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읽고

작년 가을 《불교평론》 44호에서 현응 스님이 기고한 논문 〈기본불교와 대승불교〉를 읽었다. 곧 스님의 다른 저술도 찾아보고 싶어져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미국으로 주문해 읽어 보았다. 20여 년 전에 나온 이 책은 곧 절판되어 시중에서는 오랫동안 구할 수 없었는데, 2009년 말 스님의 에세이가 몇 개 가감되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깨달음과 역사》는 필자가 영어로 된 불교 및 철학 관련 저술들에서 배우지 못했던 중요한 가르침을 준 책이다. 그래서 필자가 한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음이 소중한 특권이라고 느끼게 해 준 반가운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얻은 학문적 즐거움을 다른 분들과도 나누고 싶다.
필자에게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주제 두 개를 소개하고 철학적으로 분석하며 또 문제점도 논의해 보겠다.


1. 깨달음과 역사(歷史)

《깨달음과 역사》라는 제목은 원래 ‘보살’ 또는 ‘보리살타’ 즉 ‘bodhi(깨달음)’와 ‘sattva(역사)’에서 왔다. 제목을 통해서도 현응 스님은 보살의 궁극적인 두 목표가 ‘깨달음’과 ‘역사의 실천’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고 이 책이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보살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음도 드러난다. 그런데 《깨달음과 역사》라는 책 제목이 (대승)불교에 접해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래서 원래의 제목에 ‘불교의 이론과 실천’이라는 부제를 붙여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현응 스님에 의하면 깨달음이란 주관과 객관을 포함하는 삼라만상 모든 것이 서로 연기적으로 관련되고 변화하기 때문에 스스로 본질과 실체를 가질 수 없어(즉 無我, anatman) 어떤 것도 실재함이 없이 공(空)임을 이해함에서 비롯된다. 곧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인식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칭하는 것이고 깨달음은 자신까지 포함하는 만물을 연기의 관점에서 공(空)으로 파악해야 하는 이론적 요구를 충족했을 때만 가능하다. 이 책에서 논의의 많은 부분이 깨달음에 관한 이론적 통찰로 되어 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한편, ‘sattva’라는 말을 ‘역사(歷史)’로 번역하여 이해함은 조금 새롭지만 현응 스님이 ‘역사’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현응 스님에게 역사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함하는 인간 사회의 모든 삶과 그들의 장(場)을 말한다. 실은 인간뿐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과 무생물들을 포함해 우리 환경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그것들이 존재하고 존재해 온 모든 장을 일컬어 역사라고 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이 ‘역사’라는 개념이 얼마나 포괄적이면서도 편리한 개념인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치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한 측면이고, 경제 문화 종교 각각 또한 그러하다. 사회학이란 현대문명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를 연구하는 분야고, 인류학이란 좀 덜 문명적인 관점에서 인간 집단에 접근한다. 그런데 이 둘은 주로 동시대(同時代)의 인간 사회를 연구하는데, 이런 연구들을 통시대적(通時代的)으로 고찰해 보면 그것은 역사학의 과제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역사학이 실은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그리고 문화인류학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관계도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다. 그런데 현응 스님의 ‘역사’는 이런 인간 집단뿐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과 환경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뭇삶(衆生)과 그들의 장’이라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모든 존재자를 포함하는 이 역사(歷史)라는 통시대적 무대가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의 실천의 장인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의 다른 많은 부분에서 중생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보살의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위에서 보인 두 가지 이유로 필자는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에 ‘(대승)불교의 이론과 실천’이라는 부제를 달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또 이 부제가 비불교도까지 포함하는 일반 대중에게 책의 내용을 더 쉽게 보여줄 편리한 도구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다수의 독자들이 놀랍게 접할 현응 스님의 주장은 바로 ‘깨달음’의 문제와 ‘역사에서의 변화와 발전’의 문제가 논리적으로 전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의 쟁점들이라는 관점이다[64쪽]. 이 주장과 관련된 몇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깨달음’이란 변화와 관계성의 법칙, 곧 공의 시각으로 삶을 조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삶과 존재들에서 실재성의 장막을 벗겨내는 일입니다.[64쪽]

한편, 그와 달리 개인의 삶에서 능력과 덕을 계발하고 확충하는 일이나 사회에서의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넓은 의미에서 통틀어 ‘역사의 영역’이라고 말한다면, 역사의 세계는 존재의 실재(reality)를 잠정적으로 또는 확정적으로 인정해 두고서 그를 바탕으로 존재의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일입니다.[64~65쪽]

그 어떤 ‘것’이 실재가 아님을 이해하는 ‘깨달음’의 문제와 그 어떤 것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내용을 담아 가는가 하는 ‘역사적(현상적)’ 문제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70쪽]

