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종교가 특정 사회에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대중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사회 구성원들 중 다수 대중이 귀의하고 믿고 의지할 때, 비로소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대중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그 사회 구성원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일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요익중생(饒益衆生) 또는 중생구제라고 표현한다.
중생구제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지혜를 일깨워서 스스로 괴로움과 액난을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적 지원을 통해서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과 액난을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방법이다. 전자를 지혜행(智慧行)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복덕행(福德行)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불교사회복지는 “교단의 하위체계인 종단, 교구, 사찰 또는 그 구성원인 승가와 재가불자가 복덕행을 실천하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복지(社會福祉)는 서구에서 만들어진 ‘social welfare’라는 단어를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사회복지는 ‘사회(社會)’와 ‘복지(福祉)’라는 두 단어가 합해진 것으로 두 개념 모두 불교에서 유래되었다. 사회는 ‘법사회(法社會)’ 즉, ‘법의 결사체’라는 단어에서 ‘다르마(dharma)’를 의미하는 ‘법(法)’이 생략된 것이다. 법사회는 중생사회와 구별되는 ‘출세간(出世間)’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세간(世間)’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법’을 생략한 것이다.
복지(福祉)는 본래 ‘복덕지혜(福德智慧)’를 축약한 표현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을 줄이면 ‘복지(福智)’가 되는데 서구의 사회복지 개념에서는 지혜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智)’를 ‘지(祉)’라 바꾼 것이다. ‘지(祉)’는 ‘하늘에서 내리는 복’을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복(福)’이라는 글자는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복지(福祉)’라는 표현은 주로 물질적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다.
사회복지는 물질적으로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사회보장과 공적부조,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적 봉사(human service)’ 혹은 사회적 서비스 등의 방법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불교의 ‘복지(福智)’가 추구하는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복지 개념을 불교가 수용하면서 서구적 의미의 물질적 충족과 정신적 지혜를 증득하는 중생구제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는 불교사회복지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현대국가의 사회복지제도는 불교적 개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법론상으로는 유사성이 많다. 이런 유사한 방법들이 부처님 재세 시의 인도부터 불교를 수용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불교사회복지의 이론체계 형성을 위해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 글에서는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에서 불교계가 어떤 형태의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였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하였다.


2. 인도의 불교사회복지

1) 부처님 당시의 불교사회복지
부처님 당시에 현대와 같은 사회복지 활동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에 대하여 베푸는 것은 복전(福田)의 하나로 장려되는 복덕행(福德行)의 하나였다. 복덕행이 사회복지 개념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으나 그 내용과 실천 방법이 현대사회의 복지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불교에서는 경전(敬田)과 비전(悲田) 등 이복전(二福田)이 등장한다. 경전은 불법승 삼보에 대하여 공양을 올리는 것이고, 비전은 빈궁자나 병자 등에게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확대되어 공경복전, 보은복전, 빈궁복전을 삼복전(三福田)으로 분화되었다. 이 중 빈궁복전(貧窮福田)이 현대적 개념의 요보호(要保護) 대상자를 구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도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라”고 설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구휼하는 보시행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장자여, 그러면 어떤 것이 보시에 대해 관대함을 구족함인가? 장자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인색함의 때가 없는 마음으로 재가에 살고, 아낌없이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반드시 부응하고, 보시하고 나누어 가지는 것을 좋아한다. 장자여 이를 일러 보시에 대해 관대함을 구족함이라 한다.”

이 가르침에 등장하는 장자는 급고독을 말하는데 인도 이름은 아나따삔디까(Anāthapiṇḍika)였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실천한 재가불자 직제자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꼬살라 국의 수도인 사위성에서 거주했던 유명한 상인으로 무의탁자들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기 때문에 급고독(給孤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설법에서 부처님은 보시행의 자세에 대해서 설하고 있는데, 특히 ‘다른 사람의 요구에 반드시 부응하라’는 가르침은 오늘날 사회보호 대상자들의 선별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있다. 위 인용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관대함들은 보시를 하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에 대한 것이지만, 어떤 상황에 처한 누구에게 보시를 해야 하는지와 관련해서는 ‘다른 사람의 요구에 부응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보시를 받는 사람의 상황과 필요에 부합하는 구호를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복전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복전경(福田經)을 편찬하였다. 초기에 불복전(佛福田) 중심이던 것이 불법승 삼보복전으로, 그리고 비전(悲田)의 대상이 빈궁자, 병자, 고독자, 축생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팔복전(八福田)의 내용 중에는 불교사회복지 개념을 형성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팔복전은 ①먼 길에 우물 파는 일 ②나루에 다리를 놓는 일 ③험한 길을 잘 닦는 일 ④부모에게 효도하는 일 ⑤스님에게 공양하는 일 ⑥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일, ⑦재난당한 이를 구제하는 일 ⑧무차대회를 열고 일체의 고혼을 제도하는 일 등 여덟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범망경(梵網經)》에서는 복전 중에서는 간병복전(看病福田)이 으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사 속에서 불교 의료복지사업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증일아함(제40: 7경)에 보면 부처님이 병에 걸려 제힘으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비구 수행자를 친히 간병하고 보살펴 주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병자를 돌보는 것은 부처님을 돌보는 것과 같다’라는 설법을 하였다.

