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남방불교에서 있었던 교단의 정화와 종단개혁의 역사는 주로 왕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일어났다. 종교와 국가가 분리된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왜 남방불교의 여러 교단이 자체적으로 정화라든지 종단개혁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며 형성된 남방불교의 독특한 왕권과 교단의 관계는 교단만의 독자적인 정화와 종단개혁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이점은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에서 있었던 불교 교단의 정화와 종단개혁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왕권이 약화되거나 왕가가 사라진 현대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상실한 전통교단과 새로운 불교운동 사이의 긴장관계 및 불교 교단과 국가 사이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 등을 이해할 수 있다.

 

 

2. 아쇼까 왕

남방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군주라고 하면 의심할 필요도 없이 기원전 2세기경에 북인도를 지배했었던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까(Aśoka) 왕이다. 남방의 여러 역사서들은 그가 가장 이상적인 불교적 군주로서 불교 순례지들을 정비하고 불교를 정화하고 불교를 주변 국가들에 전파한 뛰어난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쇼까 왕의 불교정화는 주로 불교 교단의 제3결집을 지칭하는데 부처님 사후 216년 또는 236년경에 일어난 승단의 분란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에서 아쇼까라마(Aśo-kārāma) 사원를 중심으로 승단에 분란이 생겨서 7년 동안 포살(up-osatha)을 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왕권의 차원에서 이 분쟁에 개입하는 사건이 발생되는데, 이 분란의 와중에 몇몇 승려들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아쇼까 왕은 고민 끝에 그 해결책으로서 가장 신망이 있는 승려인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스님을 모셔와 7일 동안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쇼까라마(Aśokārāma) 사원으로 가서 커튼 뒤에 앉아 승려들에게 질문을 던져 6만 정도의 정통파와 6만 정도의 비정통파들을 구분한다. 그는 후자에 속하는 설일체유부(Sarvādtivāda) 학설을 따르는 사람들을 국외추방하고, 전자에 속하는 분별설부(Vibhajyavāda) 학설을 따르는 사람들을 정통설로 인정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불교 포교단을 만들어 주변의 여러 국가들에 파견하게 된다.

이때 추방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근거지를 인도 북서쪽으로 옮겨 마투라, 간다라, 카슈미르 등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금의 스리랑카 및 동남아시아 지방에 영향을 미치는 테라와다(Theravāda)를 형성하게 된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에서 아쇼까 왕의 역할을 칭송해왔다. 하지만 엄밀하게 판단해보면 아쇼까 왕은 이 사건을 통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고 있다. 즉 왕권이 교단의 분란에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어 주었고, 그 자신이 승단의 분란에 심각하게 개입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된 것이다. 사실상 불교의 교리적 측면에 대해 무지했던 군주가 교리적 문답을 통해 승려들의 사상을 판단해서 추방했다는 이야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몇몇 역사서들은 아쇼까 왕의 승단 분란 개입이 승단 내부의 교리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승단에 들어와서 승복만 입고 있는 이교도들을 가려내서 추방하는 정화운동이었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불교가 좀 더 오래 지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서 남방 불교권에서 군주의 이러한 역할을 불교를 보호하고 진흥하는 군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의 불교 교단 정화와 교단 개혁이 왕권에 귀속되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3. 스리랑카에서 왕권과 교단

