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지구온난화 탓이다. 종로에 있는 낡은 상가건물 꼭대기 층에서 겨울을 맞이해야만 했던 나는 기록적인 한파와 폭설이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들으면서 내심 틀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기도가 무색하게도 늦가을부터 수은주가 영하로 곤두박질쳤고 그 겨울, 나는 얇은 벽 하나로 혹한의 추위를 견뎌야만 했다. 그래도 온열 패널이 깔려 있었고 작은 온풍기 하나가 더 있었으니, 체온 하나만으로 살을 에는 추위를 녹여야 하는 노숙자들에 비하면 내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출가 이십 년, 나는 템플리스(Templeless)가 되어 있었다.
소임을 그만두어야 했던 날, 당장 짐을 옮기라고 했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 대학 강의를 계속해야 했고 그동안 미뤄둔 번역과 논문도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에 서울을 떠날 수 없었다. 다행히 아는 비구니 스님이 쓰던 사무실 방이 비어 있다고 해서 종로에 있는 한 상가 건물로 급하게 짐을 옮겼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세상에 절이 남아도는데, 출가하여 자발적인 홈리스(Homeless)가 된 지 이십 년 만에 템플리스라니!
이사하던 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삿짐을 옮겨준 지인에게 상가 주인이 혀를 차며 걱정을 하더란다. 참 세상 물정 모르는 스님이라고.
맞는 말이다. 대중처소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세상 스님들 다 가지고 있는 토굴 하나 장만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종단 소임이란 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인데, 소임지에 트럭 두 대분의 책을 싣고 간 것은 또 무슨 눈치 없는 짓이란 말인가? 달리 짐 둘 곳 없는 나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지만, 박스 몇 개 달랑 들고 와서 언제든지 삼십 분이면 짐 싸서 떠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다른 소임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 거대한 짐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알고 보니 그들에게는 근사한 사설암자와 아파트 토굴이 있었다.
결국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그곳을 떠나는 날, 당장 필요한 몇 권의 책과 겨울 옷가지만 챙기고, 내 상황을 안타까워한 여러 보살님들과 거사님들이 짐을 싸고 나르고 옮겨준 덕분에 나머지 그 많은 책들을 지방에 있는 지인의 창고로 겨우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템플리스 생활이 시작되었다. 출가 후 박사과정과 미국 유학 시절 잠시 기숙사 생활을 한 것을 제외하면 절을 떠나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생활의 곤궁보다 절 밖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고 이상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중심, 종로 한복판의 템플리스 생활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창 너머 가을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삭막한 줄로만 알았던 서울 거리가 노란 은행잎으로 물들어가는 모습도 지켜보았고, 가끔 사람 만날 일이 있으면 가을 국화 축제가 한창인 조계사 앞마당을 사랑방처럼 이용하기도 했다.
십일월 하순이었다. 밤늦게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지금쯤이면 서리 맞아 시들어가는 노란 국화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일부러 조계사 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많던 국화는 어디로 가고 깔끔하게 치워진 빈 마당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 국화는 서리 맞은 황국(黃菊)이 진짜인데……”
하기야 시들어가는 꽃을 보자고 축제에 올 사람은 없지. 하지만 국화가 국화인 까닭은 온실에서 접붙여 기른 형형색색의 빛깔 때문도 아니고, 자르고 이어서 만든 분재의 인공적인 아름다움 때문도 아니며, 꽃송이로 만든 코끼리, 나비, 곰돌이의 ‘큐티’함은 더더욱 아니다. 아직 봉우리를 터뜨리지 않은 국화도 아름답고 활짝 꽃잎을 편 국화도 아름답지만, 군자의 꽃이라고 불리는 이 꽃의 진면목은 서리가 온 다음에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시들 듯 시들지 않는 저 처연하고도 고고한 자태야말로 이 꽃을 사랑한 옛 사람들이 오랫동안 아껴온 것이 아닌가!
학기가 끝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위가 심해졌을 즈음, 주변에서 내 처지를 딱하게 여긴 몇몇 교수님들의 주선으로 만해마을에 오게 되었다. 옮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실스님께서 직접 방으로 찾아오셔서 방은 따뜻한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물어봐 주셨다. 그날, 스님은 당신의 시집과 저서를 챙겨 주시면서 미국에 가셨던 이야기, 시집 이야기 등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다. 그러다가 문득 말씀하셨다.
“절에는 부처도 없고 진리도 없다. 스님들 숙소지. 안 그렇더냐?” “……”
촌철살인의 말씀이다. 가슴속이 시원해진다. 하지만 사실은 절은 스님들의 숙소도 아니다. 대중처소조차 더 이상 대중스님이 주인이 아니다. 수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중처소에 계셨던 사숙님이 대중처소에서는 밥을 풀 때 가장 먼저 대중스님 밥을 푸고 나중에 어른스님 밥을 푼다는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그 철저한 공동체 정신에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안타깝게도 불과 이십 년 사이에 그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내게 세상에 절이 많은데 어디서든 열심히 기도하면 되지 왜 갈 곳이 없다 하느냐고 말씀하신 스님도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어느 절이든 살지 못할까? 부전 소임 살면서 기도해도 좋고 선방에 가서 참선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처소마저 사사로운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는 지금, 과연 그곳에 부처가 있을까?
미국에서 귀국하기 직전, 그곳 사람들은 내가 한국에 돌아가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궁금해했다. 미국에 왔다 간 대부분의 아시아 스님들이 귀국해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고 하면서 나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물었다. 대학이든 종단이든 거의 가능성이 없다는 내 대답에 옆에서 듣고 있던 혜민 스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뭘 해요?” 그래서 대답했다. “불교계에서 내가 필요치 않다고 하면 그땐 선방 갈 거예요. 선방도 돈 없으면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땐 목숨 떼놓고 갈 거예요.”
이제야 세상 물정 알게 된 나도 어쩌면 제 토굴 만들겠다고 주접을 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뿐만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홈리스가 되기를 선택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특히 비구니 스님들이 템플리스가 되기를 강요받고 있다. 하긴 원효 스님도 템플리스였다. 진정으로 법을 구하는 자라면 차라리 천가(千家)에 밥을 빌어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 삼아 자발적인 템플리스의 길을 갈 것을! 세상 어딘들 절 아닌 곳 없으므로.
“시월 국화는 시월에 핀다더라.”
조계사 앞마당의 국화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에 써 있던 말이다. 하지만 서리 맞은 국화는 어디서 피는가? 서리 맞은 국화를 찾아서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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