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4년 종단개혁을 바라보는 시선들

어느 시대에나 변화의 요구가 있듯 1,700년 한국불교사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는 그 시대 불교계가 불법과 율장에 어긋나며 대중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각과 반성으로부터 비롯됐다. 또 불교개혁의 의지는 때로 결사와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심각한 대립이나 새로운 종파의 출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성공적인 개혁은 불교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자발적인 개혁이 뒤따르지 못함에 따라 수백 년간의 모진 탄압과 수모를 견뎌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숭유억불’이라는 500년의 긴 암흑기를 빠져나오자 개인이나 단체를 중심으로 숱한 불교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혁안이 현실에 적용되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때를 기다려야 했으며, 일각에서 개혁이 이뤄졌다 해도 불교계의 큰 흐름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가운데 1950년대 ‘전통불교 회복’ ‘왜색불교 척결’을 기치로 이뤄졌던 불교정화운동과 1994년 서의현 스님의 총무원장 3선 강행으로 시작된 종단개혁은 상대적으로 ‘성공적’이란 평가가 많다. 정화운동의 경우 비구승단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조계종단의 재정립 및 비구승단으로서의 체제 정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권력 의존, 반불교적인 행태 노출, 승려의 질적 하락 등 정화 과정의 여러 문제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돼 왔다.

하지만 1994년 종단개혁에 대한 평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불교계의 ‘6·10 민주항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종단의 민주화 및 자주화를 갈망하는 출·재가자가 이뤄낸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종단개혁 자체에 대해 당사자들은 물론 학자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3.29와 4.10의 수차례 법난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불교자주화의 담보 속에 정법수행의 기틀을 마련했다.”(탄성 스님) “1994년은 종단사에서 기념비적인 해였다. 1962년 정화운동의 와중에 통합종단이 출범한 뒤 자생적인 힘에 의한 종단개혁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단 내부 개혁뿐 아니라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권력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려는 몸부림이었다.”(월주 스님) “서슬 퍼런 서 원장의 권력 앞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정의의 대중이 종단을 바로 세우겠다는 의로운 뜻으로 일어나 불의의 세력을 물리쳤다. 정의의 힘이 불의의 힘을 물리쳤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크다.”(도법 스님) “3월 26일 범승가종단 개혁추진회가 결성된 이후부터 4월 13일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무너지기까지의 시기는 분명 한국불교사의 일대 전환점을 이룬 시기이다. 그것은 이 기간 동안에 한국불교 교단의 독재체제를 ‘아래로부터’ 무너뜨린 최초의 사회적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유승무) “종단개혁운동은 불교 내부적으로는 정권의 불교탄압, 불교의 정치예속화, 폭력으로 얼룩진 문중 간의 파벌 다툼 등 불교계의 치부를 도려내는 대수술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고 불교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박수호) “1994년 개혁회의는 모든 불교도들이 합심해서 서의현의 장기집권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불교계 민주화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김순석)

이러한 다수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1994년 이후 개혁에 착수한 세력들이 과연 종도들의 요구에 얼마나 부응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평가가 확연히 달라진다. 또 일각에서는 당시 의현 스님과 더불어 반개혁적인 인물로 낙인찍혔던 서암 스님을 재조명하거나 종단개혁 과정이 경전이나 율장에 적합했느냐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1994년 종단개혁의 배경과 과정, 종단개혁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과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2. 1994년 종단개혁의 배경

