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빔밥을 좋아한다. 누군가가 모처럼 한턱 내겠다면서 뭘 먹고 싶은지 물으면 ‘비빔밥’이라고 답하곤 한다. 그럴 때면 상대는 조금은 서운해하는 표정이다. 모처럼 한턱 쏘겠다는데 ‘고작 비빔밥’이냐는 표정이다. 그러면 나는 한 단계 높여서 ‘돌솥비빔밥 먹자’고 한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뜨거운 돌솥이 내 앞에 놓이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즐겁다. 나무로 된 뚜껑을 열면 하얀 밥 위에 색색의 나물들을 올린 화려한 자태를 보면 저절로 군침이 돈다. 맛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미학적으로도 완벽하다. 

혼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할 때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꺼내어 대접이나 양푼에 고추장 넣고 비비면 한 끼 식사로 그만이다. 두 가지 이상의 레시피만 있으면 무엇으로도 비빔밥이 된다.

갓 지은 밥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은 것을 비빔밥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이것을 최고로 친다. 갓 지은 밥의 구수한 향기와 참기름의 고소한 향과 고추장의 매운맛이 어우러진 비빔밥은 먹고 돌아서도 또 먹고 싶어진다. 

여름날엔 다양한 비빔밥이 만들어진다. 텃밭에서 금방 뜯어 온 상추와 쑥갓, 치커리를 뜨거운 밥에 넣고 고추장 한 숟가락 넣고 비빈다. 조금 억세다 싶은 상추와 쑥갓 등은 뜨거운 밥의 열기에 기가 죽어 보드랍게 되어 먹기에 좋다. 커다란 양푼에 비벼서 온 식구가 머리 맞대고 같이 먹을 때면 가족이 있어 참으로 든든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공부하느라 가족과 떨어져서 외국에서 몇 년 동안 생활해온 딸아이는 혼자 밥 먹는 것을 너무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양푼에 비벼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비빔밥을 먹을 때 너무너무 행복하다면서 눈물까지 글썽인다.

또 여름엔 총총 썬 열무김치에 된장찌개를 넣고 비빈 열무된장비빔밥도 맛있다. 새콤하게 잘 익힌 열무와 된장찌개의 절묘한 조화는 씹을 시간도 없이 ‘꿀꺽’ 하고 넘어가 버린다.

어느 날, 격을 갖춘 비빔밥이 먹고 싶어 부지런을 떨었다. 콩나물을 데쳐 무치고, 고사리와 도라지도 기름에 볶고, 오이를 채 썰고, 무생채를 만들고, 당근을 채 썰어 기름에 볶았다. 이렇게 준비된 레시피를 청잣빛 대접에 돌려 담았다. 문득 오늘 내 마음은 어떤 레시피로 채워져서 흐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날마다 어떤 레시피로 채워져서 나를 끌고 가는 것일까?

마음의 비빔밥을 만든다면 어떤 레시피를 올릴 것인지 궁금해졌다. 커다란 마음그릇에 담긴 것들, 내 마음속의 이런저런 감정들을 ‘레시피’로 칭하고 우선 한번 정리해보았다.

기운을 주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레시피는 행복, 기쁨, 황홀, 유쾌, 상쾌, 달콤, 고요, 환희, 즐거움, 찬탄, 감동, 감사, 탄생, 그리움, 열정, 안락함, 사랑, 맑음, 밝음, 명쾌, 자애, 용서, 희망, 평온, 가벼움, 믿음, 알아차림 등이다. 

