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계율

1. 들어가는 말

중국의 역사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를 수용한 이후부터 여러 측면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대립하기도 하고 공생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더 발전시키고 계승시켰으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크게 다른 문화와 사상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전승된 직후에는 인도불교의 문화와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연구하는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전래된 이후 500여 년 이후부터는 인도불교의 수용 내지 답습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문화와 사상에 부합되는 중국적인 불교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이것을 인도불교의 극복 혹은 중국적인 불교의 창조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모습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수용되면서 우선 경전의 번역 문제가 급선무였다. 중국불교에서 경전의 한역 문제는 천 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불교의 다양한 문화와 특성과 전개에 영향을 끼쳤다. 경전 번역이 시작되자 한역된 경전을 바탕으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대단히 이질적인 문화의 수용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소위 중국적인 불교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불교의 특징으로 평가되는 교상판석과 그에 따른 종파의 출현 및 국가불교 등의 성격은 불교라는 종교적인 범주를 넘어서 중국에 외래문화의 토착화를 구축하였다. 이 글에서는 불교 승가공동체에서 삶의 질서를 부여해주었던 계율이 중국불교에서 어떤 모습으로 수용되고 전개되었으며 변용되었는지 선종의 청규와 관련시켜 보기로 한다.

2. 계와 율

계율이라는 용어는 중국불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가령 범어에서 계(戒)는 ṡila이고, 율(律)은 vinaya인데 계율에 해당하는 ṡila-vinaya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계는 자발적인 측면이 강하여 스스로 악을 멀리하여 선을 닦는다는 것에 가깝고, 율은 타율적인 성격이 강하여 위반했을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벌칙이 부여된다. 그럼에도 중국불교에서 합성에 해당하는 계율은 보편적인 용어로서 널리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계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적용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비교적 모든 때와 장소와 상황에서 준수할 것이 요구되어 신업과 구업과 의업의 행위까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곧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는 내면의 마음이 중시된다. 이에 비하여 율은 현실적인 질서의 유지에 중점을 둔 것으로 승가공동체가 원만하게 유지되고 불법이 여법하게 실천되는 원리에 그 가치를 두기도 한다. 때문에 주로 구업과 신업이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개인 간에 또는 승가 내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 해결 방책이 되기도 하고, 승가공동체의 경제적인 안정을 꾀하기도 하는 등 교단의 운영 방법과 생활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해 놓은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질서를 유지하고자 강제적인 조항이 수반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점에서 곧 계가 적극적인 작선을 겨냥한 것이라면 율은 소극적인 지악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계와 율을 비교하자면 계는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반면 율은 시대와 장소와 특별한 경우에 따라서 적절하게 달라질 수 있는 요건을 구비하고 있다. 때문에 율의 조항은 수범수제(隨犯隨制)에 해당하여 상황에 따라서 변화를 보여왔다. 그것이 인도에서는 교단의 중대한 사건으로 표면화되기도 하였다. 인도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상황을 지니고 있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고 전승되면서 소위 중국적인 율의 탄생이 필연적이었다.

중국불교를 불교의 시대에 비추어보면 대승불교의 발생 이후에 해당하기 때문에 대승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가령 계의 경우에 대승계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은 작선심지계(作善心地戒)에 가깝다. 하지만 율은 소승계의 지악방비계(止惡防非戒)와 가깝다고 할 수 있어서 대승불교 시대에는 율이라는 것이 제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율은 마음의 내면까지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대승불교의 경우 율을 따로 제정하지 않고 오히려 《보살선계경》 《우바새계경》 및 《범망경》 등의 경우처럼 경전의 형식을 갖춘 갖가지 계를 만들어 대응하였다. 이것이 중국불교에 전래되어 승가공동체의 운영지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면서도 중국불교에서 가장 특징적인 선종이라는 승가공동체에서는 인도불교의 보편적인 질서와는 달리 특수하고 제한적인 어떤 질서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것은 종파화된 불교가 지니고 있는 생태적인 필연성이기도 하였다. 이에 중국불교 특히 선종에서는 교단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던 수 및 당 초기에 기존의 율과는 성격이 다른 청규(淸規)라는 규범이 출현되었다. 중국 선종은 6세기에 중국에 도래한 보리달마로부터 그 시초를 간주한다. 그 까닭은 선종의 경우 모두 보리달마의 후손들에 의하여 형성되고 발전되며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리달마 이전에 이미 중국의 불교는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중국불교와 계율은 어떤 관계의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3. 율장의 중국 전래와 천태의 규범

