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디지털 문명 시대와 불교

1. 들어가는 말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若以色見我)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以音聲求我)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니(是人行邪道)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不能見如來)                   ―《금강경》 사구게

현대는 ‘감각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현대사회에서 감각적인 것의 위력은 막강해졌다. 정치, 경제뿐 아니라 종교의 영역까지 감각적인 것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들어 명상이나 웰빙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맞물려 한국불교에서도 감각적인 것, 즉 미적인 것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1970년 이래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국가정체성에 대한 미적인 재현(representation), 다시 말해 ‘한국의 미’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심미화는 불교를 ‘한국적인 것’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 그 결과 주명덕의 흑백 사진으로 유명해진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이나 바랑을 메고 길을 떠나는 승려들의 모습, 초파일이면 사찰을 수놓는 오색 연등, 다기에 우려낸 맑은 찻물, 동자승 등의 이미지는 불교의 낡은 이미지를 일신하고 대중적 호감을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불교의 심미화는 각종 불교 캐릭터 상품에서부터 불교건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찰의 전통적인 예배 공간에 제한되었던 불교예술의 외연을 미술관, 기념품점, 거실 장식장, 나아가 공공 구조물까지 넓혔다. 분명 불교의 심미화는 명상에 대한 대중적 요구와 함께 현대 한국불교의 지형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불교의 심미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금강경》 게송이 지적하는 바처럼 언어 또는 감각적인 것의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되는 불교 수행에 대하여 감각적인 것의 확장은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불교에 대한 미적인 소비를 부추기고 불교 수행에서 감각적인 것을 차단하거나 제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나아가 고요한 산사나 한적한 아란야에서의 수행마저 심미화시켜 종교 체험을 미적으로 매개된 체험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의 확대는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소통과 매개 형식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종교 자체의 변화를 강제하고 있는데, 이 변화가 축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현시점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가 더 이상 감각적인 것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법인 스님이 〈아름다운 풍경이 불교를 망친다〉는 논쟁적인 글을 통하여 불교의 심미화를 비판한 바 있지만, 과연 이와 같은 심미화가 시대적 조류에 편승한 세속화의 한 현상인지 아니면 불교의 현대화와 대중화로 평가해야 할지, 아직까지 불교계 내부에서 이렇다 할 논의조차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술 덕분으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감각적인 것의 한계는 현실세계를 넘어 가상세계로 확장되었다. 19세기 이후 사진과 인쇄술, 매스미디어 등 복제기술의 발전이 ‘대중문화’라는 문화현상을 가져온 것과 비교해볼 때, 인터넷은 ‘디지털 혁명’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생활방식과 사회구조, 심지어 인간의 세계인식과 사고체계에까지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4년 네스케이프사에서 최초의 상업용 웹브라우저를 개발한 때부터 인터넷은 사적인 의사소통에서 출판이나 상업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연결시키는 매체가 되었다. 그 결과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으며 세계는 시공간적 제약을 벗어나 지구촌이라는 단일한 공간으로 묶이고 면대면 만남이 아닌 가상공간에서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소통 방식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상품생산경제에서 정보경제로, 계급 조직에서 네트워크 분배로, 지역시장에서 국제시장으로 산업구조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대량상품생산에 근거한 “산업혁명의 패러다임은 급속히 비물질화, 또는 재물질화라는 정보혁명의 생산 패러다임”으로 교체되었다. 이제 물질성을 가진 상품조차 그 물리적 속성보다 디자인이나 브랜드처럼 가상적 요인을 통해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볼프강 벨슈가 지적하듯이 “심미적인 것은 인류학적인 이상(Ideal) 그 이상의 것이며, 심미적인 것은 우리 세계 인식과 세계 관계 일반에 대해 인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디지털 기술은 단순히 매체와 소통 방식의 변화만 아니라 인간의 세계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불교예술, 아니 불교는 이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까? 현대사회에서 감각적인 것의 확장은 종교의 세속화라는 문제를 제기할 뿐 아니라 종교 자체의 근본적인 혁신을 요청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 이후 현대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 가상의 뒤섞임은 한편으로 세계의 가상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는 불교적 세계관을 더 쉽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감각적인 것에 대한 몰입의 심화는 불교수행, 즉 세계의 가상성에 대한 자각을 곤란하게 만든다.