1) 권력 독점과 개혁세력의 등장

해방 이후 조계종은 혼란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승만의 유시로 본격화된 불교정화운동이 1970년 1월 대처승 측에서 태고종을 창종함으로써 일단 마무리됐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처’라는 벽을 넘어서자 종단 내부의 갈등과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종정과 총무원장의 갈등, 조계사파와 개운사파의 대립, 민중불교의 등장, 10·27법난, 청년 승려와 재가불자들의 개혁 촉구, 비상종단 등장, 해인사 승려대회 등 현대불교사의 페이지는 숨 가쁘게 넘어갔다. 통합종단 이후 현재까지 총 33대 총무원장에 이르고 있지만 재임 기간은 평균 1년 6개월에 불과했다. 4년 임기를 채운 총무원장이 3명에 불과할 정도로 격동의 시기였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의현 스님은 처음으로 4년의 총무원장 임기를 채웠을 뿐 아니라 재선에 이어 3선연임까지 강행하려 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힘 있는 문중 출신도, 정치적인 지지 세력이 공고하지 못했음에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치권과의 유착, 측근의 관리, 정적들의 효과적인 제압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직과 제도를 통해 장기화 집권의 토대를 차근차근 다져왔다는 점이 무엇보다 주효했다.
당시 중앙종회는 24개 교구본사에서 직접선거로 선출된 48명과 간선선출위원회에서 선출된 직능대표 27명 등 총 75명의 비구로 구성돼 있었다. 종회의원은 대부분 본사 또는 주요 사찰의 주지를 겸하는데 본사 주지 인사권을 총무원장이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에 간선선출위원회 위원장까지 총무원장이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회의원은 총무원장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총무원장의 독재체제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이미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3선연임에 대한 대중들의 반발과 저항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에도 총무원장 선출권을 갖고 있던 중앙종회가 의현 스님을 제27대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현 스님이 ‘28년 동안 총무원장을 채우지 못한 치욕의 종단사’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다시 3선을 시도할 무렵에는 일반 시민은 물론 불교대중들의 의식 또한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체제가 1987년 ‘6·10민주항쟁’을 분기점으로 무너지면서 시민운동, 민중운동, 자주화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또 일반 민중들의 힘으로 이끌어낸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16년 만에 대통령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지면서 불교계에도 참여민주주의 요구가 높아져 있었다. 여기에 1970년대 중반 이후 형성된 민중불교 세력과 개혁을 열망하는 재가불자들의 등장은 철옹성 같던 서원장의 종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견제 세력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해 있었다.

이 중 선우도량과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는 1994년 종단개혁을 이끈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다. 선우도량은 1990년 11월 14~15일 예산 수덕사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계율실천을 토대로 한 승풍진작 운동을 선언했다. 당시 금산사 부주지였던 도법 스님을 대표로 돈연, 지환, 현봉, 현응, 영명, 명진, 수경, 종광, 여연, 시명, 법성, 원명, 원택 스님 등 종단의 신진 엘리트들이 대거 참여했다. ‘출가 10년 이상의 30~50세 비구승’으로 구성된 이들은 “교계 전반에 걸쳐 만연돼 있는 불신과 패배감을 극복, 이 땅의 불교를 거듭나게 하고 현대적 승가상을 확립시킨다”는 뚜렷한 목표를 지향했다. 또한 이들은 승가의 교육과 수행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종단의 제도개혁을 지속적으로 제안하며 종단내 위상과 대중적 공감대를 넓혀나갔다.

1992년 10월 1일 창립한 실천승가회는 군부독재체제에서 통일·민주화에 앞장섰던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6월 창립)와 대승불교승가회(1988년 3월 창립)를 비롯해 불교계 진보세력들로 구성된 승가 운동단체였다. “보살행원의 사상을 오늘의 우리 사회와 민족사 위에 자기 몸을 던지는 마음으로 실천하여 개인적으로는 자기 수행을 완성하고, 민족사적으로는 온갖 역사 모순을 극복하여 불국토를 성취한다”는 취지 아래 지선 스님을 비롯해 진관, 법성, 성연, 명진, 여연, 종태, 효림, 법안 스님 등이 참여했다.

특히 실천승가회는 종단 내부의 문제보다 사회참여에 전념해왔던 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종단 내부로 시선을 돌려 종단 제도개혁을 위한 노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실천승가회는 1993년 4월 종단개혁을 위한 공개토론회를 거쳐 종회의원 직선제와 주요 소임의 겸직금지를 골격으로 하는 종헌종법 개정운동을 중앙종회에 제안했다. 또 그해 7월에 종법개정을 위한 대중 서명운동을 전개해 3개월 만에 승려 2,000여 명의 서명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며 교단 내의 대중적인 역량을 강화해 나갔다.