일반적으로 중국불교의 공인은 후한의 명제시대에 해당하는 67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의 불교는 경전의 번역시대를 맞이하여 수많은 도래승과 여타 중국승의 협력을 통한 경전의 전래와 번역, 연구와 정리 등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전혀 생소한 문화였던 까닭에 불교와 그 전적에 대하여 분별없이 인연이 닿는 대로 수용되었기 때문에 경장과 율장 논장 기타에 대한 안목도 없었다. 그러나 2~300년이 지난 후에는 경전의 분류와 교리에 대한 안목이 형성되면서 필요한 경전을 수집하고 연구했으며, 아직 전래되지 않은 경우는 직접 경전을 구하기 위하여 인도까지 구법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전래된 경전을 통하여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경전의 유통과 갈래 그리고 경전의 목록을 작성한 사람은 도안(道安, 312∼385)이었다. 도안은 중국불교의 실질적인 개척자였다. 격의불교를 배척하였고, 출가승려들의 경우 석(釋)씨를 성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또한 출가승의 경우 계율에 따른 법의를 규정하였고, 당시에 전래되고 번역된 경전의 목록을 만들기도 했다.

1) 율장의 전래
불교에서 진정한 불자가 되는 길은 우선 계를 수지하는 것이다. 때문에 계는 일찍부터 계학·정학·혜학의 무루삼학 가운데 하나로 중시되어 모든 불교 활동, 특히 수행의 필수적인 가르침으로 전해져 왔다. 따라서 계를 받으면 그 자체로서 무한한 공덕이 형성되고, 계를 수지하는 계체(戒體)가 형성된다. 이와 같은 수계와 그로 인한 계체는 계율로서 불교의 전래와 동시에 불법의 실천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 계체가 형성되고 실현되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 삼장 가운데 율장이다. 그러면 중국불교에 계와 율을 아우르는 개념으로서 통칭 율장은 어떻게 수용되었고 전승된 것인가.

율장이 중국에 전래된 최초의 기록은 위나라 가평 연간(249~254)에 중천축의 담가가라(曇柯迦羅)가 낙양에 들어와서 지금은 현전하지 않지만 《승지계심(僧祗戒心)》을 번역하고 범승을 청하여 갈마법을 내세우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401년에 장안에 들어온 구마라집이 수년 사이에 불야다라 및 담마유지 등과 더불어 《십송율》 58권을 번역한 이후이다. 후에 비마라차는 다시 보완하여 61권으로 역출하였다. 이에 《십송율》을 학습하고 그에 의거하여 수계를 하기도 하였다. 《십송율》 역출 수년 후, 불타야사는 장안에서 축불념과 도함의 도움을 받아서 《사분율》 60권을 역출하였다. 이후 법현은 인도의 대중부에서 중시해오던 《마하승지율》 40권을 역출하였다. 그는 구마라집이 장안에 들어오기 직전, 60여 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보다 완전한 율장을 구하기 위하여 인도 구법길에 올랐다. 중인도에서 직접 《마하승지율》과 화지부의 《오분율》 등을 수집하여 15~6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 사이에 이미 《십송율》과 《사분율》 등이 번역되어 있었다. 《마하승지율》 40권은 법현이 직접 번역하였지만, 《오분율》 34권은 그가 입적한 이후에 불대집에 의하여 번역되었는데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오분율》은 훨씬 늘어난 120권 분량이다. 5세기 초에 번역된 이들 4대 율장 이외에 7세기에는 의정삼장이 100권이 넘는 분량인 《근본설일체유부율》을 번역하였다.

이들 율장을 통하여 점차 연구와 실천도 이루어졌다. 중국불교의 계율은 초기에는 《십송율》이 중시되었지만 점차 다양한 율장으로 관심이 모아졌다. 5~6세기에 늑나마제의 제자였던 광통율사 혜광은 《사분율》을 근거로 그에 대한 주석을 지었는가 하면 율의 연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로 도운의 《사분율소》 9권 및 지수의 《사분율소》 20권이 간행되었다. 당나라 시대에 도선은 《사분율》을 중심으로 《사분율행사초》 12권, 《사분율함주계본소》 4권, 《사분율수기갈마소》 4권 등을 짓고, 나아가서 이를 바탕으로 소위 남산율종을 확립하였다. 한편 도운의 제자 홍준의 계통에서는 상부종이 형성되었는데, 법려는 《사분율소》 20권을 지어 그 교리를 체계화시켰다.