“만약 병든 비구에게 보살펴줄 만한 제자가 없으면 대중에 차례로 정하여 병자를 간호하도록 하라. 병자를 돌보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느니라. 누가 되었든 병자를 돌보는 것은 나를 돌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또한 환자를 간병할 때는 음식, 약, 간병인 등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바도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제3권 《환자의 경(A3:22)》에서는 이와 관련된 석존의 가르침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는 세 종류의 환자가 있다. 어떤 환자는 적당한 음식과 적당한 약, 그리고 적당한 간병인을 얻건 못 얻건 간에 병이 회복되지 않는다. 어떤 환자는 적당한 음식과 적당한 약, 그리고 적당한 간병인을 얻건 못 얻건 간에 병이 회복된다. 어떤 환자는 적당한 음식과 적당한 약, 그리고 적당한 간병인을 얻으면 회복되고, 얻지 못하면 회복되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들은 일반 의료복지와 호스피스 서비스 등과 관련해서도 활용될 수 있는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의 재가불자 제자들 중에서도 급고독 장자 이외에도 위사카(Viśākha, 毘舍倨)를 비롯하여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불교사회복지의 원형을 만들고 그것을 후세에 전해 주었다.

2) 승만경의 불교사회복지 정신
대승경전의 주요 내용은 바라밀행의 실천이고, 제일 바라밀은 보시 바라밀이기 때문에 대승경전의 곳곳에 보시행의 실천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 종류의 대승경전 중에서도 불교사회복지의 이념과 실천방법을 가장 잘 서술하고 있는 경전이 《승만경》이다. 《승만경(勝鬘經)》의 원명은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Srimaladevi-simha nada-sutra)》이다. 이 경은 여래장 사상이 담겨 있는 초기 경전류로 분류되며, 기원후 약 3~4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역 《승만경》 중에서는 구라발타라(求那跋陀羅)가 436년에 한역한 것이 널리 독송되고 있다.
《승만경》의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산실되어 알 수 없으나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이나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 등과 같은 논서에서 산스크리트 원전의 단편이 부분적으로 인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승만경》의 사상은 《입능가경(入愣伽經)》 등 여러 경전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승만경》에서 승만 부인이 서원하고 있는 십대원 중에서 제6원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를 이룰 때까지 제 몸을 위하여서는 재물을 저축하지 않겠사옵고, 무릇 받는 것이 있사오면, 모두 가난하고 곤궁한 중생들을 구제하겠습니다.”

이 서원은 자신을 위한 재물 축적이 아니라 곤궁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내용이다. 《승만경》 십대원의 제7원은 사섭법의 정신으로 중생 구제를 실천하겠다는 서원이다. 그리고 제8원에서는 구제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를 이룰 때까지 만일 고독하여 의지할 데 없거나, 구금을 당하였거나, 병이 나거나, 가지가지 액난과 곤란을 만난 중생들을 보게 되면 잠깐도 그냥 버리지 않겠사옵고, 반드시 그를 편안케 하기 위하여, 의리로 도와주고 그 고충에서 벗어나게 한 뒤에야 떠나겠습니다.”

승만의 중생구제 원력은 의지할 데 없는 고독한 노인들을 위한 노인복지, 고아를 위한 아동복지,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교정교화복지, 병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복지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승만은 부처님 재세 시에 강대국이었던 꼬살라 국의 통치자 빠세나디 왕의 딸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변방의 소국이었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우칭(友稱) 왕과 결혼하였다. 아버지 빠세나디 왕과 어머니 말리까 왕비가 부처님께 귀의하자 승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깨우쳐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원력을 세웠고 그것을 실천하였다. 그 방법이 바로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불교사회복지를 실천하는 삶이었다.

3) 아쇼카 대왕의 불교사회복지 실천
인도사회에서 불교계의 복지활동은 아쇼카 대왕의 칙령과 그것에 근거한 통치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쇼카는 불교에 귀의한 후 부처님의 가르침인 담마에 의하여 국가를 통치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그 원력을 바위와 돌기둥에 새겨서 지방의 통치자들과 백성들이 모두 알게 하고 그 칙령의 방침이 후대에 전승되기를 원했다.
아쇼카 각문에 새겨져 있는 칙령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의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면서 복지시설을 만들고 자선사업을 실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아쇼카가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는 모든 사람의 행복이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쇼카는 직접 선행을 베풀고,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그것을 감독하는 관직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감독하기도 하였다. 모든 지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되고 있는지를 감독하게 하는 법무장관(dharma mahāmatra)직을 모든 행정기관에 설치하였다.
아쇼카의 사회복지 치적에 대하여 성운 스님은 빈민구제, 의료복지, 장애인복지, 교정복지, 지역복지 등 대상별 복지서비스를 기준으로 구분하여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2005). 일아 스님은 사람을 위한 복지, 사람과 동물을 위한 복지, 온 왕국과 국경 지방인 이웃 나라에 대한 복지, 여러 계층과 수감자, 사형수 등에 대한 복지, 자선사업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이들의 연구 결과들을 요약하면 아쇼카의 사회복지활동의 대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쇼카는 노인, 빈궁자, 도움이 필요한 여성, 요보호 아동 등이 생활할 수 있는 수용시설을 만들어 빈민구제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도움이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사람이 지원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둘째, 아쇼카는 자신의 영토는 물론이고 주변국에도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과 동물들을 위한 시료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약초가 없는 지역을 위해서는 약초의 묘종(苗種)을 배포하여 재배하도록 했다. 또한 생명존중 사상의 실천을 위해서 조류나 짐승의 살육과 상해를 금지하는 등의 정책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셋째, 아쇼카는 자비정신에 입각하여 정서장애자, 불구자 등 심신장애자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시행하였다. 마애법칙(磨崖法勅)의 여러 부분에서 일체의 유정을 상해하지 말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모든 중생을 친자녀와 같이 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넷째, 아쇼카는 감옥에 감금된 수감자들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정당하게 재판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공평한 판결을 주문하였다. 또한 사형선고를 받은 수감자에 대해서도 3일간의 집행유예 기간을 주었으며, 그들의 수감자의 연고자들이 구명활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다섯째, 아쇼카는 가로수, 우물, 도로표지, 교량건설, 숙박시설 등을 건립하여 여행자의 편의시설을 갖추도록 하였다. 아쇼카 각문 제5장에는 길가에 보리수와 망고나무를 심어 여행자들이 더위를 피하게 돕고, 과일나무를 심어 식사대용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칙령이 있다. 또한 8크로사 간격으로 우물을 파고, 객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일종의 사회간접자본 확충으로 지역복지 증진에 기여할 수 있다.
여섯째, 아쇼카는 왕 자신은 물론이고 왕비와 왕족, 궁녀, 왕실의 친인척, 귀족들이 적극적으로 자선사업에 동참하도록 촉구하였다. 망고나무 숲이나, 정원, 구호소, 약품, 음식, 화폐 등을 막론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자선활동을 강조하였다. 본인이 솔선수범함으로써 전 왕국에서 자선활동이 활발해지도록 하였고, 각 지역의 법무장관들로 하여금 누가 자선활동을 잘하는지를 살피도록 하였다.
아쇼카 대왕 이후 인도에서 불교계가 사회복지와 관련된 활동을 어떻게 전개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관련 자료를 찾기 어렵다. 다만 사찰이나 스님의 역할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가 대중과 괴리된 것은 제도적이고 체계적으로 복지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불교복지는 교단과 사회를 연결해주는 고리이며, 사회적 지지기반을 형성하는 가장 좋은 방편이다. 인도불교는 이것을 소홀히 함으로써 스스로 소외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여러 가지 요인들이 더해지면서 인도사회에서 불교는 소멸되고 말았다.


