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교에 대해 잘 모른다.

문외한(門外漢)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지눌 스님과 법정 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따뜻함과 흙에 떨어진 나 자신의 마음을 찾는 기쁨을 가끔 가져 본다. 이런저런 세상살이에 지칠 때면, 불교방송을 통해 법정 스님의 법문을 듣는다. 스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올림픽 표어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그러한 삶에 강한 저항감을 느낀다는 그런 말씀이었다.

올림픽 표어, “보다 빠르게, 보다 높이, 보다 멀리.” 정확히 말하면 ‘보다 멀리’는 ‘보다 강하게’가 맞다.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보다 강하게’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를 좀 더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빠르게, 높이, 멀리만 향해 가는 사회는 사람들을 지치고 하고, 각박하게 만든다. 그래서 미혹한 나 역시 법정 스님처럼 큰 저항감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법정 스님과 나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나는 학교 선생이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저항감을 학교에서 그리고 학교와 관련된 일들을 통해서 많이 느낀다. 최근 학교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학교폭력 문제이다. 학교폭력의 문제는 미화될 수 없는 일이다. 영화의 한 대사처럼, 폭력이 옳다면 사랑은 설 자리가 없을 게 분명하다.

학교폭력은 비극이다. 순수해야 할 어린아이들이 인간에게 할 수 없는 끔찍한 행동을 가까운 친구를 대상으로 죄책감 없이 저지르는 모습은 말법(末法) 시대의 단면처럼 보인다. 말법의 시대, 더불어 기뻐하고, 더불어 슬퍼하는 자비심이 발휘되지 되지 못하는 시대일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일깨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한 깨우침에 보조(普照) 스님은 이 시대의 선지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린아이들을 깨우치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악행을 당장 처벌하고 분리하려고만 한다. 학교폭력 문제에 관한 기사의 댓글을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으며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더 이상 청소년과 성인을 차별하여 처벌해서는 안 되고, 특별히 보호해서도 안 된다는 글이 주된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올해 정부가 부랴부랴 내놓은 학교폭력 근절 대책에 잘 담겨 있다. 즉, 학교폭력 가해 학생을 등교 정지시키고, 학교 생활기록부에 5~10년간 가해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속된 표현으로 빨간 줄을 긋고, 대학입시에 불이익을 주는 방식의 대책이다. 어쩌면 이러한 사회적 공감대와 정부의 조치는 이런저런 논설보다는 당장 심장에 꽂힌 독화살을 뽑아야 하는 절박감에서 나온 것일 수 있을 것이다. 학교폭력의 피해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쌀 한 톨에도 우주적 인과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무조건 엄중한 처벌로 아이들에게만 폭력의 책임을 돌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여섯 살 난 아들이 있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목욕시키고 엉덩이를 툭툭 치며, “우리 아들, 섹시한데.” 하며 안아 준다. 여섯 살 난 아들이 아빠인 내가 목욕을 하고 나오면 엄마처럼 똑같이 말한다. 아이를 혼내야 할 것인가? 어린아이들에게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멀리, 더 강하게만 가르쳐 놓고, 또 그래야만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어 놓고 아이들을 독화살로만 인식하는 것은 염치가 없어 보인다.

보조 스님이라면 어찌 생각하셨을까 생각해 본다. 보조 스님이 살던 당시는 오늘의 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전국적인 변란이 끊이지 않았고, 불교는 팔관회를 비롯해 향락에 찌들었으며, 승려들은 불교의 특권 아래 교(敎)니 선(禪)이니 하면서 싸우던 서로의 어리석음과 미침(癡, 狂)을 다투던 시대. 그야말로 스님 말씀대로 ‘불난 집[猶如火宅]’이었다.

불난 집의 시대 보조 스님의 해결책은 “땅으로 인해 넘어진 자는 땅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는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불성에 대한 자각,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말법의 시대는 정법의 시대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을 신뢰할 수 없는 시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도덕성을 신뢰하면서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불교는 보조 스님이 보기에는 모자라고 어리석고 미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고 보조 스님은 시대를 서두르지 않는다. “얼음 언 연못이 온전히 물인 것을 알았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바로 부처인 것을 깨달았지만 법의 힘을 빌러 익히고 닦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태어난 지 10여 년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부처나 공자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이들에게 너무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공자도 나이 칠십에야 비로소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가 도덕적인 잣대에 어긋나지 않는다[從心所慾不踰矩]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아이들보다 20년 이상을 더 산 나는 아이들보다 더 바르게 살고 있는지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조금만 아이들을 느리게, 낮은 자세로, 가까이서 따뜻하게 지켜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 천천히 가는 법, 낮은 자세로 따뜻하게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 어른들이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다음에 아이들을 혼냈으면 좋겠다. 적어도 연기의 깨달음과 일체개유 만유불성(一切皆有 萬有佛性)을 신뢰하는 불자들은 그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