2) 천태지의의 규범
수나라의 사문 관정이 편찬한 《국청백록》에는 사원 자체에서 제정한 내규에 해당하는 몇 가지 조항이 설정되어 있다. 이 규범은 천태지의가 도반들과 더불어 수행하면서 제시한 것으로 중국에 전래된 율장과는 다른 문중 개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규범을 통하여 중국 수나라 시대에 천태종의 사찰에서 어떤 원칙을 준수하였고 어떤 수행을 하였으며 규범을 위반한 경우에는 어떤 벌칙을 가했는지 엿볼 수가 있다. 《국청백록》 제1권의 서문에서는 새롭게 규범을 제정해야 하는 필요성을 말하고, 이어서 열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을 열거한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독살이를 하는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대중살이를 할 경우에는 좌선은 승당에서 해야 하고, 참회는 별장에서 해야 하며, 승단의 모든 업무를 익혀야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를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삼의육물(三衣六物)의 도구를 갖추고 대중을 따라 수행하면 비로소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만약 삼의육물(三衣六物)을 갖추지 않거나 대중과 함께하지 않으면 회원에 가입할 수가 없다.

둘째는 승당에서 수행하는 사람은 본래 하루에 네 차례의 좌선수행[四時坐禪]과 여섯 차례의 예불수행[六時禮佛]을 매일의 업무로 삼는다. 그래서 좌선 네 차례와 예불 여섯 차례 등 매일 열 차례는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별도의 업무가 있는 사람도 그 일을 처리하는 데에 3일로 한정하고 이후에는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열 차례의 수행을 준수해야 한다. 만약 여섯 차례의 예불에 한 차례라도 빠진다면 대중에게 삼배(三拜)의 참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여섯 차례의 예불에 모두 빠지는 경우가 한 번만이라도 발생한다면 일차적으로 유나에게 일임한다. 사시좌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득이한 경우는 제외되는데 이 경우에도 먼저 지사에게 알려야만 벌을 받지 않는다.

셋째는 육시예불의 경우 비구승은 반드시 입중의(入衆衣)를 수해야 한다. 입중의에는 수중동물이나 육상동물의 문양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비단으로 만든 경우도 안된다. 세 차례의 종이 울리면 재빨리 집합하여 좌복을 깔고 향을 피우며 호계합장을 한다. 그리고 반드시 창송에 맞추어 합송해야 한다. 제멋대로 잡담해서도 안 된다. 고두(叩頭)하거나 탄지(彈指)의 경우에 넘어지거나, 신발을 끌거나, 절할 때와 일어설 때의 동작이 엇박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경우에는 모두 벌칙으로 대중에게 십배(十拜)의 참회를 해야 한다.
넷째는 별도로 수행[別行]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중과 더불어 수행하는 가운데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에 대하여 특별히 사종삼매에 정진하여 수행토록 하는 것이다. 도량에 따라서는 별행(別行)이라 부르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경우에 조사를 통해서 게으름을 피운 사실이 밝혀지면 그에 대한 벌칙은 일차적으로 유나에게 일임한다.

다섯째, 지사승(知事僧)의 업무는 도량의 안립과 이익을 담당한다. 그런데 지사승이 도량 살림에 손해를 입히고 대중에게 피해를 주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개인적으로 일을 처리하여 비리가 눈곱만치라도 생긴다면 비록 그것이 대중을 위해서였더라도 드러내지 말고 조사를 통해서 사실이 드러나면 추방한다.

여섯째는 하루 두 번의 공양[二時食]에 대한 것이다. 만약 현재 병든 몸이 아니라든가, 병으로 갑자기 몸져누운 경우가 아니라든가, 병이 다 나은 경우 등은 반드시 공양간에 나와서 공양해야 하고, 그 밖의 장소에서 공양해서는 안 된다. 대중이 모여서 하는 공양의 경우에 철발우(鐵鉢盂)와 와발우(瓦鉢盂)는 허용한다. 그러나 독특한 향기가 나거나 기름이 묻은 그릇, 사발·잔·숟가락·젓가락의 재질이 뼈·뿔·대나무·나무·박·옻칠한 것·가죽·조개껍질 등으로 만들어진 것을 공양간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자기의 발우를 닥닥 긁어댄다든가 후루룩 소리를 내면 국물을 마신다든가 쩝쩝 씹는 소리를 낸다든가 음식을 입안에 머금은 채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또 사사로이 국물이나 반찬을 더 달라고 한다든가 남들은 다 마쳤는데 혼자만 늦게까지 먹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범하면 대중에게 삼배의 참회를 해야 한다.