이러한 변화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제 그것을 불교를 혁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불교는 미적인 것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새로운 매체인 디지털 기술은 불교예술에 어떤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쉽게 답해질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피해 갈 수도 없는 것이다. 우선 현대미술에서 매체의 의미를 살펴본 다음, 현대사회에서 종교예술로서 불교예술의 가능성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2. 디지털 시대의 예술의 변화

모든 예술작품은 매체를 필요로 한다. 매체가 없는 예술은 없기 때문에 예술가는 누구보다도 기술 발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새로움의 추구’가 모토가 된 현대예술 이전에도 예술가들은 언제나 자신의 시대의 전위(avant-guard)였다. 사상과 표현에서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와 기술의 사용에서도 그들은 항상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러므로 예술사를 정신사의 발전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기술 발전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매체는 새로운 예술을 낳는다. 매체는 예술 장르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형식과 양식까지 영향을 미친다. 소리를 만드는 도구(악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소리를 매체로 하는 음악의 성격이 결정되고, 색을 매체로 하는 회화는 어떤 물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표현할 수 있는 대상과 형식이 한정된다. 예를 들어 서양화에서 유화물감의 발명으로 이전의 템페라화가 표현하지 못한 영역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아연 튜브의 발명으로 실내에서 제작되었던 그림을 실외에서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야외 사생이 가능해지자 화면이 밝아졌고 사생을 바탕으로 한 인상주의 회화가 등장하는 등 서양화에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동양화에서도 종이와 먹의 사용이 ‘수묵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발묵이나 파묵 같은 수묵화 특유의 기법은 종이와 붓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으며 흔히 동양화의 가장 중요한 비평 기준인 ‘기운’ 역시 동양의 기철학의 영향이라기보다 붓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중국 붓은 서양 붓에 비하여 훨씬 부드러워서 사용할 때 더 많은 힘이 필요하므로 화면에 표현되는 대상보다 표현하는 매체와 그때의 힘 안배가 결정적이다. 이처럼 ‘중국 붓’이라는 매체는 ‘기운’이 중국 회화와 서예의 가장 중요한 비평 기준이 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붓의 자국을 감추는 유화물감에 비하여 붓의 자국과 실수한 흔적까지 그대로 노출시키는 동양화의 기법 역시 매체의 차이, 다시 말해 먹과 붓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음악에서도 소리를 만드는 악기의 변화가 음악의 변화를 가져온 경우가 흔하며, 현대음악에서 침묵을 비롯한 자연의 소리를 음악의 영역에 끌어넣었던 존 케이지의 음악 활동이 피아노와 같은 전통 악기를 부수는 퍼포먼스와 관련된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물론 매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체의 차이는 예술적 표현의 차이만 아니라 예술 개념의 변화까지 이끌었다.

그러나 예술에서 매체의 중요성이 자각된 것은 현대 이후의 일이다. 현대미술이 모방을 지양하고 일체의 미술 외적 의미를 배제한 순수성을 추구함에 따라 현대미술은 매체의 환원 불가능한 본질을 찾아내는 데 온 힘을 쏟았으며 감각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매체의 표현 능력을 확대하였다. 추상적이든 아니든 모더니즘은 매체를 수단으로 해서 그려지는 내용보다 매체가 더 우월하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매체 자체를 향해 제기된 자기비판적 절차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디지털의 사용과 더불어 미술, 영화, 음악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현대미술과 마찬가지로 매체의 표현 능력이 확대됨에 따라 얻어진 결과이다.

일반적으로 ‘디지털 예술’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기존의 사진, 판화, 회화, 조각, 음악 같은 전통적인 예술의 대상들을 창작하고 소비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경우와 디지털 기술을 매체로 삼아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전통적인 예술의 창작과 소비에 디지털 매체를 활용하는 ‘디지털을 통한 예술’로서, 디지털 기술은 언제 어디서나 예술작품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예술의 대중화, 민주화를 앞당겼지만 본격적인 디지털 예술이라고 하기 어렵다.

