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마성스님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사회로 빠르게 변화해 가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만 되뇌고 있다. 예전에는 불교가 이 민족과 함께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면 왜 이처럼 한국불교가 제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가?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수행의 종교’로서 불교 본연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수행(修行)’과 관련된 문제들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이 주제는 지난 2011년 1월 26일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이 담화문을 통해 제안한 수행·문화·생명·나눔·평화의 5대 결사 중에서 수행결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총무원장의 담화문에 따르면, “불교 본연의 모습을 확립하고 종교적 가르침을 바로 세워 나가기 위한 수행결사”를 제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는 수행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다. 수행결사에 대한 도법 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의 글에서도 수행결사의 의미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도법 스님은 이 글에서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였지만, 수행 전반에 관한 대안으로는 약간 미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수행이 불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서 수행결사가 필요한가? 그것은 현재의 한국불교가 수행을 소홀히 하고 있거나 아니면 수행을 잘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 한국불교에서 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굳이 이러한 문제는 제기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한국불교의 수행법은 무엇이 문제인가?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개선해야 수행의 종교인 불교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우선 수행결사와 관련하여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는 간화선(看話禪) 수행에 대해 살펴보고, 불교수행의 핵심과 바른 수행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간화선 수행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Vipassanā) 수행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한국불교의 수행법이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2.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과 그 원인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

이번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에서 제안한 수행·문화·생명·나눔·평화의 5대 결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결사’이다. 나머지는 모두 수행결사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조성택은 〈법보신문〉의 ‘특별대담-조계종 5대 결사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5대 결사에는 수행·문화·생명·나눔·평화가 모두 들어 있다. 어떻게 보면 나열된 느낌도 있다. 육바라밀이 결국은 지혜바라밀에 의해 규정되듯이 다섯 가지 실천 항목의 틀은 결국 수행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도법 스님은 “생명결사와 평화결사를 나눠놓았는데 생명평화결사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넓은 의미에서 보면 5대 결사는 수행결사로 귀결된다. 불교의 생명은 수행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간화선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다. 지금까지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간화선이야말로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표방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에서 펴낸 《간화선》에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즉 간화선은 조사선이 강조하는 견성 체험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사 스님들께서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바로 보였던 말길이 끊어진 말씀을 화두라는 형태로 잘 정형화해서 이 화두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깨치게 하는 탁월한 수행법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수행법이야말로 한국불교가 자랑하는 최고의 이상이자 목표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수행결사를 제안한 것은 대한불교조계종의 대표적 수행법인 간화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한편 도법 스님의 글에 따르면, “스님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수행자임을 자처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수행 하면 참선, 선방 수좌, 선사를 떠올리는 풍토이기 때문에 선방 못 가고 참선 못 하고 수좌가 아닌 경우 수행을 제대로 못 하는 것이라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훌륭한 간화선을 통해 수행한 스님들은 얼마나 많이 깨달음을 이루었는가? 도법 스님은 “(조계)종단 출가 수행자가 비구·비구니를 포함하여 대략 1만 2천 명이라고 한다. 50여 년 전체를 합치면 연인원 50여만 명이 수행에 진력해온 셈이다. ……그동안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함께 살기도 하고 쟁쟁한 소문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면 깨달았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이 이상하게 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실제 괜찮게 된 경우는 50만 명 중에 20여 명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 20여 명도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대중이 반신반의하는 것을 보면 깨달은 도인이 기대했던 것처럼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볼 때 수행하여 이루어낸 결과가 너무 초라하고 허망하다.”고 탄식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보고는 충격적이다. 간화선 수행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 이가 거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겉으로 드러내 놓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간화선 수행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할 뿐, 간화선 수행법 자체의 문제점이 아니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실천적 수행에 관한 한 다른 불교국가에 비해 뛰어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자기도취적 입장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특히 초기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간화선 수행법 자체는 물론 간화선 수행자들의 태도에서도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3. 문제의 원인 분석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되었는가? 그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권탄준은 현재 한국불교계의 수행과 관련된 문제점을 여덟 가지로 지적했다.

이른바 ①수행에 대한 의식 결여, ②유심(唯心)사상에 대한 그릇된 이해, ③사회 구원을 위한 수행에 대한 의식 결여, ④모호한 성불론, ⑤지계(持戒) 생활에 대한 의식 결여, ⑥생활과 수행의 불일치, ⑦기복 신앙 차원의 수행, ⑧체계적인 수행 교육의 부재 등이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까지 지적된 원인들을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하여 분석해 보았다. 첫째는 간화선 수행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둘째는 간화선 수행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신비주의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셋째는 간화선 수행의 목적과 수단이 전도(顚倒)되었다는 지적이다.