역사의 진행과 변혁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깨달음을 기초로 연역되거나 유추되는 것이 아님은 깨달음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명료하다. 결국 역사의 문제는 역사적 노력으로 풀어가는 것이다.[191~192쪽]

깨달음이란 삶과 존재들에서 실재성의 장막을 벗겨내어 그것들이 공(空)함을 보는 진제(眞諦, ultimate truth)의 차원에 관한 것이다. 개인의 삶과 사회의 변화와 발전 과정을 ‘역사의 장(場)’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보면 이것은 존재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일이 되어 속제(俗諦, conventional truth)의 차원에 속하게 된다. 진제와 속제가 삶과 뭇 존재자들의 같은 영역에 관한 서로 다른 차원의 진리이듯이, 깨달음의 문제와 역사의 문제는 비록 존재적으로는 동일한 영역에 관한 논의들이더라도 논리적으로는 각각 다른 차원에 속한다. 그래서 역사의 문제를 깨달음의 내용을 기초로 해서 그것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유추하여 풀 수는 없고, 역사의 문제는 역사적 노력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점은 거꾸로 말하면 역사의 문제를 깨달음의 문제로 환원해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 더 설명해 해 보겠다.

어느 미술대학생이 컴퓨터 부품들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와 함께 박물관에 가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모나리자를 보며 감상문을 쓰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이 둘은 같은 그림을 바라보며 그 그림을 ‘분석’하고 ‘감상’한다. 미술대학생은 그 미소가 주는 신비로움, 대가의 완벽한 색상 선택, 얼굴 뒤 배경이 주는 의미, 그리고 그림이 제작된 시대와 옷과 장식품들의 관계 등을 마음에 떠올리며 그림을 분석하고 감상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공학기술로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는 그림 안에 좌표축들을 정해 어느 좌표에서 어느 좌표까지는 빛의 스펙트럼에서 어떤 부분을 반사시키는 분자들로 배치되어 있다는 식의, 전적으로 ‘자연과학적인’ 리포트를 작성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캔버스 위 물감 분자들의 배치에 관한 과학기술적 보고서가 이 안드로이드의 모나리자 감상문이다. 미술대학생의 감상문과 안드로이드의 보고서는 같은 그림에 대한 논리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기술들이다. 그래서 어느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의 논리적 유추가 불가능하다. 자연과학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은 아마도 안드로이드의 보고서가 진제(眞諦)에 더 가깝고 미술대학생의 감상문은 속제(俗諦)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현응 스님이라면 진제와 속제가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고 하면서 속제의 영역은 진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름대로의 법칙에 따라 이해되고 받아들여져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명화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이 그 나름대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져야 하지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 기술하며 파괴해서는 안 되듯이.

서양 현대 분석철학 특히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이 전공인 필자에게 위의 논점은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뼛속 깊이 찌르는 날카로움으로 다가온다. 멀리는 17세기의 스피노자(Spinoza)가 몸과 마음은 하나의 실체(substance)가 가진 두 측면이라고 하면서 각각은 기술하는 양상(mode of description)이 달라 서로 교류할 수 없고 각자의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가까이는 20세기 후반 세계철학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데이비드슨(Davidson)이 존재적으로 하나인 사건(event)이 그것이 기술되는 방식에 따라 심적 사건 (mental event)과 물리적 사건(physical event)으로 그 종류가 결정되며 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은 각각의 법칙에 따라 움직여 서로 상관이 없고 따라서 심적 사건들이 물리적 사건들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보았다. 현응 스님도 “깨달음과 역사가 동일한 영역이면서 다른 차원의 체계인 특성을 이해하여……[216쪽]”라면서 깨달음과 역사 두 영역의 존재적 동일함과 그 논리적 (또는 기술적) 차원의 상이함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현응 스님의 통찰은 실은 서양 근세철학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되는 칸트(Kant)의 철학체계의 큰 구조와도 밀접히 연관된다.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연계의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순수)이론이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 이론이성이 우리의 도덕체계를 주관하는 실천이성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이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실천이성비판》은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루는 이론이성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도덕법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현응 스님이 말하는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하는 ‘보살’을 규정지어 주는 ‘깨달음’과 ‘역사에서의 실천’이 논리적으로 각각 다른 차원에 있다는 주장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외에 《실천이성비판》을 따로 저술하여 하나의 이성이지만 두 개의 다른 논리적 차원을 가지고 있음을 보인 것에 비유되어도 큰 무리는 없다고 본다.