디지털 매체 자체가 예술작품의 매체가 된 것만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을 미술의 매체로 사용하는 시도는 1993년 조안 힘스커크와 더크 페스만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수집된 이미지와 HTML 스크립트를 혼합하여 수소폭탄의 이미지를 만든 〈jodi.org〉은 인터넷을 사진이나 물감처럼 예술의 매체로 사용한 첫 번째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예술의 변화는 무엇인가? 디지털 매체는 예술작품을 완성된 것이 아니라 감상자가 개입할 수 있는 열린 것으로 만들었으며 관조적인 감상 행위를 감상자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활동으로 바꾸었다. 디지털 예술은 예술작품, 예술가, 감상자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예술 장르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였으며 현실공간이 아닌 새로운 사이버공간에 예술작품을 전시하게 하였다.

‘디지털 예술’ ‘미디어 예술’ 또는 ‘뉴미디어 예술’이라고도 불리는 이 새로운 예술의 특징에 대하여 진중권은 디지털 이미지가 순수하게 인위적으로 창작된 합성 이미지를 만들 수 있으며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이미지이며, 궁극적으로 모든 감각자료를 0과 1로 환원하여 아날로그 매체들의 질적 차이를 지워버리는 메타 매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컴퓨터도 사진과 영화처럼 복제기술의 하나이지만 픽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합성 이미지를 통해 상상으로 만든 허구의 대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피사체를 그대로 반영하는 사진과 구별된다.

또한 과거의 예술 창작이 물질성을 가진 ‘오브제’를 제작하는 활동이라면, 디지털 예술창작은 오브제와 관객의 관계를 디자인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술 창작의 성격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또한 디지털 기술은 모든 자료의 질적 차이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거나 이미지를 사운드로 출력하고 사운드를 텍스트로 기술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디지털 컨버전스를 통해 공감각적인 예술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디지털 예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상호작용성’과 ‘가상현실’이다. 디지털 예술에서의 선택과 참여는 종종 ‘상호작용성’이라 불리며, 이것은 사용자가 미디어로 자신의 경험을 직접 조작하고, 미디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상호작용성’은 작품, 작가, 수용자 사이의 구별 없이 적극적으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에 대하여 마노비치는 디지털 매체에서 일어난 상호작용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이 상호작용적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는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사용자가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자가 작품의 공동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정의를 비판하면서 “메뉴 기반의 상호작용성, 증축 가능성, 이미지 인터페이스나 이미지 도구와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여 상호작용성을 설명하였다.

마노비치에 따르면 이런 다양한 상호작용은 새로운 매체가 복합−매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과거의 상호작용성과 달리 디지털 예술에서의 상호작용성은 행위로서 나타나는데, 바로 작품과 수용자 사이의 상호작용이 그것이다. 예술가는 전통적인 예술가의 역할에서 벗어나 작품의 초안자와 작업 맥락을 규정한 자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수용자의 경우, 단순히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작가의 기획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작품의 내용으로 만든다. 수용자는 작품에 참여하여 자신의 행위의 결과물을 즉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예술가, 작품, 수용자의 상호작용성이 완성된다.

상호작용성이 예술에 가져다준 또 다른 변화는 작품을 작가에 의해 완성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리고 확대되는 과정으로 체험되게 한다는 점이다. 예술은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것이며,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로 체험되고 수용된다. 그 결과 예술의 주도권이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니라 ‘다중’에게 돌려졌다. 이 현상은 미술, 영화, 음악 등 예술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데, 디지털 예술은 누구나 예술작품을 창작하거나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으며 관람의 기회도 더 많은 다중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불교적으로 볼 때 ‘상호작용성’은 ‘상즉상생하는 법계연기’를 시현한다. 과거에 관념적으로 이해되던 존재의 ‘상의상관성’이 디지털 시대에 와서는 체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매체의 이 특징을 활용함으로써 불교예술을 대중화시키고 현대화시키는 길도 넓어졌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기술을 예술적으로 변형할 때 불교는 어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으며, 새로운 매체로부터 불교예술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3. 무엇이 진짜인가?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하므로 만약 모든 현상을 현상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면 곧 여래를 보게 된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금강경》 사구게는 모든 현상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이처럼 불교는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현상적인 것은 모두 가상이며 환영이나 물거품,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고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허망한 것으로 간주한다.