3. 중국불교의 사회복지 활동

중국사회에서 불교 유입은 민중적 필요에서가 아니라 국가 통치에 필요한 새로운 이념을 수용하는 차원에서 위로부터의 확산이었다. 즉, 황제가 불교를 공인하고 신봉하면 백성이 따라서 믿고 의지하는 포교 과정이었다. 그 결과 권력이 바뀌면 주기적으로 법난이 일어나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민중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행복과 안락을 위한 교단의 노력이 이어졌다. 그러한 노력이 중국에서 불교교단과 사찰들의 사회복지 활동을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시기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에서도 공자가 이미 불교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열자(列子)》의 〈중니편(仲尼篇)〉에 공자(孔子, BC 551~479)가 상나라 태재(太宰)의 질문에 대답한 내용에서 유추된 것이다.

“삼왕오제는 성인이 아니다. 오직 서방에 성자가 있으니 백성을 다스리지 않아도 문란치 않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음이 생기며, 교화하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니 넓고 넓어 백성들이 그것을 이름 짓지 못한다.”

그 사실 여하를 떠나서 불교는 이미 기원전부터 중국에 알려져 있음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 후 불교가 황제들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수용되었으며 민중 속으로 스며들어 대중화되었다. 사찰이 건립되고 많은 스님들이 수행하면서 중생교화 활동을 다양하게 전개한 것은 역사서들을 통해서도 나타나 있다. 이 과정에서 중국불교는 매우 활발하면서도 다양하게 불교복지 활동을 실천하였다.
중국불교의 주요 사찰과 스님들이 실천하였던 사회복지 활동은 빈민구제를 위한 지원사업, 의료사회사업, 수용시설 운영, 사회교화, 문화활동, 토목구제사업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회복지 활동 사례는 주로 삼계교(三階敎)의 무진장원(無盡藏院)과 비전양병방(悲田養病坊) 및 숙방(宿坊)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삼계교(三階敎)의 무진장원(無盡藏院)
사회적 실천을 중시한 삼계교는 수(隋)의 신행(信行, 540~594)에 의해 형성된 종파를 말한다. 신행은 하북성(河北省) 위주(魏州)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일찍부터 불가와 인연을 맺어 동진출가하였으며, 17세부터 《화엄경》을 비롯한 많은 경전을 독파하였다. 신행은 시대에 부합하는 가르침을 추구하다가 중국 상주(相州), 현재의 하남성 안휘현에 위치한 법장사(法藏寺)에서 삼계교를 주장하였다.
신행이 주장한 삼계(三階)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구분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일승(一乘)의 중생을 제1계, 삼승(三乘)의 중생을 제2계, 그릇된 견해를 일으키는 말세의 중생을 제3계” 등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신행은 “제1계와 제2계에 속하는 일승과 삼승의 중생들은 별불법(別佛法)으로 제도할 수 있으나 제3계에 속하는 말세 중생들은 보불법(普佛法)으로 제도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신행은 보불법의 원리를 ‘보경(普敬), 인악(認惡), 공관(空觀)’ 등의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보경이란 《화엄경》 〈상불경보살품〉 등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모두 널리 존경하는 것을 말하며, 인악이란 자신의 내면에 들어 있는 악의 근원을 잘 인식하라는 의미이며, 공관은 앞에서 언급한 보경과 인악이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고 꿰뚫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계교에서는 보경의 실천 방법으로 보시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보시를 통해서 과거의 죄악이 소멸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재화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재물을 모아서 무진장원(無盡藏院)이라는 금용기관을 설립하였다. 무진장원은 삼계교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화도사(化度寺)에서 처음 설립되었다. 삼계교의 초기 무진장은 복전 사상에 입각한 자선사업이었다.
화도사에서 시행한 무진장 자선사업은 대여 방법도 간단하여 대출 증거서류도 없고, 채무 상환도 채무자가 알아서 스스로 약속한 대로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소규모 금융지원사업이었다. 오늘날의 미소금융과 같은 형태의 빈민구제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삼계교의 등장은 사원이 다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장원을 형성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중국불교가 대중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보시행을 실천하였고, 특히 왕이나 귀족, 지방 호족들이 큰 토지들을 희사하였다. 그 이유는 사찰의 건립과 역경 및 간경사업, 대규모 법회 개최 등에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원에서는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수익사업을 전개하였다. 즉 방앗간, 창고업, 상점, 마차를 빌려주는 가게 등의 사업을 함으로써 그 수익을 활용할 수 있었다.
삼계교는 이렇게 형성된 재화들은 어려운 계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이상적 목표 속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선의로 행한 무진장 사업은 고리대금업의 형태로 변질되면서 큰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급기야 당 왕조에서는 삼계교를 견제하고 탄압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현종 때에는 황제의 칙령에 의해 무진장원이 파괴되었고(713년), 삼계교의 독립된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으며(725년), 신행의 모든 저서는 ‘성지(聖旨)에 위배되고 진종을 침범하는 것’으로 규정됨으로써 소멸의 길을 걸었다.

