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로 (權相老, 1879~1965)]

1. 시작하는 말

 

권상로(權相老,1879~1965)
개화기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는 ‘개혁’ ‘혁명’ 또는 ‘유신’의 도도한 물결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것은 1,600여 년의 한국불교 역사상 일찍이 그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당시에는 승려들은 물론이고 한국불교에 관심이 있는 모든 지식인이 한결같이 한국불교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불교학자들은 불교개혁의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개혁의 이념을 제공하였고, 그것을 불교계의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또한 여러 가지 형태로 분출됨으로써 상당한 업적과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심지어 보수 기득권층에 속하는 인사들까지도 언필칭 ‘개혁’이요 ‘유신’이었으니, 바야흐로 당시 한국불교계에서는 ‘개혁’이 하나의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었다.  

1895년의 입성해금(入城解禁)으로 말미암아 신교(信敎)의 자유를 획득했지만 과거 경험해보지 못했던 다종교 상황 속에 내던져진 한국불교는 특히 기독교의 급속한 전파에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사회진화론의 생존경쟁 원리는 더욱 위기감을 부추김으로써 불교개혁의 패러다임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1,600여 년의 한국불교사에 일찍이 없었던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자기 정체성 확립의 노력이었다. 물론 이때에 제기되었던 개혁의 논의와 실천들이 아직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한 차원 높은 발전을 위한 자기비판과 방향 모색의 화두를 던졌다는 의미에서 근대 한국불교 패러다임의 형성은 불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한기두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불교개혁을 시도했던 시대라고 단정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면서, 지난날의 고착된 불교가 폐단뿐으로 우리 국가 사회를 구제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은 선각자들은 한결같이 불교를 개혁해야 한다고 제창했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표적인 개혁의 움직임으로 백용성의 대각교(大覺敎) 운동, 백학명의 반농반선(半農半禪) 운동, 박한영의 포교 현대화 운동, 송경허의 격외선(格外禪) 생활화 운동,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박중빈의 조선불교혁신론을 열거하고 있다.

양은용은 당시의 불교개혁이 몇 사람 선각자들의 이론이나 행적에 한정된다기보다는 한 시대를 풍미한 불교 사조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고, 김광식은 근대 불교개혁론은 개화기부터 194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제기된 당시 불교계의 ‘화두’였으며, 근현대 불교의 핵심적인 담론이었다고 규정하면서 조선 후기 이래의 낙후되었던 불교를 발전·개혁·유신시키려는 노력이 교단 내외에서 꾸준히 제기되면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던 것이니, 불교개혁론은 당시 불교계의 현실과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다.

결국 근대 한국불교는 개혁에 대한 논의를 중심축으로 하여 진행돼 왔으며, 개혁이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당위적 사명으로 자리 잡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적어도 한 시대를 관통하는 패러다임으로서 모든 불교인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행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불교개혁 패러다임의 이념을 형성하는 데는 주로 불교학자들의 역할이 컸는데, 특히 개혁의 당위성이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최초로 개혁 패러다임의 이념을 형성한 것은 퇴경당(退耕堂) 권상로(權相老, 1879~1965)였다. 그는 불교계에서 실질적으로 최초의 월간 잡지인 《조선불교월보》를 창간(1912)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약했고,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1918)보다 앞서서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통사인 《조선불교약사》(1917)를 썼으며, 해방 후 1953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종립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역임하는 등 불교학에 관한 그의 저서나 불교계 내에서의 활약상은 어느 것 하나 선구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퇴경 권상로가 발행한 《조선불교월보》(왼쪽).
오른쪽은 1912년 4월부터 1913년 7월까지 연재한 〈조선불교개혁론〉의 서론 부분.
특히 1912년 4월부터 《조선불교월보》를 통해 〈조선불교개혁론〉을 연재하고 있는데, 한용운(1879~1944)의 《조선불교유신론》이 공간(公刊)된 것이 1913년 5월이니까 권상로의 불교개혁론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불교개혁론인 셈이다.

 

권상로는 입성해금 이후 한국불교 재활(再活)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1903년 25세 되던 해에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입실건당(入室建幢)을 하게 된다. 청년 교학승으로서 불교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충만해 있었고, 개혁의 웅지를 처음으로 품게 되었다. 이후 28세 되던 1906년, 명진학교에 들어가 당시에 유행했던 사회진화론과 같은 서양의 신학문과 접하게 되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였다.

32세 되던 1910년에는 원종(圓宗)의 편집부장이 되어 종무원에서 일을 보게 되면서 현실적으로 제도적인 개혁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12년 《조선불교월보》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약하면서부터는 불교개혁을 위한 이론 정립과 계몽, 그리고 불교사의 정립이라고 하는 과제에 매달리게 된다.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조선불교개혁론(朝鮮佛敎改革論)〉이다. 이것은 당시 광범위한 공감대를 얻고 있던 불교개혁의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불교개혁의 이념을 형성한 최초의 불교개혁론으로 평가되지만, 본인으로서도 최초의 저술인 셈이므로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논문의 제목에는 ‘조선불교진화자료(朝鮮佛敎進化資料)’라는 부제(副題)가 달려 있는데, 이것은 그의 개혁론이 사회진화론에 따르는 종교 경쟁을 입론(立論)의 근거로 삼고 있음을 분명히 해 준다.


