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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계율 개정론 / 자현 스님
특집 | 불교와 계율 ― 수단으로서 율과 시대와 문화권에 따른 변화수용
[53호] 2013년 03월 21일 (목) 자현스님 kumarajiva@hanmail.net

1. 불교승단과 사회의 관계

동아시아의 중국문화권은 제정일치의 일원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은(殷)·상(商)나라 때의 군주에 대한 칭호인 제(帝)나, 주(周)나라 때의 칭호인 천자(天子)를 통해서 단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이러한 군주의 칭호는, 군주가 곧 은나라의 최고신인 제와 주나라의 최고신인 천(天)의 지상 대리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는 곧 제천의례를 직접 집행하는 제주(祭主)가 된다.
이는 동아시아의 이상인격론인 성군론(聖君論, 聖人君主論)을 통해서도 단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덕분에 중국에는 성인이 아닌 군주는 있어도, 군주가 아닌 성인은 존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중국문화권의 특질은, 이후 불교와 같은 종교가 군주권으로부터 독립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인도문화 같은 경우는 제정분리의 이원론적인 문화 배경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군주권과 유리된 종교 영역이 별도로 존재한다. 이는 종교 영역만의 제도 필연성을 대두한다. 물론 동아시아도 ‘청규(淸規)’와 같이 종교 규율이라는 특수한 영역이 있다. 그러나 이는 군주권 안에서 특수 영역이지 군주권에서 독립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붓다 당시 연쇄살인범인 앙굴리마라가 출가했을 때, 아사세 왕이 왕권을 출가교단으로까지 행사하지 않는 것은 양자의 분절성을 잘 나타내준다. 물론 붓다 역시 율의 제정에서 군주권에 해당하는 부분과 충돌하지 않으려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출가인의 불허와 관련된 차난(遮難)에 채무자나 관리가 있는 것 등을 통해 단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또 승단의 육식 대상에 말고기와 코끼리고기가 제외되는 것을 통해서도 인지해 볼 수 있다. 즉 인도문화의 제정분리적인 배경은, 세속법과 분리된 출가집단의 제도적인 원칙을 더 강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붓다 역시 율의 제정에서 이 부분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인격과 관련해서, 인도는 중국과 달리 성인과 군주의 계통을 다르게 구분한다. 만일 군주가 곧 성인이 될 수 있다면, 붓다의 출가는 의미 없는 사족인 동시에 붓다의 한계를 드러내는 측면만 될 것이다. 즉 군주와 성인, 내지 출가자의 경계가 분절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과 출가는 완전히 차단되어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상으로 나뉘지만, 현실이라는 같은 세상 속의 두 영역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사키 시즈카는 불교교단을 ‘섬(島)’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적절하다. 즉 양자는 섬처럼 분리되어 있지만 완전히 단절된 두 영역은 아닌 것이다.
실제로 후대에 이르면, 이러한 양자가 강력한 일원론적 진리관에 의해서 혼재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의 대표적인 경우가 반(反)출가주의를 제창한 대승불교이다. 또 불전(佛傳)과 관련해서도 붓다를 전륜성왕과 비견하는 모습이 살펴진다. 이는 붓다의 탄생과 관련해서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고, 녹야원의 첫 설법을 초전법륜이라고 하여 불상의 제작에서까지 손바닥에 차크라를 묘사하는 것, 그리고 붓다의 열반 시에 전륜성왕의 장례법에 의해서 화장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붓다의 일생을 전륜성왕에 비견하는 것으로, 붓다의 출가주의와는 다른 관점이 인입(引入)된 결과로 이해된다.
이러한 양상은 후대에 세속권력과 출가문화가 혼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를 통해서 역으로, 군주권에 의해 출가교단의 독립성 보장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음을 상정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도의 이원론적인 배경문화 속에서, 기본적으로 차안과 피안으로 대비되는 성과 속은 분절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또 붓다 당시에 이 부분은 상당히 잘 지켜지고 있었다는 것을, 율 조문과 제정 배경 등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2. 붓다의 율 정립과 제도로서 특징