2) 비전양병방(悲田養病坊)과 숙방(宿坊)
비전양병방은 중국 당대 측천무후(624~705) 때 각 사찰에 설치한 사회사업기관이다. 비전양병방은 비전(悲田)·요병(療病)·시약(施藥) 등의 세 가지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비전은 빈민을 구휼할 수 있는 토지를 말하고, 요병은 환자의 요양과 치료, 시약은 의약품의 제공 등을 의미한다.
초기에는 비전방과 양병방으로 구분하여 운영되었는데 이후 종합적인 복지의료기관의 형태인 병방(病坊)의 형태로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비전방은 지역사회의 굶주리는 사람과 빈곤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토지를 운영하는 사찰을 말한다. 그리고 양병방은 질병치료와 함께 굶주리는 아이들을 수용하는 고아원 역할을 겸하였다. 양병방은 당대 현종 개원 22년(734)에 황제의 칙령으로 여러 사찰에 설치되었다.
당 무종 대 회창의 훼불사건이 발생하면서 관리하는 스님들이 사라지면서 비전양병방은 관청의 사무실로 전환되었다. 병방을 운영하던 스님들이 강제로 환속되면서 이를 관리할 수 없게 되자 폐쇄된 것이다. 그런데 빈민과 병자들이 증가하자 녹사(綠事)를 선발하여 그 일을 대신하게 하였고 비전양병방은 비전(悲田)이 없는 양병방으로 운영되었다.
북송(北宋) 때에는 항주 일대에 퍼진 전염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의 기능을 하는 병방(病坊)이 각 사찰에 다시 설치되었다. 이 시설을 ‘안락(安樂)’이라고도 불렀는데 숭녕(崇寧) 2년(1103)에는 ‘안제방(安濟坊)’으로 개칭하였다. 안제방은 관전 500무를 하사하고 도로에 유기된 영아들을 수용하여 유모들이 양육하게 하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입양을 주선하고, 빈민들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국을 함께 설치하였다.
숙방(宿坊)은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사원이다. 숙방 중에서 대표적인 시설은 오대산 보통원(普通院)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원은 오대산 순례자들을 위해서 설치되었는데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무료로 숙박할 수 있었으며,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도 제공하였다.