이들 단체 이외에도 전국승가대학 학인연합, 동국대 석림동문회, 동국대 동림동문회, 동국대 불교학생회, 중앙승가대동문회, 중앙승가대학생회, 전국불교운동,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우리는 선우, 한국교수불자연합회, 경제정의실천 불교시민연합, 대한불교청년회, 불교인권위원회, 청년선재회, 보리방송모니터회 등도 종단개혁의 주도·지지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2) 총무원장의 정권유착에 대한 반감 확산

종단개혁에 출가자는 물론 재가불자들이 광범위하게 동참하게 된 배경에는 ‘의현 총무원장=반민주 및 독재’라는 시대적인 인식과 함께 김영삼 정권의 종교편향 영향도 적지 않았다. 31년간 지속됐던 군부 출신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문민정부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인물인 동시에 독선적인 개신교 장로라는 양면성을 띠었다. 그는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청와대에 찬송가가 울려 퍼지게 하겠다”고 공언하는가 하면 “일요일 선거유세 중지 선언”을 하기도 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청와대에 목사를 불러 예배를 보는 등 종교편향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반 언론에서조차 이는 국민의 85% 이상이 개신교를 믿는 미국에서도 하지 않는 일로 타 종교인들의 불만을 자초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종단개혁 1년여 전인 1993년 4월 1일 발생한 군부대 불상 폐기 사건도 김영삼 정권에 대한 불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육군 제17사단 전차대대 부대장 중령 조병석은 호국신흥사 법당을 폐쇄하고 불상을 파손해 폐기하는 훼불사건을 자행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전국 50여 신행단체가 범불교도 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중앙종회와 원로회의에서도 이 문제를 안건으로 다뤘다. 또 동국대와 중앙승가대 학인 스님들이 항의시위를 벌였고 청년불교도 규탄대회가 조계사에서 열리기도 했다.

불교계의 규탄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4월 12일 권영해 국방장관의 유감 표명과 함께 훼불 주범을 구속함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5월 21일 조병석이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됨에 따라 정부에 대한 반감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이렇듯 정권 초기부터 종교편향이 잇따르는 김영삼 정권에 대한 불교계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총무원과 정권과의 긴밀한 유착관계였다. 1987년 총무원장 의현 스님은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고뇌에 찬 충정의 구국 의지’라며 지지했다. 6·29 선언에 이어 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이번에는 ‘불자 대통령’ 운운하며 노태우 후보를 지원했다. 그러다 1992년 대선에서는 정주영 후보를 밀다가 다시 YS(김영삼 전 대통령) 쪽으로 돌아섰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수장이 선거 때마다 스스로 정치적인 중립성을 훼손하자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김영삼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총무원장에 대한 불신은 깊어가고 불교의 자주화에 대한 불자들의 열망도 더욱 커져 갔다.

이런 가운데 의현 스님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 1994년 1월 27일 터진 상무대 비리 연루 사건이었다. 상무대 사건은 국방부가 광주와 김해에 있는 제병합동교육본부 및 병과학교를 전남 장성군으로 이전하는 사업으로, 이 과정에서 조계종 총무원장이 정치권의 비자금을 돈세탁해주었다는 의혹이었다. 당시 이 사업을 수주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자 청우건설의 조기현 대표는 총 공사비 1,600억 원 가운데 658억 원을 선급금으로 받았다. 이 중 227억 원을 개인적인 용도로 유용했으며, 80억 원을 의현 스님이 주지로 있던 대구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 건립기금으로 시주했다. 이 80억 원은 동화사 재무담당 스님의 손을 거치지 않고 주지인 의현 스님에게 직접 건네졌으며, 이것이 다시 정치권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결국 의현 스님은 상무대와 관련한 숱한 의혹을 낳으며 불교계를 정치권과 결탁한 비리 집단으로 내몰리도록 했다. 동시에 의현 스님의 입지도 크게 줄어들었으며 결국 불자들의 거센 저항과 마주해야 했다.