일곱째는 대중들이 지켜야 할 사소한 주의사항에 대한 것이다. 가까이 나가든 멀리 나가든 도량 안에 있든 도량 밖에 있든 언제나 생선이나 고기나 오신채나 술 등을 훔쳐먹어서는 안 되고, 또한 정해진 공양시간이 아닌 때에 먹어서도 안 된다. 만약 조사를 통해서 사실이 드러나면 추방한다. 단 병이 위독하다든가 치료를 위해 의사의 처방전에 따르는 경우라든가 도량을 떠나서 치료할 경우에는 처벌되지 않는다.

여덟째는 승가라는 말은 화합이라는 뜻이다. 화평하고 용서하는 것은 화(和)이고,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겸손한 것이 합(合)이다. 그러므로 큰 소리를 낸다든가 욕설을 한다든가 화난 얼굴을 하면서 다투어서는 안 된다. 다투는 일이 생기면 쌍방 모두가 대중에게 30배의 참회를 해야 한다. 그러나 다툼을 걸었어도 그에 상대하지 않은 자는 처벌하지 않는다. 신체나 손발을 통해서 물리적으로 해를 가한 자는 그 경중을 불문하고 추방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신체나 손발로 상대하지 않은 자는 처벌하지 않는다.

아홉째, 십중금계를 범한 자는 율에 따라 다스린다. 그러나 무고하게 비방한 일이 발생한 경우에는 비방을 당한 자는 처벌하지 않지만 비방한 자는 추방한다. 만약 학인으로서 입중 이전에 범한 과실이 있다면 문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인의 신분이었을 때는 정식 회원에 소속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비구라고 말하면서 대중에 참여한 이후부터는 십중금계를 범하여 타인을 비방한 경우는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처벌한다.

열째는 이상은 경전에 의거하여 주의사항을 세운 것으로 마치 병에 따라 약을 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처방전에 들어 있지 않다고 하여 이미 먹은 약을 토해버린다면 무슨 효험이 있겠는가. 만약 위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주의사항을 지키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참회할 때마다 참괴심이 없고 스스로 새로운 각오를 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먹은 약을 토해버린 사람과 마찬가지이므로 대중으로부터 추방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만약 마음을 고쳐먹고 새롭게 입중한다면 그 경우는 허락한다. 위의 모든 원칙을 범했다고 하더라도 대중은 용서하는데도 요지부동으로 참회마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도리에 맞는 사람이 아니다. 대중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추방해야 한다.

다음으로 예경하는 규범에 대해서는 용수 대사의 《십주비바사론》에 주로 의거하고 그 밖의 제경의 뜻을 통하여 보조로 삼고 있다. 하룻낮과 밤 동안에 때로는 여법하게 하고 때로는 생략하기도 한다. 하루 여섯 차례의 예경 가운데 아침과 한낮에는 예경만 생략하고 나머지 좌선·참회·독경의 세 가지 의례는 이행한다. 아침과 한낮에는 예경만 생략하고 나머지 좌선·참회·독경의 세 가지 의례는 이행한다. 초저녁에는 한낮에 하는 10불명호만 그대로 예경하고, 한밤중과 새벽녘에는 보례법을 행한다. 이 경우에 먼저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일체현성에 이르기까지 23정례를 하고 나서, 다시 범천을 비롯하여 천태산의 신령 및 기타에 이르는 모든 존재를 돌봐주시는 제불께 참회의 12정례를 하고, 제불을 청하고 수희하며 회향하고 발원하는 정례를 하고, 다시 보례법을 실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천태지의 자신이 지사인으로서 내규를 어떤 자세로 이끌어갔는지 그 경험을 통하여 간곡하게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사원에서 어떻게 대중의 질서를 운용했는가 하는 그 일례를 엿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지의가 제정한 규범은 계율이 중국불교에 뿌리를 내리면서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 내지 창조적인 운용의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보다 본격적으로는 이후 시대에 해당하는 선종에서 청규라는 모습으로 출현하여 소위 계율의 완전한 중국적 변용으로 정착되어 갔다.