스리랑카에서 불교 교단과 왕권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물론 불교 교단은 기본적으로 왕가의 후원하에 발전했다. 일반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이 충실한 불교신자이기를 원했고, 왕은 보살이자 부처님 사리의 보호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면서 왕권을 유지했다. 한편 불교 교단은 왕가로부터 교단을 유지하기 위한 보시를 받으면서 왕권을 인정했다. 따라서 부처님의 치아 등과 같은 중요한 사리가 올바른 불교적 군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불교 교단의 번영은 왕이 외부로부터 침입에 잘 대처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것에 의해 지속되었다. 왕가에서는 불교 교단에 땅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노동력을 함께 기증했다. 따라서 교단은 점차 부유해졌으며 승려들은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세속화되었으며 왕권에 밀착하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왕들은 아쇼까 왕의 예를 따라서 승단 내부의 일들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에서 정화(purification)란 이름으로 부패한 승려들이나 이단을 믿는 승려들을 교단에서 몰아내는 일들이 왕가의 이름으로 실행되었다. 스리랑카의 승려들 또한 종종 왕권을 이용해서 교단 내의 부적절한 승려들을 추출하거나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해왔다. 기본적으로 스리랑카를 통치할 수 있는 왕가의 도덕성이 승려들을 통해서 뒷받침되었고, 승려들은 왕의 공덕을 칭송하고 왕가의 보시를 받음으로써 왕가의 가치를 인정하는 상호보완적 공생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고대 스리랑카에는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아바야기리(Abhay-agiri), 제따와나(Jetavana)라는 3개의 교단이 있었고 서로가 왕가로부터 더 많은 후원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오늘날 남방의 테라와다 교단에서는 마하위하라가 중심이 되었지만, 이 3개의 교단은 10세기경까지 스리랑카에서 끊임없이 경쟁하며 발전했다. 교리적으로 보았을 때 마하위하라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가장 보수적인 견해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기원전 1세기경에 형성된 아바야기리와 기원후 4세기경에 형성된 제따와나는 좀 더 개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인도에서 유입된 범어 문헌들에 나타난 불교사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었다.

이들의 경쟁 관계는 10세기경 쉬와 신을 숭배하는 남인도 촐라(Co-la)인들이 스리랑카에 침입하여 고대왕국의 수도인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를 정복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촐라 인들은 아누라다푸라를 기반으로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반까지 스리랑카 북부지역을 지배했다. 이들은 위자야바후(Vijayabāhu) 왕이 뽈론나루와(Polonnaruwa)를 중심으로 강력한 왕가를 형성하면서 점차 남인도로 밀려나게 된다. 사실상 이 전란의 와중에 스리랑카의 비구니 교단이 소멸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정식으로 복원되지 않고 있다. 비구 교단은 전란 중에 도피했던 승려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그 세력이 극히 미약했고 3개 교단의 구분 또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1153년부터 1186년 사이에 뽈론나루와를 중심으로 스리랑카를 통치했던 빠라끄라마바후(Parākramabāhu) 1세는 아쇼까 왕의 예를 따라서 불교 교단을 정화하고 개혁한다. 그는 전란의 피해를 적게 입었던 아란니까(Āraññikas)의 마하깟사빠(Mahākassapa) 스님을 초청하여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승왕(sangarāja)과 같은 지위를 주고 그의 주도로 승단의 개혁과 정화를 이루게 된다.

