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속의 예술, 예술 속의 불교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한국 전통춤의 백미는 ‘승무’라고 한다. 실제로 승무는 그 분위기나 예술적 편성에서 타 장르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단 대풍류라는 장단을 사용하여 대부분의 민속춤 장단을 아우르고 있으며, 다른 무용장르와는 달리 법고과장이라는 타악이 포함되어 그 예술적 가치를 돋보이게 하며, 자신을 숨김으로써 도리어 드러내는 의상 속에는 숭고함을 지나 종교적 경외감까지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토리의 전개가 있는 로맨틱 발레나 탈춤과는 달리 그 형식미를 강조하는 춤사위를 보더라도 한국 춤의 시작과 끝이라는 말이 짐작될 만큼 완벽한 구성과 높은 예술적 기교가 있어야 하는 춤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승무의 출생성분은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설들로 분분하다. 대학의 교과서로 많이 채택되었던 송수남의 《한국무용사》에는 승무를 불교기원설과 더불어 ①‘황진이 초연’설 ②‘동자무’설 ③‘구운몽 파생’설 ④‘파계승의 번뇌’설 ⑤‘가면극의 노장춤’설 등으로 나누었다. 여기에 덧붙여 임진란 때 왜군을 속이기 위하여 승려의 복장으로 춤을 춘 것이 유래라는 등의 속설을 가미하면 승무의 기원설은 가히 소설을 쓸 만큼 다양할 것이다. 물론 가장 유력한 불교의식 직접 기원설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불교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황진이 기원설이란 황진이가 지족 선사를 유혹하기 위하여 투명한 장삼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것이고, 동자무설은 동자가 스승이 출타한 후 스승의 움직임을 모방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구운몽설은 소설 《구운몽》 속의 성진이 인간세의 무상함을 깨닫고 광대무변한 불법을 표현하였다는 설이다. 또 파계승 번뇌설은 환속한 승려가 괴로움을 잊기 위하여 추어진 것이며, 노장춤 기원설은 대부분의 탈춤에서 보이는 노장춤이 발전한 형태라는 것이다.

이 중 ②, ④번은 나름대로의 해석이 가능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특히 황진이나, 구운몽, 파계승 기원설 등은 한국무용계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받아들여진 신무용의 스토리 전개에서 자주 인용되는 스토리텔링이었다. 다시 말해서 신무용가들의 신무용 창작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된 레퍼토리 중 하나인 것이 오히려 승무의 기원설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이 승무 기원의 학문적 성과로 인용되고 있었다. 

어쨌건 학계의 입장도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이 보통이다. 먼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불교의식 기원설이다. 이것은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에서 승무가 작법의 법고춤에서 파생하였다고 연원을 밝히는 데서 시작한다. 이에 대하여 김유신과 이병옥 등은 조선 중기 불교에서 파생된 승무가 ‘탁발승→사당패→권번’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의견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승무의 의상이나 명칭 또는 승무에 법고가 포함된 것과 비교하여 가장 설득력을 가진다.

반면 승무를 교방예술로 나눈 정병호의 견해는 민속예술기원설에 가깝다. 《한국의 전통춤》에서 정병호는 승무가 사찰의 승려들의 의식무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남도 살풀이춤, 탈춤의 한삼춤 영향을 받은 창우, 예기 집단이 창조한 교방예술의 일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의견 역시 승무의 기원이 불교에서 파생된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같은 책에서 정병호는 승무의 명칭이나 의상 등에 대하여 기방예인들이 왜 이러한 것들을 선택하였는지를 승무 발생의 중요한 단서로 의문을 제시하며 승무 발생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설명하기도 한다. 정병호는 아마도 승무가 불교에서 출발하여 속가로 내려오면서 그 의식적, 종교적 색채는 약화되고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무대 예술적인 춤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한 것 같다.

이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역사적 자료와 문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 승무가 불교에서 파생하였다면 역사적 자료만큼이나 현재 추어지고 있는 승무 속에서도 어느 정도 그 기운이 남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로라하는 한국의 명무들은 자신만의 승무를 추고 있었고 이 승무의 분위기 역시 다양하였다. 그 예로서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한영숙의 승무와 이매방의 승무를 들 수 있다.