4. 일본불교의 사회복지 활동

불교는 전통적으로 복전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승려는 물론이고 보살계를 받은 재가불자들도 보살도의 실천자임을 강조한다. 이 보살도의 실천이 바로 불교복지사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쇼토쿠 태자의 중생구제 활동이 토대가 되어 이후 많은 사찰과 스님들이 불교복지사업을 전개하였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일본불교계도 자비행을 실천하는 방법의 하나로 불교 이념과 정신에 토대를 둔 복지서비스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곤궁자에 대한 시여(施輿)와 치수(治水), 제방과 다리 건설, 식수 제공을 위한 우물 파기, 의료활동과 약품 제공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일본의 불교 교단과 개별 사찰들이 주축이 되어 시행한 자선구제 활동은 일본의 현대적인 사회사업의 원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일본불교는 구불교(舊佛敎), 신불교(新佛敎), 신흥불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불교는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받은 이후부터 대당 유학파들이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불교는 오사카, 교토, 나라 등을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대당 유학파들이 돌아와서 일본의 종파불교를 개창하기 시작한 1200년대부터 1800년대 중반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시기까지를 신불교, 그리고 메이지 천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불교를 신흥불교시대라고 말한다.
일본에서 불교가 공인된 시기는 538년이었다. 당시에는 토착종교인 신도(神道)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유교와 도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선왕인 요메이(用明) 천황이 죽자 신도를 숭상하는 배불파와 불교를 숭상하는 숭불파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태자가 숭불파인 사가(蘇我馬子) 일족을 지원하여 승리함으로써 황태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일본 불교사회복지의 출발점은 쇼토쿠(聖德, 574~622년) 태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요메이 천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왕이 사망하고 나서 593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어 여왕인 스이고(推古) 천황을 보필하였다. 595년에 고구려의 혜자(惠慈)와 백제의 혜총(慧聰) 등이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태자는 혜자 대사를 스승으로 삼아 불교에 귀의하였다. 쇼토쿠 태자는 법흥사(598년) 창건을 시작으로 법륭사, 사천왕사 등을 건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교와 도교 등도 허용함으로써 일본의 아스카(飛鳥) 문화 시대를 열었다.
쇼토쿠 태자가 불교사회복지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오사카 시텐노지(四天王寺)에 시카인(四箇院)을 설립한 것이다. 시카인은 신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덴인(敬田院), 노인과 고아를 수용하는 구제시설인 희덴인(悲田院), 약국 기능을 하는 세야쿠인(施藥院), 그리고 병원시설인 료보인(療病院) 등 네 가지 시설을 의미한다.
일본의 신불교 시대는 최초의 대당 유학승이라고 할 수 있는 도쇼(道昭, 628~700)가 이미 7세기 중반부터 문호를 열고 있었다. 이후 많은 대당 유학승들이 중국으로 떠났고, 다양한 교학과 선법을 가지고 돌아와 일본에 소개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따르면 도쇼는 653년 견당사들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서 초기에는 현장법사 문하에서 유식을 공부했고, 그 후 달마대사의 제자인 혜만 스님에게서 선법을 배우고 661년에 일본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쇼는 선승이지만 십수 년간 만행(萬行)을 하면서 길가에 우물을 파고, 나루터에 나룻배를 만들고, 다리를 놓는 일을 하였다.
쇼토쿠 태자 이후에 일본 사회복지의 가장 상징적 인물은 도쇼의 제자인 행기(行基, 668~749)로 알려져 있다. 행기는 일본에서 활동한 백제계 스님으로 15세 때인 683년에 호고우사(法興寺)로 출가하여 수행하였다. 이후 야쿠시사(藥師寺)로 옮겨 법상유식의 교의를 배웠다. 그리고 그의 교설과 자선구제, 사회토목사업 등의 활동은 스승 도쇼로부터 배웠다. 도쇼가 대당 유학을 떠났을 때는 삼계교(三階敎)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행기는 스승으로부터 삼계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이 그의 사회사업 활동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주장도 있다.
행기는 제자들과 전국을 순행하면서 교량 건설, 제방공사, 도로보수, 전답개간, 항구 건설 등 민중을 위한 복리사업을 도모하였다. 《행기대보살행장기(行基大菩薩行狀記)》에 따르면 그의 사회복지 활동 사례를 알 수 있다.