현응 스님의 논문 〈기본불교와 대승불교〉에서 전개되는 논지도 현응 스님의 주장에 대한 필자의 분석이 어긋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래에 몇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실재를 전제하지 않는 연기론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가 세상을 덧없이 알고 허망하다고 하는 생각을 유지하면서도 과연 세상을 적극적이고도 뜨겁게 살 수 있는가? 여기서 냉정한 판단을 기초로 한 해답이 나왔다. ‘덧없다, 허망하다, 꿈같다’라는 것은 사실판단이지 가치판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가 덧없고 꿈같고 허망하다는 것은 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판단의 영역이며, 그것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거나, 즐겁다거나 괴롭다거나 또는 무언가를 하겠다거나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은 가치판단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상투적으로 생각하면 ‘덧없다, 허망하다, 꿈같다’라고 하는 면은 당연히 ‘그만두어야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아! 슬프다’ 따위와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상관관계를 가지지 못한다. 즉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은 전혀 다른 논리적 차원의 영역인 것이다…….
대승불교란 이와 같이 세계가 허망하다고 보는 사실판단을 바탕으로 하되, ‘자비’와 ‘원(願)’이라고 하는 투명한 가치판단을 내세워 다양한 방편바라밀을 통해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친다.

20세기 초 영국의 분석철학자 G. E. 모어는 우리가 사실판단으로부터 가치판단이 나오는 것처럼 착각하는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범하지 말아야 함을 역설했다. 예를 들어 다윈의 진화론이 옳아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계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험악한 법칙이 적용되는 곳임이 사실이라고 해 보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사회도 이런 방식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며 지배하고 살아야 하고 또 그러는 것이 옳다는 가치판단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 사회도 자연계처럼 약육강식의 장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막아주며 약자를 보호할 제도적 장치 등이 필요하다는 전혀 다른 가치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현응 스님의 주제인 깨달음과 역사에서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구조의 논의가 가능하다. 깨달음이 삼라만상에서 실재성을 벗겨버림으로써 삶과 존재 모두가 허망하다는 사실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다.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해 생멸하므로 본질과 실체가 없이 공(空)하다는 것이 허망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논의의 편의상 깨달음이 삶과 존재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허망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치판단을 내린다면 이는 바로 위에서 지적한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사실로부터 이를 막을 사회적 제도가 필요하다는 가치판단의 예가 보여주듯이, 존재의 허망함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비와 원(願)이라는 가치판단을 내세워 삶을 더 적극적이고 뜨겁게 살 것을 요구하게 된다.

깨달음과 역사가 하나의 영역에 대한 논리적으로 다른 두 차원의 문제라는 현응스님의 통찰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겠다. 역사상 위대한 철학자들의 통찰도 그 맥을 같이하고 있어서, 현응 스님의 주장과 맞서려면 이 모든 철학자들과도 맞서야 하니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논리적으로 다른 두 차원의 문제들이 그 논리적 상이성 때문에 법칙적으로 연결되지 못한다고 해서 이 둘 사이에 어떤 다른 연기적 관계조차 존재할 수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현응 스님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이는 화엄의 연기관을 따르자면 보살의 깨달음과 그의 역사에서의 실천이라는 두 존재자들 사이에도 연기가 성립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편 논리적으로 상이한 차원의 존재자들 사이에 서로 법칙적 연관성이 없이도 인과관계가 성립함은 현대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에서 특히 위에서 지적한 데이비드슨에 의해 주로 논의되었다. 그의 견해를 예를 들어 살펴보겠다.

철수가 영희와 장난을 치다가 영희의 팔을 꼬집는다고 하자. 영희의 피부에 손상이 일어나고, 이 내용이 신경세포를 타고 뇌에 전해져 영희는 통증을 느끼며 “아야!” 하고 소리 지른다. 여기서 피부의 손상은 생리학적 현상으로, 궁극적으로는 물리학 용어로 기술될 수 있다. 그래서 이 현상은 원칙적으로 물리학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통증은 심리현상으로서 물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용어들과 물리학의 법칙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이 이유를 보기 위해 물리학 교과서를 한번 상기해 보자. 그 교과서의 어느 구석에도 ‘통증’이라는 단어는 나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심리현상과 물리현상을 연결시켜 줄 수도 있을 ‘교량법칙(bridges laws)’은 수많은 뇌신경학자들의 반세기가 넘는 연구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대의 심리철학도 심리현상과 물리현상을 법칙적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말하자면 철학자들은 심리현상과 물리현상이 ‘논리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에 있어서 두 차원을 엄밀하고 정확하게 법칙적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피부의 손상과 통증 사이에 인과적 관계가 존재함을 분명히 알고 있다. 누가 나를 꼬집으면 아프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물리현상과 심리현상 사이에 분명히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굳이 양자역학이 다루는 미시세계의 현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일상에서의 이같이 작은 사례만으로도 ‘논리적으로’ 다르고 법칙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두 차원에 속하는 것들이 실은 인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응 스님이 깨달음과 보살의 역사에서의 실천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부정한 적은 없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스님이 이 두 차원의 논리적 상이성을 강조하다 보니 마치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인과적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방향으로 글이 완성된 것 같기도 하다. 《깨달음과 역사》와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둘 다 그렇다.