기본적으로 아란니까가 마하위하라 교단에서 도시를 떠나 숲에서 생활하면서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승려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마하위하라를 중심으로 교단이 통합되고 개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하깟사빠는 첫째 아란니까의 엄격한 규율에 미치지 못하는 승려들은 승단에서 추출되거나 행자로부터 단계적으로 다시 수계를 받도록 했다. 둘째로, 남아 있는 승려들은 새로운 결집을 통해 교단의 구분 없이 하나의 교단에 속하도록 하며, 셋째 까띠까와따(Katikāvata) 계율 목록을 내려서 이를 통해 승단을 통제한다는 세 가지 원칙을 세워 교단을 개혁했다. 물론 아바야기리나 제따와나가 이 개혁을 통해서 즉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유명무실해졌으며, 승려들은 지역별 핵심 거점을 중심으로 재편되게 된다. 따라서 12세기 이후 스리랑카의 교단 정화는 주로 까띠까와따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관심의 초점은 승단의 단합이나 통합이 아니라 승려들의 계행으로 옮겨가게 된다. 사실상 승단이 아니라 왕에 의해서 까띠까와따가 정식으로 공표되고 승단의 최고 어른에게 승왕(sangarāja)과 같은 지위를 부여되었다. 불교 승단은 승왕을 정점으로 승려들의 수직 계열화가 이루어지면서 승단은 점차 국가에 귀속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17세기 캔디 왕가에까지 이어져왔으나 16세기 이래 수없이 많은 외침과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기독교와 힌두교가 유행하고 불교는 극히 미약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불교의 쇠퇴 원인으로 유럽인들의 스리랑카 식민지 지배를 거론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불교의 교단과 왕권의 밀착 및 승려들의 지나친 왕가 의존적 경향이 또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즉, 15세기 이후 수많은 외침을 거치면서 스리랑카의 왕들은 더 이상 불교 교단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고 가톨릭이나 힌두교 사제가 왕의 조언자 역할을 대체하면서 불교 승단은 가장 강력한 후원자를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에 남인도의 힌두적 요소들을 유입되고 승려들의 세속화가 이루어지면서 불교 교단이 유지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캔디(Kandy)를 중심으로 1747년부터 1782년까지 통치했었던 끼르띠 스리 라자싱가(Kīrti Śri Rājasingha) 왕은 자신의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사라난까라(Saraṇaṅkara)와 함께 불교 교단의 복원에 나선다. 세속화가 진행되어 수많은 세속적인 업무에 관련되었던 당시 스리랑카의 불교 승려들은 사미계까지만 받았으며 의도적으로 비구계를 받지 않으려 했다. 더 이상 새로운 비구계를 주는 것이 어려워지는 지경에 처하게 되자 사라난까라는 왕에게 청해서 당시 강력한 해상무역 왕국으로 성장한 태국으로부터 비구계를 내려줄 수 있는 승려들을 초청하게 된다. 스리랑카의 불교승단의 수계 전통 복원을 위해서 태국의 왕은 스리랑카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명맥을 잇고 있는 전통교단의 승려들을 스리랑카로 보내게 된다.

 

 

1750년 장로 우빨리(Upāli)를 중심으로 18명의 비구들과 7명의 행자들이 캔디에 도착하게 된다. 이들은 캔디의 말왓따(Malwatta) 사원에 머물면서 수없이 많은 수계를 의식을 진행하여 스리랑카에 비구계 전통을 다시 세우게 된다. 또한 혼란의 와중에 더 이상 완전한 형태의 빨리 삼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스리랑카 불교 승단을 위해 태국으로부터 많은 빨리어 불교경전들을 역수입하여 보급한다. 이들은 왕가의 후원하에 스리랑카의 불교 승단을 개혁하고 복원하여 오늘날 스리랑카 불교의 최대 종파인 시암니까야를 형성하는 초석을 낳게 된다.

스리랑카의 불교 교단 역사는 불교 교단의 개혁이 항상 왕가와 밀접한 관계하에서 일어났으며 불교 교단의 정화와 개혁이 불교 교단 스스로의 몫이라기보다는 왕권에 귀속되는 국가적 사업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4. 동남아시아에서 왕권과 교단

미얀마와 태국의 경우 불교 교단과 왕가의 상호의존 관계는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왕은 신과 같은 존재(devaraja)이면서 전륜성왕(cakravarti)이고 불교를 수호하고 불교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사람(dhammaraja)이었다. 수없이 많은 분쟁과 혼란을 거치면서 새로운 왕가가 들어서게 되면 새로운 통치자는 거의 예외 없이 아쇼까 왕의 예를 따라서 불교 교단을 개혁하고 정화하려고 했다. 즉 불교 교단의 개혁과 정화는 새로운 왕가가 오랫동안 번영할 수 있는 공덕을 쌓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권력투쟁에 수반되는 수많은 암투와 폭력에 대해서 일종의 면죄부와 같은 역할을 했다. 물론 이러한 의례적인 교단 정화 행사와 더불어 몇몇 중요한 불교 교단 개혁이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15세기경 페구(Pegu)를 중심으로 라만나데사(Ramaññadesa)로 알려진 오늘날 미얀마 남부 지역을 통치했었던 몬(Mon)족 담마째띠(Dhammaceti) 왕의 승단 정화운동은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오늘날 남방불교의 초석을 낳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이 아쇼까 왕 시대에 장로 소나(soṇa)와 웃따라(Uttara)가 파견되었던 것으로 언급되는 황금의 땅(Suvaṇṇabhūmi)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스님이었다가 왕위에 오른 담마째띠는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에 승단 내부의 갈등이 심해지고 각각의 승려 그룹들이 독자적으로 수계를 행하면서 승단분열(sanghabheda)이 가속화되자 불교가 사라지게 될 것을 우려했다. 또한 라만나데사의 그 어떤 스님도 제대로 된 수계의식을 진행할 수 있는 계단(sīmā)을 설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한탄했다.