2. 제1편 서론(緖論)

서론은 문제의 제기로서, 종교 경쟁이 점점 심각해지는 시대의 조류를 파악하지 못하고 산속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걸고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조선불교의 폐쇄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況世界는 日闢하고 風潮는 日變하여 社會之交際焉日繁하고 宗敎之競爭焉日繁하니 於是乎에 逃世入山하여 閉門深睡하던 我朝鮮佛敎는 喘息이 垂絶하여 名詞도 難保할 境遇에 至하였도다.

헐떡이는 숨통마저 끊어져 그 이름조차 보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권상로가 당시의 불교를 얼마나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비판 의식을 전제로 그는 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假使九歲를 黙無言하시던 達摩尊者라도 今日에 東來하시면 維新二字가 不絶於口할지오, 六年을 坐不動하시던 釋迦世尊도 此時에 下生하시면 改革一事에 勞力而行하시리라. 聽之思之하야 勉之旃之어다. 如曰余說이 不成說이라 하면 姑置張遑說辭하고 爲道此時가 是何時호리라. 宗敎競爭時代니라.

이와 같이 유신의 절실함을 피력하고 있는데, 특히 이른바 종교경쟁 시대이기 때문에 유신이 더욱 절실하다는 주장이 주목된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비판은 개혁론뿐 아니라 그의 다른 저술에서도 보이고 있다. 즉 그는 불교 쇠퇴의 원인을 불교 자체의 내적 반성에서 찾고 있다.

天道는 宜新이어늘 人事는 常舊하고 世潮는 革新이어늘 敎規는 守舊하야 五百餘年을 坐不遷하며 六千餘員이 睡不起하야 四面崢嶸한 許多敎壘는 曙光이 璀璨하되 吾敎徒는 槐安一枕에 舊天地를 長守하야 如彼한 悲劇을 釀成하며 如彼한 悲劇을 甘受하며 如彼한 悲劇을 解脫치 못함이로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개혁을 이루어 내지 못하고 옛 영화만을 꿈꾸며 무사안일에 빠져 있는 불교계를 비판하였다. 또한 오늘날 다종교 시대가 되어 불교 혼자만이 유야무야로 지내오던 옛날과는 판이한 시대가 되었는데도 타 종교들을 이유 없이 폄하하여 자만하면서 그저 여래의 신통혜명과 신지(神祗)의 옹호수축(擁護隨逐)으로 교체(敎體)의 자연 향상하기만 앉아서 기다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가 타 종교와의 경쟁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자승심(自勝心)과 희망심(希望心)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한편 그는 〈근대 불교의 삼세관〉이라는 글에서 한국불교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각각 비관(悲觀)과 고관(苦觀), 그리고 낙관(樂觀)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당시 처해 있는 현실을 고관으로 파악하고 있음이 주목되는데, 미래의 낙관으로 가는 과도기이기에 고(苦)가 필수적으로 동반된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불교개혁의 실천으로 추진되었던 일들, 예컨대 원흥사(元興寺)와 사사관리서(寺事管理署),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와 명진학교(明進學校),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과 사범학교(師範學校) 등이 모두 위법헌신(爲法獻身)의 많은 노력을 들인 것이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느냐는 것이다.
아울러 신시대를 맞이하여 인재양성을 위해서 물심양면의 지대한 노력을 들여 키워 놓았더니 모두 자기 출세의 길로만 달려가니 이 또한 고통이요, 누세(累世)의 선사(先師)들이 피땀으로 지켜낸 불교 재산을 지키고 또 윤식(潤殖)해야 하니 이 또한 어려움이며, 그러면서도 법재(法財)를 들여 세상의 가난을 구하기도 하고 선(禪)으로써 세상의 독극(毒劇)을 풀어야 하니 이 또한 괴로움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당시 불교계가 신구(新舊)로 갈라져서 대립하고 있음을 고통으로 보고 이렇게 피력했다.

帶妻食肉의 新風潮 輸入을 迎合하는 者의게는 寺法實施도 苦가 不少하고, 講律持戒하는 舊制度 保守를 主唱하는 者의게는 淸規解弛도 苦가 莫大하다.