불교승단은 수행공동체이기는 하지만, 자급자족하는 경제기반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사회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세속으로부터 완전독립은 불가능하다. 이는 붓다의 율 정신에 사회와의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 불교의 포교라는 대사회적인 계몽과 역할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이 된다.
승단과 사회와의 연결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탁발(걸식)이다. 인간의 생존과 관련해서 흔히 의식주가 거론된다. 그러나 인도의 무더운 기후 환경 탓에, 이 중 의(衣)와 주(住)에는 탄력적인 자율성을 부여한다. 덕분에 자이나교의 공의파(空衣派)나 두타행(頭陀行)의 재수하(在樹下), 재노지(在露地)나 아란야(阿蘭若) 등이 가능하게 된다. 불교승단은 나체를 용인하지 않지만, 승단의 입회 기준 시점에 행사의(行四依)를 가르쳐주게 되어 있다. 행사의란 ①착분소의(著糞掃衣) ②상행걸식(常行乞食) ③의수하좌(依樹下坐) ④용진부약(用陳腐藥)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는 승단에서 의와 주는 사회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할 개연성도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즉 의식주 중에서 식과 관련된 탁발이 사회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붓다는 원칙적으로는 승단 안에서 일반의 음식조리를 금지했다. 단 정지(淨地)에서 죽 조리와 탁발해 온 음식을 데우는 정도는 용인된다. 죽은 오전에 먹기 때문에 탁발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목발우가 금지되는 이유에는 발우가 곧 음식을 데치는 데 사용되는 솥의 기능을 겸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근과 같이 탁발이 용이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자체적인 조리도 용인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는 상시의 원칙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탁발에 의존하는 승가는 필연적으로 세속과 분리될 수 없는데, 붓다는 이를 승가의 사회성으로 판단한 것 같다. 이는 승려가 탁발 후에 음식물을 제공한 시주자에게 축원이나 법문을 해 줄 수 있도록 한 것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또 탁발은 그 호응도에 따라, 붓다 당시의 다종교적인 환경에서 불교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가늠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탁발이 불교의 대사회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역으로 사회적인 영향이 승단에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즉 승단은 사회적 가치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특히 다종교가 경쟁하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이는 우위를 점하기 위한 필연성을 가진다.
실제로 붓다는 탁발 시에는 승가리(僧伽梨)인 대의(大衣)를 착용하도록 해서, 보다 위의를 갖출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승가갈마(僧伽羯磨) 등의 승단 행사에 울다라승(鬱多羅僧)을 착용했다는 점에서, 당시 승단이 사회적 관점을 의식한 기준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공양이나 의복의 착용 방식 등에서도, 거사의 비판이라는 사회성이 작용하는 것을 통해서 보다 분명해진다.
또 사회적인 부분과 충돌하지 않는 부분인 승단 행사와 관련된 안거나 포살 역시, 타 종교와 대비에 의한 빔비사라 왕의 권유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율의 제정과 관련해서 강력한 사회와의 긴장감을 읽어볼 수가 있다.
율은 세속법에 상응하는 승단의 규율인 종교법이다. 그러나 승단은 사회와 유리되었지만 단절된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사회의 요구와 변화에 호응하는 유기적 관계를 갖추고 있다. 실제로 세속법 역시 사회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능동적인 유기체의 양상을 보일 때,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다. 항차 수행이 목적인 승려들에게 제도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다.
율이라는 제도는 승단 내적으로는 서로 간의 수행 완성을 위한 편리, 그리고 외적으로는 대사회적인 불교승가의 위상을 고려하여 제정된 한시적인 규범일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붓다는 모든 것의 변화원리를 주장하신 분인데, 승단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 ‘제도(율)’는 당연히 대중의 요구와 사회의 변화를 따라서 개변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율장에는 율 제정 이후에도 〈피혁건도(皮革健度)〉에서처럼, 승단의 특수성에 따른 필요가 있으면 붓다는 이를 수용하는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사회적인 요구와 관련해서도 마늘의 금지는 일군의 비구니들의 탐욕에 대한 사회 여론의 비난에서 기인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율은 금과옥조와 같은 항상성을 가져서는 안 되고 시대를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력을 확보하게 하는 것이, 붓다의 본의에 부합된다고 하겠다.