4. 선종의 청규와 그 의의

1) 《백장고청규》
소승계로부터 대승보살계에 이르게 되면서 계율 사상도 중국사회에 침투해 가는 과정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승제류(僧制類)가 재가자와 출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보살계와 승제의 발전적인 전개는 계율의 본질을 지켜가면서 시대와 지역의 환경에 의하여 새롭게 불교의 중국적인 변용을 출현시켰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선문에서 형성된 청규이다.

청규는 선종이 명실상부하게 교단을 형성하면서부터 보여주는 선문화의 측면이다. 오늘날 선종사에서는 중국불교에서 선종의 출현은 보리달마의 서래로부터 그 시원을 삼는다. 그러나 달마는 자신과 몇 안 되는 제자들을 거느리면서 선자로서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에 성행했던 교학불교와 달마선법과의 관계, 나아가서 달마로부터 혜능에 이르는 선종의 형성 시대에 겪어야 했던 불법 사태 등의 요인으로 인하여 본격적인 교단으로는 성립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후 소위 중국 선종의 제4조로 간주되고 있는 대의도신 시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집단생활이 가능하였다. 도신은 스승이었던 승찬을 따라 수행하기를 10년 내지 12년, 후에 출가하여 수 대업 연간에 길주에 이르러 형산에 가고자 하여 강주(江州)를 거쳐 여산의 대림사에 10년 동안 주석하였다. 그러는 동안 출가자와 재가자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무덕 연간(618~626) 초기에 여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파두산으로 옮기고, 이후 쌍봉산을 중심으로 500대중을 거느리는 집단을 형성하였다.

선종사에서 보이는 최초의 본격적인 정착생활이었다. 이에 따라 집단 내에서는 반드시 어떤 내규가 필요했을 것이다. 갖가지 직무분담은 물론이고, 수백 명의 대중이 기존의 방식대로 걸식 행위로만 공양을 충당할 수는 없었다. 이에 일정한 지역의 토지를 보시받고 그 땅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 자급자족의 전통이 출현하였다. 여기에는 모든 대중이 참여하는 작무로서 소정의 원칙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출가승려의 작무 행위가 농사를 짓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수행의 일환으로 간주되었고, 나아가서 일상적인 삶의 행동을 깨침의 실천으로 간주하는 조사선풍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기존에 전래되었던 율장의 규범만으로는 적용할 수 없는 모습이 도출되었기 때문에 선문에 적절한 규범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 선종 시대부터 선승들은 율사에 기거하면서 승방을 별도로 지어 선원에 기거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선문규식》에 따르면 “선종은 처음 달마대사로부터 조계혜능 및 그 이래로 대부분 율사에 기거하였다. 비록 별원으로 되어 있었지만 설법과 주지에 대해서는 율사의 법도와 부합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찬영의 《대송승사략》 권상의 별립선거(別立禪居)의 항목에서는 달마의 가르침이 이미 널리 실천되고 있었지만 사원에 부속된 별원에 기거하면서 특별히 다른 율제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신 선사는 동림사에 주석하였고, 혜능 선사는 광과사에 주석하였는데, 후에 백장 선사 때에 처음으로 별도의 율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선자들은 율원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사원에 거주하여 율제를 수용하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점차 선풍을 거양하는 길을 열어 나아갔다. 《송고승전》 권 10의 〈백장회해전〉에는 그 제도가 율과 달랐다고 말한다. 그래서 비록 부처님의 말씀은 아니었을지라도 선문의 제방에서는 그것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혀 전승되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은 생활은 이후로 약 200년에 가까운 8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8세기 말엽의 백장회해(749~814)는 조사선풍을 가장 잘 구현한 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선종사에서 최초로 보이는 청규를 제정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되고 있다. 백장회해가 처음으로 제정했다는 청규는 오늘날 소위 《백장고청규》로서 그 전모가 거의 산실되어 버려서 원형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몇몇 기록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나마 《백장고청규》의 면모를 엿볼 수가 있다. 특히 《경덕전등록》에 실려 있는 양억(楊億)의 《선문규식》 및 진후가 쓴 백장의 《탑명》에는 청규 자체의 존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백장고청규》의 원형에 대한 약간의 내용을 엿볼 수가 있다. 곧 대중의 운력은 반드시 평등하게 행해졌다는 것, 선원의 건립에 재가인의 후원이 있었다는 것, 장례의식은 선원의 독자적인 방식이 아니라 불교의 방식을 따랐다는 것 등이다.