 불교뿐 아니라 모든 철학과 종교가 현실의 실재성에 대하여 오랫동안 의문을 제기해 왔다. 플라톤은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현실은 가상에 지나지 않고 이데아의 세계가 참된 실재라고 생각했으며 데모크리토스의 경우에는 진정한 실재를 현상 배후의 원자들의 배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이 우세해진 근대 이후 이와 같은 철학적 사유가 사라지고 현실의 실재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듯 보였다.

디지털 기술의 도입과 더불어 현실의 현실성에 대한 질문이 다시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디지털 이미지가 사진처럼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이미지를 변형하여 만들어진 것이지만 현실 못지않게 현실적인 것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재하는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과 동일한 현실성을 갖는 ‘가상현실’은 한편으로 인간 인식의 한계를 확장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 경험의 실재성과 나아가 현실의 실재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실재는 얼마나 실재적이며, 가상은 얼마나 가상적인가?”라는 질문은 불교에서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던 것이다. 유식학에 따르면 인간의 대상인식은 세 가지 종류[삼류경(三類境)]가 있다. 그 첫 번째는 대상이 없이 발생한 인식, 즉 ‘독영경(獨影境)’이다. 이 인식은 꿈이나 환상, 환각처럼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 대상으로 삼아 발생한 인식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처럼 오류이다.

두 번째 대상인식은 ‘대질경(對質境)’이다. 이 인식은 대상 없이 발생하는 독영경과 달리 ‘어떤 것’에 의해 촉발되어 발생한 인식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근거가 없는 인식은 아니지만 그것은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니다. 유식학에서 사용하는 예를 통해 살펴본다면,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고 착각했을 때, 이때 ‘뱀에 대한 인식’은 대상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잘못된 인식이다. 이 인식은 눈에 들어온 정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의 형상에 대한 기억에 의해 왜곡된 인식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에 의해 왜곡된 인식,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허망분별이다.

그러므로 새끼줄을 뱀이라고 본 명백한 착각의 경우만 아니라 일상적인 인식, 즉 현상에 대한 인식은 모두 오류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 세상에 현상하는 모든 것이 이미지이지만 우리의 지각은 현실 속에 풍부하게 존재하는 이미지 중 극히 일부만 파악할 뿐이다. 지각의 감소성은 신체적 한계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지만, 틀에 박힌 개념이 개입할 때 더욱 배가된다.

예를 들어 빨간 장미를 보고 그것을 ‘빨갛다’고 인식하는 경우, 우리 눈에 지각된 ‘빨강’은 장미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우리가 그것을 ‘빨강’이라고 개념화하는 순간 오류가 된다. 왜냐하면 ‘빨강’이라는 개념은 ‘빨간 장미’라는 사태를 추상화하고 왜곡시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주관적인 인식에 불과하며 오류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대상에 촉발되어 발생했다고 믿는 현실 인식은 대질경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어떤 인식이 올바른 인식인가? 유식학에서는 ‘성경(性境)’을 올바른 인식이라고 주장하는데, 유식학의 새끼줄 비유에 따르면 새끼줄을 새끼줄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뱀’이라는 관념을 배제하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인식은 개념적 인식(비량)이 아니라 인식주관이 순수하게 수용한 감각에 대한 직접적 인식(현량)을 말한다.

모든 현상이 영구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물거품이나 환영처럼 무상한 것이라는 《금강경》 사구게가 무상한 현상 배후에 이데아와 같은 영원한 실체를 찾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현상의 가상성에 대한 지적이라면, 성경은 의식의 허망분별을 배제한 현상 그대로의 인식, 들뢰즈의 말을 빌린다면, 감각적인 것에서 서사를 배제하고 그 자체를 지각하는 인식일 것이다. 현실 자체는 그냥 떠다니는 이미지만 있을 뿐이며 어떤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서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지의 일부를 뽑아 조합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들뢰즈는 이처럼 어떤 인위적인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 충만한 상태를 ‘내재성의 평면’이라고 불렀는데, 이 상태는 유식학에서 말하는 ‘성경’과 흡사하다.