한편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가 마치 흰 바둑알의 흰 빛깔과 딱딱함이 서로 아무 논리적 관련도 없지만 조화롭게 하나의 바둑알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살은 깨달음과 역사에서의 자비의 실천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는 멋진 삶을 이루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현응 스님에 있어서 깨달음과 역사가 관련을 맺는 방식이다. 그러나 필자라면 자연과학의 법칙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고 종종 도깨비 방망이같이 느껴지는 변증법이라는 장치를 도입해서 서로 아무 관련도 없는 것 같은 둘을 종합하고 조화를 이루려는 예측 불가능하고 제어할 수 없는 시도를 하지는 않겠다. 현응 스님이 든 흰 바둑알의 예 또한 적절치 않다. 흼과 딱딱함이 도대체 어떻게 서로 붙어서 조화롭게 하나의 바둑알을 만들고 있을까? 흼을 정(正, thesis)으로 할 때 딱딱함을 흼의 반(反, antithesis)으로 볼 수는 없으니 물론 변증법적 관계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혹시 흼과 딱딱함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인과력의 일종인 인력(引力)을 가진 덕분에 합쳐져 하나의 개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질량을 가진 두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는 인력이 있다. 흼이라는 속성과 딱딱함이라는 속성도 서로 인력이 있어서 하나로 뭉쳐 흰 바둑알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력에 의한 상호작용은 연기의 가장 대표적인 관계의 하나인 인과관계의 사례가 된다.

이제 깨달음과 역사가 비록 논리적으로는 다른 차원에 속하지만 경험적으로는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생물학적 존재인 인간이 개체 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부정할 수는 없고, 보통 한 개인의 생애 대부분은 그 개인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데 쓰이게 된다. 배가 고프면 이 몸을 먹여야 하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게 해야 한다. 다치거나 병들면 치료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이런 생물학적 욕구 충족을 위해 쓰는 너무도 많은 시간과 마음 외에도, 사람이기 때문에 필요한 심리적 욕구를 위해서도 한없는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애정을 받고 싶고 또 사회적으로도 어떤 지위를 성취하고픈 욕망 등으로 우리는 자신의 심리를 돌보기 위해 끊임없이 노심초사하며 노력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끝없는 자기 사랑(self-love)으로 넘쳐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자기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현상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것 없이는 생물학적 개체로서의 생존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할 테니까.

그런데 우리가 다행히 붓다의 가르침에 접해서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자. 깨달음이란 주관과 객관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연기로 인해 본질과 실체를 결여하여 모든 것이 무아(無我, anatman)이고 공(空)임을 앎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우리에게 실은 자아(self, atman)가 없고 모든 존재자가 연기로 관련되고 변화한다는 이치를 알아 깨우쳤다고 해 보자. 그러면 이 사람에게는 이제 자아라는 무거운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 갇혀 있던 한없는 자기 사랑이 ‘자기’가 없어진 사랑(selfless love)이 되어 서로 연결되어 변화하는 모든 뭇 삶(衆生)에로 향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 자기 없는 사랑(selfless love)이 바로 자비(慈悲)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자아의 존재에 대한 망상에서 벗어나면 그 자아를 돌보기 위해 애태우느라 생기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三毒)도 없어질 것이고, 이 삼독이 없어진 빈자리에 넘쳐나는 자기가 없어진 사랑 즉 자비심이 대신 성큼 들어섬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다.

필자는 이 점이 경험적으로도 검증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많이도 들어온, 깨달음에서 무한한 자비심이 우러나온다는 가르침은, 깨달은 자는 무한한 자비심을 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르친다기보다는 이렇게 깨달음이 아상(我相)을 제거하여 끝없는 자기 사랑을 한없는 자기 없는 사랑 즉 자비심으로 변화시켜 준다는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비행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필자는 그것이 ‘자기’라는 무거운 뚜껑을 제대로 제거하지 못해 자기 없는 사랑이 넘쳐흘러 중생에게 도달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들이 실은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에의 실천은 별개 차원의 문제로, 깨달음의 내용과는 논리적으로 상관없이 ‘자비’와 ‘원(願)’이라는 가치판단을 내세워 중생을 위한 뜨거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깨달음과 역사 사이에 논리적 상관성이 없음은 필자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자비와 원(願)의 존재론적 근원은 무엇인가? 한없는 자비심을 내고 큰 원(願)을 세워야 하는데, 그것들이 무(無)로부터 나올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필자는 이 자비심과 서원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 바로 원래는 생물학적 본능에 바탕을 둔 자기 사랑이 무아(無我)와 연기에 대한 깨달음에 의해 변화되고 승화된 자기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경험적으로 이보다 더 중요한 근원을 찾을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없는 사랑이 자비와 서원의 유일한 근원이라고까지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개체보존의 생물학적 본능뿐만 아니라 종족보존을 위한 이타적 본능도 가지고 태어났으며, 사회적으로 협동과 봉사의 중요성을 교육받으며 후천적으로 습득한 여러 미덕도 갖추고 있다.