신구 양자의 극심한 대립을 모두 부정적으로 보면서, 양자 사이의 중립을 지키려고 하는 자신의 입장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이 끝난 후에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하였듯이 결국은 낙(樂)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며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또한 불법 그 자체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오늘날 종교 간의 경쟁 시대를 맞이하여 미구에 다가올 ‘법전일장(法戰一場)’에서 결국은 불교가 승리할 것이며, 모든 중생이 불교의 대음(大音)에 다 놀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으니, 과거처럼 산중 불교, 독선기신(獨善其身)의 불교가 아니라, 윤리를 아니 잊어 사은(四恩)을 저버리지 말며, 생활로 인도하여 사민(四民)을 균화(均化)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감화원(感化院), 유치원(幼稚院), 맹아원(盲啞院), 양로회(養老會), 구황회(救荒會), 간병회(看病會) 등의 자선 및 공익사업에 적극 나서고, 도로 및 교량을 닦는다든지, 신문 잡지를 확장하여 나간다면 불교의 미래는 틀림없이 낙(樂)이라는 것이다. 그가 불법의 우수성에 대한 확신 속에서 미래 불교의 존재태에 관해서 제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권상로는 그 자신이 불교의 승려이면서도 불교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매우 신랄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비판 의식은 곧 불교개혁론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인 밑받침이 되었다. 아울러 근대적인 학문 방법론을 적용한 불교의 학문적 연구, 즉 한국불교사의 정립이라는 사명을 갖게 해 준 것이기도 하다. 한편 그가 제기했던 비판의 관점은 오늘날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많아 근대 한국불교학의 선구자로서 그의 위치를 새삼 깨닫게한다.


3. 제2편 논개혁지여하(論改革之如何)

권상로는 제1장 ‘논개혁지필요(論改革之必要)’에서 개량(改良), 발달(發達), 확장(擴張), 유신(維新)의 단어들을 소개하면서 여기서 유신이 가장 긴박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또 이 유신을 함에 있어서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수단은 곧 개혁이니, 개혁이 아니고서는 유신을 할 수 없고, 설사 유신을 한다고 할지라도 개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그 정도가 유치하고 그 역량도 나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2장 ‘논개혁지성질(論改革之性質)’에서는 개혁을 기왕 하려면 적극적 인위개혁을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제3장 ‘논개혁지관계(論改革之關係)’에서는 한국불교사에서 이러한 적극적 인위개혁을 시도한 적이 없었음을 지적한다. 즉 천위(天爲)만을 믿어서 불법이나 국왕, 대신의 외호(外護)만을 앉아서 기다릴 뿐이었지, 조금도 불법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전심전력을 다한 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국왕이나 대신들이 돌볼 때에는 복락을 누렸지만, 그렇지 아니할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을 받았고 누구 하나 항쟁하거나 간언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중국에서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있을 때마다 이에 항거하는 용상대덕이 많이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곧, 유빙(庾氷)이 사문도 왕에게 절해야 한다고 하자 여산(廬山)의 혜원(慧遠, 334~416, 東晋代 白蓮社의 개조)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 국가권력에 저항하였으며, 한유(韓愈, 768~824)가 불골표(佛骨表)를 지어 올리거늘 태전(太顚, 唐代 스님)은 조목조목 따져서 반박하였다. 정영사(淨影寺)의 혜원(慧遠, 523~592)과 지현(知炫, 隋代 스님)은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불교를 폐지하고 도교를 숭상함에 대하여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그 밖에도 많은 숭려들이 국왕이나 대신에게 대항한 사적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불교는 최소한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국가의 절대적인 후원으로 성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제를 옹호하고 그 외호를 바라는 편에 많이 섰지, 체제를 비판하고 개혁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따라서 조선 500여 년 동안 극심한 배불이 자행될 때도 적극적으로 불교의 호법론을 주장하면서 정치권력에 항거한 승려가 거의 나오지 않았고, 한국불교를 왜곡시킨 최대의 악법인 일제의 사찰령에 대해서도 불교계 내부에서 정법 수호를 위한 조직적인 반발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국가권력과 밀착된 체제 옹호적인 한국불교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제4장 ‘논개혁지이해(論改革之利害)’, 제5장 ‘논개혁지공용(論改革之功用)’, 제6장 ‘논개혁지인물(論改革之人物)’에서는 개혁에는 이해(利害)가 나뉘어 있는 것이라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해득실을 따지고 앉아 있기보다는 개혁이 시급하다는 것과 개혁을 위해서는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 고대해도 나타나지 않음을 아쉬워한다. 제7장 ‘논개혁지시대(論改革之時代)’에서는 불교에 있어서 오늘이 개혁을 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임을 역설한다. 500년간의 압제로 인해 쇠퇴함이 극에 달했던 한국불교가 이제 거기서 벗어나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에 이른바 “일은 옛사람의 반만큼만 해도 그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불교계가 개혁을 갈망하고 있고, 그 효과는 크게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불교계의 단합이 필수적임을 주장한다. 제8장 ‘논혁명지후(論革命之後)에 위단체위자치(爲團體爲自治)’에서 불교의 개혁을 위해서는 불교계 전체가 하나의 단체로 단결해야 함을 주장한다.