유식학적 분류를 따른다면 실재하지 않는 가상현실에 대한 인식은 독영경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상현실은 현실이나 꿈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르마끼르띠에 따르면 올바른 인식은 그 인식의 효용성에 의해 결정된다. 현실적 인식은 올바른 결과를 가져다주는 반면 꿈은 허황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다르마끼르띠에 따르면 독영경이 오류인 까닭은 실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른 결과를 가져다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르마끼르띠의 예를 든다면, 사막을 지나가는 사람이 신기루를 보고 오아시스라고 착각하여 달려가면 결국 물을 먹지 못하게 된다. 신기루에 대한 인식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오류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술에 의해 산출된 가상현실은 어떠한가? 가상현실이란 “효력 면에서는 실제적이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은 사건이나 사물”을 말한다. 그러므로 박영욱이 지적하듯이 가상현실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질문은 “가상현실은 허구적인 것인가 혹은 또 다른 현실세계인가?”이다. 현실세계에서 대상의 존재 유무만 놓고 판단한다면 현실세계에 대한 인식은 대상에 의해 촉발된 대질경으로, 가상세계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의해 촉발된 독영경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식학적 관점에서 볼 때 현실세계든 가상세계든 그 자체로 존재론적 층위가 결정되는 것 아니라 인식 태도에 따라 그 층위가 결정된다. 다시 말해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면 현실세계든, 가상현실이든 관계없이 ‘성경’이 될 수 있다. 대다수 학자들도 가상현실을 하나의 현실로 인정하고 있는데, 매체론적 입장에서 볼 경우에도 인간의 외부세계에 대한 지각이나 의사소통에서 매체가 갖는 역할에 주목할 경우 현실세계와 매체에 의해 창출되는 인위적인 세계 사이의 구분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에르 레비가 지적하듯이 가상화를 현실에서 가능성의 집합으로의 이행으로 본다면 현실성의 상실을 초래하겠지만 그 효과에 있어서 “현실화만큼의 철회 불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절차에 있어서 그만큼의 한정을 포함하고 있고, 그 노력에 있어서 그만큼의 발명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의 창조를 전달하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다. 또한 다르마끼르띠의 정의에 따라 판단해 볼 때에도 “효력 면에서 실제적인” ‘가상현실’은 현실과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

오히려 가상현실의 가상성은 실재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반대로 풍요롭고 강인한 존재 방식이며, 창조 과정을 확장하고 미래를 열어주며,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존재의 단조로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현실세계든 가상세계든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모두 가상에 불과하지만, ‘석녀의 아들’이나 ‘거북의 털’처럼 허무맹랑한 ‘독영경’이 아니라 들뢰즈가 지적한 대로 “가상현실은 가상으로서 충만한 현실”을 담고 있다.

붐은 디지털 정보 혹은 이미지에 대하여 불교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과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는 없으며 심지어 시간조차도 하나의 허구적인 가상일 뿐이다. 실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며 그것은 결코 실재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붐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칸트가 설정한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 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현실이란 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어차피 현실의 존재가 허구이므로 디지털 매체를 통하여 인간은 이러한 인식을 획득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벨슈는 자연과 인위적 세계의 구분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세계 자체(자연성)와 인위적 세계(인위성)를 ‘실제적 실재’와 ‘가상적 실재’로 대체하는데, 이 두 개념은 반성 개념으로서 상보적이며 현실적인 기능이 있다고 보고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가상현실은 현실 못지않은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 그것은 한갓 가상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가상현실은 전통적인 예술이 재현하는 미적 가상과 다른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진중권이 지적하듯이 가상의 제작이 디지털로 변화함에 따라 “‘현실’에 대한 예술가들의 느낌도 변해”왔다. 그가 지적하듯이 “현실과 가상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 두 세계의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는 것”이 미디어 예술의 근본 문제가 됨과 동시에 현실의 가상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 일어난 변화 중 인간과 예술에서 가장 큰 변화는 가상의 존재론적 지위의 변화일 것이다. 사진예술에서 가상의 기초로서 이야기되었던 원본 또는 현실은 디지털 예술에서는 전혀 의미를 갖지 않는다. 사진예술에서는 플라톤이 제기한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이 유효했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진짜’가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거나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 20세기 현대미술은 예술작품의 ‘진짜 같음’이나 예술작품이 제공하는 ‘시각적 즐거움’보다 예술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경험적 활동’으로 이해한다. 그 결과 서양예술에서 오랫동안 비평 기준이었던 ‘사실성(verisimilitude)’이 폐기되고, 경험 가능한 모든 것, 즉 감각적인 것이 그것이 사실의 반영인지 복제인지 아니면 변형인지와 무관하게 중요해졌다.