3. 범종추의 결성과 종단개혁 착수

1994년 새해 벽두부터 불교계는 술렁였다. 이 해 8월 말로 의현 스님이 총무원장 임기를 마치기 때문이었다. 실천승가회, 석림동문회, 선우도량, 전국승가대학학인연합회, 중앙승가대 학생회 등 승가단체들은 1월 14일 회동을 갖고 종단개혁에 대해 논의하고 연대 움직임까지 보였다. 특히 1970~80년대 군부독재에 항거했던 진보세력 측 스님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실천승가회는 이번에 반드시 민주적인 종단을 탄생시키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미 1월 11일 실천승가회 기자회견에서도 “종단의 권력구조를 건강하게 건설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며, 모든 수단에는 ‘구종을 위한 농성’ ‘전국승려대회’ 등이 포함된다”고 선언했다. 또 그들은 “개혁이 안 되면 대중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시 의현 스님이 3선 출마에 나설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실행으로 옮겨질 경우 1인 독재체제 및 정권과의 유착을 반드시 끊고 종단의 민주화를 일궈내겠다는 게 실천승가회의 입장이었다.

개혁에 대한 열망은 승가뿐 아니라 재가단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정의실천 불교시민연합도 1월 17일 조계종 총무원 앞마당에서 중앙종회의원들에게 꽃을 나눠주며 “불교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한국불교가 새롭게 태어나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많은 단체들이 대책과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때마침 상무대 이전 비리 문제가 불거졌다. 이에 대한 총무원장의 침묵 속에 비판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 갔고, 종단의 민주화와 자주화에 대한 공감대는 폭넓게 확산됐다. 젊은 학인 스님들이 주축이 된 전국승가대학 학인연합, 중앙승가대학생회, 동국대석림회 등 승가단체들은 3월 9일 동화사 불사금의 출처를 밝힐 것과 함께 총무원장의 용퇴를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이런 가운데 3월 16일 실천불교회가 현대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종단개혁에 관한 불교대중 의식조사’도 종단개혁에 불을 지피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스님 400명과 재가자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절대다수인 86.6%가 총무원장의 3임을 반대했으며, 종단의 개혁 필요성에 대해 전체 응답자의 95%가 개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현 총무원장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주위의 만류에도 그는 여론조사가 발표되던 3월 16일 측근을 통해 3선 출마를 공표했고, 3월 30일 임시종회에서 차기 총무원장 선출을 다룰 것을 전격 발표했다. 논란이 되던 당시 종헌(43조)의 “총무원장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중임(重任)할 수 있다”는 규정을 놓고 ‘중임’이 두 번이 아니라 거듭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재임 기간 중 불교방송 인가, 중앙승가대 4년제 승격 및 각종 학교 인가, 불교케이블TV 인가 등 공적이 많으며, 특유의 결단력으로 종단분규를 잠재우는 데도 자신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듯 종도들의 마음은 이미 의현 스님을 떠난 뒤였다. 승가와 재가단체들은 총무원장의 즉각 퇴진을 속속 촉구하고 나섰다. 중앙승가대 학인스님 250여 명은 3월 21일 검찰청 정문에서 구종(救宗)법회를 개최하고 △상무대 비리에 대한 국회의 국정조사권 발동 △검찰의 성역 없는 수사 및 관련자 구속 △의현 총무원장 퇴진 등을 천명했다. 또 전국불교운동연합 이문옥 공동의장, 대한불교청년회 배영진 회장,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장혁 회장, 경제정의실천 불교시민연합 김동흔 사무처장 등 재가불자 1,000여 명은 3월 22일 상무대 비리에 대해 총무원장이 직접 의혹을 밝힐 것과 3월 30일 예정인 총무원장 선출 계획은 취소돼야 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승가단체들도 이러한 불자들의 요구에 부응해 민첩하게 대응했다. 실천승가회, 선우도량, 중앙승가대학생회, 동국대석림동문회, 동국대동림동문회 등 8개 승가단체는 3월 23일 중앙승가대에서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 출범식을 갖고 청화·시현·도법 스님을 상임대표로 추대했다. 이들은 “봉건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체와 퇴조만이 깊어가는 불교를 민족역사의 중심 무대로 올바로 묶어 세우기 위해서는 종단의 법과 제도, 인물을 개혁해야 한다”며 “3월 30일 종회의 불법적인 총무원장 날치기 선거를 저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94년 3월 23일 중앙승가대에서 열린 범종추 출범식.
3월 26일 조계사에서 범종추 소속 스님 500여 명과 재가불자 3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구종법회에는 ‘총무원장 3선 반대와 상무대 비리 진상규명’을 촉구한 뒤 탑골공원까지 평화행진을 실시했다. 이어 청화, 시현, 도법, 희문 등 범종추 대표들과 비구니 현오 스님 등 5명이 구종법회가 끝나자 조계사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재가자로 ‘우리는 선우’ 남지심 공동대표가 합류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언론의 관심이 커져갔고 조계종 사태 관련 보도기사도 급격히 늘어갔다. 김용덕(한양대), 박광서(서강대), 사재동(충남대), 정태혁(동국대) 등 교수불자 36인이 종단개혁 촉구와 현 총무원장 3임을 반대하는 등 지식인들의 선언도 잇따랐다.

