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열린논단 일정

주제 : 어려워야 불교인가-한국불교의 문제점과 과제

발제 : 김영명 박사(한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시간 : 2012년 7월 19일(목요일) 오후 6시

장소 : 불교평론 세미나실(강남구 신사동)약도 참조

문의 : 불교평론 편집실(739-5781)

별첨 ; 김영명 교수 저 <한국불교 이것이 문제다> 보도자료

협조 :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본 메일을 전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불교평론 열린논단(7월 19일)에 초대합니다.

계간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토론광장 <열린논단> 7월 모임에 선생님을 초대합니다. 이번 모임 주제는 ‘어려워야 불교인가-한국불교의 문제점과 과제’입니다. 발제는 정치학자 김영명 박사입니다.

조금 의아할지 모르겠습니다. 열린논단의 주제가 사뭇 도발적인 데다 발제도 불교전문학자가 아닌 정치학자라니. 그렇습니다. 이번 논단은 도발적입니다. 한국불교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 과제 몇 가지를 든다면 전문학자들도 잘 모르는 불교가 넘쳐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라는 말 자체가 다양한 교설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니냐 하는 지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불교는 선불교처럼 깨달으면 부처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하면 불보살의 원력과 가피를 강조하는 타력불교도 있습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무엇이며 유식과 중관은 또 무엇인지, 공부를 하다보면 머리가 아파 돌아서고 싶은 것이 불교입니다. 솔직하게 사정을 말한다면 처음부터 기복불교에 빠진 사람은 그렇다 치고, 열심히 교리공부를 한다는 사람도 갈수록 오리무중인 것이 불교공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오랜 역사에 걸쳐 광대한 지역에서 발전해온 불교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불교라 하더라도 그것이 불교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쉬워야 실천도 가능하고 확장도 가능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백화점처럼 방만하게 펼쳐놓은 교학체계에 대한 반성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교상판석을 시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논단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최근 거의 독학으로 불교를 공부한 한 지식인 불자를 초청해 그 눈물겨운 불교공부 고군분투기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그가 불교를 해보니 이런 것이 어렵더라, 이런 것이 문제더라 하는 얘기를 솔직하게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발제를 해주실 ‘초보불자’는 한림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김영명 박사입니다. 김교수는 최근 자신의 답답한 불교공부 과정을 ‘이뭣고’를 패러디한 제목의 <이게 도무지 뭣하는 소리인지 모르겠고>라는 책을 썼습니다. (김교수가 어떤 분이고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별도로 붙이는 출판사 보도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의도는 불교전문가들끼리 뭐라고 말하기 이전에 비전문가가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면 어떤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항상 문제적 주제를 내걸고 진지한 발제와 토론으로 참가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는 불교평론 열린논단에 여러분의 깊은 관심과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참고로 한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열린논단 상반기 일정은 이번 7월 모임이 끝입니다. 8월은 휴가철이라 쉬고 9월은 만해축전 학술세미나로 대체됩니다. 얼굴 잊지 않도록 많이 나오셔서 안부 물으시기 바랍니다.

불교평론 편집위원회 /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합장

김영명 교수 저서 소개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김영명 지음 ∥ 인문·종교 ∥ 2012년 5월4일 ∥ 신국판 변형 ∥ 284쪽 ∥ 15,000원 ∥

ISBN 978-89-5769-129-8 ∥ 담당자 이민재 (010-9551-9395)

 

 
스님들은 못 쓰는 불교 이야기

 
도서관이나 책방 서가에 진열된 불교 서적 가운데 아무거나 한권 골라 펼쳐보자. 대개 이름난 승려나 불교 전문가가 쓴 책일 것이다. 그 안에는 물론 좋은 말도 있겠지만 대체로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 어렵거나(입문서), 두루뭉술하거나(비판서), 뜬구름 잡는 듯한(수행서) 소리로 채워져 있다. 1600년의 나이테, 1000만 불자를 자랑하는 한국 불교가 한편에선 이해불가에 염세적인 종교, 그들만의 골방종교라는 비판을 듣는 데는 이런 까닭도 있지 않을까? 초보자에게 친절한 입문서,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비판서의 부재 말이다.

사람들은 궁금하다. 불교란 도대체 무엇일까, 저 많은 불교 경전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뭘까, 무상이니 무아니 공이니 중도니 하는 것들도 설명을 들어도 알 수가 없네, 수행참선에만 정진하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고 보살이 될 수 있는 걸까, 무소유를 말하면서 국장 뺨치는 다비식은 왜 여는 걸까? 등등. 그런데 불교의 식자들은 이런 당연한 물음들에 답을 주지 않는다. 초보자의 수준 낮은 질문이라 상대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깊은 불심에 이르지 못한 중생들은 어쩌란 말일까. ‘한국적 정치학’에 천착해온 정치학자이자 4년차 초보불자인 한림대 김영명 교수 역시 이런 점에 답답함을 겪었고, 여기에 공감할 독자가 적지 않다는 판단에 이 책을 썼다. 『이.뭣.고』는 큰스님들이 보여주는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지는 않다. 대신 저자의 직업적 논리벽과 정합성을 동원해 불교 핵심 원리를 군더더기 없이 추리고 이를 잣대로 오늘날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설득력 있게 지적해낸다.