한영숙 승무
이병옥에 의하면 한영숙의 승무가 전문 창우 집단이 주로 전승하여 그 춤사위가 남성적이면서 진취적인 반면, 이매방의 승무는 호남 지방의 권번에서 전승되어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승무가 불교의 의식에서 파생하였고 불교의 영향을 받으며 민간에서 발전하였다면 아직도 승무 속에는 불교와 관련된 형식과 의미가 남아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승무 연구가 역사적 자료와 문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실증주의적 방법이었다면 승무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지금까지 보존되고 전승되고 있는 승무 그 자체 속에서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는 않을까? 

본 연구의 목적은 이러한 입장에서 승무가 내포하고 있는 예술적 형식과 의미를 공연자 입장에서 살펴봄으로써 그 이해를 높이는 데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을 위하여 먼저 승무에 내포된 형식을 의상, 장단 그리고 움직임의 특징으로 나누어 공연자(performer) 입장에서 소묘하였으며 후에 이를 불교적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나타난 해석의 많은 부분은 본 연구자가 현재까지 200여 회가 넘는 승무의 공연의 현장적 경험과 공연 후 관객과의 질의응답에서 나타난 감상자의 비평에 크게 의존하였음을 밝힌다.

승무가 불교에서 기원하였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체험에 의지하는 예술 경험이라는 점에서 승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움직임과 학습자의 해석적 관점 그리고 공연자와 관객 간의 감상은 승무를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의 자료가 될 승무는 필자가 지금까지 학습과 공연해온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한영숙류의 승무전수곡 완판(40분)으로 한정한다. 따라서 이 논문은 현재 추어지고 있는 승무 전체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담보하지 않으며, 또한 한영숙류 승무 그리고 그 승무의 개인적 체험의 해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2. 승무의 불교적 특징 세 가지

승무의 불교적 특징은 그 명칭에서부터 나타난다. 승무를 그대로 번역하면 승려 또는 중의 춤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승려가 제의식에 사용하는 의식무에는 통칭 작법이라는 명칭이 통용되고 있다. 작법은 보통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타주춤의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승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운주사에서 발간된 《불교무용》에서 법현은 불교의 의식무를 통틀어 작법이라고 칭하고 이와 함께 승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매방 승무
얼핏 보아 승려의 춤을 의미하는 승무가 불교의식무의 통칭으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전승되고 내려오고 있는 전통춤의 계통을 교란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승무는 민간에서 불교식 가사장삼을 입고 추어지는 예술적 춤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인정하게 된다면, 역사적으로 1934년 한성준이 창작하여 발표한 살풀이춤이라는 명칭을, 현재 한국에서 연행되고 있는 무속인들의 모든 춤에 적용해도 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승무라는 명칭이 본래부터 불교 집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춤을 통틀어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보기에도 한계가 따른다. 왜냐하면 승무라는 명칭에는 이미 관찰자의 대타적 입장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직업적으로 승려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직업적인 승려의 복장을 하고 추어지는 춤을 가리켜 승무라고 명명하였을 것이며, 승려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춤을 승무라고 명명하였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승무가 의식무에서 속가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분류되고 널리 통용된, 속가에서만 쓰이는 계급적이고 직업적인 명칭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일반인들 중에는 승려가 추는 작법에 대하여 승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경우가 흔하다. 법무 또는 작법이라는 말보다 승려라는 직위에 속한 사람의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유명한 조지훈의 시 〈승무〉에서도 나타난다. 승무 자체는 민간에서 추어지는 춤이지만 조지훈이 노래한 ‘승무’에는 현재 추어지고 있는 승무의 의상과 법고의 묘사와 더불어 번뇌하는 비구니의 춤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시인의 상상력으로 승무라는 명칭이 가지는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뛰어나게 묘사한 것이다. 즉 승무라는 용어가 지니는, 속가와는 구별되는 입장의 춤꾼과(실제로 조지훈의 승무는 정확히 관찰자적 입장에서 비구니의 춤과 내면세계가 묘사되고 있다.) 현재 민간에서 추어지고 있는 승무라는 춤의 형식이 함께 만들어 놓은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후대 한성준에 의하여 무대춤으로 정리가 되면서 예술춤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어쨌건 승무의 태생이 불교에 있다면 승무라는 춤 속에도 불교적 의미가 숨어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 승무에는 불교를 찬양하거나 불교적 사상을 전파하거나 직접적으로 전법을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승무를 감상하고 종교적 감동이라고 할 만한 깊고 넓은 사색에 젖는다. 이것은 아마도 승무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기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승무에는 다른 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의상과 장단 그리고 움직임의 특징으로서의 시선 처리가 그것일 것이다.