 


4. 3·29 폭력사태와 의현 총무원장 퇴진

3월 28일 500여 대중이 ‘종단개혁을 위한 결의대회’를 갖고 철야정진 기도에 들어간 가운데 종단개혁의 분기점이 됐던 사건이 벌어졌다. 중앙종회를 하루 앞둔 3월 29일 새벽 6시 30분 300여 명의 조직폭력배들이 조계사에 난입해 범종추 스님들을 폭행한 것이다. 이들 폭력배가 총무원장 측근의 지휘 아래 이뤄졌음이 드러나면서 의현 스님을 지지하던 세력까지 등을 돌렸다. 또 폭력을 방조한 경찰에 대한 비난이 커졌고 심지어 3명의 중앙승가대 학인들은 몸에 시너를 붓고 분신을 기도하기도 했다. 여기에 종회의원이던 영담, 정우 스님이 돌연 범종추 지지를 선언하고 나선 것도 종단개혁에 큰 힘으로 작용했다.

총무원 청사를 두고 범종추 스님들과 집행부 스님들이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이날 오후 6시 40분 종로경찰서는 총무원의 요청에 따라 전경 1,500여 명을 투입했다. 경찰들은 농성을 벌이던 대중들을 강제해산시키고 200여 명의 스님들을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특히 《해인》지 편집장이었던 도각 스님이 총무원 측이 던진 돌에 얼굴을 맞고 덕왕전 지붕에서 떨어지는 중상을 입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3월 30일 중앙종회가 열리기 직전 정휴, 중원, 지하, 설정, 현호, 월탄, 설조, 일면 스님이 종회 불참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종회의원들은 종도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단독 출마한 의현 스님을 선택했다. 56명의 종회의원 중 55명이 의현 스님의 총무원장 3선을 지지한 것이다. 당선 직후 의현 스님은 “폭력에 굴하지 않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종단을 수호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저항은 더욱 커져갔다. 4월 1일 교수, 문인, 법조인, 언론인 등 각계 인사 419명이 폭력배 난동을 방관한 정부를 비판하는 동시에 총무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또 가톨릭, 개신교, 원불교 지도자까지 “사상 유례없는 종교탄압”이라며 경찰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범종추는 4월 2일 안암동 중앙승가대에서 폭력배 난입과 경찰 강경 진압을 규탄하는 대회를 열고 내무부를 항의방문하는 등 개혁을 향한 노력을 지속해나갔다. 이때 범종추의 개혁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 원로회의였다. 4월 5일 부의장 혜암 스님의 소집으로 종로 대각사에서 열린 원로회의에서 의현 총무원장 즉각 사퇴 및 4월 10일 승려대회 개최를 결의했다. 하지만 의현 스님은 원로회의 결의사항을 거부했다. 이때까지도 개혁을 흐름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한 가닥 희망을 접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범종추는 4월 6일 20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조계사에서 범불교대회를 개최하고 최형우 내무부장관 해임 및 의현 스님 퇴진을 강력히 요구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4월 7일 서암 스님은 읍소문을 발표하고 “반목과 쟁투는 끝없는 순환을 이루므로, 안정과 평화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이라며 “자비와 화합으로 종단의 앞날을 열어나가 주시기를 거듭 호소한다”고 밝혔다.

