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을 넘기니 앞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친구가 있었다. 머리가 난다는 발모제를 복용하고 검은 깨와 검은 콩 등 발모를 도와준다는 자연식을 상식해보기도 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 친구는 결국 마흔도 되기 전, 삼십 대 중반 전후에 앞머리가 전혀 없는 대머리가 되었다.
가족과 친구들은 그런 그를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무심하게 대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그가 늘 겪게 되는 사회생활은 그게 아니었다. 처음 만나는 그 친구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그 친구를 어른 대하듯 해서 자신의 나이를 밝혀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하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또 나이 드신 어른들이 자신을 동년배 취급해서 어쩔 수 없이 어른들과 어울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모두 본의 아니게 생긴 난처한 경우였다.
그 친구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가발을 쓰기로 하였는데 이게 또 문제였다. 아주 심하지는 않았지만 두피와 접촉면에 피부알레르기가 생겨서 가발을 오래 쓸 수 없었다. 밖에서는 가발을 쓰고 생활했고 집에 오자마자 가발을 벗고 생활하는 일이 일상사였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든지 출장을 간다든지 가발을 오래 써야 하는 경우는 알레르기를 완화해주는 항히스타민제를 사전에 복용해야만 했다.
그래도 가발은 그에게 사회생활에 힘을 주는 역할을 했다. 비록 자신의 진면목을 일시적으로 감추는 일이었지만 가발은 그에게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활력보조제로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특히 타인들과의 접촉이 많고 대외업무가 잦은 그가 영업 활동을 하면서 가발로 인해 입게 되는 혜택은 큰 위안이 되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별도의 가발을 가방에 갖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는 그러나 일단 집에 들어오면 가발을 쓰지 않았다. 피부알레르기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밖의 사회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또 회사 업무수행을 위해 부득이 가발을 써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자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가발을 착용하여 자신을 위장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심리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그와 가깝게 지내는 가족들과 친지와 친구들은 그런 그를 십분 이해했다.
가발을 착용하고 벗기와 쓰기를 반복하는 삶을 십여 년 가까이 살아온 그가 아마 사십 대 후반쯤이었던 것 같다. 시골에서 사시던 부친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부친상을 치르고 일주일 만에 귀가했을 때였다. 자신이 거주하던 아파트 슈퍼마켓에 일용품을 사러 갔다가 가끔 눈인사 정도 하는 이웃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그 이웃사람이 친구를 보고 “요즘 안 보이시더니 어디 다녀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기에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고 왔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이웃사람이 “아니 얼마 전까지 정정하게 다니시더니 그 어르신 너무 갑자기 돌아가셨군요. 노인분들은 내일을 알 수 없다더니 참 안 되셨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짓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웃사람과 헤어져 친구는 자기가 사는 곳에 거의 오시지 않았던 아버지를 그 이웃사람이 잘 알 수 없을 텐데 이상하다고 여기면서 곰곰 궁리해보니 이웃사람이 생각하는 자신의 아버지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 이웃사람은 친구가 가발을 썼을 때와 벗었을 때 보았던 친구를 아들과 아버지로 인식했던 듯싶었으리라. 외출할 경우 가발을 쓰고 다니지만 어쩌다가 가발을 착용하지 못한 경우 그 이웃사람은 가발을 쓰지 않은 친구를 얼굴이 닮은 친구의 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친구가 가발을 벗으면 “어이 아저씨!” 하고 놀림을 받았으니 그 자체는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웃사람이 돌아가셨다고 인식하고 있는 아버지는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그 친구는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그 이웃사람의 인식 속에서 가발을 쓰지 않은 자기는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 이미 죽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 
타인으로부터 또 다른 자기 자신의 죽음을 확인받은 그날 이후 자기 정체성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더라고 했다. 그러한 생각을 반복하던 친구가 진정한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골몰했을 것이라는 내 나름의 추측을 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에게 과연 삶과 죽음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화두로 작용했을 것이다. 가발로 자신의 머리 없는 머리를 임시로 감추었지만 그 때문에 또 다른 자신의 죽음이라는 인식 앞에서 자신의 본래진면목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일깨우고 있으니 불가에서 전해주는 기막힌 인연이 닿았다고 해야겠다.
이후 몇 년이 지나 친구는 가발을 쓰지 않았다. 그가 왜 가발을 벗게 되었는지를 나름 추측하며 그 친구의 입장에서 생각을 대변해보는 것도 나로서는 잠시 시비의 근원을 밝혀 보는 일이 되기도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파급되면서 자연스럽게 석가세존이 말씀하신 《금강경》 사구게의 가르침인 “제상비상 약견여래(諸相非相 若見如來)”가 떠오른다.
모든 상은 현상으로 보면 그 실상을 알 수가 없다. 겉모습에 집착한다면 본래의 모습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대상에 집착하면 본 성품을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림자나 허상을 보지 말고 본 모습인 참 나를 보라는 의미로도 읽히기도 한다. 참나를 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지 말고 현상과 함께 현상 이전의 실상을 보아야 한다. 최소한 그런 노력만이라도 하는 것이 깨우침의 길로 가는 기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본체의 입장에서 보면 허상 아닌 것이 없다. 현상의 입장에서 보면 친구가 가발을 쓴 모습은 분명 또 다른 친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발을 안 썼다고 해서 그것이 또한 친구 자신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깊게 탐구할 대상이다.
허상과 그림자가 판을 치는 세상이 지금의 현실세계다. 이런 세상에서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성찰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쩌면 좋은 인연으로 연결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친구의 머리가 숱이 많은 가발을 착용한 단정한 모습과 대머리를 한 형상으로 겹쳐지다가 밝게 빛나는 대머리로 고정된다. 그 친구의 대머리를 떠올리면서 한편으로 그 친구가 자신이 대머리가 되기 이전 본래의 참모습을 찾기 위한 여정에 지금쯤 돌입하고 있을 것이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상상을 해본다.
이러한 것은 또한 각자의 본래 모습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며 본인 자신도 모르는 각자의 화두가 존재하는 까닭이라고 여기고 싶다. 가발은 역시 또 다른 허상일 뿐이다. 친구의 가발을 통해 본체의 입장에서 보면 허상 아닌 것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우친 것만 해도 큰 소득임을 자각해본다.
지금 이 시간 제상비상의 진리에 입각하여 무엇보다 우선 자신에게 있는 허상을 지우려 한다. 아울러 이 글을 읽게 되는 여러분 각자에게 머물고 있는 허상과 그림자를 걷어내고 실상인 참나를 찾아가고 찾아내기를 적극 권유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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