첫째는 간화선 수행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원래의 “간화선은 조사선의 전통을 계승하여 선을 대중화하고 사회화하면서 정립된 생활수행법이다.” 간화선을 체계화시킨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출가자와 재가자들에게 일상생활을 하면서 화두를 참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선사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무너져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지혜를 밝히기 위하여 자유자재하고 활발발한 선을 널리 전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행자들의 삶과 수행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법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에서 사고하고 실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교법과 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또한 이를 생활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선 수행자와 종단 사부대중의 겸허한 반성과 뼈를 깎는 정진이 필요하다. 이 점을 개선한다면 한국 선은 우리 국민과 인류에 많은 기여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자성하고 있다.

권탄준은 “평소 생활에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다스려 잘못 길들여진 생활방식을 바꾸고 훌륭한 생활 습관을 길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정·혜가 전일화(全一化)된 수행이 아니라, 수행이 따로 있고 생활은 생활대로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도법 스님은 “기존의 불교관과 수행론이 수행과 생활의 통일, 즉 생활이 수행이 되고 수행이 생활이 되어야 하는데 생활 따로 수행 따로이기 때문이다. 왜 수행과 생활이 통일되지 않을까? 비중도적인 불교관과 수행론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그러면 간화선 수행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게 된 그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한마디로 한국불교의 수행법은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의 체계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은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순천 송광사)에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수행운동인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전개했다. 이때 비로소 대혜 선사가 세운 간화선법이 보조 국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다. 정혜결사란 선정과 지혜를 동시에 닦는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의미한다.

물론 ‘정혜쌍수’라는 말 속에 지계(持戒)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지계는 무시되고 선정과 지혜만 강조되었다. 간화선은 문자 그대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전형적인 선정 수행법이다. 간화선에서 이처럼 선정을 강조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계의 중요성이 소홀해진 것이다. 특히 선수행자들이 막행막식해도 화두만 타파하면 일체에 걸림이 없는 도인(道人)이 된다는 것이 암암리에 뿌리내려져 있다. 그래서 선객들의 입에서는 어떤 스님이 어떤 기행을 했다더라는 일화들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같이 간화선 수행자들이 지계의 중요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선사(禪師)가 되려면 마치 계(戒)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이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재가자들도 화두를 들고 일상생활을 활기 있게 해나갈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주변에서 전개되는 역경계와 순경계를 화두로 다스리고 현실에 깨어 있는 것이다. 화가 나려 할 때, 정신이 혼미해질 때, 어떤 대상에 한없이 집착하려 들 때, 화두를 들고 화두에 역력히 깨어 있게 되면 그러한 경계를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하루 근심 걱정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간화선은 본래 생활선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김나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대체로 간화선 참선 수행은 오로지 상근기만이 할 수 있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재가불자 가운데도 상근기가 아니면 감히 접근도 못 하는 영역이라 선방 스님들의 독점 전유물이 되어 있음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선방의 스님들도 수행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데, 하물며 재가불자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화두 참구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간화선 수행을 통해 깨달은 자라고 자처하는 선사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아집과 집착에서 비롯된 행위를 할 때, 그것을 지켜보는 후학들은 간화선 수행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은 성자로서의 삶을 몸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수행도 삶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수행을 떠난 삶도 온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즉 수행의 일상화, 일상의 수행화가 바른 불자의 삶이다. 그런데 선사들은 여전히 삶의 현장에서 실현할 수 없는 공허한 언어의 나열이나 삶과 유리된 깨달음에 대한 환상만 심어주고 있다. 실제로 선사들의 법어(法語)는 화성인의 언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는 간화선 본래의 생활선으로 복귀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간화선 수행자의 생활과 수행이 둘로 구분됨으로써 ‘깨달음의 사회화’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선방의 수좌는 사회문제에 초연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문제와 중생의 삶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 수행과 생활의 분리로 인해 문화·나눔·생명·평화에 대한 문제에도 무관심해진다. 불교라는 종교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이른바 사회고(社會苦)와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출가자는 바른 수행을 통해 문화·나눔·생명·평화의 문제 해결에도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문화·나눔·생명·평화결사도 결국은 수행결사를 통해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간화선 수행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신비주의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김나미는 “깨달음은 여전히 한국불교 최고의 상위 자리를 지키며 모든 수행자와 학도(學徒)들의 과제이자 목표가 되어 있다. 법문을 들어도 고승들의 단골 용어가 된 ‘깨달음’은 자주 듣지만 그 어디서도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정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무척 신비한 ‘그 무엇’으로 포장되어 있다. 깨달음은 ‘신비’라는 구름 속의 무지개로 포장되어 저 드높은 곳에 모셔진 추상적인 것으로 전락해 있다.”라고 비판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깨달음’이라는 용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너무나 자주 쓴다.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현재 “한국에서는 깨달음의 정의조차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으며, 이 개념에 대한 이해는 신비화되어 있기까지 하다.” 한편 한국불교계에서 깨달음과 수행에 관해 치열하게 논의가 진행된 적이 있다. 하지만 아직도 깨달음에 대한 이해는 그 사람의 수준에 따라 각기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