4. 디지털 예술의 새로운 지각적 특징

예술작품은 가상인 현실의 복제라는 점에서 플라톤의 철학에서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가장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었던 것과 달리, 불교에서 예술작품은 우리가 지각하는 현실세계와 존재론적인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불교적 관점에서도 예술작품은 현실세계와 마찬가지로 가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행위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가상의 제작이 손에서 기계로, 기계에서 전자로, 그것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함에 따라 ‘현실’ 자체가 다르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불교예술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까?

일찍이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사진 기술이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를 제거하고 원본의 유일성을 없앴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지만, 벤야민이 보기에 그것은 복제예술의 한계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벤야민은 사진의 미덕은 정신적인 것의 결여, 다시 말해 사진의 단순한 기계성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는데, 사진 기술은 그림보다 현실을 더 정확하게 모사하는 그 복제기술 때문이 아니라 예술에서 ‘미적 가상’을 제거한 점 때문에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미적 가상이란 예술작품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형상에 그치지 않고 배후에 있는 어떤 것을 구현하는 가상을 말하는데, 화가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형상화할 경우 그는 그 대상에 대한 도식을 그리는 것이지 결코 현실의 대상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진은 생각하지 않는 단순한 기계이기 때문에 도식이나 개념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지 않으며, 그 결과 사진의 이미지에서는 어떠한 도식이나 개념도 없다. 벤야민이 지적하듯이 회화에서 아우라가 발생하는 까닭은 복제가 불가능한 원본이기 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회화는 인간의 눈, 다시 말해 이미 도식과 개념이 전제된 인간의 눈으로 파악한 정신적인 형상을 표현하지만 사진은 그러한 정신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정신적인 어떤 것’이란 개념적 부가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그 자체는 ‘정신적인 어떤 것’이 없다. 항상 보고 마주하는 일상에서 아우라를 발견할 수 없듯이 사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초월적인 것, 혹은 정신적인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사진은 전통적인 화가의 그림과 달리 상징을 제거함으로써 이와 같은 현실의 공허함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들뢰즈는 영화의 움직이는 이미지가 사진의 정적 이미지보다 ‘내재성의 평면’에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디지털 매체도 그러한 탈서사적 이미지를 쉽게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은 기계적 장치를 이용하여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고, 혹은 이미지 자체를 인터페이스 장치를 활용하여 변화시키고, 특정 부분을 왜곡하거나 변형시키고 공간감을 왜곡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예술은 ‘어떤 것’의 가상이 아니라 그 자체 가상 이미지이며 이미지 배후의 구체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부가된 의미의 층, 다시 말해 서사가 배제되어 있다.

이 이미지들은 서사가 배제되었기 때문에 이미지 자체로 표상된다. 감상자는 더 이상 서사에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그 이미지와 마주하게 된다. 탈서사화된 이미지를 채우는 것은 감상자 자신의 몫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감상자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예술과 달리 감상자에게 열린 것이 된다. 디지털 예술의 상호작용성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감각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구상화가 제대로 감각의 논리를 구현하지 못하고 텍스트처럼 읽히기 때문에 감상의 과정에 개념과 지성의 작용이 개입하며, 이때 감상자가 경험하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텍스트라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디지털 매체에서 서사의 파괴는 미적 경험의 새로운 차원을 연다. 그것은 규정되지 않은 감각 경험 자체에 접근 가능하게 한다.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의 지각의 경험이 곧 ‘성경’인데, 들뢰즈는 이처럼 비담론적인 이미지가 이데올로기나 담론에 대한 위반과 전복이라는 위협적 세력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기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보았다. 벤야민이 사진이라는 매체가 예술이 될 때, 즉 ‘예술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사진예술’이 성립하게 될 때 사진의 미덕이 바로 미적 가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제거하고 예술작품의 의미 자체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본 것과 유사하다.