 

 

사실상 남방 불교권에서 승단의 청정함은 올바른 수계전통과 제대로 된 계단(sīmā)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었다. 담마째띠는 당시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에 올바른 수계전통도 없고 제대로 된 계단도 없다고 판단하고 아주 혁신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즉, 승려들을 스리랑카로 보내 아쇼까 왕 시대에 파견된 마힌다(Mahinda) 전통이 잘 유지되고 있는 마하위하라 교단에서 수계를 다시 받도록 하여 수계전통을 올바로 세우고, 깔야니 시마(Kalyāṇī sīmā)를 출발점으로 율장(Vinaya)에 의거하여 승단을 개혁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쇼까 왕 시대에 자신의 지역에 파견된 소나(soṇa)와 웃따라(Uttara) 장로와 스리랑카에 파견된 마힌다 장로가 기본적으로 동일한 승단에 소속되었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미 유명무실해진 소나와 웃따라) 수계전통을 과감하게 버리고 스리랑카로부터 마힌다(Mahinda) 수계전통을 들여오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수계전통 통합으로서 사실상 이 시점으로부터 동남아시아 불교에 급속한 스리랑카화가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담마째띠 왕의 불교 승단 정화운동은 미얀마 남부 페구에서 발견된 빨리어와 몬(Mon)어로 기록된 깔야니 시마 비석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에 따르면 담마째띠 왕은 1475년에 각각 22명으로 구성된 2그룹의 몬족 승려들을 왕의 친서와 선물들과 함께 스리랑카의 부와네까바후(Bhuvanaikabahu) 6세 왕에게 파견한다. 오늘날 콜롬보 남부 꼿뜨(Kotte)를 수도로 하고 있었던 왕은 이 승려들을 성대하게 맞이했으며, 전설에 의하면 부처님이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목욕했던 곳으로 알려진 깔야니 강에 뗏목을 띄우고 24명의 스리랑카 비구들을 선발하여 수계의식을 진행했다. 왕을 비롯한 스리랑카의 스님들은 계단(sīmā)의 청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흐르는 물 위의 뗏목에 계단을 만드는 우닷까우닷케빠 시마(udakkukkhepa sīmā)를 준비했다.

이후 이 수계전통은 강의 이름을 따서 깔야니 시마로 불리게 되었고 동남아시아에서 교단수계 전통의 정통성과 청정성을 대변하는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스리랑카 불교가 1500년경부터 시작된 유럽의 식민 지배로 거의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스리랑카 불교의 마지막 황금기에 스리랑카 수계전통이 동남아시아로 넘어가서 유지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깔랴니 시마에서 수계를 받은 승려들이 라만나데사로 되돌아오자 담마째띠 왕은 이 승려들과 몇몇 신망이 있는 노스님들을 중심으로 수도 근교에 무따오(Mutao) 사원을 건립한다. 그는 올바른 방법으로 계단을 설립하고 자신의 통치 아래에 있는 승려들에게 스리랑카 마힌다 수계전통에 따라 다시 수계를 받도록 했다. 깔야니 시마 비문에 의하면 1479년까지 약 15,666명의 비구들이 여기에서 수계를 받았다고 하니 거대한 변혁이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담마째띠 왕이 깔야니 시마를 중심으로 불교 교단을 통합하고 수계전통을 올바로 세웠던 정화운동은 19세기 태국에서 현 짜끄리 왕조의 4번째 왕이었던 몽쿳(Mongkut)에 의해 다시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태국의 양대 종단 중의 하나로 성장한 탐마윳(Thammayut) 니까야가 이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성장하게 된다.
몽쿳 왕자는 태국 왕가의 법도를 따라서 어린 시절에 출가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불교에 빠져들었던 왕자는 빨리어에 흥미를 느끼고 율장을 비롯한 많은 불교문헌들을 공부했고 태국 각지의 불교사원들을 순례했으며 많은 불상과 금석문 등을 발굴하여 연구했다고 한다. 라마 2세가 죽었을 때 몽쿳 왕자는 태국의 3대 왕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승려로 남기로 결정한다.