如何한 方法으로 以하여야 我三千年偉大한 宗敎와 老大한 社會를 更一層鞏固하며 擴張할까 曰團體力이 完結하고 自治制가 儼立하여야 할지니라. 如何하여야 團體力이 完結하고 自治制가 儼立할까 曰改革에 在하니라. 嗚呼라 團體力이라 함은 衆人의 目的이 一處로 注集함을 謂함이오 自治制라 함은 個人의 行爲가 法律에 抵觸치 아니함을 謂함이어늘…

권상로가 이 글을 발표했던 1912년 8월은 원종과 임제종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문패를 내리고, 불교계를 대표하는 현실적 조직으로서 ‘조선불교선교양종주지회의원(朝鮮佛敎禪敎兩宗住持會議院)’이 성립된 직후로서, 불교계에 아직 반목과 대립의 앙금이 남아 있던 때임을 상기해 본다면 불교계의 단결을 촉구하고 있는 그의 의도가 더욱 분명해진다. 또한 그가 ‘단체’를 중시하고 있는 것은 인간 사회가 약육강식하고 적자생존 한다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이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개인보다는 단체를 중시하고, 불교계가 하나의 단체로서 개혁을 추진해 나가기를 소망했다.


4. 제3편 논개혁지전례(論改革之前例)

권상로는 제1장 ‘논석가출세(論釋迦出世)가 전위개혁(全爲改革)’에서 석가세존은 세계의 모든 개혁가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신 대개혁가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도에는 카스트제도가 있어서 계급 차별이 엄격하였는데, 석가세존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수행하여 도를 이루시고 입을 여신 첫 마디에 평등주의를 제창하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들이 안으로 내포하고 있는 지혜의 씨앗은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 하시고, 마지막으로 열반회상에서 말씀하시기를,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 고 하셨으니, 평등이란 말 가운데 이보다 더 평등한 말이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권상로는 석가의 평등주의에서 불교개혁의 최고 이상을 발견하였다.

外道梵志도 俱來得度하니 聖魔가 平等하고 多子塔前에 半坐를 分與하시니 師資가 平等하고 四禪已下는 三災同壞하니 人天平等也요 十方來聽이 各坐一面하니 貴賤이 平等也요 人死爲羊하고 羊死爲人하니 人畜이 平等也요 生本無生하고 滅本無滅하니 生死가 平等也요 塗創에 兩忘者는 寃親이 平等也요 互爲主伴者는 自他가 平等也요 淸淨一心이 貫通五輪하니 依正이 平等이요 於下屠刀하고 立地成佛하니 善惡이 平等이요 種類極繁하여 不遑枚引하나 維摩不二와 華嚴圓融과 圓覺之頓과 法華之終이 皆平等之極이요 改革之極이니라 ……摠히 言之컨대 初自入胎로 終至涅槃佛於其中間에 施設示現과 苦口瀝肝이 平等二字로 包括한 바 되어 婆羅門의 階級主義를 無餘破碎하여 自由平等의 人類幸福을 圓滿指示하시니 世界改革家의 誰가 我의 世尊의 右에 出할 者리오 是故로 可謂如來는 全爲改革하셔서 出現於世하시고 無有餘事로다.

즉 여래는 평생을 두고 설법하심이 모두 평등, 이 두 글자로 포괄하여 개혁하셨으니,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오로지 개혁을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하시게 되었다. 이것은 권상로 자신의 불교사상과도 통하는 것으로서, 불교가 근대화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불교의 평등주의를 회복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제2장 ‘논달마동래(論達摩東來)하사 대행개혁(大行改革)’에서는 개혁의 선례로서 달마가 동쪽에 와서 선종을 일으킨 것을 들고 있다. 즉 달마가 중국에 와서 문자에 속박되었던 굴레를 남김없이 도려내고, 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돈오(頓悟)하는 방법을 가르쳐 줌으로써 무미건조한 불교에 종교적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니 그가 곧 불교개혁의 비조(鼻祖)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권상로가 추구하는 한국불교개혁의 노선이 단순히 시급한 발등의 불이나 끄자는 정도의 작은 모사(謀事)가 아니라, 적어도 석가가 불교를 일으키고 달마가 선종을 개창한 것처럼,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적 개혁을 추구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수백 년간의 탄압을 견뎌오는 동안 이미 이름만 남아 종교로서의 본질을 잃고 있는 한국불교에 종교적 생기를 불어넣어 그 본질을 회복시켜 보려는 원대한 포부가 밑에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곧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이요,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ia Eliade)가 말하는 종교적 재평가(Religious Revalorization)의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다.