717년에는 백성을 괴롭히는 승도를 다스리는 법을 설하였고, 726년에는 산기(山崎)의 교량을 조성하여 대법회를 개설하였다. 731년에는 하내국(河內國) 협산지원(狹山池院)을 건축하였고, 또한 행기를 따르는 우바새·우바이 가운데 노령한 사람은 출가를 허락하여 수행을 자유롭게 하였다. 733년에는 곤요우사(昆陽寺)를 창건하여 스스로 조각한 약사여래와 11면관음상을 안치하였다. 또한 온천을 개발하였고, 시약원(施藥院)을 두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을 간호하였다. 745년에는 일본 승단의 최고직인 대승정(大僧正)으로 추존되었는데, 당시 행기를 따르는 승도가 3,000명이나 되었다. 749년 82세에 입적하여 생구산(生駒山) 동악에 장사하였다. 불교를 통한 중생 구원, 국리민복을 우선으로 하는 보살행을 행한 백제계 승려로서 그 종교적 활약이 지대했으므로 일본에서는 살아 있는 보살로 찬양 공경하였다. 업적은 사찰 49개소, 교량 6개, 제방 15개소, 항구 2개처, 복지사업소 9개소 등을 조영하여 일본불교 최고의 교화승으로 섬겨지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헤이안(平安) 시대는 간무(桓武) 천황이 794년에 헤이인교(平安京, 지금의 京都)에 도읍을 정한 이후부터 1192년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성립될 때까지 약 400년간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불교사회복지에 앞장선 승려는 사이쵸(催徵)와 구우카이(空海) 등이 있다. 이들도 교량을 놓고, 강을 건너기 위한 배를 만들고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구우카이(空海, 774~835)는 농지 축조와 빈곤한 청년들의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의 활동으로 인정을 받았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1192~1333)는 일본의 봉건주의 기초가 확립되었으며, 무사계급이 등장하였고, 일본 선종(禪宗)의 전통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는 에사이(榮西)와 도겐(道元) 등을 비롯한 다수의 걸출한 선승들에 의하여 일본사회에서 신불교 전통이 형성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생겨난 일본의 신불교 종단은 호넨(法然, 1133~1212)의 정토종, 신란(親鸞, 1173~1262)에 의한 정토진종, 잇펜(一遍, 1239~1289)의 시종(時宗), 에사이(塋西, 1141~1215)의 임제종, 도겐((道元, 1200∼1253)의 조동종, 니치렌(日然, 1222~1282)의 일련종 등이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 일본은 가뭄과 빈번한 태풍으로 인하여 유례없는 대흉작을 기록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기근이 발생하고 1년여 동안 역병이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교토 시내에서만 약 4만여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다. 따라서 이때에 불교계에서는 빈민구제를 위하여 발 벗고 나섰다. 그중에서도 에이사이(榮西)는 빈민들을 위해서 절에서 약사불 조성을 위하여 마련한 자금을 모두 내줄 정도로 구제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예존(叡尊, 1201~1290)은 가마쿠라 중기, 율종의 승려로서 흥정보살(興正菩薩)이라고 불렸다. 1235년 서대사(西大寺)로 옮긴 후 이듬해 자서수계(自誓受戒)를 한 후 계율 부흥에 진력했다. 예존은 제자인 인성(忍性)과 함께 비인구제(非人救濟)를 위해 노력하였다. 여기서 비인(非人)은 일반 사회에서 차별을 받는 천민으로서 걸인이나 특수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 나병환자 등을 말한다. 예존은 이들에게 금전이나 쌀 등을 지원해주고 숙소나 집을 고쳐주기도 하였다. 또한 1268년에는 기아자 구제를 위하여 수만 명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일본의 에도시대(江戶時代)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막부(幕府)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將軍)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에 일본불교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 이유는 막부의 종교정책이 불교의 사회활동을 제지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황벽종의 승려였던 데쓰겐(鐵眼, 1630~1682)의 활동은 일본불교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데쓰겐은 목판에 글을 새겨 대장경을 간행하는 원력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런데 10년 불사에 필요한 기금을 다 모아갈 즈음인 1682년에 관서지방에서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데쓰겐은 다수의 난민들을 오사카의 서룡사(瑞龍寺)로 운집시키고 대장경 간행을 위해 모아 놓은 돈과 쌀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하루 평균 1만여 명을 구휼하였는데 한 달 이상 지속하였다. 사찰에 돈이 바닥나자 다른 지인에게 차용하여 베풀었다.
그렇게 두 번이나 경전 간행을 미루고 기근자 구호와 중생교화에 전력하였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고, 병자에게는 약을 주고, 기아를 발견하면 절에 데려와 길렀다. 죄수를 만나면 감형을 요청하면서 많은 수의 지역 주민들에게 자비행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20여 년 만에 세 번째로 기금을 모아 황벽사 대장경 간행을 완료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데쓰겐은 대장경을 세 번 간행하였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 구제의 불경간행이야말로 목판에 새긴 불경보다 값진 것이다.”라고 그의 사회복지 활동을 칭찬하고 있다.
일본불교가 현대적인 불교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은 1879년부터 각 종파들이 육아원을 설립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99년에 ‘일본불교자선회재단’이 설립하면서 빈민구제, 의료, 고아 및 빈곤 아동의 양육, 이재민 구호, 재소자 교화 등의 활동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본불교의 대사회활동은 김경집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1879년 일본의 각 종파는 낙태와 어린아이의 유기방지를 위한 복전회육아원(福田會育兒院) 설립, 1883년 나가노 선광사(善光寺) 내에 구호와 보호를 위해 대권진양육원(大勸進養育院) 설립 등이 있었다. 그 후 1890년에 이르면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가 증대되고, 1891년 농미(濃尾)를 중심으로 대재해가 발생하자, 각 종파는 관장대리를 파견하여 구제를 담당하였다. 이때 동경 각종협동 불교자선회에서는 자선연설과 탁발로 기금을 모금하였다. 이런 자선활동은 1888년 11월 자하현대진시(滋賀縣大津市)에서 근강부인자선회(近江婦人慈善會)의 결성과 1890년 각 종파의 관장회의에서 불교자선회(佛敎慈善會) 창립이 결의된 이후 더욱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1901년 대일본 불교자선회 재단의 결성, 1911년 대곡파자선협회의 결성 등으로 이어졌다. 재해구조 활동은 1905년 동북 대흉작에 대해 동북불교 각종연합회, 1910년 8월 관동대수해에 대해 천태종의 구제활동과 의료활동은 뛰어났다. 일련종에 의한 나병환자의 의료병원이 설립된 것도 이때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불교 복지활동은 국가 윤리에 수렴되면서 군인가족의 원조와 전사자 유족들에 대한 구휼로 돌아섰다. 그것은 일본불교계가 태평양전쟁에 휩쓸리면서 군국주의의 외풍을 막지 못했던 시대적 환경 때문이었다. 전후 일본불교는 패전의 아픔을 극복하고 일본 국민의 행복과 안락을 위한 여러 가지 현대적 복지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일본은 현재 복지법인 중심으로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복지시설은 종교 여부를 떠나서 법인이 운영주체가 되고 있다. 따라서 불교복지시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큰 의미도 없다. 다만 최근 일본불교 사찰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복지법인 중 하나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니가타 현 나가오까(長岡) 시에 위치하고 있는 정원사(淨願寺)는 일본 불교복지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활발한 복지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정원사는 정토진종계에 소속된 사찰로 약 700년 정도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이 사찰에서는 주지 스님이 ‘사회복지법인 숭덕회’라는 복지법인을 설립하고 산하에 약 30여 개의 각종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숭덕회 법인 산하의 복지시설 중에는 종합병원 2개소를 비롯하여 노인복지시설, 정신장애시설 등을 주축으로 관련 시설들이 지역별로 개설되어 있다. 종합병원은 각각의 복지시설과 연계되어 있어 시설 운영의 효과성과 전문성을 지원하고 있다. 노인복지시설은 이용시설과 수용시설이 노인들이 요구에 부응하여 최고급으로 운영된다. 또한 소규모의 그룹 홈, 노인주택, 주간보호시설 및 재택보호 등 지역주민들의 복지욕구 변화를 고려하여 새로운 시설과 서비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일본불교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는 사찰의 신행활동에 무관심한 신도들을 일깨우는 일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타개하고 사찰의 사회적 역할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가 사회복지 활동이라는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순수한 신행활동과 수행적 기능이 쇠퇴하고 있는 현실을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서 극복하려는 일본불교의 모습은 한국불교에도 타산지석의 교훈이 될 수 있다.


