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행복한가? 근자 들어 그 생각을 자주 한다. 올겨울 들어 그 생각을 더 자주 한다. 봄, 여름, 가을보다는 겨울이 산사람에겐 사색하기 더 좋은 때문이리라. 옷 벗은 참나무 우듬지 사이로 달빛이 스치고 지나는 한밤중, 좌정하고 있으면 그 물음의 깊이는 더 깊어진다. 나는 지금 과연 정말로 행복한가? 진실로 기쁜 행복 속에서 살고 있는가? 이고득락(離苦得樂)하고 있는가?
얼마 전 가까운 거사 한 분이 가정적으로 큰 풍파를 겪었다. 삼십 년 결혼생활 동안 큰 탈 없이 가정생활을 잘해 오던 그의 아내가 어느 날 느닷없이 사교(邪敎)에 빠져버린 것이다. 거사는 그 일로 아내와 일 년 넘게 신경전을 벌여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사라져버렸다. 남편 몰래 그곳에 간 것이다.
수소문 끝에 거사는 아내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그리곤 새벽 두 시가 넘는 시간에 경찰까지 동원해 아내를 찾아냈다. 사교에 빠진 아내도 미웠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밤늦은 새벽까지 사람들을 붙잡고 그릇된 교리로 미혹하고 있는 사교에 대한 분노가 그의 마음을 더 끌어 오르게 했다. 분노로 불타는 거사 앞에서 아내는 오들오들 떨었다. 아내를 차에 태운 거사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분노와 애증의 갈애가 다이너마이트처럼 터져버렸다. 화를 억제하지 못한 그는 그곳에 입고 갔던 아내와 자신의 옷을 마구 가위질해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머리를 스님처럼 밀어버렸다. 차가운 냉수욕으로 불길을 껐다.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나에게 전화했다.
그에게 내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자비와 연민’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비와 연민만이  그들 부부를 구해주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먼저 참회를 주문했다. ‘나로 인해 그리도 긴 세월 당신이 아파하더니 이제 내가 그 아픔을 되돌려받고 있구려. 그렇게나마 당신이 위로와 평안을 찾았다니 참으로 고맙소. 사랑하오. 내가 잘못했소.’라면서 아내에게 진실로 참회하라고 했다.
나는 또 말했다. ‘현자와 중생의 차이는 즉흥적인 마음이니 모든 상황을 원칙과 법칙을 갖고 차분히 대응’하라고. 그렇게 할 때 ‘아무리 악마(사교)가 악마의 짓을 해도 다 이해가 된다.’며 ‘그럴 때일수록 문수보살의 지혜와 관세음보살의 사랑으로 모든 상황을 큰 가슴으로 쓸어안으라.’고.
나와 통화를 끝낸 그는 비 맞은 참새처럼 떨고 있는 아내 앞에 조용히 무릎 꿇었다. 그리곤 아내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눈물이 치솟았다. 참으로 오랜 눈물이었다. 참회의 눈물이었다. 사랑과 이해, 자비와 연민, 고해와 성사의 오열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내를 사교로 내몬 건 결국 자신이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활방식과 태도와 사고가 아내를 사이비 종교라는 삶의 마지막 경계선으로 몰고 간 것이다.
가슴에 아내를 안고 그는 몇 시간을 울었다. “그래, 여보. 다 내 잘못이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하고 산 업보로 당신이 그리 된 것이오. 부디 나를 용서하오. 내가 당신을 사이비 종교로 내몬 악마이오. 내 진정으로 참회하니 부디 나를 용서하고 받아주오.” 그도 울고 아내도 울었다. 딸도 울고 아들도 울었다.
거사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은 그날 밤 나는 쉬 잠이 오지 않았다. 방석 위에 좌정하고 앉은 나는 이젠 내가 나에게 물었다. ‘진실로 너는 지금 행복한가? 진정으로 너는 지금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이고득락한가?’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한 구절이 달빛처럼 눈으로 고여 들었다.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또는 어떤 종교를 믿든 우리 모두는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행복은 각자의 마음 안에 있다.’
법정 스님의 ‘행복론’ 한 토막도 북한산 아린 바람처럼 이마를 때리고 지나갔다.
‘행복은 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꽃향기처럼 들려오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멀리 밖으로 찾아 나설 것 없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느끼면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두 분 행복론의 요지는 결국 다 ‘바로 내 마음 안에 행복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행복한가?’ 하고 묻는다는 건 참으로 우문(愚問)임이 분명해졌다. 행복은 이미 내 안에 있건만, 나도, 그 거사도, 그 거사의 아내도 있지도 않은 밖의 행복을 찾아 여태껏 황량한 벌판을, 먼 들판을 헤매고 다닌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거사의 아내는 사이비 종교의 문까지 두드리고 만 것이다. 남편과 자식과 가정에 깊은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면서.
그 일이 있는 뒤로 한밤중에 일어나 좌정하는 버릇이 더 늘었다. 그때마다 나는 무엇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 ‘우리의 행복론’을 되새겨보곤 한다. 그리고 스승이신 용타 스님께서 일러주신 ‘행복의 기초논지’를 반추하며 내 안의 행복론을 다시금 담금질해본다. 행복마을 이사장인 용타 스님은 ‘행복의 기초논지’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의했다. “내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고, 행복이란 그냥 좋은 느낌이며, 그 행복의 주체는 우리이고, 그러므로 내 인생의 목적은 나만의 행복이 아닌 우리 모두의 행복”이라고.
벵골의 성자 라마크리슈나의 말처럼, 우리는 어쩌면 지금껏 집과 돈과 이름이 행복인 줄 알고 걸어왔다. 그러나 지금 나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한 나 자신이 이미 행복하다면 그 모든 것들이 또한 나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에게 전화를 했던 그 거사도, 사교에 빠졌던 그의 아내도 자신들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행복을 잊어버리고, 자신들 안에서 나직하게 펄럭이고 있는 행복의 깃발을 못 보고 한 세월 힘들고 아프게 생의 황무지를 방황한 것이다.
이제나마 그들 부부가 사랑과 이해와 자비와 연민과 통찰과 참회로써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참된 행복과 행복의 가치를 되찾게 된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이 첫 철을 나는 나에게 북한산 겨울이 주는 첫 선물이 아닌가 하다.
북한산 겨울은 정말 춥다. 하지만 북한산 동천(冬天)이 일러준 ‘겨울날의 행복론’이 있어 혼자 나는 겨울이 춥고 외롭지만은 않다. 겨울날의 이 따뜻한 행복론을 춥고 가난한 아랫말 사람들에게 전송한다. 겨울날의 북한산 행복론과 더불어 모두 털옷 같은 마음으로 한 철 잘 나시길 빈다.
오늘 밤, 좌정한 방석 위로 또 고드름 같은 달빛이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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