사실상 그는 태국의 전통교단인 마하니까야(Mahānikāya)의 여러 가지 관행들이 빨리어 율장에 의거했을 때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있었다. 또한 마하니까야의 계단이 올바르게 설치되지 못하여 청정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고민하게 된다.

그는 버마의 박해를 피해 태국에 들어와 있었던 몬(Mon)족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서 깔야니 시마의 존재를 알게 되고 올바른 수계전통을 확립하고 계단의 청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일종의 개혁운동으로서 깔야니 시마의 정통성을 담보로 1833년부터 새로운 수계전통을 태국에서 확립하게 된다. 수많은 태국의 승려들이 몽쿳 왕자를 따라서 새롭게 수계를 받았으며 점차 마하니까야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1902년 승단포고령을 통해서 이 새로운 수계전통이 탐마윳 니까야로 인정받으면서 정식으로 발족하게 된다.

탐마윳 나까야는 비록 왕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태국 불교 승단의 분열을 초래했다는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오늘날까지도 태국에서 빨리어 율장을 중심으로 엄격한 계행을 중시하는 종파로 자리 잡고 있다.

5. 나가는 말

동남아시아에서는 스리랑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승단의 개혁과 정화가 주로 왕가와 밀접한 관계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비록 불교 승단의 정화와 개혁이 왕권에 귀속되는 국가적 사업이라는 측면은 왕권이 약해지기 시작한 현대에 들어와서 점차 희석되고 있지만, 승단이 자체적으로 교단의 정화와 개혁을 진행하기는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다. 동남아시아의 불교국가들은 국가별로 승왕(sangarāja) 제도를 가지고 있다.

각국의 불교 승려들은 자신이 속한 종파와 상관없이 승왕을 중심으로 피라미드처럼 수직계열화되어 있다. 물론 승왕은 국가나 왕권과 상관없이 승단에서 자체적으로 임명한다고 하지만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경우를 보면 여전히 왕권 또는 군부의 실세들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남방불교권의 전통 불교 교단은 여전히 왕가 또는 국가와 상호의존관계를 형성하여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전통 승단의 자체적인 정화와 개혁은 사실상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왕가가 아닌 일반 승려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개혁운동은 ‘보란 업처 수행운동’의 경우에서 보듯이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예외 없이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태국에서 새로운 불교운동으로 성장하고 있는 담마까야의 경우 태국 전통교단에서 이단시되고 있지만 농촌 지역의 빈곤층을 중심으로 많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은 탁신 계열로 분류되며 사실상 태국 왕가를 위협하는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불교 승단과 왕권의 밀착관계가 점차 사라져가는 현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있는 전통불교 교단과 새로운 불교운동 사이의 긴장 관계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

 

황순일 /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학사, 석사), 영국 옥스포드대 졸업(박사). 출라롱콘대학 교환교수(태국), 사이타마대학 객원교수(일본)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Metaphor and Literalism in Buddhism(Routledge-Curzon)과 Sermon of One Hundred days(Equinox)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에서 개념과 명칭〉 등이 있다. 불이상(연구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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