역사에서의 실천을 위한 자비심과 원력(願力)은 이렇게 많은 다른 근원으로부터도 비롯되어 나올 수 있다. 자기 없는 사랑 하나만을 근원으로 보는 것은, 예를 들어 화엄의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단지 경험적으로 가장 분명히 확인되는 생물학적 본능에 바탕을 둔 자기 사랑과 그것이 변화 승화된 자기 없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근원의 하나라는 것이다.


2. 깨달음의 개념적 분석

지금까지 ‘깨달음과 역사에서의 실천’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해 왔다. 이제 주제를 조금 바꾸어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가 제시하는 ‘깨달음’의 속성에 대한 스님의 논지를 소개해 보겠다. 그리고 나아가 ‘깨달음’에 대한 경험주의적 이해와 개념분석을 통해 ‘깨달음’에 대한 더 명료한 이해를 가능하게 할 필자의 제안도 펴 보겠다. 한편 필자의 분석은 역사상의 돈오설(頓悟設)과 점오설(漸悟設)의 대립과 논의 자체가 실은 ‘깨달음’의 개념에 대한 혼동으로부터 비롯되었을 수도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깨달음이란 주관과 객관을 포함하는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적으로 관련되어 생멸하므로 모든 것이 본질과 실체를 결여하여−무아(無我, anatman)− 실재함이 없이 공(空)임을 체득함이다. 깨달음이란 이렇게 기본적으로 인식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말한다. 그런데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 특정한 내용을 가진 어떤 객관적 실체로서 공(空)의 진리를 인식대상으로 하여 인식주관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초월하여 이 둘 각각도 연기로 관련되고 변화하여 스스로의 본질과 실체가 없는 공(空)의 영역임을 알고 받아들임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현응 스님의 견해는 나와 나 이외의 존재세계를 구분하는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초월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필자도 논리적으로 명쾌한 이 주장을 물론 기꺼이 진제(眞諦)로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실은 논리적 차원의 진리로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공(空)의 진리를 체득하는 인식의 경험적 과정은 논리적 차원의 진리와는 다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깨닫기 이전의 우리는 상식적으로 인식주관으로서 ‘나’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필자가 아는 한 불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이 ‘나’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또 절대시해 왔다. 그리고 인식주관으로서 ‘나’가 책을 읽고 강의 등을 들으며 대상으로 존재하는 인식객관으로서 진리내용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식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존재자 사이의 인과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어떤 것이라고 믿는다. 주관과 객관이 자성(自性, self-nature)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인식의 내용은 속제(俗諦)에 해당되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인식의 경험적 과정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진제(眞諦)인 공(空)의 진리에 대한 이해는 인식 과정의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서, 공(空)을 이해하면 인식의 경험적 과정을 거꾸로 재해석하게 되어 근본적으로는 인식주관과 객관이 본질이나 실체가 없이 연기에 의해 생멸하는 가상적 존재일 뿐이라는 논리적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현응 스님 또한 글로 풀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점에 대해 필자와 같은 견해일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부터 깨달음의 경험적 과정을 추적해 가며 우리가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다양한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깨달음에 대한 이해를 더 선명하게 해 보겠다. 지금까지는 종종 형이상학 이론을 동원하며 깨달음과 역사에 대한 관계를 논했으니, 이제는 불교 일반에 대한 보다 단순한 질문들을 통해 깨달음에 대한 평이하고 일상적인 이해를 시도해 보자.

모든 불교도는 붓다의 경지에 이름을 목표로 한다. 이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겠다. 그렇다면 붓다란 무엇인가? 붓다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할 수도 있겠다.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서양인들이라면 이 질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붓다’라는 말의 의미부터 알고 싶어 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붓다(Buddha)’라는 말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서 ‘깨달은 자(Enlightened On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는 무엇을 깨달았기에 ‘붓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진리인가, 세상에 대한 진리인가, 아니면 이 둘 다에 대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승불교적 답변은 자신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공(空)하다는 진리겠다. 그러면 공(空)의 진리를 깨우치면 붓다가 되는가? 아니면 이 진리 내용에 대한 이해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공(空)의 관점으로 바꾸어 내면화시켜야 붓다가 될 수 있는가? 어쩌면 이렇게 세상을 보는 관점을 극적(劇的)이고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조차 붓다가 되기에 충분치 못할지도 모른다.