5. 제4편 논현전지당개혁자(論現前之當改革者)

그는 여기서 당면의 개혁 과업으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먼저 제1장 ‘논구욕개혁어사물(論求欲改革於事物)인댄 당선개혁어심지(當先改革於心地)’에서는 첫 번째 과업으로 정신 개혁을 역설하였다. 그는 한국불교의 쇠퇴를 늙고 병들어 말라 죽어가는 나무에 비유하면서, 이 나무를 살리려면 무엇보다도 가지를 쳐주지 말고 그 뿌리를 북돋워 주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30여 본산에 6, 7천의 많은 승려들이 ‘내 차마 이 가지가 병들어 썩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하여 가지와 잎사귀를 향하여 침을 놓아 치료하고 있으니 격화소양(隔靴搔癢)과 같다는 것이다. 그는 부질없이 수고하지 말고 심전(心田)에 있는 신근(信根)의 아래를 향하여 비료를 주라고 주장한다.

嗚呼라 具曰維新而異於事者는 心不同故也오 心不同者는 信根이 不固也니 請一其心하여 同歸於信하고 先維新於其心하며 後維新於其事어다.

그는 당시에 모든 불교계 인사들이 개혁을 말하면서도 방법론상의 이견으로 인해 분열상을 보이고 있음을 개탄하면서, 그 원인으로 불교에 대한 믿음이 굳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모든 불교계가 불교에 대한 믿음이 충실해야만 정신적인 통일을 기할 수 있고, 그런 다음에야 유신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용운이나 박한영(1870~1948)의 개혁론에도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분으로서,제도의 개혁에 앞서서 신앙의 확립을 강조하는 그의 주장에서 종교인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여기서 그의 불교개혁이 단순한 시무(時務), 또는 제도적 개혁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불교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파사현정을 목표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제2장 ‘논단체지개혁(論團體之改革)’에서는 조선불교가 이미 단체는 이루었으되 그 단체의 형태와 조직이 아직 부족하니, 오직 마음으로 뭉쳐진 단체라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조선불교가 겉으로는 뭉쳐진 것 같지만 실속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其力其心이 每每團結於無用之地하여 倘有一人이 做一事發一言하면 衆口衆心이 少不究其始末하고 便以詆毁訕謗으로 爲能事하니 雖或有可以善良之事業인들 一齊衆楚에 何오… 當面詆毁하고 內心含非하여 互相引之而入於反對方面하여 成一個形團力團矣로다. 所以로 十數年來에 爲吾敎獻身努力하여 期圖維新者不一不二로대 而恒今古如是하여 少不有進就的結果하니 長太息者豈不是乎아……

불교계가 단결하지 못하여 똑같이 유신을 한다고 하면서도 서로 반목하고 헐뜯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즉 아무리 선량한 목적으로 사업을 일으켜도 곧 여기에 대해 헐뜯고 방해하여 반대 방면에 서서 또 다른 형태의 단체를 만들어 대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불교계의 대립이란 구체적으로 원종(圓宗)과 임제종(臨濟宗)의 대립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 그가 어느 편을 두둔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똑같은 유신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서로 대립하고야 마는 불교계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결국은 당시의 현실적인 불교 조직이었던 ‘주지회의원’을 중심으로 불교계가 하나로 뭉쳐 개혁을 추진해 나갔으면 하는 그의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제3장은 ‘논재단지개혁(論財團之改革)’이니, 오늘날 불교가 그 도(道)의 우수성만을 믿고 재단 형성과 유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우려하고 있다.

吁嗟라 星羅碁布한 我朝鮮寺院이 殆近乎千有餘百而其歷史也 擧皆千有餘年之久則其占領也도 亦不尠焉하여 森林也 土地也 建物也 器用也 古物也 寶物也를 摠而言之하면 朝鮮內宗敎界財團으로는 可以第一指를 屈할만한 바어늘 但以四方에 散在하여 向所謂心團이 未成하고 區區面面에 各自保管하여 或則規模狹窄하며 或則法度解弛하여 彼我之畛域이 斯立에 自他之觀念이 因生하여 設或有共同的大關係大光彩가 生할 事業이라도 床頭錢을 只惜하여 公衆利益을 不顧하나니……

즉 그는 불교가 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로서 수많은 사찰이 수많은 토지를 점령하고 있어 그 재산이 조선의 종교 중에 제일 많지만, 정신적인 단결, 즉 심단(心團)이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각자의 이익만을 생각할 뿐, 공동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앞에서 말한 두 세력, 즉 유신자(維新者)와 완고자(頑固者)가 각각 불교 재단의 개혁을 위해 노력해야 할 바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維新者는 移其手하여 先使財團으로 敏活其生殖하고 頑固者는 轉其腦하여 更於義務에 固執而不捨하면 同心相協하고 易地皆然하리니 於是焉吾儕는 有義務焉하며 有能力焉하여 如鳥兩翼하고 吾敎는 得財力焉하고 得手段焉하여 如車兩輪이라. 雖使渾世界草木瓦石으로 盡成魔王하여 來作障難인들 其於余敎에 何오.

