나라 때 백장회해 선사(720~814)가 지은 총림의 청규를 기초로 하여 원나라 때 편집된 《칙수백장청규》에는 불탄일에 행한 관불회의 순서가 기록되어 있다. “4월 8일에 ……중략…… 설법을 마치고 아뢰기를, ‘제자리에 앉아 각자는 위의를 갖추고 대불전에 나아가 욕불하고 경을 외우십시오. 삼가 아룁니다.’ 제자리에 앉은 뒤 대중들을 이끌고 함께 불전에 다가가서 불전을 향해 줄지어 늘어서고 입정을 한다. 주지는 향을 올리고 삼배를 한다. 좌구를 거두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뜨거운 물에 진식한다. 손님을 청한 시자가 번갈아 물을 올리고 향을 사르는 시자가 향을 바치면 다시 자리에 와서 삼배하고 다시 향을 사른다.” 이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당나라 때도 선원 등에서도 관불회가 행해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처럼 관불회는 불탄일에 행해지는 특유한 의례행사였다.

그러나 당나라 시기의 불탄일에 행해진 갖가지 불교의례는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의미가 적고, 대부분은 귀족계급들과 영합하여 그들의 물질적 발전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 당시의 불교교단과 귀족계급들이 어떤 관계였는지, 또 불교가 얼마나 세속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

② 성도절과 열반절

불탄일과 함께 붓다의 생애와 관련된 중요한 의례로는 석존이 깨달음을 얻은 성도절인 12월 8일과 열반절인 2월 15일이 있다. 먼저 성도절과 관련해서는 앞에서 말한 《칙수백장청규》 권 2에 선원에서 진행되는 순서가 실려 있는데 그것이 유일한 자료로 보인다. 이 문헌이 당나라 때 백장회해 선사가 총림청규로서 지은 것을 기본으로 했지만, 편집된 때는 원나라 때이기 때문에 여기에 실린 내용이 당나라 때에 적용된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당 시대의 성도절과 열반절에 관한 자료는 따로 발견되고 있지 않다. 송 시대에 제작된 《불조통기》 권 33 및 《석씨요람》에는 열반절이나 성도절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들 문헌은 송나라 시대에 행해진 내용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당나라 때는 불탄일 의례를 더 중시했으며 성도절과 열반절 의례는 관심 밖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③ 우란분절

우란분절(盂蘭盆節)은 사후에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받고 있는 영혼을 구하기 위해 매년 음력 7월 15일에 사찰에서 행해지는 의식으로서 울람바나(烏藍婆拏, ullambana)의 음역이다. 이것은 이미 인도에서는 붓다 재세 때나 서역 지방에서 행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진 시대에 월지국 출신 축법호가 한역한 《우란분경》을 보면,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죄를 지어 아귀도에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구하기 위하여 목련이 큰 잔치를 벌였다. 이를 본받아 음력 칠월 보름에 조상의 성불을 기원하여 민가와 절에서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분에 담아 조상의 영전이나 불전에 공양하는 의례가 우란분절이다.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 무렵, 남쪽에서 우란분절 법회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초기부터 성황리에 행해졌는데, 고종 때 출간된 《법원주림》 권 62에 우란분절 때 올리는 공양물에 대한 문답이 나열되어 있다. 이를 보면 그 당시 우란분절 법회가 널리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장안의 서명사, 자은사 등에는 해마다 우란분절에 국가에서 공양물과 악사를 보내왔다고 전하고 있다. 어떤 형식으로 우란분절 의례가 진행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때 올리는 공양물은 《우란분경》에 기록이 있다. 흰 쌀밥, 백 가지 맛을 내는 다섯 가지 과일 및 향, 좌구 등 시주의 능력에 따라 음식물과 세공물을 올렸다고 한다. 이 우란분절은 당나라 말기로 접어들면 비속화되고 세속화가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대종은 궁정에서 우란분절 행사를 하면서 금으로 된 일산으로 장식하고 백만 금을 소비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우란분절 행사는 궁정과 밀접하게 유착하면서 당나라 불교의례 가운데 가장 세속화된 의례의 하나로 꼽힌다.