온갖 번뇌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심리적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붓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무리 지적으로 탁월하고 공(空)의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하더라도 그 삶이 계속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한 ‘깨달은 자’라고 볼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이것은 ‘번뇌에 시달리는 붓다’라는 말이 자기모순인 점이 증명해 준다. ‘결혼한 총각’이나 ‘둥근 사각형’처럼 개념적으로 자기모순을 포함하는 표현은 실재 세계에 그에 해당하는 대상을 가질 수 없다. ‘총각’이란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일컫는데, ‘결혼한 결혼하지 않은 남자’란 있을 수 없다. 또 사각형이란 그 정의(定義)에 의하면 네 변(직선)으로 이루어진 다각형이어서 ‘둥근 사각형’은 없다.

이렇게 자기모순을 포함하는 개념들은 어느 세계에도 그 개념들이 적용되는 대상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번뇌에 시달리는 붓다’가 우리에게 자기모순적 표현으로 다가오고 ‘번뇌에 시달리는 붓다’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붓다’라는 명칭이 ‘번뇌로부터 해방된 자’라는 뜻까지도 포함하게 되어서일 것이다. 엄밀히 말해 깨달음은 인식 차원의 문제고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열반은 삶의 실천의 장에서의 문제로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번뇌에 시달리는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라는 개념이 모순되는 이유는 ‘깨달음’의 개념이 언제부터인가 최소한 어떤 종류의 ‘열반’을, 다시 말해 어떤 종류의 ‘번뇌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포함하게 되어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지금까지 불교 일반에 대한 일련의 질문을 던져 보았으니 이제 다시 원래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간단명료한 답은 물론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안다. 그것은 우리가 깨달음이 가진 다른 종류와 상이한 측면들에 대해 서로 다른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어느덧 깨달음의 다른 종류와 여러 측면을 모두 지칭하는 포괄적인 말(blanket term)이 되었다. 그래서 ‘깨달음’의 개념을 더 선명히 이해하려면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다양한 맥락을 구분하고 정리해 주는 작업이 필요하겠다. 필자는 먼저 깨달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곧 지적(인식적) 깨달음과 실천적(열반적) 깨달음이다.

지적 깨달음

붓다는 주관과 객관을 포함하는 삼라만상이 서로 연관되어 생멸한다는 연기 즉 공(空)의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되었다. 여기서의 깨달음은 인식 차원의 변화를 말한다. 본고의 1절 ‘깨달음과 역사’에서 인식 차원의 변화에 대한 논의가 이미 이루어졌으니, 이 지적 깨달음의 속성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흥미롭게도 ‘깨달음’을 경험주의적으로 접근하며 그 개념을 분석해 보면 역사상의 돈오(頓悟)설과 점오(漸悟)설 사이의 논쟁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실은 해결한다기보다는 논쟁을 해체해 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논쟁의 시작이 개념의 혼동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혼동된 개념을 깨끗이 정리해 주면 논쟁 자체가 처음부터 없어도 되었던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먼저 지적 깨달음의 경우에 한정해서 ‘깨달음’을 개념적으로 분석해 보겠다.