기운을 빼앗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레시피는 고통, 성냄, 외로움, 두려움, 어리석음, 탐욕, 불쾌, 아픔, 좌절, 분노, 슬픔, 원망, 무상함, 괴로움, 우울, 절망, 어둠, 무기력, 불신, 의심 등이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는 레시피는 고독함, 느림 등이다. 유식(唯識)에서는 고독함을 두고 나쁜 정신작용이라고 하지만 나는 고독함 속에는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그런 에너지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부터는 마음으로 날마다 점심(點心)엔 비빔밥을 먹는 것이다.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점심은 그 단어를 음미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비빔밥은 실제 내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마음 비빔밥에 쓸 레시피는 굳이 찾지 않아도 저절로 갖추어지곤 했다. 그런데 내가 비빔밥을 만든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레시피를 선택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어느 날은 마음그릇에 상쾌한 바람 한 줄기를 담고 행복과 기쁨을 담은 비빔밥을 맛있게 먹기도 했다. 마치 고추장과 참기름만 넣은 비빔밥처럼 담백한 맛이다. 또 어느 날은 화단에 핀 진달래 한 송이를 담고 감사와 찬탄과 즐거움을 담은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이 정도면 호사스러운 비빔밥이다. 희망과 열정과 찬탄을 넣은 비빔밥에는 반드시 고요 혹은 느림을 첨가해야 한다. 까닭 없이 들떠서 허둥거리는 것도 마음 수행엔 좋지 않다. 이렇게 날마다 기분 좋은 비빔밥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기운을 주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레시피를 몽땅 다 넣고 비빔밥을 만든다면 어떤 맛일까? 필시 히로뽕(?)을 맞은 것처럼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내 생각이 틀렸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선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성의 순간에 시공간을 잊어버리고 마치 우주가 폭발하는 듯한 에너지를 느꼈다고 했다. 내 몸도 마음도 사라진 상태, 그런 상태를 경험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긍정의 레시피를 전부 넣고 만든 비빔밥을 먹고 몸과 마음이 사라지는 그런 순간을 나도 경험해 보고 싶다.

현악사중주나 첼로 연주 등 그런 음악을 듣고 나서 만드는 비빔밥엔 대체로 황홀과 열정과 감동이 주재료로 들어가고 약간의 고독감이 가미되어 만들어진다. 고독감이 들어가서 더욱 맛있는 비빔밥이 되기도 한다. 항상 웃고 다니는 것도 좋지만, 약간의 우수와 우울을 섞는 것도 멋스럽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분노와 원망과 슬픔이 담긴 비빔밥이 나왔다. 이런 밥을 어떻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가? 분노와 원망과 슬픔으로 만든 비빔밥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으련만 그것을 하루 종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보고 있다. 그러다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슬그머니 비워 버린다. 이런 날은 점심을 건너뛰어야 한다. 마음 그릇에 담긴 분노, 원망, 절망을 계속해서 주시하여 설 자리를 주지 않아야 한다.

때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고통에 시달릴 때도 있다. 이때는 마음그릇이 이미 딱딱한 돌처럼 굳어져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한다. 지켜보는 것도 순조롭게 되지 않는다. 호흡과 호흡 사이는 스타카토처럼 짧게 끊어진다. 다음날도 계속되면 마음그릇은 새파랗게 질린다.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지만 갈 곳도 숨을 곳도 없다.

문득 자신을 죽음이라는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에너지가 담긴 레시피를 몽땅 집어넣고 만든 비빔밥을 먹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떠오르는 부정적인 레시피들을 객(客)처럼 그냥 떠나보내면 그만인데, 주인처럼 마음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떤 날은 야외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가 생각지도 않은 레시피로 비빔밥 한 그릇을 뚝딱 만든다. 흘러가는 흰 구름 한 조각을 잡아오고,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그물처럼 일렁이는 햇빛과 연못의 분홍연꽃과 푸른 연잎으로 비빔밥을 만든다. 내 안에 자연풍광을 들이는 것이다. 이것 또한 색다른 맛이라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는 그런 메뉴이다.

때로는 고요와 느림과 비움으로 인해 마음그릇이 이미 충만할 때도 있다. 이때는 마음의 고요함을 지키고 싶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음의 속도가 느리면 호흡 또한 느림의 속도에 맞춰서 내 안을 들고 난다.

수십 가지 아니 수백 가지의 비빔밥을 척척 만들어내는 마음은 훌륭한 요리사요, 화가요, 음악가요, 마술사다. 이젠 내가 원하는 행복한 비빔밥을 만들도록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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