3. 1·2차 결집에서 확인되는 율 관념의 충돌

법은 본질은 아니지만 본질에 비해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또 제도는 구성원을 위해서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이지만, 일단 만들어진 이후에는 구성원을 규제하는 성격을 가진다. 여기에 더하여 법과 제도에는 구성원의 이익과 직결될 수 있는 성질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 타당하지만, 쉽게 변화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진다. 법가(法家)의 상앙(商鞅)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상군서(商君書)》에서 “백배의 이익이 없으면 법을 바꾸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율 역시 종교법이자 제도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시대를 따라서 바뀌어야 타당하지만 바뀌지 않으려는 속성을 내포한다. 여기에 종교법은 그것을 만든 교조의 권위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더욱더 함부로 개변하는 것이 어렵다. 율 역시 붓다라는 교조에 의해서 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교황제와 같은 교단의 최고 수장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이의 개변은 교조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난해성이 존재한다.
실제로 1·2차 결집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양상을 단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1차 결집 시에 발생한 아난과 마하가섭 사이의 소소계(小小戒(律)) 폐지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 율의 개변과 묵수(墨守)의 대립으로 인지될 수 있다. 그런데 붓다의 의지를 빌려 율의 유연성을 주장한 아난은, 기준의 명확성 문제가 우선이라는 마하가섭에 의해 차단되고 만다. 제도에서 ‘시대적 변화의 수용이냐’ ‘명확한 기준의 문제냐’는 오늘날까지도 동시에 풀 수 없는 딜레마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모든 제도는 시대를 반영해서 만들어지지만, 이는 시행되는 동시에 시대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마치 신제품은 출시와 더불어, 더 이상 신제품이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율의 개변과 묵수의 대립은, 1차 결집을 주도한 마하가섭의 주장으로 관철된다. 그러나 이후 아난이 불교교단의 최고 수장이 된 이후에도 크게 변화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기준의 문제를 제시한 마하가섭의 주장 역시 높은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차 결집과 관련해서 율의 개변과 묵수의 문제는 또다시 재점화된다. 이때 논점이 된 것은 주지하다시피 야사(耶舍)의 십사(十事)가 ‘정법(正法)이냐, 비법(非法)이냐’의 문제이다. 이는 붓다의 열반 이후 변화된 시대상과 불교교단의 능동적 변화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여기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소금’과 ‘화폐의 소지[金銀淨]’ 문제였다. 그러나 당시에 소금도 화폐의 속성을 내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핵심은 새롭게 대두된 화폐경제의 수용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장로들의 판단에 의해 십사가 비법으로 판정되면서, 다수의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의 반발에 의해 승단이 분열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다. 즉 불교의 근본분열에는 율의 개변과 묵수 간의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파승가(破僧伽)는 불교에서 가장 우려할 만한 일로서 초율적(超律的)인 5역죄(五逆罪)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율의 개변과 묵수의 대립이 파승가를 초래하는 동인이 되고 있다. 이는 율의 개변과 묵수가 불교사 전체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2차 결집에서도 1차적으로 장로들에 의해 율의 묵수 주장이 관철되었다는 점에서, 불교의 본토인 인도에서도 율의 개변은 굉장한 문제이며, 묵수 주장이 정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교가 보다 종교적이며 제도화된 상황에서는, 율의 개변이 더욱더 어렵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도불교 같은 경우는, 율이 승단의 실천원리이자 구성원의 행위규범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시대변화에 따른 부분을 완전히 좌시할 수는 없었다. 이의 해결을 인도불교는 율의 이해에 따른 부분수정과 보충이라는 관점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실제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남·북전 6부 율장은 각 부파의 문화배경적 차이에 따른 율의 이해 차이와 변화 양상을 잘 나타내준다. 그러나 이후 불교가 인도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중국문화권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율은 이와 같은 부분 보완으로는 넘을 수 없는 문화장벽에 봉착하게 된다.