사면초가에 직면한 의현 스님 측이 4월 7일 원로중진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혜암 스님이 이를 거부했다. 이런 가운데 4월 9일 서암 스님은 다시 원로의원인 비룡, 도천, 청하 스님을 비롯해 법전, 정관 스님 등 100여 명의 원로·중진 스님들의 의견을 수렴해 △전 사부대중은 종단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화합의 장을 갖도록 하라 △4월 10일 개최예정인 집회는 종단의 분열과 법통의 단절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금한다 △종단 수습을 위하여 원로회의를 비롯한 중앙종회와 집행부 및 범종추 대표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토록 하고 종난을 수습하라 등 3개항의 종정교시를 하달했다.

그러나 종정의 읍소문과 교시도 거대한 종단개혁의 흐름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4월 10일 오후 1시 조계사에서 2,500여 스님과 1,000여 재가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국승려대회가 봉행됐다. 사상 최대 규모였던 이날 승려대회에서 혜암 스님은 “서암 종정은 합법적인 승려대회를 금지하는 교시를 내려 종헌을 위배했고, 서 원장은 불법으로 3선 연임을 강행하고 폭력배를 동원 종도들의 뜻을 어겼다”며 불신임 결의의 이유를 밝혔다. 이어 △의현 총무원장 모든 공직 박탈 및 체탈도첩(멸빈) △현 총무원 집행부 불신 △조계종 개혁회의 출범 △차후 원로회의에서 후임 종정 추대 등을 결의했다.

 

종단개혁을 요구하며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1994년 4월).
전국승려대회에 이어 원로회의 의장권한대행 혜암 스님은 4월 11일 비상상태를 선포했다. 이제 의현 총무원장에게는 더 이상 기댈 곳도 버틸 힘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4월 13일 새벽 5시 종로 대각사에서 총무원장 사퇴를 선언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이날 오후 예정대로 열린 범불교도대회에서 2,000여 스님들과 8,000여 재가불자들은 대통령의 ‘3·29 법난’에 대한 사과 및 내무부 장관 해임 등을 요구했고, 2,000여 명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를 향해 거리시위를 벌였다. 원로회의도 같은 날 오후 4시 총무원 청사에서 전국승려대회 결의 내용들을 인준하는 동시에 10대 중앙종회는 모든 권한을 조계종 개혁회의에 위임하고 해산할 것을 지시했다. 3월 26일 범종추의 구종법회를 시작으로 본격화된 종단개혁은 이렇게 19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5. 조계종 개혁회의 활동과 성과

4·10 전국승려대회와 원로회의 인준으로 4월 22일 출범한 조계종 개혁회의는 의장 월하 스님과 상임위원장 탄성 스님을 비롯한 99명이 참여한 가운데 6개월을 기한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했다. 종단개혁과 불교중흥을 기치로 △정법종단의 구현 △불교자주화 실현 △종단운영의 민주화 △청정교단의 구현 △불교의 사회역할 확대 등 5대 지표를 실현하는 토대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강구했다. 전화, 팩스, 컴퓨터 통신으로 사부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을 비롯해 종책세미나, 개혁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 여론조사작업 등을 실시했다.

개혁회의는 참선수행 도량인 선원을 기초선원과 전문선원으로 구분해 기초선원 이수자는 종단의 기본교육 이수자와 동등한 자격을 갖도록 했다. 기초선원 이수자와 기본교육 이수자만이 전문선원에 입방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또 단일 계단을 운영하는 동시에 계를 받기 위해선 종단에서 정한 의무교육을 반드시 이수하도록 함으로써 수행자로서 자질과 역량을 고양시키도록 했다. 과거의 교육 미비와 수행풍토가 정립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병폐를 개선하고 올바른 수행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총무원으로 일원화됐던 종무행정 체계를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으로 분리해 각각의 역할을 전문성에 근거해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교육원은 ‘기초행자교육원’을 두어 행자교육을 엄격히 실시하도록 하고, 승가대학 과정을 의무교육으로 전환해 승려교육을 대폭 강화했다. 또 승가고시를 의무화하고 여기에서 합격해야 종단의 모든 교역직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학림, 승가대학원, 율원, 선학연수원을 두어 교육을 체계화하고, 선학, 율학, 교학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두어 양적, 질적으로 발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점도 성과라 할 수 있다.