지적 깨달음에 불교의 진리를 깨우치는 정도(degrees)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양적(量的, quantitative) 측면이 있는가를 살펴보자. 무아(無我)와 연기 즉 공(空)에 대한 이해가 한 단계 한 단계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갑작스럽게 한순간에 다가오는가? 이것은 역사상의 돈오점오 논쟁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어리둥절한 질문이다. 이제 우리가 무아와 연기(즉, 공)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깨우치게 되는가를 고려해 보며 이 질문에 대답해 보자. 무아와 공이라는 서로 연관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보통 고등학교 이상 대학 수준의 교육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평균 4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무아’와 ‘공’이라는 이 두 생소한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보면 지적 깨달음에 있어서 돈오(頓悟)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붓다의 연기설과 공(空)을 가르치는 대학 강의실을 상상해 보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서 철학 공부를 해 보지 못한 신입생들은 가령 이 진리를 50% 정도 이해할 만한 지적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철학 과목을 두세 개씩 들어서 75% 정도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른 학교에서 편입하여 이미 불교(철)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소수 학생들은 90% 준비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깨달음의 양화가능성(量化可能性, quantifiability)이 지적 깨달음에 있어서 돈오(頓悟)가 불가능하다는 결정적 증거다.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돈오가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학생들이 공(空)의 진리를 아주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는 어떤 특정한 순간들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순간들이 지적 깨달음의 순간들이라고 불릴 수도 있겠고, 또 학생들은 이런 순간들이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닥쳐온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제로 갑자기 다가오는 것은 단지 개인적으로 지적 깨달음을 인식하는 경험이 그럴 수 있을 뿐이고, 지적 깨달음 전체 과정(process)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깨달음 자체를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 즉 깨달음의 ‘느낌’이 갑작스러울 뿐이지 깨닫게 되는 전체 과정이 갑작스러울 수는 없다. 그리고 강의실에서 공(空)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자신과 세계의 모든 것을 이 가르침에 따라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할 예외적인 학생을 만나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세계의 여러 영역과 측면들에 ‘공(空)’이라는 불교의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적용해 나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 혹시 컴퓨터 칩들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라면 예외가 되겠다. 예를 들어 안드로이드가 처음 만들어질 때 자아와 삼라만상이 영원토록 변치 않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깨닫기 이전 번뇌에 시달리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견해와 같다. 그런데 만약 이 안드로이드가 불교 형이상학 즉 공(空)의 가르침으로 다시 프로그램되어 작동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자신과 세계를 공(空)의 관점에서 보고 해석하는 데 전혀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컴퓨터니까 그렇다. 그러나 생물학적 존재인 인간의 두뇌와 심리체계는 이런 방식으로 변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지적 깨달음에 있어서 돈오(頓悟)는 안드로이드에게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적 깨달음이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논리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질적(質的 qualitative)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가? 그렇다. 자아와 세계를 근본적으로 공(空)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다면 깨달았다고 할 수 없겠다. 현응 스님은 돈오의 ‘돈(頓)’을 ‘갑작스러운’ 또는 ‘단숨에’와 같은 시간적 의미가 아닌 ‘혁명적’이라는 논리적 의미로 해석한다. 그래서 돈오란 일상의 관점과는 논리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인 공(空)의 관점에서 자아와 세계 만물을 바라보는 ‘혁명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혁명’이란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Thomas Kuhn)이 그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하는 ‘혁명’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쿤은 기존의 과학과는 관점과 방법론이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과학이 나와 기존의 과학을 대체하는 것을 ‘과학혁명’이라고 불렀다. 현응 스님에 의하면 돈오(頓悟)란 기존의 자아관 및 세계관과는 질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혁명적’인 자아관과 세계관을 갖는 것이다. 날카로운 통찰이다. 이렇게 돈오의 ‘돈(頓)’을 인식함에 있어서 질적 논리적으로 다른 차원에 진입하는 혁명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지적 깨달음은 언제나 돈오일 수밖에 없다. 깨달은 자들은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관점과는 논리적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자아와 삼라만상을 본다. 그들은 이제 무아(無我)를 믿는다. 또 그들은 만물이 자성(自性)이 없이 연기에 의해 생멸(生滅)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공(空)의 진리를 체득하여 삶과 세계를 ‘혁명적’으로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하게 된다.
필자는 지적 깨달음이 자아와 세계만물에 대한 질적으로 전혀 다른 해석을 요구하는 한 논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돈오(頓悟)라는 점을 인정한다. 공(空)의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논리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지적 깨달음의 질적 논리적인 측면에 있어서 부분적인 또는 ‘점진적인’ 깨달음(漸悟)이 있을 수는 없다. 깨달음은 질적(質的)인 측면에서 언제나 돈오(頓悟)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 위에서 지적 깨달음의 양화(量化)가능한 측면을 살펴보며 논의하였듯이, 이런 종류의 ‘돈오(頓悟)’-관점의 질적 혁명적인 변화-는 경험적으로 볼 때 그렇게 갑작스럽게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날 수는 없다. 공(空)의 진리를 깨닫는 지적 깨달음도 삼라만상의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하나의 과정(process)이다. 어떤 과정도 한 순간 또는 단숨에 일어날 수는 없다. 경험적 관점에서 볼 때 돈오(頓悟)의 주장은 어떤 인과적 과정도 경과 시간(duration)과 중간 단계들(intermediary stages)을 가진다는 우리의 직관과 상충하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갑작스레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한다면,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그가 깨달음을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의식했다는 것일 뿐이다. 다른 모든 과정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과정도 결코 갑작스럽게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이제 지적 깨달음에 대한 논의를 요약 정리해 보자. 논리적으로 그리고 질적(質的)으로 지적 깨달음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관점의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는 돈오(頓悟)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양화(量化)가능한 측면에서의 지적 깨달음은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에 있어서는 언제나 점진적 변화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필자가 제안한 ‘깨달음’의 개념분석을 통해 돈오점오 논쟁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이 해결 또는 ‘해체’될 것을 희망해 본다.