 
말하자면 이 책은 한 전문 분야에 대해 문외한인 지식인이, 그 전문 분야를 처음 접하면서 자기가 가진 지식을 통해 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한국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한국에 처음 와서 느끼는 강한 인상이 한국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을 수도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 너무 익숙한 사람은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놓치기 쉬운 한국의 특징이나 문제점들을, 한국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이 바로 그 모른다는 까닭에서 더 잘 짚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7쪽)

  불교의 핵심은 ‘나와 남의 괴로움 제거’

불교란 무엇일까? 망망대해를 떠도는 가르침들 가운데 저자는 3법인과 4성제를 불교의 본질로 꼽는다. 5계나 연기법, 윤회관 같은 다른 교리들이 대체로 인류 보편적 윤리규범이거나 타종교, 혹은 불교 이전의 인도철학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데 비해 이 두 가지 세계관은 불교를 통해서만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모든 것은 변하고, 따라서 변하지 않는 자아도 없다. 모든 것은 괴롭다’라는 명제를 인생(존재)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수행(8정도)을 통해 나와 남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을 불교의 핵심으로 파악한다. 괴로움 해소의 과정은 종교로서 불교의 매력이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 제거는 절대자를 향한 믿음과 간구가 아니라 수행을 통한 지혜 터득과 타인을 향한 자비행의 결합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불교는 자신들의 가르침에 얼마나 충실히 복무하고 있을까?

  초보자에게 불친절한 종교

저자의 불교 입문기는 한국 불교가 기초 교리에서부터 일반 중생이 접근하기 까다로운 종교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무상은 덧없음이요, 무아란 자아가 없음이다” 따위의 모호한 설명만 되풀이하는 고장 난 레코드 같은 교리해설, 불립문자를 뽐내지만 정작 육경, 육근, 사념처 같은 이해하기 힘든 한자어가 그득한 가르침, “그것은 없다. 이름하여 그것이라 한다”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등등 보통 사람은 알 길 없는 알쏭달쏭 선문답 놀이 같은 것들은 한국 불교를 좀 더 신비롭게 보이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중생들, 특히 초보자들에게는 일주문 진입을 방해하는 암초일 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전문적인 지적 훈련을 한 사람임에도 기초적인 교리를 이해하는 데 애를 먹어야했다. 저자는 교리 대중화를 제안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일화를 빌려 ‘돈오’를 ‘번개 깨달음’으로, 젊은 부부와 나이 든 부부의 부부싸움을 빗대 ‘점수’를 ‘쌓아 깨달음’으로 쉽게 풀이한다.(201~207쪽) 이처럼 교리 대중화란 뜻 모를 문자 좀 그만 쓰고 중생의 언어로 분명하게 이야기해 달라는 말이다.  

중생구제에 관심 없는 한국 불교

또한 저자는 한국 불교가 대승불교를 자처하면서도 대승의 가장 큰 자산이라 할 중생구제를 말로만 떠들 뿐 실제로는 정부지원금이나 의전수준에만 더 관심을 쏟는 ‘종단구제’에 빠져있다고 지적한다. 중생의 고통 호소에는 귀를 닫고 템플 스테이 예산 삭감 같은 문제가 터졌을 때나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이다. 깨달음에 관해서도 산사에 박혀 ‘혼자만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한국 불교의 수행법은 취미생활에 불과하다고 꼬집는다. 저 혼자 진리의 눈을 얻는 것은 등산이나 꽂꽂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선후관계로 보는 견해에 반대하면서 한국 불교가 자리이타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굳이 소승불교와 구분 짓고 싶다면 실질적인 중생구제 방편이 선행돼야 한다고 충고한다. 56억7000만 년 뒤에나 온다는 미륵정토를 이야기할 게 아니라 오늘의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횡포에 맞서 중생의 목소리를 대변하라는 말이다. 또한 법공양으로만 뿌듯해하지 말고 사회복지와 구호활동에 직접 나서 달라는 말이다.