즉 유신자와 완고자가 각각 그 역할을 다하면, 불교는 의무도 있고 능력도 있으며, 재력도 있고 수단도 있어 마치 새의 양 날개처럼, 그리고 수레의 두 바퀴처럼 굳센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 재단의 개혁을 논하면서도 그가 또 한 번 강조하는 것은 불교계의 단합이다. 그가 이 점을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 준다.

제4장은 ‘유감각심연후(有感覺心然後)에 능개혁기단체(能改革其團體)’이다. 우선 그는 시대정신을 알지 못하고 폐쇄성만을 고집하는 불교계의 우둔함을 비판한다.

吾儕는 深山에 處하고 三昧에 入하여 時代의 變遷과 風潮의 飄蕩이 如何한 程度에 到達함을 了知치 못하는 故로 三尺單前에 槐安枕이 依然하여 百年光陰을 華胥夢으로 經過코자 하니 甚矣라 感覺心之乏少也며 宜矣라 感覺心之乏少也로다.

이처럼 불교계는 감각심이 부족하여 마음으로 뭉쳐진 단체를 이룩할 수가 없음을 개탄한다. 그렇다면 부족한 감각심을 어떻게 하면 키울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유신이라는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니라, 때에 맞추어 적절하게 맞추어 나갈 따름이니, 시절의 순서를 미루어 관찰하고 남과 나를 비교하면 일종의 새로운 감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비교종교학적인 안목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남과 나의 비교를 통해서만이 자신을 더 정확하게 알 수가 있고, 또 거기서 개혁할 문제도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그의 불교학을 전통적인 것과는 구분하게 해주는 근대적인 성격이다.

제5장은 ‘논교육지당개혁(論敎育之當改革)’이다. 실상 그의 불교개혁론에서 구체적인 각론적 방안 제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러나 그의 불교개혁론이 바로 여기서 미완인 채로 끝을 맺고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있으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교개혁론을 더 이상 전개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편집과 발행을 책임졌던 《조선불교월보》가 폐간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아울러 1913년 5월에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이 단행본으로 발간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은 불교개혁론의 횃불을 당긴 것에 만족하고, 이후로는 한국불교사의 정리와 자료 수집에 더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아무튼 그의 구체적 개혁 방안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불교계의 급선무로 간경(看經)과 참선(參禪), 그리고 전도포교(傳道布敎)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교리의 연마이다.

敎理에 不明하면 參禪도 盲棒痴喝에 不過하고 傳道布敎도 譫言魔說에 不外하리니 此不得不敎理를 先明할지오 敎理를 明코자 할진대 不得不學人을 養成할지오 學人을 養成코자 함에는 不得不敎育의 機關을 改良하여야 할지로다.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리를 배우는 학인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의 개량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기관의 개량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는 일왈 사범(師範)이요, 이왈 서적(書籍)이며, 삼왈 체제(體制)요, 사왈 장소(場所)라고 했다. 그중에서 우선 사범의 개혁을 논파하고 있는데, 타성에 젖어 있는 안일한 강사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多少杜撰長老는 只得解了幾句幾字하면 便肆然高踞하여 自處以知解宗師하되 至若深經奧義하여는 好似囫圇呑棗하나니 這般塵拂下에 如何産得碧眼兒리오…… 試思하라 講宗에 對하여 從來諸方之崇拜歆慕가 果然如何하였는가 四集幾卷만 學就하여도 通方學者로 待遇하고 大敎幾科만 誦得하여도 巨劈宗匠으로 推尊하여 事之若第二佛이 出世하니 於是乎에 無耻之徒가 窺作利名하여 尋行數墨으로 爲能하다가 一期에 冒了豎幢(所謂入室)하여는 便靦然自許하여 玷了丈席하되 人莫敢誰何하니 朝鮮佛敎界의 覇權은 講師의 特有獨享에 歸하였도다……

우리는 이 글에서 그가 한국불교의 강원(講院) 교육을 이끌어 온 강사들의 행태에 대해 얼마나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승려들을 교육하는 강원의 수준은 곧 한국불교학의 수준을 가늠하게 해 주는 잣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강사들의 안일한 태도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곧 전통 불교학에 대한 비판과 다름 아니다. 전거(典據)도 확실하지 못한 몇 자 글귀를 가지고 마치 대학자인 양 권위를 내세우는 전통 불교학 강사들의 학문 행태와 그 수준에 대해 그는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이제 불교개혁의 구체안을 제시함에 있어서 그가 전통 불교학과 강원 교육 체제의 개혁을 제일 먼저 내세우는 것은 불교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그를 전통 불교학자들과는 구분 지어 볼 수밖에 없는 점이기도 하다.