④ 천자의 생일과 기일

국왕의 생일에 궁중이나 사찰에서 법회를 여는 것은 인도나 서역불교에서는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천자의 생일이나 기일을 불교행사의 하나로 삼았는데, 중국에서 불교가 얼마나 국가적 색채가 강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실례이다. 천자의 생일을 불교의례의 하나처럼 행한 것은 불교를 국교처럼 간주했던 북위(北魏)에서 시작된다. 국력이 강성하고 불교를 숭상했던 당나라 때도 천자의 생일을 불교의례의 하나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 천자의 생일에 법회를 열기 시작한 것은 현종 때부터이다. 뒤이어서 숙종, 무종, 선종, 의종, 소종, 덕종 때도 계속되었다.

천자 생일과 마찬가지로, 천자와 황후의 기일(忌日)에도 궁정과 관련된 불교의례가 행해졌다. 그러나 당나라 이전에는 문헌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천자나 황후의 기일이 불교의례로 행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당나라 초기부터 시작된 이 의례는 중종 때는 궁궐 안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현종, 덕종 때도 이어졌다. 그러나 무종은 폐불 정책을 실시하여 행해지지 않았고, 그를 이어 즉위한 선종이 다시 부활하여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 때에도 선황인 소종의 기일에 이 법회가 행해졌다. 이러한 천자의 생일이나 기일 등은 불교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므로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불필요한 법회이지만, 불교교단이 국가적인 색채가 강한 시기였기에 이런 행사들이 불교의례의 하나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⑵ 비정기적인 의례

비정기적인 의례로는 재(齋), 독경 등이 있다.

첫째, 재는 스님들에게 식사를 공양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이것은 스님들에게 식사를 공양하는 의식, 또는 그런 의식을 중심으로 한 법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스님에게만 식사를 공양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일반인에게도 식사를 공양하는 경우를 특별히 ‘무차재(無遮齋)’라고 한다.

재는 인도에서 이미 행해졌던 의례이고,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행해졌다. 남북조 시대 무렵에는 양나라 무제가 행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비롯해 여러 번에 걸쳐 행해졌다. 당 시대로 들어오면 한층 성행하여 당시 법회의례의 대부분이 재라고 볼 수 있다.

재는 스님들에게만 식사를 공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므로 식사를 공양하는 스님의 수에 따라 ‘오백승재(五百僧齋)’ ‘천승재’(千僧齋)로 부르는데 당나라 때는 이보다도 훨씬 많은 스님들에게 식사를 공양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많게는 1만 명 스님에게 공양하는 대법회도 있어 ‘만승재(萬僧齋)’라고 불렀다. 송나라 때는 이보다 세 배가 많은 ‘삼만승재(三萬僧齋)’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 밖에도 ‘오천승재(五千僧齋)’ ‘삼천승재’(三千僧齋), 적게는 ‘백승재(百僧齋)’ ‘십승재(十僧齋)’도 행해졌다. ‘십승재’는 한 사찰에 머무는 스님들만으로 충분하지만, ‘백승재’ 이상은 부근의 여러 사찰 스님들이 모여 공양하는 것이므로 하루에 그치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 행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재는 스님들에게 식사를 공양함으로써 자신의 선근공덕을 쌓는 것이 목적이므로 수많은 스님들에게 공양하는 것은 순수한 목적이라기보다는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수도형 의례라기보다도 기도형 의례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시대가 내려갈수록 실제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친 불교행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둘째, 독경은 불교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되는 불교의 전통적인 의례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본래의 목적을 잃고 독경으로 공덕을 쌓으려는 형식적인 면에 치우치는 법회로 변해갔다. 독경법회는 동진 시대부터 이미 행해졌다고 하며, 남북조 시대가 되면 양나라의 무제가 성대한 독경법회를 열었던 것을 비롯하여 두세 개의 실례가 문헌에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당나라 때는 대종 때 《인왕경》을 강찬(講讚)하는 법회도 열렸다. ‘재’처럼 이 독경의례도 시대가 흐를수록 자신의 수행을 위하기보다는 기도나 공양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4. 나오는 말

지금까지 불교의례의 의미, 종류, 인도와 중국의 불교의례 발생 과정과 양상을 살펴보았다.