이런 점에서 《백장고청규》의 대중생활은 무엇보다도 안목을 구비한 장로의 지도에 크게 의지하였다. 그와 같은 전형적인 인물상이 곧 조사였다. 조사는 본래 달마조사를 의미한다. 곧 달마로부터 비롯된 일군의 선풍을 조사선이라 하였는데 이 경우 조사라는 의미는 이해와 실천이 상응한 자를 가리킨다. 때문에 달마로부터 연유하는 조사선에서 조사의 위상은 부처님을 대신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던 시대였다. 이에 굳이 불전(佛殿)을 건립하지 않더라도 조사가 설법을 펼치는 법당(法堂)으로 불전을 대신할 수가 있었다. 《선문규식》에 의하면 《백장고청규》에서 서술하고 있는 총림은 법당(法堂), 승당(僧堂), 방장(方丈), 요사(寮舍) 등의 건물이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장고청규》에서 눈여겨볼 만한 내용은 기존의 계율에서는 엄금했던 생산노동을 인정한 보청법(普請法)을 명시하고 있는 점이다. 일찍이 도신 대사의 정착생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지만 보청법을 명문화했다는 것은 조사선의 전통 사상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선종의 전통은 도신 이후에도 《능가불인법지》에 보이는 것으로, 쌍봉산에서 홍인이 제자들을 지도하는 모습이나 《단경》에 보이는 혜능의 행장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몸소 농사를 지었고 나무를 하였으며 운력을 생활화하였다. 곧 조사선의 성격은 본래성불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 일상의 삶에서 상하가 균등하게 운력에 참여하고 그것을 수행 나아가서 깨침의 실천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이 무렵 선종의 교단에서는 이제 생산노동의 행위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런 점은 인도 선법과는 크게 다른 중국 선종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계율에 명시된 규정을 넘어서 조사선적인 가풍에 근거하여 중국선이 새롭게 정착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2) 《선원청규》
북송시대만 해도 이미 당나라 시대에 형성되었던 《백장고청규》에 많은 변화가 가해져서 그 원형이 크게 손상되어 본래의 모습을 상실해버렸다고 한다. 이에 북송 휘종의 숭녕 2년(1103)에 장로종색(長蘆宗賾)이 백장의 의도를 되살리려고 제정한 것이 《선원청규》 곧 《숭녕청규》였다. 이 점에서 《선원청규》는 현존하는 청규로서는 최고(最古)의 청규로서 이후에 동아시아에서 출현한 많은 청규의 연원이 되었다. 곧 그것을 시대별로 나열하면 《선원청규》는 북송, 《일용청규》 《입중수지》 《교정청규》는 남송, 《비용청규》 《환주암청규》 《칙수청규》는 원대에 성립되었다. 이 가운데 《일용청규》 및 《입중수지》는 총림에서 초학자를 대상으로 하는 계몽적인 청규이고, 《환주암청규》는 중봉명본의 문중에서 제정되고 운용되었던 청규였다. 때문에 본격적인 청규로는 《선원청규》 《교정청규》 《비용청규》 《칙수청규》의 4종을 언급할 수가 있다. 《칙수청규》는 백장이라는 말은 붙였지만 《백장고청규》와는 매우 다른 것이므로 《선원청규》야말로 실질적으로 《백장고청규》의 형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선원청규》의 편자 장로종색은 법수(法秀) 및 장로응부(長蘆應夫)에게 참문하여 그 법을 잇고 숭녕 연간(1102~1106)에 진정부 홍제선원에 주석하면서 《선원청규》를 편찬하였다. 그 법맥은 운문문언−향림징원−지문광조−설두중현−천의의회−장로응부−장로종색으로 계승되었다. 《선원청규》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에 대한 이본(異本)도 6종이 출현하였다.