총무원의 역할을 보완하고 독주를 견제할 수 있도록 중앙종회의 권한을 확대시킨 점도 큰 변화다. 종회의원은 종단의 다른 주요 소임을 맡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 종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에 대해서는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징계를 할 경우 중앙종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그 지위를 보장했다. 이와 함께 종단운영에 종도들의 참여를 확대시켰다. 총무원장 선거권을 320여 명으로 확대했고, 교구본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교구종회의원 등 종단의 주요소임자를 직접 선거로 선출케 한 것이다.

종래에 징계에 관한 사항만 담당했던 호계원의 소관업무도 크게 확대해 징계 이외에도 선거 관련 심판 등을 관장하게 했다. 특히 종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종단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 종단 재정의 공영성 및 투명성 보장을 위해 모든 재정은 공개운영을 원칙으로 함을 종헌에 명문화했으며, 사설사암의 종단 등록을 의무화하면서도 운영의 독립성과 사자상승을 인정해 기득권을 충분히 보장토록 했다. 또 사찰이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감사기관의 조사를 거쳐 총무원의 허가를 얻어야 하고, 총무원이 종단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중앙종회의 동의를 얻게 해 종단 재산처분의 요건을 엄격히 했다. 시대적인 여망을 담아 불교사회복지법인 등을 설치하는 것을 종헌에 비중 있게 명시한 것도 주목할 만한 성과로 꼽힌다.

개혁회의는 또 ‘인적청산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종단개혁에 저항했던 ‘해종행위자’ 143명에 대해 징계를 결의했다. 이 가운데 의현, 보일, 규필, 원두, 무성, 종원, 준제, 진암, 진경 스님 등 9명에 대해서는 세간법의 사형에 해당하는 체탈도첩(멸빈)을 확정했다.
한편 개혁회의는 종헌과 종법을 개정해 11월 7일 중앙종회 선거를 실시해 제11대 중앙종회를 개원시키고 원래 약속했던 6개월의 시한을 2개월 연장한 12월 8일 해산했다. 또 중앙종회는 개혁회의가 개정한 종헌종법에 따라 11월 21일 총무원장 선거를 실시해 제28대 총무원장으로 월주 스님을 선출했다.


6. 종단개혁에 대한 평가들과 과제

1994년 종단개혁은 조계종의 행정, 교육, 포교 등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대중이 힘을 모아 일궈낸 큰 성과였다. 그러나 당시 종단개혁에 대한 아쉬움과 비판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다. 이는 곧 오늘날 불교계가 당면한 문제이자 새롭게 지향해야할 개혁과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법 스님은 종단개혁의 과정에 있어 △개혁 주체의 불교적 문제의식의 빈곤 △사전 준비의 부족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풍토 △수행자적 신념과 자세의 흔들림 △약속 이행이라는 명분 흠집 △사부대중이 화합하는 계기로 승화시키지 못함 등을 비판했다.

김봉준은 종단개혁운동이 사부대중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서 이뤄졌음에도 막상 개혁회의 구성 과정에서 재가불자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하는 개혁회의의 이중성과 함께, 당시 개혁세력이었던 젊은 승가도 제도정치권에 대부분 편입됨에 따라 건전한 비판·견제 세력이 부재하게 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박수호는 종단운영의 민주화라는 개혁종단의 애초 목표가 상당히 퇴색됐음을 지적했다. 비록 종권이 특정인에게 집중되는 문제는 해결했지만, 비구니와 재가신도가 배제된 채 비구에게 종권이 집중되는 것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불교 자주화’라는 목표도 법난사태의 불명확한 해결과 세속법에 의존하는 문제해결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한계를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박희승은 1998~1999년 재연된 종단사태는 1994년 개혁불사의 한계를 보여주었다고 보고, 교단의 정화와 개혁이란 제도 개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의식 개혁과 병행돼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평가했다. 이를 위해 △조계종단의 정체성 제고 △수행종풍 확산 및 수행체계와 지침, 프로그램 개발 △포교 강화 및 종단 재가신도의 교육과 수행의 체계화 △종단 및 사찰 운영제도의 지속적 개선 등을 향후 개혁 과제로 제안했다.