5. 한국불교의 사회복지 활동

삼국시대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는 재난구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재난구제 활동은 그 이전에 비하여 매우 활발해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송산 스님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불교의 자비사상이 유입되면서 구제사업의 빈도가 높아지고 질적으로도 향상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다만 사찰이나 스님들의 구체적인 구제 활동 사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불교계는 태조 왕건이 불교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고 사원전이 지급되었다. 또한 많은 귀족과 평민들이 전지(田地)를 시납(施納)하였기 때문에 사찰들은 부유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흉년이 들면 사찰은 자연스럽게 기민구호(饑民救護)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사》에는 연복사와 개국사 등에서 구호사업을 전개한 사례들이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 사회복지기관으로는 제위보(濟危寶),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혜민국(惠民局) 등의 기관이 있었다. 제위보는 전염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 및 기근 등에 대비하여 축적하는 일종의 기금관리처였다. 대비원은 질병을 치료하는 국립의료기관이면서 동시에 유민들을 일시적으로 구호하는 사업도 담당하였다. 혜민국은 서민들의 질병치료를 위해 설치한 의료기관이었다. 이들 복지기관들은 사찰과 연계하여 운영되었기 때문에 국가와 불교계가 협력하는 사회복지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불교 사찰들은 대부분 사회복지 기능을 수행하였다. 사찰의 복지활동에 필요한 재원은 주로 ‘보(寶)’를 통해서 만들어졌다. 사찰의 보는 “왕이나 귀족, 평민들이 전곡을 시납하면 그 원본은 그대로 거치하고 이식(利息)을 취하여 영구히 이득을 얻는 제도”를 의미한다.
보는 사원에서 시작하여 민간으로 확산되었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형태도 있었다. 따라서 보는 사원보(寺院寶)와 비사원보(非寺院寶)의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보(寶)의 명칭도 삼보(三寶)에서 온 것으로 “목적을 정하여 보를 세워 존본취식(存本取息)하여 그 이윤으로 사업에 사용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보의 운영으로 형성된 재원은 처음에는 사찰 전각의 보수, 증축, 관리, 승려의 생활, 훈련 및 교육의 비용 등으로 충당되었다. 그렇지만 삼재팔난이 횡행할 경우에는 제위보(濟危寶)를 비롯하여 많은 보의 재원들이 빈곤자와 병자의 구휼을 위해 사용되었다. 고려시대 성행했던 보의 명칭이 조선 성종 이후에는 역사 속에서 점차 사라졌다. 그것은 보의 실행이 점차 문란해져서 여러 가지 폐해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불교는 조정과 사대부로부터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사찰의 사회적 기능이 점차 축소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사찰 단위에서 복지활동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승려 개인적 차원에서 활동한 사례들이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태종 6년(1406)에 천노 출신이었던 장원심(長願心) 스님이 있었다. 《태종실록》에 나타난 장원심 스님의 활동 기록을 살펴보면 스님의 자비행이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장원심 스님은 기근자를 보면 꼭 먹을 것을 빌어 먹이고, 자기의 옷을 벗어 입혀 주었으며, 앓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휼하며, 사람이 죽었는데 장사지낼 사람이 없으면 반드시 자기가 그를 장사지내 주며, 도로를 만들고, 교량을 건설하고, 가지 않는 곳이 없이 모두 다니며, 사람을 돕는 일만 하였으므로 어린이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세종 4년에는 한성에 구료소를 두고 탄선(坦宣) 대사로 하여금 300명의 스님들이 군인들을 구료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스님들이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숙청문(肅淸門)과 창의문(彰義門) 두 문을 열어 군인들의 출입하는 길을 통하게 하고, 도성(都城)의 동쪽 서쪽에 구료소(救療所) 네 곳을 설치하고, 혜민국 제조(惠民局提調) 한상덕(韓尙德)에게는 의원(醫員) 60명을 거느리고, 대사(大師) 탄선(坦宣)에게는 중 3백 명을 거느리고 군인들의 병들고 다친 사람을 구료(救療)하도록 명하였다. 또 전 유후(留後) 여칭(呂稱)과 검교 참찬(檢校參贊) 허도(許衜)에게 이를 감독하도록 명하였다.

세종 9년에는 천우 선사와 을유 선사 등이 한증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탕욕하는 장소를 만들어 병 있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내용의 상소문이 올라와 왕이 윤허하는 일이 있었다. 두 스님은 국고 지원을 받아 백성을 치료하는 보의 기금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쌀 50섬과 무명 50필을 요구하였다. 세종은 이를 윤허함으로써 한증치료법이 대중화될 수 있었다.