《선원청규》의 내용은 크게 선림의 가람(伽藍), 직위(職位), 수행(修行) 등 세 분야로 나뉜다. 첫째, 가람에 대해서는 우선 그 명칭으로 보면 대전(大殿), 법당(法堂), 승당(僧堂), 고사(庫司), 중료(衆寮), 욕실(浴室), 삼문(三門), 진당(眞堂), 방장(方丈), 장전(藏殿), 토지당(土地堂), 동행당(童行堂), 연수당(延壽堂), 각(閣), 탑(塔), 나한당(羅漢堂), 수륙당(水陸堂), 해원(廨院), 장사(莊舍), 유방(油房) 등이 직접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선원청규》에서는 아직 불전이 가람의 중심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불전이 명확한 형태로 등장하여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게 된 것은 남송 때 성립한 《일용청규》 및 《교정청규》에서 보인다. 여기에서 장사는 장원을 관리하는 장주가 거주하는 당사이고, 해원은 곡물의 매매와 그 밖의 것을 담당하는 당사이며, 유방은 기름을 짜는 곳이다.

둘째, 직위에 대해서는 주지 밑에서 보좌하고 대중을 통솔하는 직위로서 사지사(四知事), 오두수(五頭首) 내지는 육두수(六頭首)가 있었다. 사지사는 감원(監院), 유나(維那), 전좌(典座), 직세(直歲)이고, 오두수는 전좌(典座), 서장(書狀), 장주(藏主), 지객(知客), 욕주(浴主)이며, 육두수는 오두수에다 고두(庫頭)를 더한 것이다. 사지사와 육두수는 주지가 임용했지만 그 아래에는 또 많은 소지사(小知事)가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주지는 대중의 의향을 물어서 결정하고, 임기 중에는 함부로 교체할 수가 없었다.

셋째, 수행에 대해서는 《선문규식》에 의하면 주지와 대중이 모여서 아침과 저녁으로 설법과 청익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던 것이 《선원청규》에 의하면 상당설법의 경우에 5일마다 승당하여 종지를 거양했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보아 후대 《교정청규》에서 말하는 오참상당(五參上堂)과 같은 설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참상당이란 매월 1일,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등 5일마다 하는 설법이다. 이와 더불어 주지가 수시로 방장에서 행한 설법으로서 정기적인 상당설법의 간격을 보충한다는 의미의 소참설법이 있었는데, 아침에 하는 것을 신참(晨參)이라 하고, 저녁에 하는 것을 만참(晩參)이라 하며, 주지의 형편에 따라서 신참이 취소되는 것은 방참(放參)이라 하였다. 후대에는 만참이 취소되는 경우에만 한정하여 방참이라 불렀다. 그런데 소참의 경우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 등 매월 6회의 만참으로 정형화되어 갔는데 이것을 삼팔만참(三八晩參)이라 하였다. 후대에 《칙수백장청규》에서는 8일, 18일, 28일 등 매월 3회의 8일에 행해지는 만참이라는 의미로 변화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청규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것은 백장에 의해서 정해진 보청(普請)이었다. 보청에 대하여 《선원청규》에서는 “보청에는 요주(寮主)와 직당(直堂)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드시 함께 임해야 한다. 질병과 관객(官客)을 제외하고는 주지일지라도 참여하지 않으면 시자가 대신하여 대중으로부터 추방당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조사선의 가풍에서 일상의 모든 행위가 수행이고 깨침의 실천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보청의 의미도 본래의 생산적인 의미로부터 점차 형식적이고 도량의 청소 정도의 행위로 변화되어 갔다.

3) 《칙수백장청규》
《칙수백장청규》는 서문과 발문에 의하면 원통과 지원 연간에 백장산의 주지였던 동양덕휘(東陽德輝) 선사가 당시의 천자였던 혜제순종(惠帝順宗)의 칙명을 받아 편집한 것을 다시 칙명을 받들어 집경사(集慶寺)의 주지였던 소은대소(笑隱大訴) 선사 등이 거기에다 교정을 가하여 천하의 총림에 널리 반포한 것이다. 원대에는 세조 이래로 라마교가 대단히 성행하였지만, 선종의 세력은 여전히 대단하였다. 문종 황제의 천력 2년(1329) 금릉에다 대용상집경선사(大龍翔集慶禪寺)를 창건하여 중국 오산의 첫째로 삼아 소은대소 선사를 주석하게 하고, 칙지를 내려 《백장청규》를 간행하게 했다. 당시의 청규는 총림마다 제각각 전승해오던 전통을 따라 행해지고 있어서 그 대강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일정한 체제는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순종 시대에 동양덕휘 선사가 청규에 대한 주청을 올려서 마침내 원통 3년(1335) 가을에 칙명을 받게 되었다.