김종명은 “깨달음에 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크게 신비주의적 인식, 세속주의적 인식 및 실증주의적 인식의 세 가지로 나타난다. 신비주의적 인식은 깨달음을 신비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세속주의적 인식은 깨달음이란 특출한 수행자들의 몫일 뿐, 재가불자의 목표는 될 수 없다는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증주의적 인식은 깨달음이란 진리 구현을 위한 출발점이란 측면의 인식이다.”라고 분석했다. 특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깨달음에 대한 신비주의적 인식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깨달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홍사성은 깨달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불교에서 깨달음 문제만큼 많은 오해와 시비가 교차하는 것도 없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몇 가지 오해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는 깨달음을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신비한 무엇, 또는 고도한 관념적 철학체계로 이해하는 경향이다. 깨달음의 체험은 갑자기 은산철벽이 무너지듯 눈앞이 환하게 열리고 초월적 어떤 능력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깨달음을 위해 매우 오랫동안 특별한 수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묵언수행이나 동구불출이나 장좌불와와 같은 무엇인가 특별한 수행을 해야 깨달음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생물학적 생사문제나 도덕적 인과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이 경우 죽음을 예언하거나 좌탈입망, 사리를 남기는 것이 깨달음의 한 증표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처럼 선수행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신비적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깨닫기만 하면 당장 도인(道人)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 지상주의’가 한국 선종의 현주소인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의하면 ‘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눈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세계와 인생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인 것이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깨달음은 신비화되었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 말한 ‘진리에 대한 눈뜸’이 대승불교에서는 ‘부처가 된다(成佛)’라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깨달음은 다겁생을 통한 수행의 결과라거나, 범부들은 감히 접근할 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깨달음은 일부 선 수행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깨달음에 대한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깨닫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한순간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셋째는 간화선은 수행의 목적과 수단이 전도(顚倒)되었다는 지적이다. 앞에서 살펴본 깨달음에 대한 신비적인 인식은 수행의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수단으로서 ‘깨달음’과 목적으로서 ‘열반’이 뒤바뀌어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은 목적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수단이어야 할 깨달음을 목적으로 여기고, 목적인 열반을 수단으로 잘못 인식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깨달음은 열반에 이르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이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깨달음이라고 잘못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깨달음(bodhi)·해탈(vimutti)·열반(nirvāṇa)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용어의 쓰임새에 따라 약간 다른 의미를 갖고 있음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에 바른 수행법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의 증득에 있다. 이 평범한 사실에 대한 이해부족, 즉 깨달음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한국불교는 잘못된 수행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수행법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수행의 결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종착점이 아니라 진리 구현을 위한 출발점이다. 즉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눈뜸’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깨달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행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열반이라는 증거는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Mahāsatipaṭṭhāna-sutta(大念處經)》에 나오는 다음의 대목이다.

비구들이여, 이 도(道)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이처럼 수행의 목표는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열반의 증득이야말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수행의 최종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바른 수행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4. 불교수행의 핵심과 바른 수행법

불교수행의 핵심

앞에서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미 그 대안을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문제 속에 이미 답이 있고, 답 속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불교수행의 핵심과 바른 수행법, 이른바 수행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수행하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되돌아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불교수행의 특징을 한마디로 ‘중도적 수행론에 근거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 당시 인도의 종교와 철학의 특징을 비교했을 때, 불교는 중도적 수행론에 해당된다. 붓다는 최초의 설법에서 불교수행의 핵심은 중도(Majjhimā-paṭipadā)라고 선언했다. 붓다는 지나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는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또한 붓다는 일생 동안 중도적 삶을 몸소 실천했다.