실천적 깨달음

누군가가 지적인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가정하자. 그는 무아와 연기(즉, 공)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또 그가 깨달은 이 진리에 따라 무척 ‘자연스럽게’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해석한다. 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나무랄 데 없이 완전히 깨달았다. 그러나 지적 차원의 인상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가 스스로의 번뇌(duhkha)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와 다른 이들에게 번뇌를 초래하는 방식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습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식욕을 제어하지 못해 아직도 과한 양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건강을 해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또한 팔정도(八正道)의 정언(正言)의 가르침을 알기는 하나 실제로 실천하지 못해 무심결에 남들에게 가혹한 말을 써서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향도 버리지 못했다. 한편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해 그가 속하는 단체에서 어떠한 책임질 일도 맡기를 거부하는 부정적인 습성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실존적 문제를 공(空)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줄만 알지 이들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여러 문제점도 안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지적 인식적 차원의 깨달음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든 번뇌를 야기하는 다양한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더 이상 ‘깨달은 자’로 간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논의했듯이 ‘번뇌에 시달리는 붓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지적 깨달음은 진정으로 온전한 깨달음이 되기에는 충분치 않다. 우리가 현재 이해하는 의미에서 깨달음은 지적 깨달음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깨달은 자는 지적 깨달음의 내용을 인식 차원에서 계속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음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고 제대로 된 깨달음을 위해서는 충분치 않다. 깨달은 자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는 탐욕,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 없는 맑은 공(空)의 상태에 있다. 그리고 그는 붓다가 가르친 팔정도(八正道)와 다른 도덕 규칙들도 철저히 내면화하여 아무런 의식적 노력 없이도 그것들을 따르고 행한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단순히 지적 성취의 문제가 아니다.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습성이 충분히 계발된 상태를 요구하는 또 다른 종류의 깨달음, 즉 실천적 깨달음 또한 성취되어야 한다. 그래서 실천적 깨달음은 ‘열반적 깨달음’으로도 불릴 만하다.

이런 실천적 깨달음만 고려한다면 돈오점오 논쟁이 그다지 심각한 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실은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습성이 어느 순간 갑자기 단숨에 완성될 수는 없을 것이니 실천적 깨달음은 점오(漸悟)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겠다. 또 한편 어떤 이들은 남들보다 빨리 극적으로 그들의 심리상태를 바꾸고 새로운 습성을 계발할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간을 더 필요로 하며 그들의 성품과 의지 그리고 환경적 요인에 따라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어떤 이들은 빨리 달리고 다른 이들은 시간을 두고 여유 있게 걷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머지않아 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시간 차이가 조금 나는 것이 무슨 큰 문제이겠는가?

이제 필자가 한참 전에 제기한 질문을 상기해 보자. 깨달음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갑작스레 단숨에 이루어지는가? 비록 흥미롭지는 못하지만 가장 적절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깨달음’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렸다. 깨달음에는 지적 깨달음과 실천적 깨달음의 두 종류가 있고, 지적 깨달음은 양적(量的)인 측면과 질적(質的)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돈오와 점오에 대한 질문은 위에서 제시한 ‘깨달음’의 개념분석을 따르며 각각의 경우마다 다르게 대답 되어야 한다. 돈오(頓悟)는 지적 깨달음의 질적(質的) 논리적 측면에 해당되고, 지적 깨달음의 양화가능(量化可能)한 측면과 실천적 깨달음에서는 점오(漸悟)만이 가능하다. 필자는 우리가 깨달음에 상이한 종류와 측면들이 있다는 것을 일단 보기만 하면 그토록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돈오점오 논쟁이 실은 ‘깨달음’에 대한 여러 개념적 혼동으로부터 야기되었다는 점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개념분석이 철학적 문제들을 종종 ‘해체’시킨다는 것은 이제 놀라울 것도 없다.


3. 맺는 말

지금까지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에서 필자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들로 다가온 ‘깨달음과 역사의 관계’ 그리고 ‘깨달음의 개념’에 대해 살피고 논의해 보았다. 현응 스님의 책은 그 외에도 여러 다른 주제들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과 제안들을 펼치고 있다. 그 가운데 5장 ‘역사에 다가가는 불교’에 나와 있는 네 편의 에세이는 1980년대 중후반을 배경으로 전개된 불교의 사회적 실천에 관한 스님의 견해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 〈민중불교운동의 대승적 전개를 위하여〉는 당시의 민중불교운동에 대한 스님의 격려뿐 아니라 그 운동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날카로운 비판을 보여주는 에세이다. ‘민중의 분노의 시대’였던 1980년대에 이토록 객관적인 시각과 균형감 있는 비판으로 민중불교를 논의하고 가르치는 데는 단순히 냉철한 지성 외에도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 밖에도 세미나 등을 통해 다루고 싶은 주제들이 많아서 필자가 스스로 책을 따로 쓰지 않는 한 이 자리에서 그 모든 주제를 논의할 수는 없겠다. 단지 독자들에게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가 한국에서 6년 그리고 미국에서 이제 거의 20년 동안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가르쳐 온 필자에게 영어로 된 책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철학적 통찰을 보여주고 가르쳐 준 책이라는 점을 밝히며 글을 마친다.

 

홍창성 /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미국철학회 아시아철학위원회장 역임(2005~2008). 저술로는 “Natural Kinds and the Identity of Property,” “Jaegwon Kim: Conscience of Physicalism,” “How to Teach Zen in a College Class-room” 〈유형물리주의와 기능주의 환원론의 만남〉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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