1) 승무 의상의 특징:

장삼승무의 의상은 나비춤의 영향이 크다. 승무는 바지저고리 위에 하얀색 고깔과 흰색 장삼을 입고 왼쪽 어깨에 붉은 가사를 두르고 추어진다. 이것은 나비춤에서 고깔과 장삼 그리고 가사를 두르고 추는 것과 동일하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나비춤에서 청색과 홍색의 가사를 양쪽으로 두르는 대신 승무에서는 홍가사 하나만을 두를 뿐이며, 마찬가지로 나비춤에서 꽃을 양손에 드는 대신 승무에서는 북가락을 소매 속에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승무에서 북가락을 숨기고 추는 것은 후에 법고를 쳐야 하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승무의 장삼이 나비춤의 장삼과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승무의 춤사위는 길이가 긴 북가락으로 장삼을 날려야 할 만큼 긴 소매의 장삼을 입고 춘다는 것이다. 이것은 승무가 장삼춤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승무라는 명칭으로 추어지고 있는 탈춤의 춤들 역시 긴소매와 북가락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북을 쳐야 하는 법고과장은 추어지지 않지만 북가락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승무라는 춤은 장삼을 날려서 추는 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긴 소매를 날려서 추는 춤은 오직 승무의 형식에만 국한된다. 근래에 들어 강선영의 태평무에서도 한삼을 날리기 위하여 제법 긴 북가락을 넣어 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전해져 내려오는 법도와 상식이라고 할 수 없다.

한삼은 북가락으로 날리려는 용도가 아니며 궁중에서 대부분의 한삼춤은 임금 앞에서 손을 가리기 위한 무구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같은 이름으로 추어지는 이동안의 태평무 역시 한삼을 놀리며 추는 한삼춤이지만 북가락은 없으며 그 길이 역시 짧다. 또한 한영숙의 태평무에서는 한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맨손춤으로 편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선영의 태평무는 한삼과 북가락의 역할이 모호해진 정체불명의 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승무는 장삼춤이다. 그렇다면 장삼춤으로서 승무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의식이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삼의 움직임은 육신을 가진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것은 이루어졌는가 하면 변화하고 다시 나타나는가 하면 사라지고 마는 끝없는 과정이다.

움직임의 변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영숙의 승무에는 마루라는 독특한 의미가 숨어 있다. 이것은 영어의 프래이즈(Phrase)와 같은 의미이다. 즉 하나의 춤사위나 형식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시작하여 끝나는 전체의 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일정한 프래이즈가 승무의 염불과장 속에는 6번이 내재되어 있다. 하나의 일정한 의미의 춤사위가 시작되어 풀어졌다가 끝맺어지고 다시 그로부터 다른 프래이즈가 시작되어 6번을 이어진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 역시 어떠한 동작의 시작과 끝맺음 그리고 다시 새로운 동작이 시작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승무에서 마루의 의미는 장삼이 공간에서 아름다운 선을 그리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춤의 형식 속에서도 일정한 패턴이 끝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삼의 움직임과 형식적인 마루가 가지는 연속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 항상한 것은 없다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공간 속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던 장삼은 찰나에 사라지고, 다시 사라졌던 장삼은 다시 움직여 어떠한 질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이것은 무상한 세상 속에서 언제나 정진해야 하는 수행자의 모습은 아닐까?

실제로 이러한 패턴이 사라지는 부분이 승무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 소위 연풍제라고 하는 이 부분은 그동안 승무가 보여준 직선과 곡선의 패턴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무대에서 완벽한 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승무를 추는 사람은 양팔로 장삼을 공중으로 펼치고 다시 그 팔을 거둬들여 원의 안쪽으로 앉는다. 후에 한쪽 팔과 다리를 뻗으며 원의 밖을 보며 장삼을 펼치면서 그다음 동작을 준비한다. 한영숙의 승무에서 연풍제는 4번을 위와 같은 똑같은 춤동작을 반복하여 완벽한 원형을 그리면서 마무리한다.

