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선행학습 금지법’이라니? 그 덕분에 종일토록 웃었다. 온 나라의 아이들이 선행학습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고 한다.
초중고, 대학교 모두 해당할까? 기대가 뭉실뭉실 커진다. 걸음 떼자 학교에 가서 놀기 시작하여 반백이 넘도록 아직도 학교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로서는 듣던 중 참 솔깃한 얘기였다. 아, 난 너무 일찍 태어났나 보다. 평생토록 ‘선행’ 학습에 골몰하느라 폭삭 늙어버린 내 인생이여…… 이제는 세상이 변해서 미리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것도 법으로 금지해 주는 세상이 되었나 보다.
그 법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선행학습의 범주를 정해야 할 것이다. 선행의 개념은 어느 시점까지로 할까? 또 학습의 범주는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과목에 따른 특성은 어떻게 차별하나?
학창 시절에 난 몹시 궁금했다. 수업 시간 내내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는 미술 교사와, 한 시간 수업에도 몇 차례씩 판서하느라 힘들어 보이는 수학 교사의 월급이 똑같다는데, 불공평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난 항상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이는 미술 교사를 부러워하면서 미술반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경우도 선행학습이라 해야 할까? 미술 과목의 선행학습 정도는 어찌 판단하나? 글만 떼면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는 국어 과목은 어찌하나? 위 학년 책을 절대로 보면 안 되나? 초등학생이 중학생인 형의 책을 읽어 보면 그 법을 어겨서 죄가 될까? 선행학습의 유무와 정도의 판별은 누가, 무엇을, 어느 학생을 기준으로 할까?
그리고 제일 중요한 핵심 하나가 있다. 법이란 모름지기 보호할 법익이 있을 때, 그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최소한으로 제정한다는 것은 기초 중의 기초 상식이다. 그런데 옆집의 아이가 미리, 많이, 그것도 너―무 많이 공부해서 내 아이의 공부가 떨어졌다고? 내 아이의 등수가 떨어졌다고? 옆집의 아이가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내 아이가 장차 대학을 가는 데 방해가 되니까, 손해를 보았으니, 지금 당장 공부를 못하게 하여, 내 아이와 똑같은 수준으로 학습 능력을 낮추어 달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내 아이보다 남의 아이가 뛰어나게 잘하는 것만을 문제 삼아서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또 무슨 논리인가? 내 아이보다 뒤떨어지는 아이는 왜 문제 삼지 않는 것인가?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평등해야만 한다. 그 법이 보호하는 평등이란 과연 무엇일까? 학습 지진아나 꼴찌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을 고안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아이를 끌어내리고 공부를 못하게 막도록 하자는 것이 제대로 된 정책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책에 푹 빠져 살았던 중학교 시절의 나는 아동용, 성인용을 가리지 않고 눈에 뜨이는 모든 책을 닥치는 대로 독파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자주 본 책도 적지 않다. 그중에는 주부를 위한 가정백과전집도 있었다. 그 책에는 서양 요리를 만드는 법과 먹는 방법, 꽃꽂이하는 법을 비롯하여 온갖 살림 잘하는 법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나는 이미 선행학습을 톡톡히 한 셈인가? 그리고 이제야 고백하지만 ‘19금’ 내용이 틀림없는 소설까지도 그 시절에 읽었다.
언젠가 인도 여행 중이었다. 남인도 힌두 사원 벽에 조각된 마이투나(성교) 상을 열심히 모사하던 초등학교 아이들을 본 적 있다. 사원 근처에 있다는 학교의 아이들은 소풍 겸 미술 실습을 나왔다고 했다. 그것을 보고 인도 아이들은 생생한 성교육을 3D 입체 조각으로 하는 셈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기묘한 성교 체위를 사원 벽에 번연히 드러내어 놓는 인도인의 관념은 이방인에게 언제나 낯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도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 상상력이 발달하기 전부터 자연스레 접하고 그리고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그것도 자연스럽게 신들의 놀이려니 생각하거나 인간 삶의 놀이로 여길 터이다.
평생교육이라는 말이 쓰인 지 이미 오래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의 학습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놀이 단계, 개념 단계, 논리 단계가 그것이다. 간혹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어서 쓰는 글에도 논리가 없다는 평을 받는 이유는 대체로 개념 단계 학습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개념 단계를 제대로 거치고자 하면, 개념을 잘 아는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할 것이다. 소위 개념 있는 스승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쓴 것은 모두 유희에 그치거나 놀이 단계에 불과하다. 그저 개인만의 지적 유희에 그치는 것이다. 그런 말과 글에 아무런 반향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이리라.
개념은 일반 모두가 공유하며 상통하는 것이다. 엄마라고 부르면 엄마가 답한다. 누구나 엄마를 엄마로 알고 있는데, 누군가 엄마를 이모라고 잘못 사용하면서도 응답하지 않는다고 투정해 봐야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동사는 동사로, 명사는 명사로 써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명사를 동사처럼, 동사를 명사처럼 구사한다면 의미 전달이라는 말의 목적을 온전히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불교가 너무 만만한가? 날이 갈수록 분명히 불교라 할 수 없는, 불교의 탈을 쓴 책과 글이 범람하고 있다. 소위 불교인이 쓴 글도 이상한 불교 이야기가 많다. 주어가 부처님이라고 모두 불교 이야기가 아니다. 붓다라고 하며 평서체로 썼다고 해서 참다운 불교가 아니고, 부처님이라고 하면서 공경체로 썼다고 불교다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불교학에는 선행학습이 중요하다. 무지무지 중요하다. 불교 이전에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어학도 첫손에 꼽히는 기초일 테지만, 인도의 역사와 문화, 철학과 종교 모두 필수이고 기초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불교만 공부하기에도 그 양이 너무 벅차서, 다른 공부에 눈 돌릴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선행학습 금지법에서 불교학은 단연코 예외 처분해야 한다. 도리어 선행학습이 필수이다. 필요해도 너―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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