종교의례는 종교 행위의 의미체계로서 상징적인 성격을 지니며, 종교적 가르침을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종교의례의 유형은 기도형 의례와 선정형 의례로 나누어진다. 기도형 의례는 자연발생적인 종교와 절대 신격의 계시형 종교로 다시 나누어진다. 기도형 의례 가운데 먼저 자행의례는 ‘상구보리’를 위한 수행의례이다. 타행의례는 재가신도들의 부탁을 받아 스님들이 행하는 각종 기원의례와 회향의례를 말한다. 이 의례는 자행의례의 상구보리가 아닌 ‘하화중생’을 위한 의례이다. 선정형 의례는 자기 신앙을 계발하고 심화를 꾀하는 것이 목적으로 하는 의례를 말한다. 이것은 기도형 의례와 달리 일상생활이 곧바로 의례행위가 된다. 이 의례에 속하는 것으로는 안거, 자자, 포살회, 사경, 득도식 등을 들 수 있다.

불교의례의 외적 시원은 예경과 반승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례의 기원은 수행을 통해 해탈을 얻기 위한 외적 표현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 인도의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의례가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이지만 꾸준하게 행해져 왔던 것들이 있다. 먼저 정기적인 불교의례로는 포살, 안거, 자자 등이 있다. 또 정기의례이면서 불보살을 장엄하는 장엄의례로는 초파일 법회, 성도절 법회, 열반절 법회 등이 있다. 그리고 부정기적인 의례로는 통과의례인 수계의례가 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대승불교로 이행되면서 힌두교의 영향 아래서 밀교화되어 갔다. 이에 따라 불교의례는 포살, 안거, 자자 등과 같은 초기불교에서 행해졌던 수도형 의례에서 기도, 불공, 재 등과 같은 기도형 의례로 변질됨으로써 의례의 순수성도 점점 사라져갔다.

중국에서 불교의례는 동진 시대부터 차츰 성행하여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정비가 이루어졌다. 한 나라 때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 삼국 시대가 되면 불교가 점차로 쇠약해지면서 교단 형식을 보이게 되고, 여기서 의례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처음에는 서역에서 온 스님들에 의해 불교의례가 전해졌지만 그 뒤에는 점차로 중국인에 의해 실행하게 된다.

이 무렵의 의례에 관한 역사적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진행절차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형식은 매우 간단했던 것 같다. 남북조 시대 무렵이 되면, 불교는 국가와 귀족의 보호에 의해 영향력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의례도 또한 복잡한 형식을 지니게 된다. 또 남북조 시대의 의례는 의례를 실행하는 목적을 잃고 기도를 위해 행하여지게 된다.

다음으로 당 시대 이후의 의례를 보면 오대(五代)는 당나라의 그것을 답습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송나라는 중국이 통일되어 다시 문화가 왕성하게 일어나 번창하면서 불교도 이에 따라 흥성하였다. 따라서 송 시대에는 선종이 번창하였기 때문에 선종의 의례가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또 이 시대에는 의례를 행하는 목적, 또는 동기가 바뀌어 당나라 때보다 뚜렷하였으므로 어떤 의례는 종교적 의의를 잃고 연중행사의 하나가 되든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물질적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중국에서 불교의례는 크게 정기적인 의례와 부정기적인 의례로 나누어진다. 정기적인 불교의례로는 불탄일, 성도절, 열반절 등과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기념하는 생애와 관련된 행사, 그리고 인도 초기불교 시대부터 행해져 왔던 포살, 안거, 자자와 관련이 있는 우란분절, 그리고 천자의 생일과 기일 등의 의례가 있다. 그러나 당나라 때는 열반절이나 성도절 의례는 불탄일 의례보다 중요시하지 않아 불교도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천자의 생일이나 기일 등은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불필요한 법회이지만, 그 시대가 국가적인 색채가 강한 불교교단이 존재하였기에 이런 행사들이 불교의례의 하나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비정기적인 의례에는 재(齋), 독경 등이 있다. 재는 자신의 선근공덕을 쌓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선근공덕을 쌓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수도형 의례라기보다도 기도형 의례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고, 시대가 흐를수록 실제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친 불교행사가 되어 갔다. ‘재’처럼 이 독경도 시대가 흐를수록 자기 자신의 수행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도나 공양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갔던 것을 알 수 있었다. ■

문을식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주요 논문으로 〈십주비바사론에 나타난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의 계 연구〉 등과 저서로 《인도의 사상과 문화》 《용수의 중도사상》 《요가 상캬 철학의 이해》 등과 번역서로 《인도철학의 자아사상》 등이 있다. 현재 한국불교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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