이것은 고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인생과 자연이 영원히 순환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승무 대단원의 말미에 이 연풍제가 추어진다는 것은 승무의 전 과정을 통하여 제행무상을 터득한 수행자의 말 없는 사자후가 아닐까?

2) 장단 그리고 법고

승무는 대풍류 반주로 추어진다. 이 대풍류라는 이름은 관악영산회상이라고도 불리는 관악기 중심 〈영산회상〉의 속칭이기도 한데, 〈영산회상〉은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회의 불보살을 노래한 악곡으로 본래 불교 성악곡이었다. 이 불교 성악곡이 기악곡화되어 민간음악과 귀족음악으로 각각 비슷한 선율에 다른 특성을 살린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승무의 반주 음악으로 쓰이는 대풍류는 오랜 역사 동안 민간으로 전승된 형태이다. 또한 성악곡이 기악곡화되면서 느린 장단으로 시작해서 빠른 장단으로 끝나는 형식적 미학이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자리하게 되었으며 승무 또한 느리게 시작해서 빠르게 흘러가는 형식적 미학에 맞추어 춤사위가 전승되어 왔다.

예전, 춤을 한가락 추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승무를 추었던 것과 같이 승무의 장단 구성 역시 지역과 개인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한영숙의 승무에서는 7가지 장단이 11번의 변화를 거치면서 40여 분의 시간 속에 전개된다. 실제로 홀춤(솔로)으로서 40여 분을 무대에서 춘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무용사에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일 뿐 아니라, 춤꾼에게는 엄청난 체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춤일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춤이 그렇듯이 승무 역시 이러한 반주 장단에 의하여 그 춤이 영향을 받는다. 그 장단 구성을 살펴보면 염불−염불도드리−느린 허튼타령−자즌 타령−굿거리−자즌 굿거리−굿거리−자즌 굿거리−법고−당악−굿거리로 편성되어 있다.

이 중 8번째 자즌 굿거리는 법고로 넘어가는 중간 다리 역할 정도만 하므로 총 10과장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부분은 크게 장단의 연주 시간과 내용상 5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장단과 장단에 의한 춤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장단의 구성에 의하여 승무의 감상자는 승무 속에 내재된 어떠한 메시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 승무의 시작은 염불장단에서 법고를 향하여 엎드린 자세로 시작된다. 6박으로 구성된 염불장단은 한국의 가장 느린 장단에 속하며 또한 그렇기에 가장 예술적인 장단이기도 하다. 예술적이라고 함은 그 장단에 의한 춤사위가 매우 정제되고 극도의 절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염불장단이 매우 느리기 때문에 춤사위 역시 느리다. 이러한 장단은 관객의 몰입을 쉽게 얻어낼 수 없다. 극도의 집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염불을 통해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 낸다면 승무를 감당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이유로 해서 승무의 꽃은 염불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느린 염불을 지나면 타령으로 넘어간다. 타령은 매우 남성적이다. 4박으로 구성된 이 장단은 그 선율의 고저가 심하고 호방하기 때문에 북방 계열의 탈춤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춤사위 역시 사납다. 염불에서는 숨어 있던 한영숙에만 나타나는 몸의 독특한 움직임인 지숫기(또는 궁글리기)가 본격적으로 보인다.

이 지숫기는 오금질에 의하여 온몸이 전후와 좌우로 전일하게 움직이는 독특한 패턴을 나타낸다. 그리고 타령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이러한 지숫기는 승무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고 있다. 한마디로 승무는 이 지숫기의 변형된 춤사위의 모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장단에서는 보이지 않는 도무도 포함되어 있어 호방한 느낌을 더욱 진하게 내뿜는다.

타령을 지나면 굿거리가 펼쳐진다. 굿거리는 타령과 같은 4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느낌은 매우 다르다. 타령이 남성적이고 호방한 느낌이라면 굿거리의 편성은 여성적이고 온화한 느낌이 든다. 어느 시인이 국화를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말하며 그 완숙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것처럼 굿거리 역시 혈기방장한 타령을 지나 성숙한 내면의 모습으로 춤을 춘다. 타령과 거의 비슷한 동작들이지만 굿거리에서는 보다 편하고 이완된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타령에서 한 박자 한 박자에 정확한 춤 구성이 요구된다면 굿거리에서는 같은 춤동작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박자와 장단을 사용하여 움직임이 편성되기 때문이다. 과장이 지나면 법고로 넘어간다.