이에 덕휘 선사는 백장회해 선사가 마련했던 청규의 원본을 여러모로 수습해 보았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남송 휘종의 숭녕 2년(1103) 홍제원의 주지였던 자각대사 종색이 만든 《숭녕청규》, 도종의 함순 10년(1274) 유칙이 만든 《총림교정청규총요(叢林校定淸規總要)》 2권, 원대 무종의 지대 4년(1311) 동림사의 주지 일함이 만든 《선림비용청규》 10권 등을 바탕으로 청규를 편집했다.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보완하여 9장으로 나누어 장마다 서문을 첨가하고 각 장의 대의를 명확하게 하여 2권으로 나누어 성지(聖旨), 법지(法旨) 차부(箚付)를 붙여 지원 4년(1338)에 《칙수백장청규》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곧 원나라 시대에 총림의 전범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5. 계율의 변용과 그 의의

불교의 발생에 따른 불법의 형성과 발전과 그 유지에 대하여 인도에서 형성되었던 불교계율 바라제목차가 승가의 형성과 발전과 그 유지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때문에 불교가 중국에 전승되면서 인도와는 크게 달랐던 중국의 지리와 문화와 사상의 전반에 걸쳐 새로운 모습으로 적응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과제였다. 그 가운데서도 불교의 사상적인 측면보다 오히려 출가자의 일상적인 삶을 규정하는 계율의 문제는 더욱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게다가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교는 소위 외래종교 나아가서 오랑캐의 가르침으로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질적인 문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반복적이고 관습적인 문화행위를 통하여 마침내 소위 중국적인 불교로서 발전을 구가하게 되었다. 교단생활과 관련하여 불교 본래의 가르침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문화에 부합되는 계율정신을 창조하고 적응시켜 나아가는 것은 우선 율장의 연구와 그에 상응하는 규범 창출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중국의 유교문화 전통에서 출가 행위 자체만 해도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인도적인 계율의 중국적인 변용도 그에 못지않은 중차대한 문제다. 그래서 계율의 텍스트와 관련하여 그 전형적인 모습이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것으로서 《범망경》이었다면, 출가승려의 경우에 실제의 삶과 관련하여 가장 중국적인 모습은 인도의 계율과 아울러 불교교단 생활을 규제하고 그에 상응하는 권위를 지닌 다양한 승제(僧制)의 출현이었다. 천태교단에서 보여준 내규는 물론이고, 선종에서 자파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새롭게 선보인 청규의 출현은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를테면 종파로서 등장한 선종에서는 부처님과 거의 동등하게 자격을 부여했던 조사들의 일상의 삶과 말씀과 그 기록이야말로 계율의 바라제목차와 같은 권위를 지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이 인물에 국한되지 않고 제도적인 발전으로 확대되어 가람의 배치와 규모와 직무분담과 수행방식 등에까지 폭넓게 적용됨으로써 선종의 청규 제정과 그에 따른 교단 운영은 더 이상 인도불교의 연장이 아니라 그것을 승화시킨 중국불교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지니고 있는 한 특징으로서 불교의 기본적인 형식과 정신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황의 변화에 따른 대처와 창조적인 변용을 구사하여 그것을 일상적인 삶의 틀을 규정하고 있는 계율의 측면에서 가장 잘 구현해낸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중국불교의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고대 한국에서 불교의 수용은 가장 앞서 가는 사상과 문화의 접촉이었다. 이로써 출가집단의 구성원은 불교가 발전되어감에 따라서 점차 일종의 엘리트계층으로서 부각되었다. 때문에 출가자의 경우 구법행각 내지 문화의 첨병으로서 가장 앞장서서 빈번하게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그것을 국내의 문화에 접합시키면서 사회의 리더로서 그리고 많은 백성의 사표로서 구실을 하였다. 그와 같이 창조적인 모습의 불교 곧 계율의 수용과 변용과 적응이 오늘날과 같이 거의 모든 측면에서 변화가 빠른 시대에 과연 어떻게 대응되고 구현되어야 좋을지 숙고해 볼 일이다. ■

김호귀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동 대학원 선학과 졸업(석사·박사). 동국대 불교대학 선학과 강사 역임. 저서로 《묵조선 연구》 《선과 수행》 《금강경 찬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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