4. 동아시아 문화에서 율에 대한 이해

대승불교는 깨달음의 본체론적 관점에 입각한 재가주의를 수용한다. 이렇게 될 경우 세속과 출가의 이분법적 분기가 모호해지게 된다. 이 문제는 《밀린다왕문경》에서 재가인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문제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즉 깨달음이라는 보편성에 입각하게 되면, 인도문화의 이분법적 측면은 필연적으로 문제점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특질을 대승경전에서 두드러지는 재가인의 깨달음과 재가보살의 존재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원론적인 배경이 존재하는 인도문화에서 이는 배경문화에 따른 저항을 받게 되고, 결국 대승경전은 중국문화권과 같은 일원론 구조 속에서 화려하게 만개한다. 즉 대승논서와 달리 대승경전이 인도문화권에서 강세를 보이지 못했던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작용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화권을 달리하는 동아시아로 넘어오면, 이는 역으로 정반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인도불교에서 강세를 보이던 부파 문헌과 대승 논서보다도, 오히려 대승경전 중심의 연구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모종삼(牟宗三)은 이는 ‘인도의 논서 중심적인 구조’와 ‘중국의 경전 중심 구조’라는 상호대비로 이해하지만, 그 배경에는 문화배경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겠다.
이원론적인 인도문화권에서, 출가집단의 규칙인 율은 재가인적인 계와 구분되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율은 계라는 보다 폭넓은 보편범주 속에 배속되는 특수성인 동시에, 계와 일치하는 가치로 변모된다. 이는 중국철학의 심성론에서 심(心)과 성(性)이 분리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동시에, 동일한 ‘즉(卽)’의 관점에서도 파악되는 것과 유사하다. 성리학에서 성(性)은 심(心) 속에 존재하는 핵심이다. 그러나 선종이나 양명학에서 심과 성은 표현을 달리하는 동일가치에 대한 지시 방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계와 율은, 바로 이러한 이이일적(二而一的) 구조를 가진다. 그로 인하여 비구 250율은 250계로, 지율제일 우바리는 지계제일 우바리가 된다. 덕분에 동아시아의 율과 관련된 언급에서는 ‘계율’이라는 말이나 ‘율(律)’의 표현이 ‘계(戒)’로 변화되어 개념어가 불분명해져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대승불교의 깨달음에 입각한 본체론 강조와 동아시아의 일원론적인 배경문화는, 인도승단의 율 중심을 계 중심으로 전환한다. 여기에는 문화권의 차이로 인하여 인도승단과 같은 율의 엄격함이 존재할 수 없었던 측면도 한 작용을 한다. 즉 율의 엄격성만을 강조할 경우, 동아시아승단은 전체가 율에 저촉되어 청정한 승단이 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3의1발(三衣一鉢)의 인도문화나, 탁발과 같은 측면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승단은 율이라는 형식적이고 엄격한 규정보다는, 계라는 내용적이고 유연한 가치를 선택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로도 문화권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결과 계율은 동아시아 승단과 점차 유리되면서 형해화된다. 문화권적 차이로 인한 실생활의 유리가 커짐으로 인하여, 개변의 요구보다는 계율의 상징화가 작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체수단으로서 청규(淸規)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계율 자체를 변화하기 힘든 구조에서 새로운 제도를 제창한 것이다. 덕분에 출가는 250계와 같은 계율로 하고, 승원의 삶은 청규로 하는 이중 양태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청규는 동아시아의 일원론적 문화배경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세속법의 영역 밖에 존재할 수 없다. 또 붓다의 권위를 입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동아시아 승단 전체를 규정하는 원칙도 아니다. 그러므로 청규는 특정한 현전승가에만 제한되는 제도로 그친다. 이는 계율과 청규의 가장 큰 차이점인 동시에, 청규가 계율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5. 계율에 대한 극단적 판단