법고는 북을 치는 대목이다. 이 이름이 법고인 것처럼 이 북의 근원도 불교의 법고춤에서 찾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한국의 전통춤 중에서 공연 중 북을 치는 것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승무와 같이 북을 직립시켜서 공연에 편성한 것은 작법의 법고춤을 제외하면 승무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어쨌건 춤꾼은 장삼 속에 숨겼던 북가락을 꺼내어 북을 두드린다. 그 장단은 자즌 굿거리 또는 당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승무 속에는 음악적 과장인 법고 부분이 춤과는 분리되어 구성되어 있으므로 그 예술적 완성도 역시 어렵고 까다롭다. 또한 잘 연주된 북소리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있는 파토스를 건드려 춤을 감상하는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을 자아낸다. 법고 속에는 굿거리와 당악이 포함되어 있다.

이매방의 승무에는 법고과장에서 자즌 굿거리와 당악을 연주하지만 한영숙의 경우에는 당악이 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악은 당나라의 음악이라는 뜻이며 빠른 4박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굿판에서 흘러나오는 ‘덩덩 덩더꿍’ 하는 리듬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래서 승무 전체를 통하여 가장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춤꾼은 양쪽 북가락을 두드리기도 하며 북놀음을 하면서 춤을 추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과장에서 춤사위는 회무와 도무 그리고 자즌 발걸음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과장이 지나면 모든 것을 정리하는 굿거리가 다시 나온다. 춤꾼은 북가락을 다시 장삼에 숨기고 연풍제를 돌아 승무의 대단원을 마감한다.

승무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공연이 끝나면 보통 이 춤에 담긴 내용을 물어보기를 좋아한다. 형식미를 강조하며 내용이 없는 것 같은 승무 속에 무언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정 부분 일리가 있으며 또한 그렇게 느끼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장단의 구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승무를 한 인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염불을 통하여 조심스럽고 절제된 움직임은 유소년기의 성장을 나타낸다. 타령의 남성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은 청년의 질풍노도와도 같다. 굿거리에서 춤꾼은 질풍노도를 지난 완숙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굿거리가 지나면서 인생은 황금기를 맞이한다. 빠른 법고와 당악에서 춤꾼은 꽃이 피고 흩날리는 절정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과정은 춘하추동, 성주괴공(成住壞空)과 같은 자연과 우주의 운행으로도 느껴진다. 염불은 법계의 시작이다. 동토의 차가운 땅을 뚫고 움트는 생명의 강인한 움직임이 염불의 느린 동작에서 느껴진다. 뜨겁고 고된 여름을 지나 가을 속에서 드디어 결실을 본 생명은 그 몸을 흙에 묻으며 다시 다음의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 승무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승무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라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그것은 춤을 추는 사람과 춤을 감상하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승무 감상의 몫은 전적으로 관객에게 달렸으며 역사적 사실을 강요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승무를 추는 사람의 의식 역시 중요하다. 승무와 같은 형식미가 강조된 춤에서는 그 춤사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상자의 느낌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승무를 추지만 그 느낌이 모두 다른 것은 춤을 추는 사람의 인생이 다르고, 몸이 다르며, 춤을 해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승무를 추는 춤꾼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춤꾼에게 승무는 힘들다. 단순히 혼자서 40분을 무대에서 지탱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힘들고 벅찬 일이다. 하지만 춤꾼은 절대적으로 춤에 몰입해야 한다. 춤꾼이 몰입하지 않은 승무는 개인적으로 해석되지 않으며 춤꾼이 해석하지 못하고 집중을 잃은 춤을 관객이 올바르게 전달받기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때문에 춤꾼에게 승무는 인생과 같다. 한고비 지났다고 생각하면 다시 태산이 가로놓여 있고, 태산을 지난 순간, 다시 대해가 펼쳐진다. 어렵게 바다를 건너면 끝을 알 수 없는 모래사막이 갈 길을 막고 있다. 춤꾼은 한시도 승무 전 과정의 일거수일투족도 간과할 수 없다. 승무 속에 쉬운 상대란 없다. 한 고비를 넘기면 바로 다음의 고비가 마련되어 있는 승무는 그야말로 고(苦)의 연속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번뇌의 연속이다.