바이벨이 지적했듯이 디지털 예술에서 이미지는 이미지 혹은 예술 자체에 대한 반성적 관계를 지니며 메타 이미지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 경향은 회화의 서사성에서 벗어나 자기지시성, 즉 자연이나 현실에 대한 재현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의 가능성, 즉 순수한 형과 색의 조형적 잠재성을 탐구한 모더니즘 회화의 경향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매체가 가져다준 새로운 지각적 특징은 무엇인가? 디지털 예술가이자 이론가인 페터 바이벨(Peter Weibel)은 전통적인 예술이 정적인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디지털 예술이 동적인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는 전통적인 예술 담론이 정태적인 존재 개념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디지털 예술은 동적인 상황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태적인 존재 개념에 기초한 전통적인 예술 혹은 예술담론이 이미지와 독립된 참된 실재를 상정하기 때문에 화가의 의무는 그러한 참된 실재를 닮은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정태적인 존재가 불변의 실재, 혹은 본질을 전제하는 것과 반대로 동적인 이미지는 이처럼 그런 불변하는 실재를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디지털 이미지의 리얼리즘은 전통적인 예술의 리얼리즘과 다를 수밖에 없다. 레프 마노비치 역시 “컴퓨터로 만들어진 합성 이미지는 우리 현실을 열등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이벨은 “디지털 예술은 이미지의 변형 가능성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불변적이고 정태적인 존재 혹은 이념 등 실체의 표현이라는 미적 가상의 논리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면서 이미 변형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이미지의 경우 그 원본상의 진실이 무의미해질 수 있기 때문에 미적 가상에 바탕을 둔 예술 담론과 상충되는 새로운 미학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디지털 매체의 발명은 단순히 새로운 예술 양식의 창조에 그치지 않고 예술 개념 자체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예술은 무엇을 복사한 것인가, 무엇의 가상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상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우리의 경험이 감각적으로 매개되었듯이 예술작품의 수용이 디지털 매체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디지털 예술은 ‘열린 창’이 되기를 그만두었다. 그것은 현실을 복제하는 창틀이 아니라 새로운 가상세계를 보여주는 프레임이기 때문에 프레임 자체가 의식되어도 예술작품의 감상에 조금도 방해되지 않는다. 순진하게 예술작품에 재현된 사태가 현실이라고 믿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이 현실이라고 눈속임할 필요가 없이 예술작품 자체가 매개된 것임을 그대로 노출하고 그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의 대중은 더 이상 ‘미디어에 몰입하는 것’과 ‘그것의 매개성을 의식하는 것’ 사이에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관람객은 가상 앞에서 그것이 실재하는지, 아니면 허구적인지 굳이 가리려 하지 않는다. 이 존재론적 중립 속에서 대중은 때로는 허구를 실재로, 때로는 실재를 허구로 지각하면서 기꺼이 실재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제3의 존재층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 디지털 예술이 보여주는 탈서사적 이미지는 가상현실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의 존재성을 드러내면서 가상의 가상성에 대한 자각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불교적 수행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5. 디지털 시대의 불교예술의 가능성

세속화된 세계에서 종교적인 것의 의미가 퇴색함에 따라 현대미술에서 종교예술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전통적인 종교미술에서 종교적인 의미는 주로 상징을 통해 전달되었다. 전통적인 불교예술 역시 상징들의 체계이다. 상징은 종교적 서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감추어진 기호로서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엘리아데가 지적하듯이 현대의 종교 경험은 전통적인 종교 언어로 표현되기 어렵다. 예술가들은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며 전통적인 종교 이미지나 상징에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불교미술은 어떠한가? 불교를 미적으로 수용하고 표현하려는 대중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불교예술은 여전히 전통적인 표현에 머물러 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제작되는 불교예술은 거의 대부분 과거의 도상을 그대로 복제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차용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시키는 소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차용된 도상은 정신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을 분리시키고 의미를 예술작품 외부에 두기 때문에 전통적인 불교예술이 담고 있었던 정신성을 표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미적 표현마저 구태의연하다. 날로 증가하는 불교에 대한 미적인 것의 침투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매체는 기존의 불교예술을 대중화하는 수단으로 겨우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불교예술에 새로운 접근 방법과 형식, 내용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디지털 매체의 특성을 적용한 불교예술 작품은 드물다.