동아시아 승단은 문화권적 차이로 계율을 실생활에 준수할 수 없다. 덕분에 계율은 승단의 보편준칙이 되지 못한다. 이는 계율이 승단의 실생활과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자, 계율의 준수 자체가 목적인 양태가 나타나게 된다. 즉 ‘동아시아 율사’의 등장이다. 율이란 인도승단의 보편준칙이라는 점에서 모든 소속원이 지키는 보편적인 가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율사란 율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율을 가르치고 판단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우바리와 같은 지율자(持律者)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율자들에게도 율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마치 법관에게 법은 직업 대상일 뿐으로, 행복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과 같다. 그런데 동아시아 승단에서 율은 지킬 수 없는 측면이라는 점에서, 이를 목적화하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하여 율사는, 계율을 지킨다는 점 때문에 호법신의 보호나 신비한 양태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중국의 도선이나 우리나라의 자장 및 진표 등의 기록을 통해서 쉽게 인식해 볼 수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율사들에게서는 서상수계(瑞祥受戒)와 같은 특징도 살펴볼 수 있다. 율이 승단의 제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서상수계와 같은 개념은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이 가능하고 이것이 한국불교 율맥(律脈)의 주류라는 점에서, 동아시아불교의 율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계율은 승단의 제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결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제도는 당연히 소속원 전체가 지키는 준칙이 되어야 하지, 율사와 같이 특별한 사람만 지키는 구조가 되어서도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불교의 율 전통이 전지하고 있는 율 관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동아시아불교에는 이러한 계율의 묵수적인 측면과는 대척점을 형성하는 계율에 대한 상이한 이해도 있어 주목된다. 선종과 같은 본체적인 일원론에 입각한 계율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깨달음이라는 전체 완성의 관점에서 볼 때, 계율은 사족과 같은 군더더기이자 허공을 재단하려는 것과 같은 답답함일 뿐이라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한국불교에서 이와 같은 인식은 원효나 경허와 같은 이들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윤창화의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은 바로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논리적 층차가 다른 부분을 동일한 선상에서 판단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자체적인 문제점을 내포한다. 그렇지만 깨달음은 인식주관적인 것인데, 이를 현실적인 부분에까지 일반화시키려는 경허의 행동양식 역시 불교 안에서 비판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경허는 깨달음이라는 주관에 매몰되어 객관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컨대, 경허의 일화 중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것으로, ‘길을 걷기 힘들어 하는 만공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는 아낙에게 강제로 입맞춤을 했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범죄가 성립되는 행위이다. 그런데 당시의 관점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여성은 마을에서 부정한 여성으로 집단 따돌림이나 구타를 당했을 수 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이혼이나 목을 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허의 행동은 깨달음도 그 무엇도 아닌 불특정인에 대한 폭력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경허가 일련의 비율적인 행동을 하고도, 한국불교의 다수에게서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이러한 비율적 행위가, 교조인 붓다와는 행위에서 철저한 대척점을 이룬다는 점에서 본다면, 분명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필자는 이것이 동아시아 문화권에 존재하는 일원론과 깨달음의 절대화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즉 교조의 준칙보다도 문화권적인 이해를 통한 집단인식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측면은 광덕(廣德), 엄장(嚴莊)과 부설거사(浮雪居士)와 같은 예나 중국의 방거사(龐居士)나 이통현장자(李通玄長子) 등에서도 살필 수 있다. 인도불교에서 유마거사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면, 동아시아에서는 훨씬 더 폭넓은 외연과 관대한 인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변화에 바로 문화권적인 특징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깨달음이라는 본체론적인 관점에서 현상적인 계율을 부정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는 승가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지만, 동시에 세속적인 사회와 단절된 집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늘날과 같이 다종교가 경쟁하는 사회현실 속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아시아 율 전통에는 율사들에 의한 율의 묵수와 이를 통한 신통의 양상이 살펴진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율에 대한 ‘신성화’와 ‘사족화’라는 두 가지 전통이 동아시아와 한국불교에 존재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계율은 승가의 제도라는 점에서 신성화될 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된다. 그와 동시에 계율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깨달은 사람의 활달한 경계라는 인식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제도란 사회법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반 서민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공통되는 통규여야 한다. 거기에는 절대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되며, 또 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신비한 힘이 발생할 수도 없다. 그런데 동아시아는 계율과 관련해서 이러한 두 가지의 모순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양자는 무엇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잘못된 가치로 공히 지양되어야 할 인식이라고 하겠다.