이러한 승무를 추는 춤꾼의 표정 역시 온화할 리 없다. 때로는 이를 악물어야 하고, 때로는 입을 벌려 부족한 산소를 들이마셔야 하며 기꺼이 온몸과 의상을 흘러내리는 땀으로 적셔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악전고투를 감상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관객은 우아한 여타의 춤과는 다른 감상의 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성적이고 아름다운 승무의 이미지가 아닌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쳐나가며 정진하고 고뇌하는 진정한 수행자로서의 인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3) 승무의 움직임 특징−시선

1년에도 여럿, 세계의 토속적인 언어가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으며 그 빈자리를 영어가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그와 같이 나라마다 고유하게 나타나고 있는 움직임의 특징도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는데 한국의 전통춤 움직임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발레 즉 무대를 전제로 한 움직임이 대신하고 있다. 이것은 언어가 사라지는 것만큼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나라의 움직임이건 그것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그 나라의 역사적 배경과 환경적 풍토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나라의 춤은 그 춤이 가능하게 한 독특한 세계관과 몸에 대한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움직임을 서양적 움직임이 대신하게 된다면 개별적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 오고 있는 각 지역마다의 전통적 움직임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나아가 그 민족의 예술적 정체성 역시 혼동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발레적 움직임을 구사하는 춤꾼이 승무의 가사 장삼을 입고 승무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고 해서 그것을 전통춤 승무로 보기에는 어려운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전통적 움직임만 담보하고 있다면 양복을 입고 서양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전통춤 또는 한국의 춤이 아니라고 할 까닭이 없다. 이러한 면에서 승무에 나타나는 움직임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한 움직임에 의하여 한국적 움직임의 미적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춤은 북방의 탈춤 계열, 중부지방의 산대놀이 계열 또는 남부지방의 오광대 계열의 모든 춤들이나 종교의식무인 불교의 작법이나 굿판 속의 춤들 그리고 일제를 거치면서 권번에서 학습된 기방의 춤이나, 심지어 시골에서 막걸리 한잔 걸치고 이루어지는 촌로의 허튼춤까지도 몸의 움직임 사용에서 일정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구희서가 쓰고 정범태의 사진을 실은 《한국의 명무》라는 책에는 전통춤 97종과 창작춤 10종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 사진 속에 나타난 전통춤은 대부분 오금이 굽혀져 있으며, 몸통이 숙여져 있고 또한 시선이 아래로 떨어뜨려져 있다. 반면 창작춤은 무릎을 피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몸통이 곧게 펴져 있으며 시선 또한 위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특징 역시 승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모든 움직임의 기본은 무릎의 오금질에서 나온다. 동계 스포츠인 스키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릎을 굽혀서 눈 위에서 몸의 균형을 잡는 것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을 움직이기 위한 기본적인 형태는 다리의 굽힘과 핌에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다리의 움직임은 승무뿐만 아니라 발레의 기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춤 특히 승무에서 무릎의 사용은 펴는 것보다 굽히는 것에 더욱 강조점을 둔다.

승무의 학습단계에서도 스승은 제자에게 과도할 만큼 심한 오금의 굽힘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가 일어나는 것은 승무 전체의 움직임이 오금의 굽힘과 핌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승무의 염불에는 무릎을 한 번 깊이 굽힌 상태에서 한 장단 동안 서서히 확장시키는 부분이 있다. 무릎을 굽히게 되면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하여 몸통을 중심으로 몸은 수축을 일으키며 고개와 시선 역시 떨어지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무릎을 펴게 되면 몸의 중심을 맞추기 위하여 몸통 역시 펴지게 되며 시선 역시 마찬가지이다.

승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몸의 움직임 전체가 중요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선일 것이다. 왜냐하면 전통춤을 여타의 창작춤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시선의 처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선의 처리는 몸의 움직임과는 다른 방법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창작춤은 보통 최승희의 신무용을 바탕으로 잉태하였으며 최승희는 일본의 이시이 바쿠(石井漠)로부터 발레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발레를 바탕으로 한 신무용은 철저하게 무대예술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창작춤의 시선이 올라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관객을 전제하여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온 것을 나타내며 그 몸짓과 시선도 무대에서 돋보이기 위한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반면 한국의 전통춤은 이러한 무대 개념이 강하지 않았다. 궁중의 임금 앞에서, 굿판의 한곳에서, 엄숙한 의식이 펼쳐지는 사찰의 앞마당에서 춤꾼의 시선은 아래로 떨구어지는 것이다.