전통적인 종교 언어나 종교적 이미지, 상징의 실패는 새로운 종교 언어, 새로운 종교적 이미지의 출현을 재촉한다. 새로운 매체는 불교예술에 종교적 상징의 제작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을 어떻게 불교적으로 활용하고 불교적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디지털 이미지는 서사의 파괴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움직이며 비예측적이며 비재현적인 디지털 이미지는 기존의 서사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의미화 이전의 감각 경험을 현시한다. 따라서 디지털 이미지의 감각성은 가상의 경험이 아니라 철저하게 서사가 배제된, 다시 말해 분별적 사유 활동을 없앤 ‘감각적인 것’ 자체의 인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가상세계의 가상성은 서사의 파괴로 인하여 ‘몰입’과 ‘가상의 가상성에 대한 자각’을 가능케 한다. 몰입의 체험에 대하여 마리 로르 라이언은 가상현실은 몰입적이고 상호작용적 경험이라고 보았으며 마이클 하임은 “가상환경은 사용자를 풍경과 음향 및 그 환경의 특수한 촉감 속에 푹 빠지게” 하는 것이며 “몰입은 가상세계에 현전하는 느낌, 즉 물리적인 입력과 출력을 넘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라우는 몰입은 “심적으로 빠져들어 가는 일” “보이고 있는 것에 비판적 거리가 소멸해가는” 특징을 띠며, 발생한 일에 점차 감정적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데이비스는 “안과 밖 그리고 마음과 몸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공간에서 나타나는 육화된 의식으로서, ‘세계−내−존재’에 대한 자아의 주관적 경험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시공간적 맥락이 만들어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연의 원형적 양상들과 내적인 심리적 공간을 동시에”라고 관련시키고 있다. 이런 목적을 위해 최대한 혼자서 몰입에 참여하는 일, 즉 이미지 세계 안에서 주관적 경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라우는 데이비스의 ‘삼투’가 완전히 새로운 현실, 이미지 세계 안에서 거의 모든 몰입공간의 역사에 육체적^정신적 현전을 통한 초월의 계기를 만들어내는 대안현실들을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관조적 인상, 심지어 명상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효과가 작품 수용에 있어 혁신적인 측면이라고 보았다. 그라우가 지적하듯이 몰입은 이전의 예술작품의 중요한 요소이자 비판적 반성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던 ‘미적 거리 두기의 소멸’을 가져왔다. 이로써 우리는 몰입의 경험을 통해 이미지 공간 안에서 이미지와 직접적인 접촉을 하고, 기존의 예술형식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촉가성이라는 지각 방식을 체험하게 된다. 나아가 이전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체험은 관객에게 좀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몰입의 경험은 자칫 컴퓨터 게임처럼 감각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매몰을 가져올 수 있다. 사이버 공간은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이기 때문에 보편적 의사소통을 결여한 자폐적 공간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다시 말해 사이버 공간의 이미지들은 타자성을 무시한 상상계로의 후퇴라는 정신병적 징후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디지털 이미지는 감각적인 것을 통한 초월적 경험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명상적 체험은 디지털 예술이 가져온 새로운 경험이다. 또한 가상의 가상성에 대한 체험은 ‘자각’이라는 불교적 수행을 일깨운다. 디지털 예술에서 매개성은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매개에 대한 자각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 역시 매개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데, 이 방법은 불교수행을 대중화할 수 있는 탁월한 방식이다.

디지털 이미지 혹은 가상현실의 세계가 비물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그러한 특징은 예술의 영역뿐 아니라 일상적인 지각 체계와 의사소통체계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와 단절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지만, 불교예술은 과거의 전통에 머물지 말고 디지털 예술의 가능성과 한계를 주의하면서 새로운 매체를 불교적 체험을 확장시키고 심화시키도록 새로운 혁신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


명법 / 서울대 강사.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동 대학원 미학과 졸업(석사^박사학위 취득). 1993년 출가, 운문승가대학 졸업. 현재 운문사 강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과 강사.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미학의 역사》(공저) 등과 〈송대 예술관에 끼친 선종의 영향〉(박사학위 논문) 등 논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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