6. 종헌종법과 시대정신

동아시아불교에서 계율에 대한 상반된 인식이 존재하는 것은, 문화권적 차이로 인해서 계율이 실천적인 현실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이를 신비화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거추장스럽게 여겨 무력화했다고 하겠다.
현대 한국불교에서도 계율은 과거 동아시아불교의 인식에서처럼 다분히 형해화된 상징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미·사미니계와 비구계·비구니계를 받지만, 계율을 받을 때부터 지키기 힘들다는 것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모두 공감하는 지경에 있다. 대표적인 예로 사미십계의 불비시식(不非時食)을 꼽을 수 있다. 불비시식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은 계율을 받는 과정인 수계산림(受戒山林) 기간에는 지키다가 계율을 받는 날부터 역으로 무력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계율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 모두 용인하고 있다. 이는 계율이 얼마나 형식적인가를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과거와 다른 점은 종단구조로 되어 있고, 이 중 현실적인 부분은 율보다도 종헌종법이 지배하는 것이다. 즉 계율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일종의 관습법과 같은 의미를 가지며, 종헌종법이 실정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종헌종법은 과거 동아시아의 청규처럼 특정한 현전승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종단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점에서 인도불교의 율을 대체하는 것은 오늘날 종헌종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제도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여러 종류의 제도가 존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종헌종법과 계율이 어떤 방식으로든 단일화되고, 청규는 사라지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조직 속에 하나의 단일원칙만 존재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가치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대적인 종헌종법과 전통적인 계율을 일원화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이 두 가지는 각각의 타당성을 가진다. 종헌종법은 현대사회의 시대정신을 담보하고 존재하는 가치이다. 이에 반해서 계율은 붓다의 제도적인 관점을 전지한다. 특히 종교 같은 경우는 교조의 권위가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계율을 의미론적으로 재해석해서 종헌종법 안으로 끌어들인다고 해도 계율의 권위를 부여할 수는 없다.
제도는 사회성을 반영해서 탄력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맞다. 또한 붓다 역시 이와 같은 관점을 취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하가섭이 제기한 주장처럼, 그것에 변화를 주었을 때 붓다와 같은 승인 기준점이 붓다 열반 이후의 불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교단의 대표자를 세우지 않은 불교에 있어서는 필연적인 딜레마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의 열반 이후 불교는, 이 문제로부터 단 한 번도 온전한 해법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불교가 세계화되어 문화권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고, 현대와 같이 변화가 빠른 세상에서 더욱 강력하게 부각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은, 계율과 종헌종법 양자의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끌고 가는 것이다. 조선의 법전으로 《경국대전》이 있고, 대한민국에는 헌법이 있다. 양자는 분절된 가치이지만, 국토와 국민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완전히 유리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불교 역시 계율은 교조의 권위로 묶어서 상징성만으로 제한하고, 계율을 근간으로 하여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새로운 종헌종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마치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지만 이는 상징적인 정신으로 그치고, 현실적인 의술은 현대적인 연구가 활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종헌종법의 〈승려법〉 속에 의·식·주를 기반으로 하는 계율의 수립정신이 반영된 실천규범이 새롭게 정리되어야 한다. 이는 최고의 전문가들의 철저한 연구를 거쳐, 종단의 비준을 받아 실행원리로 작용해야 한다. 이럴 경우에만 한국불교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제도상의 혼란을 막고, 단일한 기준의 통일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7. 계율과 전통, 그리고 현대

계율의 현대적 재해석의 문제에는 ‘계율에 내포하는 교조의 존엄성’과 ‘현대라는 변화한 현실’의 문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전통’이다. 한국불교는 1,60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동아시아불교의 역사는 이보다도 더 긴 2,000년이나 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동아시아와 한국문화의 변화에 따른 전통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는 의·식·주에서 인도 율장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없다. 의·식·주 중 주는 원형과 완전히 달라졌다. 덕분에 붓다가 승원의 위치로 말씀하신, ‘마을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이라는 개념은, 현대인들에게는 역으로 사찰이 위치할 장소가 아니라는 인식을 준다. 의와 같은 경우도 가사만 수(垂)하는 경우는 존재할 수 없으며, 식문화 역시 손으로 먹거나 탁발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선행문화와의 습합에 의해서 이루어진 장기간에 걸친 변화며, 이 또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전통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한국불교 대표종단인 조계종의 경우, 탁발금지조항과 법계(法階)에 따른 가사의 차등 착용처럼 식과 의 조항에서 율장과는 다른 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전통에 입각한 변화이다.
동아시아에서 탁발은 인도의 걸식과는 다른 곡식이나 금전 요구로 변화하고, 그 인식도 수행자의 여법한 행위가 아니라 비속한 습속으로 규정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변화로 인하여 현대의 조계종에 와서 탁발이 금지되는 규정이 정해지기에 이른다. 단 법계에 따른 가사의 차등 역시 동아시아불교의 전통에 입각한 측면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재정립한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는 계율의 현대적 조율과 새로운 정립이 단순히 율장과 현대의 시대적 요구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율원에서는 목발우를 금지하고 와발우가 타당하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식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한국불교에서 목발우가 사용되는 전통이 생겼다는 점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목발우가 와발우로 교체된다고 하더라도, 한국불교는 인도와 같이 유약처리 하지 않은 와발우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며, 또 1개의 발우만 쓰거나 탁발을 하여 손으로 먹지도 않는다. 이럴 경우 율장에 맞게 되는 것은 어설픈 질료의 변화 1가지일 뿐이다. 나머지는 그대로 전통을 답습하고 있다. 이는 율장에 대한 이해에서 전통에 대한 검토가 빠졌을 때 범할 수 있는 오류를 잘 나타내준다.
또 조계종은 복제와 관련해서 사미의제(沙彌衣制)나 종단가사 제작과 같은 부분도 단행한다. 이는 철저히 현대적 필연성에 의해 대두된 측면의 반영이다. 사미와 비구의 차등은 붓다 당시에도 있었지만, 차등의 원칙과 기준은 지금과는 달랐다. 또 종단가사와 같은 경우는 같은 불교 안에서 종단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사미의제와는 배경이 또 다르다. 그러나 이 역시 인도불교에서부터 부파마다 가사 색을 달리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또한 전혀 배경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계율의 현대에 맞는 적합한 변화를 논할 때, 율장과 현대의 문제만이 아닌 전통의 문제로부터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연구와 위치 비정 역시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다.