 
자력신앙이든 타력신앙이든 신앙만 강조하는 점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과 중생구제는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이명박정부 들어 기독교 편향 정책을 펼친 정부와 불교계, 특히 조계종 종단 사이의 마찰이 심했다. 정부 잘못이 단초가 된 점은 명백했고, 이에 대해 항의하고 정책 변경을 요구한 조계종의 행동도 정당했다. 그러나 (…) 불교계가 그렇게 흥분하고 나선 것은 역시 그것이 자기 이익을 해치기 때문이었다. 한국 불교계가 다른 어떤 사회적인 공익을 위해 또 사회정의를 위해 그렇게 나선 적이 있었던가? (…) 티베트 승려들은 독립이나 자치권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베트남 승려들은 조국에 민주주의를 심기 위해 분신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한국 불교는 무엇을 했을까? (…) 개신교와 천주교는 민주화 투쟁을 하고 인권향상에 앞장서고 못 먹는 자를 위해 무료 급식소를 만드는데, 불교는 그런 일을 왜 안 할까? 여러 가지 까닭이 있겠지만, 불교 교리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고, 특히 한국 불교의 성격이 더 문제라고 본다. 말로만 대승이지 진정한 대승이 아니란 말이다. (236~237쪽)

 
 
무속인이 보살로 불리는 것이 싫다면

이 책은 또 한국 불교가 지나치게 신비화되거나 기복 종교화되는 현상에도 일침을 가한다. 저자는 종교의 기복적 성격을 일정부분 긍정하며 불교 역시 대중 종교인 이상 위로와 고통해소 측면에서 기독교의 적극성과 실용주의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자는 오늘날 무속인이 보살로 불리고 불상이 합격기원의 제단으로 전락한 상황을 개탄하며 그 이면에는 지나친 신비주의가 맞물려 있다고 지적한다. 불교가 신비하고 어려우니깐 중생들로서는 그저 복비는 데만 매달리고 일각에서 절이 점집과 다름없게 취급되는 기복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처사님 환영합니다” 대신 “출입금지” 팻말을 붙인 사찰 선방의 폐쇄적 신비주의가 중생을 기도와 염불 위주의 기복신앙으로 내몰고 있는 셈인데, 이 역시 교리 대중화와 중생구제 방편이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생활인의 일상에 맞는 수행법을 요구한다.


불교는 평화와 행복의 종교다

군데군데 날선 비판이 등장하는 탓에, 이 책이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한국 불교를 바라본 게 아니냐는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불교와 인연을 맺은 이후 『법구경』과 『수타니파타』를 읽을 때마다, 고즈넉한 사찰 경내를 거닐 때마다, 또 소박한 명상에 잠길 때마다 어디서도 얻지 못한 차분함과 평온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요컨대 불교는 염세와 고행의 종교가 아니라 평화와 행복의 종교다. 다만 저자는 자신처럼 전문적인 공부쟁이조차 난코스로 여길 만큼 어지러운 산문 진입로와, 석가모니의 미소를 압도하는 화사하고 거대한 불상이 이 매력적인 종교를 중생과 분리된 ‘그들만의 불교’로 만들고 있다는 판단에 이 책을 썼다. 이런 생각이 저자만의 것은 아닐 게다. 불자들과 교단이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해 더 많은 중생들이 좀 더 쉽게 불교와 인연을 맺고 행복해지길 기대한다.

 
 
 
저자 소개

이 책을 쓴 김영명은 서울대학교와 뉴욕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한 정치학자다. ‘미국 물’ 먹은 학자답지 않게, 한국의 유별나고 드센 영어 광풍에 맞서 ‘한글운동권’의 일선을 10여 년째 지키고 선 어기찬 한글운동가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시종일관 한국 불교에 제기하는 “쉬운 이야기를 왜 이렇게 어렵게 쓰나?”라는 불만은 사실 저자가 한글운동에 팔 걷고 나선 이유와 맥을 같이한다.

지천명을 한참 넘길 때까지 불교와는 별 인연 없는 삶을 살았지만, 세 해 전 산책 삼아 삼성동 봉은사 경내를 거닐다 발견한 『금강경』 강의 공고가 다리가 돼 불자의 길로 들어섰다. 뒤늦게 시작한 불교 공부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한국 불교의 역사가 1600년을 헤아린다는데 한글로 된 입문서의 수준은 간단명료함에서 영문교재에도 한참 못 미쳤다. 한자 남용과 모호한 표현들이 번번이 이해를 가로막았고 이름난 이들의 선문답은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부처와 보살과 아라한의 깨달음은 차고 넘치는데 중생을 위한 깨달음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교리뿐만이 아니다.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라며 자비와 중생구제를 입버릇처럼 외지만 정작 이를 위한 실천은 아득했다. 결국 오늘날 한국 불교가 입문자에게 한없이 불친절하며 중생과 따로 놀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저자를 이 책으로 이끈 셈이다. 일종의 외부 전문가가 몇 해 동안 내부에 들어가 관찰하며 내놓은 한국 불교 진단서라고 봐주면 좋겠다.

한림대 국제학대학원 원장, 한글문화연대 대표를 지냈고 현재는 한림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가르치며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직을 맡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과 외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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