그의 불교개혁론은 이와 같이 불교 교육제도의 개혁을 논하면서 끝나고 있다. 그 뒤에 쓰기로 예고되어 있는 서적, 체제, 장소의 개혁에 대한 논의도 다 끝맺지 못한 채 미완으로 중단된 것이다. 불교계 전체에 대한 개혁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앞의 논의만 보더라도 당시에 그가 가졌던 개혁 사상의 성격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권상로 자신이 전통 강원 교육을 통해 성장했으면서도 전통 불교학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으며, 불교의 근대적 변용에 대하여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개혁의 논지를 펼쳐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근대적 개혁 정신이 있었기에 뒷날 《조선불교약사》의 저술을 비롯한 한국불교의 역사적 체계화 작업이 가능했으며, 그의 불교학을 근대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 제도의 개혁은 당시 불교계의 공통적인 과제였다. 예컨대 다음의 글을 보자.

然한즉 諸德이 頭燃을 救함보다 一層急務로 進行할 바는 靑年徒弟의 敎育을 獎勵하여 我佛敎界의 未來師範을 多數養成함이 是矣라.……

이 글은 이른바 종교 경쟁의 시대에 타 종교와의 경쟁 속에서 불교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청년도제(靑年徒弟)의 교육이 급선무라는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또한 한용운이나 박한영 등의 불교개혁론에서도 가장 강조하고 있는 바이니, 예컨대 한용운은 승려 교육의 급선무로 보통학(普通學), 사범학(師範學), 외국 유학의 세 가지를 제시하면서 “교육을 방해자는 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고, 교육을 진흥시키는 자는 마땅히 불도를 이루리라.”고 절규할 정도로 교육을 강조하였다. 또한 박한영도 불교 쇠퇴의 원인을 참된 교육의 부재에서 찾으면서 서양의 기독교처럼 불교를 새롭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청년도제를 옳게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불교 교육 제도의 개혁은 불교계에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고, 권상로 또한 이것을 상당히 강조하였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교육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불교 포교의 진흥이라는 과제가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타 종교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포교가 제1의 과제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교육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이면에는 포교 사업의 개혁을 촉구하는 뜻도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조선 불교에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부족한 것은 포교 사업이라고 말한다. 선원(禪院)에 가면 참선 대중도 있고, 강당(講堂)에 가면 경학자(經學者)도 있고, 염불(念佛)하는 이도 있고, 지주(持呪)하는 이도 있다. 또한 말사 주지나 본사 사무원 의자를 넘보고 쟁탈하려는 이는 도처에 오히려 수효가 너무 많지만 포교사만은 지원하는 이도 별로 없고 할 만한 자격도 많지 못하니 이는 어찌 된 연유인가? 그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몇백 년 동안 탄압받던 습관이 굳어져서 참선·간경·염불 등의 근본 목적이 중생 제도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지금도 될 수 있는 대로 깊이깊이 들어가서 인간 사회와는 아주 담을 쌓아 버리고 다만 자구해탈(自求解脫)로 돌아가게 된 것이 그 하나요, 둘째는 사중(四衆)을 앞에 앉히고 높다란 설상(說床)에 올라앉아서 경전을 새기는 것만을 포교로 오인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설교와 포교를 혼동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꼭 승상설법(陞床說法)만이 포교가 아니고, 어떠한 일언일행·일물·일사라도 중생에게 이롭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로(苦勞)를 제(除)하고 위안을 받게 하는 것이면 모두가 포교라는 것이다. 포교(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의 사섭법(四攝法)이 포교상에 제일 요소임을 생각하면 어느 것이나 포교 아니 될 것이 없으니, 다만 자리(自利)를 위한 것만을 제(除)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가 포교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교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가? 그는 문자의 포교가 설교나 강연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한다. 즉 포교라는 것은 흥학(興學)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강학과 포교에 대한 결심을 피력하면서 다른 승려들의 분발을 촉구하여 이렇게 말했다.

新年을 當하여 나의 願하는 바는 무엇보담도 布敎에 專力하고 合心하여 內的으로는 어느 經論 하나라도 그대로 남겨둔 것이 없이 죄다 飜譯하고 講釋하여 刊行하며, 外的으로 어떤 사람을 勿論하고 낱낱치 佛敎의 讀物 한 券씩을 가지고 있게 되기를 目標로 하여 이것으로써 全人類를 敎化하고 이것으로써 全事業을 成就하자는 一段의 蒭言을 吐露하는 바이다. 그저 七千 僧侶는 다 각각 쓰라. 벳기라. 飜譯하라. 解釋하라. 그리하여 印出하라. 頒布하라. 朝鮮 佛敎로 하여금 朝鮮 佛敎의 面目을 維持케 하고 朝鮮 人民으로 하여금 朝鮮 佛敎를 信仰케 하는 것은 오직 이것을 除하고는 他道 없을 것을 敢히 斷言하는 바이다.

그가 얼마나 포교와 교학을 중시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또한 그는 불교 경전의 간행과 보급을 역설하고 있다.

朝鮮佛敎家는 許多한 經卷을 積而不讀하며 藏而不露하야 先聖法言으로써 世에 應用치 못하고 但講學家幾個尊師의 寶惜에 止할 而已니 一切諸佛도 皆從經出하니 所在之處는 卽爲有佛若尊重弟子언마는 但尊之敬之하야 束之高閣이면 其流通傳續은 杳無其人하리니 諸佛出興하사 爲衆說法하신 本懷에 어찌 契合하리오.