“한증(汗蒸)하는 승려로 대선사(大禪師) 천우(天祐)·을유(乙乳) 등이 말하기를, ‘한증으로 병자를 치료하는 것은 인애하는 정치의 한 가지가 될 만한 일입니다. 지난 계묘년에 대사승(大師僧) 명호(明昊)가 탕욕(湯浴)하는 장소를 만들어서 병 있는 백성을 구제하려고 성상께 말씀을 올렸던바, 성상께서 가상하게 여기시어 바로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욕실(浴室)을 만들라고 명하셨는데, 일이 미처 착수되기도 전에 명호가 죽었습니다. 저희들은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널리 시주를 받아들이어 연전에 욕실(浴室)을 증설한 바, 한증으로 병을 고친 자가 계속하여 끊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병자는 땔나무를 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죽을 쑤어 먹기와 소금·간장 따위도 마련하기가 쉽지 아니하므로, 저희가 비록 안타깝고 민망하오나 공급할 길이 없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아시게 되어 쌀 50섬과 무명 50필만 주시면 그것으로 밑천 삼아 이식만을 가지고 쓰면서 본밑천은 도로 나라에 반납하고서 영구히 보(寶)를 세워 가지고 그것으로써 병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소승들의 지극한 소원이옵니다.’ 하오니, 그 소원에 따라서 쌀과 베를 주고, 또 의원 한 사람을 정하여 그로 하여금 똑같은 마음으로 치료해 주게 하고, 1년이 되면 교대시키는 것으로 일정한 법을 삼기를 청하옵니다.”

세종조까지만 해도 국가에서 시행하는 빈민구제와 의료사업의 대부분은 사찰에서 담당하였다. 조정에서는 스님들을 모아서 각종 부역에 동원하였으며, 일정한 의무를 다하면 도첩(度牒)을 주었다. 부역의 내용에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의료활동 지원과 기민(饑民) 구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서산대사 휴정 스님을 비롯하여 사명대사 등 많은 스님들이 국난극복과 대중의 재난 및 질병 구제 등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였다.
일본강점기를 거쳐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불교계의 사회복지 활동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현대적 의미의 사회복지 서비스 체계를 갖추고 활성화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현재 불교계는 약 2,000여 개의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등 각 종단과 사찰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사회복지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복지 활동은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속된 복전사상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6. 맺음말

역사적으로 불교사회복지 활동을 살펴본 결과 국가와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 공통점은 대부분의 사찰과 스님들이 자비와 복전 사상에 근거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 중생구제 활동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활동 내용이나 방법 등의 면에서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그 이면에 내포하고 있는 불교사상은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 특히 한국, 일본, 중국 등과 같은 동아시아 불교국가들은 대승불교권에 속하기 때문에 대승사상의 영향을 공통적으로 받았다. 따라서 더욱 적극적으로 중생구제의 원력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한 역사적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다.
인도에서는 복전사상과 자비정신을 바탕으로 아쇼카 때 다양한 불교 복지서비스가 시행되었다. 이때부터 불교는 현대적 복지서비스와 유사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에서는 빈민구제 활동의 하나인 삼계교의 무진장원, 비전양병방과 숙방 등의 의료 및 기민구제서비스를 제공하는 불교복지 기관들이 운영되었다. 일본은 쇼토쿠 태자 때 설립된 경전원, 비전원, 시약원, 요병원 등 사개원(四箇院)이 가장 중요한 불교복지시설로 자리 잡고 있으며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제위보를 비롯하여 사찰에서 운영하는 여러 가지 보(寶)를 중심으로 기금을 축적하고 재난 발생 시 구호기금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혜민국을 비롯한 각종 국가복지기관도 스님들이 참여하여 복지서비스를 제공하였다.
또 하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당시의 국가권력과의 관계이다. 중국의 삼계교가 국가권력의 견제를 받아서 사회복지활동이 위축되었다든지, 일본 불교의 사회복지활동이 막부시대나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변질된 사례는 불교, 더 나아가서 종교가 사회복지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의 사례는 이러한 점을 더욱더 자명하게 보여준다.
반면에 인도의 아쇼카 대왕이나 일본의 쇼토쿠 태자 시절의 활발한 사회복지활동은 국가권력의 도움이 있으면 더 많은 사람에게 보시를 할 수 있다는 점도 보여준다. 물론 지속가능한 보시를 위해서는 국가권력에만 의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불교 독자적으로 하기에는 이미 사회가 너무 복잡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된 시대상황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되새기면서 사회복지활동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즉 앞서 《빳따깜마 숫따(Pattakamma-sutta)》에서 인용한 ‘다른 사람의 요구’에 반드시 부응하겠다는 서원을 다시 확고히 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큰 줄기의 사회복지 활동은 국가가 맡고 있다. 하지만 차상위계층 문제 등 국가가 신경을 쓸 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계층의 복지는 열악하다. 이렇게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서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는 사회복지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도 국가가 앞장서서 개입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교육의 대상인 학생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사회복지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사회복지의 개념으로서 지금 현재 꼭 필요한 요구에 부응하는 불교만의 사회복지활동이 필요하다.
한국불교는 최근 들어서 현대적 개념의 사회복지 활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웃 종교들에 비하여 다소 때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오랜 역사 속에서 실천한 중생구제 활동은 어떤 사회복지제도보다도 인도주의적이며 평등성의 가치를 실현하는 가치 있는 복지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복지국가에서는 국민의 최저생활 보장을 위해서 각종 사회보장제도와 공적부조제도, 사회복지서비스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적 복지 서비스가 국민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연구결과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불교가 본래부터 추구해 왔던 정신복지와 문화복지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연구결과도 나타나고 있다.
향후의 불교복지는 물질적 서비스 제공의 수준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이 정법에 의지한 지혜를 성취하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정신복지서비스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이웃 종교들과는 차별성을 갖는 불교 고유의 복지서비스 영역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길이다. ■

 

김응철 / 중앙승가대 포교사회학과 교수. 경기대 행정학 박사. 불교인재원 원장, 중앙신도회 부회장, 서울시자원봉사센터 이사, 사회복지법인 진관무위원 감사 등으로 활동 중. 저서로 《불교지도자론》(공저), 《포교이해론》(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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