8. 제도의 생명력과 율장

모든 제도는 시대변화를 수용하면서 생명력을 유지한다. 또 제도는 그 제도를 만드는 조직의 목적에 복무해야 한다. 붓다 역시 이에 대해서 분명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이는 붓다의 율 제정 기준인 수범수제(隨犯隨制)와 제계십리(制戒十利)를 통해서 단적인 확인이 가능하다.
붓다는 불교승단을 만들기 이전에 다른 수행단체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또 그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면 왕궁 교육에서 통치술을 학습하였다. 이는 붓다가 율을 제정함에 있어서 전체적인 틀을 일거에 갖출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도 일반적으로 단체의 회칙이나 규약을 제정할 때, 전체적인 틀을 만든 뒤 추후에 문제점의 개정을 통해서 수정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율 전체를 수범수제라는 현실적인 문제점에서 구하고 있다. 이는 붓다가 율 제정에서 현실수용을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루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 붓다의 율 제정 목적인 제계십리를 통해서, 우리는 율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제계십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율의 제정 목적은, 승단의 안정 및 번영과 승단구성원 간의 마찰 최소화와 수행자의 이상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붓다의 율 제정 원칙은, 현대의 우리로 하여금 불교승단의 번영을 배경으로 하는 계율의 개변과 탄력적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현대불교는 대승비불설의 문제를 겪으면서 ‘말 중심이냐, 뜻 중심이냐’의 논란을 겪은 적이 있다. 이는 계율 문제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남방불교는 붓다가 담배를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방불교는 붓다가 수행자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담배를 금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러한 충돌은 대승불교에서 육식을 금지하는 과정에서도 살필 수 있다.
대승불교의 특질이 본래부터 붓다의 뜻 중심에 있다는 점은, 계율의 개변 및 탄력적 운영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로 대승불교에서는 율보다는 계 중심이었고, 이의 타당성을 변증하기 위해서 율장에 상응하는 계경(戒經)을 만들기도 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포함하는 전체불교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대승의 관점만을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본류는 대승이며, 이것이 동아시아와 한국불교의 전통이라는 데에도 역시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율의 개변 가능성은 충분히 반영되어야 하며, 이는 붓다의 율 제정 관점과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늘날 율장을 개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앞서 주장한 바와 같이 율장의 상징성을 확보하고, 율장과 동아시아 및 한국불교의 전통이 계승된 현대적인 ‘승려법’의 제·개정이 요청된다. 이렇게 되어야만 승단의 실질적인 규범이 정비되는 동시에, 율장 역시 권위와 더불어 가장 타당한 이 시대의 생명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

자현스님 / 조계종 교수아사리. 동국대학교 철학과, 불교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석사.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박사학위 취득, 고려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주요 저서로 《불교미술사상사론》 《사찰의 상징세계 상·하》 등과 70여 편의 논문이 있음. 현재 동국대학교 강의전담 교수, 월정사 교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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