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문을식
선문대 교수
한 해의 가을은 그동안의 노력을 갈무리하는 계절이다.

그것은 저 농촌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학문의 장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가을만 되면 여기저기서 학술행사가 열린다. 이런 현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해가고 풍부해지는 것 같다. 올가을도 다양한 행사가 넘쳐났다. 그 가운데 ‘불교 수행과 뇌, 그 치료적 의미’라는 행사에 눈길이 갔다. 그 행사의 주제는 명상, 마음치유, 그리고 뇌과학이다. 마음치유/치료나, 명상은 많이 들어봤던 것이나 뇌과학은 약간 생소한 말이다. 그래도 마음부터 살펴보자.

인간의 마음에는 여러 층이 존재한다. 마음의 층에는 동요, 미혹, 산란, 집중, 지멸의 다섯 층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범부중생의 마음은 동요부터 산란까지이다. 이들 층은 번뇌에 물든 마음이다. 사람들 대부분의 마음은 이들 층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그래서 그 마음의 층은 가라앉혀야 할 대상이다. 바람 없는 곳의 등불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마음도 명상을 통해 그와 같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명상이란 문자적으로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것’ 또는 ‘고요히 생각을 가라앉히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영어 메디테이션(meditation)을 번역한 것이다.

그것의 어원은 라틴어 meditar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것을 현대사전에서 보면 ‘깊이 생각하는 것(to think seriously or deeply)’과 ‘어느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고 유지하는 것(to fix and keep the atten-tion on ane matter)’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이것과 불교나 인도사상에서 일치하는 산스끄리뜨어에서는 디야나(dhyāna, 禪)가 있다. 먼저 이 용어에 대해 요가철학의 근본경전인 《요가경(Yoga-sūtra)》에서는 “명상이란 의식의 작용이 한결같이 집중된 상태이다.”(YS.3.2)로 정의되어 있다. 산스끄리뜨어 디야나에 대응하는 초기불전 언어인 빨리어에는 쟈나(Jhāna)가 있다. 이들의 한역 음사로는 선나(禪那), 선(禪), 선정(禪定), 정려(靜慮), 참선(參禪) 등이 있다.

이것의 용례는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서의 하나인 《무애해도(無礙解道)》(Ⅱ, pp.44-45)에서 ‘여실하게 숙고하는 것’이라는 뜻과 ‘번뇌를 태워 없애는 것’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메디테이션의 ‘고요하게 생각에 잠기는 것’과 ‘고요히 생각을 가라앉히는 것’은 각각 불교의 ‘여실하게 숙고하는 것’과 ‘번뇌를 태워 없애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혹자는 ‘생각에 잠기는 것’과 ‘고요히 생각을 가라앉히는 것’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처음 명상을 할 때는 의도적으로 특정한 생각을 일으켜 마음을 집중해 나가지만, 명상이 무르익어 충분히 몰입된 상태에 이르면 생각 자체가 저절로 멈추게 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명상이란 ‘특정한 생각을 일으켜 거기에 몰입하고, 마침내 생각 자체가 멎는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요가사상에서는 수행을 통해 생각이 멈춘 상태를 삼매(samādhi)로 표현한다. 곧 “삼매란 집중의 대상만 홀로 빛나고 집중하는 마음 자체는 없어진 것과 같이 된 상태이다.”(YS.3.3) 이런 명상수행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동요를 가라앉히는 평정의 상태를 목적으로 한다.

명상은 여러 유형이 있어 분류 방법이 다양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내향적 명상, 외향적 명상, 중도적 초월 명상의 셋으로 나누기도 한다. 내향적 명상은 일상에 대한 반성하는 것이다. 앞에서 명상을 ‘고요히 생각하다’는 명상의 정의가 이에 해당한다. 불교에서 보면, ‘온갖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실천하는 것’이라는 칠불통계라든지 인도사상, 특히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하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의무와 명예를 강조하는 행위의 윤리가 이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외향적 명상은 타력에 의해 마음의 평안을 얻는 명상이다.

 기독교의 하느님, 이슬람의 알라, 《바가바드 기따》에서 지고자 끄리슈나에 대한 헌신적인 믿음과 사랑,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정토 신앙 등이 이에 해당한다. 중도적 초월 명상은 일상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명상이다. 다시 말해 번뇌에 물든 온갖 잡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요가경》에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의 활동을 멈추게 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가라앉히는 것, 초기불교에서 알아차림, 곧 마음 지킴, 더 나아가 화두 명상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동안 명상은 주로 종교적 맥락에서 이용되면서 일상의식을 넘어서는 초월 상태에 도달하거나 깨달음과 해탈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최근에는 명상이 심리학과 심리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하면서 많은 사람의 각광을 받고 있다. 이것은 뇌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명상의 신경생리학적 과정을 밝히려는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한 명상은 종교적 맥락에서 벗어나 의료에 적용하면서 명상의 심신치료 효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이것은 일반인에게 보급된 명상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선두 주자 가운데 한 사람은 존 카밧진(John Kabat-Zin)이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의과대학에서 ‘스트레스 감소 및 이완 프로그램(MBSR: 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을 처음 실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명상이 뇌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다수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그것들에 따르면, 명상은 특정 성분을 증가, 또는 감소시킨다고 한다. 또한 고도로 숙련된 명상수행자는 특정 뇌파의 성분−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포용의 정신−을 임의로 발산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심리학자는 말한다. ‘20세기의 연구는 뇌의 시대를 시작하였다면 앞으로는 마음의 시대이다. 뇌의 시대에는 뇌의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기능을 분해하고 분석하는 데에 집중했다면, 마음의 시대에는 그러한 지식을 통합하는 작업이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시대에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보호하는 방식에 대한 기초 및 임상연구,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연구, 마음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연구 등이 주목받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이유로 명상이 종교적인 맥락에 머물지 않고 신비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점점 더 현실적이고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수행의 대표주자로 명상/선수행을 말해 왔는데 그것이 현대인의 구세주(?), 의학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불교계도 주목하고 많은 관심을 둬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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