이처럼 위대한 불교 경전이 유통되지 못하고 오직 고각(高閣)에 잠자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권상로에게 있어서는 흥학(興學), 간경(刊經), 그리고 교육이 모두 포교라고 하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불교개혁의 일환으로 일평생 불교학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것도 결국은 이러한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상 그의 개혁론을 종합해 보면, 권상로는 지난날 불교계의 구습을 철저히 비판하는 가운데, 다가오는 종교 경쟁의 시대에 불교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런 악습을 일거에 타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당시 《조선불교월보》에 게재되었던 권상로의 개혁 이론은 교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고, 이후 한국불교의 개혁 논의에 불을 지폈다. 그의 불교개혁론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구적인 것이었고, 1년 뒤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을 공간(公刊)하는 촉매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의 불교개혁론이 한용운처럼 지속적인 실천 운동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다만 이론적인 천착에 그쳤으며, 오히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완전히 반동화되어 일제에 순응하는 친일적인 방향으로 선회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고, 이것이 그의 불교개혁론의 한계이다.


6. 맺는 말

권상로는 전통 강원 교육과 근대적 불교 교육을 겸비하여 전통 교학과 근대 불교학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또한 입성해금 이후 기나긴 억불에서 벗어나 불교 중흥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1900년대 초에 20대 청년 교학승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그였기에 불교계의 구습에 대한 비판 의식이 남달랐고, 또한 30대 초인 1910년대에 불교계 중앙 종단의 소임을 맡아보게 되면서부터는 불교 근대화를 위한 제도적 개혁, 또는 전통 교학의 근대적 변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비판적 불교개혁 의식이 체계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1912년에 발표한 〈조선불교개혁론〉이다. 여기에는 그의 일생에 걸친 문제의식이 녹아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광범위한 공감대를 얻고 있던 불교개혁의 흐름을 처음으로 학문적인 체계 속에 담아냄으로써 불교개혁 패러다임의 이념을 형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것은 불교개혁의 여론을 더욱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전개되는 불교개혁 논의에도 하나의 전형(典型)으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권상로 불교개혁론의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도 불교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판 의식이 전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통 교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이른바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처음으로 불교를 신앙의 대상에서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싹트게 된 비판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학문 탐구에 있어서 객관성의 유지를 가능케 함으로써, 그의 불교학이 이미 전통적인 한계를 벗어나 근대 불교학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다.

이렇듯 철저한 비판이 있었기에 개혁의 절대적 필요성을 확신했으며, 그에 따른 대안의 제시로 이어지고 있다. 우선 정신 개혁을 강조함으로써 개혁의 근본을 확고히 하고자 했고, 불교가 하나의 단체로 단합할 것을 촉구함으로써 타 종교와의 공존 속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 했으며, 타 종교와의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서 시대정신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심을 회복하려 하였으며, 교육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전통 불교학의 근대화와 청년 인재의 육성을 도모하려 했다.

특히 전통 강원 교육을 통해서 성장했던 그가 전통 불교학을 그토록 비판할 수 있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무엇보다도 그의 투철한 현실 인식과 투철한 신심(信心)의 바탕 위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즉 모든 종교가 동등한 위치에서 상호 경쟁하는 다종교 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포교가 가장 우선시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 교육 제도의 개혁의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아가 흥학(興學)과 간경(刊經)도 또한 교육과 함께 포교에 필수적이라는 생각 아래 그는 일평생 강학(講學)과 출판, 그리고 포교를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그는 불교학 분야에서 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리하여 근대적인 방법론을 적용하여 한국불교의 역사적 체계화 작업에 매진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후학들의 연구에 기본이 되고 있는 방대하고도 중요한 저서들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불교의 개혁을 주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도 평등주의적 바탕 위에 철저하게 현실적이요 원융적인 불교 사상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즉 묵수(墨守)보다는 활용(活用)을 중시하였기에 전통을 과감히 비판하고 서양의 근대정신을 받아들여 그것을 불교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불교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오늘날 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한 불교의 입장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다만 이러한 원융성과 현실성은 자칫 지계(持戒) 관념의 약화와 현실 타협의 구실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제 초기 개혁의 선봉에 섰던 권상로가 뒤에 친일의 거두로 변해 가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재헌/ 서울대 종교대학원 강사.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박사(철학·종교 전공). 한국학중앙연구원, 강남대, 한신대, 경원대 등 강사 역임. 주요 논문으로 〈근대 한국불교의 타 종교 인식〉 〈권상로의 불교개혁 사상〉 〈미군정의 종교정책과 불교계의 분열〉 등과, 저서로 《이능화와 근대 불교학》 《금강대도 종리학 연구론》 Ⅰ·Ⅱ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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