시선이 떨어지는 것은 춤꾼의 의식이 관객이 아닌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치 참선을 하는 수행자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사물에 방해받지 않고 스스로의 화두에 집중하기 위한 것처럼 춤꾼은 시선을 떨어뜨림으로써 관객이 아닌 스스로의 움직임과 내면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의 처리는 한국 춤의 특징이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전통적 정서 중의 하나를 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떨구어진 시선에 대한 해석에 관한 한 정답인 것 같다. 얼마 전 나비춤을 본 적이 있는데 고깔로 머리를 가린 비구니 스님의 한 번 앉았다 한 번 일어나는 동작 속에서 한없는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감상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떨구어진 시선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구니 스님의 작법 속에 이러한 슬픔을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아마도 스님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일체개고(一切皆苦)의 믿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승무의 분위기 역시 비애미(悲哀美)가 강조되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승무에서 춤꾼의 얼굴은 고깔에 의하여 가려져 있으며, 몸에는 그것을 가리고도 남을 만한 크기의 바지와 저고리로 치장되어 있다. 더불어 자기의 키보다도 긴 장삼을 입고 홍색가사를 두른다. 노출되어 있는 신체는 겨우 얼굴 일부이지만 그 시선마저도 아래를 향하여 떨구어져 있다. 이런 의상과 춤의 분위기로 본다면 승무는 관객을 무시하거나 도외시한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감추어진 얼굴과 떨구어진 시선 속에서 관람자는 한없는 슬픔과 끝없는 고통을 말없이 헤쳐나가야 하는 우리 인생의 한 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3. 나가는 말

본 연구의 목적은 승무가 내포하고 있는 예술적 형식과 의미를 공연자 입장에서 살펴봄으로써 그 이해를 높이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하여 먼저 승무의 다양한 기원설을 살펴보았으며 승무가 불교에서 파생되었음을 전제하였다. 그리고 공연자 입장에서 승무에 내포된 불교적 형식미를 의상, 장단 그리고 움직임의 특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의상의 경우 불교 의식무인 나비춤의 가사와 장삼을 기본으로 함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승무는 일종의 장삼춤이며 이 장삼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끝없이 그려지는 선과 형태에 의하여 관객은 제행무상의 불교적 가르침을 심미적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해석되었다.

승무의 장단은 대풍류라고도 불리는 불교의 음악인 〈영산회상〉이 사용됨을 확인하였다. 승무의 대풍류는 염불장단을 포함한 7개의 장단에 의하여 11번의 변화를 40여 분 동안 거침으로써 승무의 중요한 미적 관점을 표현하게 되며 그 의미는 번뇌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진하는 구도자의 이미지로 해석되었다.
승무에 내포된 움직임으로 오금의 굽힘과 몸통의 역할 그리고 시선의 처리를 다른 장르의 춤과 구별되는 한국춤과 승무의 특징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공연자의 시선이 현대의 공연예술 장르에 비하여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승무가 관객중심의 춤이 아닌 스스로의 움직임과 내면에 집중하려는 의도로 설명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선의 처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비애미 또는 일체개고의 감상을 일으키는 것으로도 해석되었다.  

본 연구가 진행되면서 전통춤 승무는 불교에서 파생되어 민간에서 발전된 한국의 대표적 예술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승무의 정확한 기원이 교과서에 정식으로 채택되지 않고 다양한 기원설 중의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승무가 학문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공연예술이란 면을 주시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역사적 자료와 문헌 그리고 학계의 통관의례가 필요한 역사적 고증과는 달리 승무는 현재도 시현되고 있는 살아 있는 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승무의 실증적 증명만큼이나 승무를 추고 있는 춤꾼의 해석과 그것을 통한 관객의 감상이 현대의 승무를 재해석하고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승무를 공연하고 승무를 전승함으로써 승무에 대한 다양한 불교적 이해를 넓혀가기를 기대해 본다. ■

 

이철진 / 한국춤예술센터 성균소극장 대표.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 이애주 사사. 〈주역팔괘에 의한 살풀이 춤의 한 해석〉으로 명지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SOAS(런던대학교) 방문교수, 한국근현대 예술구술사 채록 연구원, University of Sydney 방문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소극장 꿈꾸는공작소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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