김응철은 1995년(1차), 1998년(2차), 2003년(3차)에 각각 500여 명의 스님과 재가자를 대상으로 종단개혁과 관련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정법구현 종단의 실천도’ ‘불교자주화 구현의 실천도’ ‘청정교단 구현 실천도’ ‘종단 운영의 민주화’ ‘불교의 대사회적 역할 확대 실천도’ 등 각 분야에서 긍정적인 평가보다 부정적인 평가가 월등을 높았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 같은 결과는 종단개혁 이후에도 종단 지도부가 구성원들로부터 여전히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김광식은 승려대회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했다. 승려대회는 계율의 측면에서 논란의 소지가 적지 않음으로 이에 대한 기원 및 연원을 반드시 고찰해야 하며, 작금의 승려대회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분규의 상징으로 보고 있음을 유의해야 함을 언급했다. 특히 승려대회 자체에 초법적인 권위(구속력, 효력)가 있다고 한다면 추후에도 승려대회에 의지해 모든 문제와 모순을 해소하려는 기대심리가 지속됨에 따라 종헌종법의 권위는 무너지고 반불교적인 행태가 더욱 깊어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김광식은 또 1994년 종단개혁의 걸림돌처럼 여겨졌던 서암 스님이 사실은 종단개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조명했다. 특히 세미나 등을 통해 수렴한 종단개혁 내용을 1993년 11월 30일 교계신문에 이미 공고를 하고 단행하려 했음에 주목했다. 이어 개혁안에는 △승가갈마법 시행 △종학연구소 설치 △각급 승가고시 실시 △상설교육원 개설 △자자와 포살 실시 △재정의 공개 △종단 소유 부동산 관리운영책 수립 △기획실 부활 △종회의원 면책특권 삭제 등 개혁종단 못지않게 개혁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소개했다.

김순석은 개혁회의가 불교계의 민주화에 큰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종정과 총무원장의 청와대 방문으로 개혁의지를 희석시킨 점 △비구니들의 헌신적인 참여에도 고작 9명을 선임함으로써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점 △서의현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한 종회의원들을 개혁회의에 포섭한 점 등을 꼽았다.

이 밖에 징계자 사면에 대한 문제 지적도 있다. 서암 스님이 1994년 4월 26일 종정에서 물러날 때 원로 스님들에게 쓴 글에서 “본인에게는 하등 전달 없이 타처(他處)에서 불신임결의를 하셨는지는 풀리지 않는 의혹으로 남아 있다”고 밝혔던 것처럼, 4·10 승려대회에 참석하고 있지 않은 종정을 불신임하고 총무원장을 멸빈하는 궐석 징계는 절차상 문제는 물론 율장에도 어긋난다는 비판이다. 또한 현 징계제도는 (참회와 화합이라는) 율장의 정신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채, 범계자에 대한 응징과 처벌의 개념이 강한 일반 사회법에 가까운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승가라는 수행자 공동체의 법률 체계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범계 행위의 확정 및 징계방법, 징계 절차, 그리고 징계자의 관리 등에 있어 율장과 심각하게 상치한다는 지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자비와 화합에 근거해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불교승단에서 영원히 수행의 기회를 빼앗는 멸빈과 같은 가혹한 처벌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는 뼈아픈 지적도 있었다.

여기에 종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멸빈자 사면복권’을 묻는 질문에 ‘절대 반대’ 15.1%에 그친 반면 ‘선별 및 모두 사면복권’이 85.0%로 월등히 많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종단개혁 자체가 종도들의 뜻에 의한 것이라면 사면 또한 종도들의 뜻에 따라 이뤄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밖에 종단개혁 이전에는 총무원장의 권력 집중이 문제라면 최근에는 종회의원의 과도한 권력과 도덕성이 새로운 문제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1994년 종단개혁은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이뤄진 혁명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개혁이 불교의 법과 율보다는 세간의 민주화와 자주화를 좇아 이뤄졌는지, 그 과정에서 발생한 비불교적인 요소와 상처들은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불교의 개혁은 세간의 민주화나 자주화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재형 / 법보신문 학술기자.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사학과 수료. 주요 논문으로 〈불교계 친일행적 어떻게 볼 것인가-지암 이종욱을 중심으로〉 〈고은의 만해론을 비판한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신미의 역할〉 〈초기불교 연구 현황과 전망-불교 박사학위논문 분석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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