《Dhammacakkapavattana-sutta(轉法輪經)》에 의하면 중도는 곧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한다. 따라서 팔정도가 불교수행의 근간임은 말할 나위 없다. 또한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불교수행의 핵심은 계·정·혜 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 고유의 전통설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의 간화선 수행이나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은 계·정·혜 삼학의 체계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남전의 《Mahāparinibbāna-sutta(大般涅槃經)》에 의하면, “이것이 계(戒)이다. 이것이 정(定)이다. 이것이 혜(慧)이다. 계(戒)가 실천되었을 때, 정(定)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정(定)이 실천되었을 때, 혜(慧)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혜(慧)가 실천되었을 때, 마음은 번뇌, 즉 욕루(欲漏, kammāsava)·유루(有漏, bhavāsavā)·견루(見漏, diṭṭhāsavā)·무명루(無明漏, avijāsavā)로부터 해탈하게 된다.”라고 했다. 다른 경전에서도 계(戒)와 혜(慧), 그리고 혜(慧)와 정(定)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Soṇadaṇḍa-sutta(種德經)》에 따르면, “혜는 계에 의해 청정해지고, 계는 혜에 의해 청정해진다. 혜가 있는 곳에 계가 있고, 계가 있는 곳에 혜가 있다. 계를 지키는 자에게 혜가 있으며, 혜를 지키는 자에게 계가 있고, 계와 혜는 세상에 있어서 최고의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Dhammapada(法句經)》에서도 “지혜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사람은 열반에 가까이 간다.”라고 했다.

이처럼 이 세 가지는 원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세 가지 가운데 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도덕적 규범은 보다 높은 정신적 성취를 위한 불가피한 기반으로 간주되고 있고, 도덕적 기초 없이는 어떠한 정신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계는 선정이나 지혜를 얻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지계를 다른 말로 ‘심신의 조정’이라고도 한다. ‘심신의 조정’ 없이는 정신을 통일·집중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선정이 필요한가? 통일·집중된 정신을 통해 올바른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선정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붓다 당시 외도 중에는 선정을 수행의 최후 목적으로 삼아 선정을 얻으면 그것으로 열반의 이상경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붓다가 성도 전에 사사(師事)했던 알라라 깔라마(Āḷā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라는 두 선인과 62견(見) 가운데 초선(初禪) 내지 제사선(第四禪)의 선정 그 자체를 열반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을 주정주의자(主定主義者) 혹은 수정주의자(修定主義者)라고 부른다. 붓다가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체험했지만, 그들 스승의 곁을 떠났다고 한다. 이것은 붓다가 선정이나 수정주의를 버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정 수행 자체를 그 목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의 곁을 떠났던 것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붓다가 수정주의를 버린 것으로 잘못 해석하지만, 붓다는 결코 선정(禪定)이나 수정(修定)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붓다는 선정이 무익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장아함 10 《십상경》에 “만일 비구로서 믿음도 있고 계도 있으며 많이 들은 것도 있고 설법도 잘하며 능히 대중을 기르고 능히 대중 가운데서 널리 법의 말을 연설하더라도 사선(四禪)을 얻지 못했으면 곧 범행(梵行)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선정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이외에도 선정 수행의 중요성을 언급한 경전은 수없이 많다.

선정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지혜를 얻기 위한 전제 조건임은 분명하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緣起)의 도리를 깨달은 것은 선정의 상태에서였다. 올바른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얻고자 하는 지혜가 고도로 순수한 것일수록 선정도 극도로 순화되고 통일되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선정은 올바르고 뛰어난 반야의 지혜를 획득하는 데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미 얻은 지혜·경험을 최고도로 활용하는 데에도 필요한 것이다. 가령 우리가 이미 뛰어난 지혜·경험을 얻었다고 해도, 정신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냉철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 지혜·경험을 충분히 구사할 수가 없게 된다.

이제 팔정도와 삼학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팔정도의 각 항목은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정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 정어(正語, sammā-vācā), 정업(正業, sammā-kammanta), 정명(正命, sammā-ājīva),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a), 정념(正念, sammā-sati), 정정(正定, sammā-samādhi) 등이다.
이 여덟 항목은 서로 상관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여덟 항목이 한 성도(聖道)의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항목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여덟 항목이 모두 협력함으로써 하나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를테면 첫 번째 정견은 다른 일곱 가지를 수반하고 있는 정견이고, 두 번째 정사유도 다른 일곱 항목과 함께 있는 정사유이다. 마찬가지로 최후의 정정도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정견 내지 정념 등 일곱 항목을 수반하고 있다. 정정이 그 작용을 완전히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곱 항목의 협력이 필요하다.

잡아함 권 28, 787경에서는 정견이 다른 일곱 가지 항목을 일으킨다고 했다. 또한 《Aṅguttara-nikāya(增支部)》 7, 42에서는 정견에서부터 정념에 이르는 일곱 가지가 정정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것은 팔정도의 정견과 다른 일곱 항목, 정정과 다른 일곱 항목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팔정도를 삼학으로 나누어 보면, 정어·정업·정명은 계학에 해당되고, 정정진·정념·정정은 정학에 해당되며, 정견·정사유는 혜학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계·정·혜는 상섭(相攝, saṅgaha, Sk. saṁgrha)의 관계에 있다. 즉 계 가운데 정·혜가 포함되어 있고, 정 가운데 계·혜가 포함되어 있으며, 혜는 계와 정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삼학을 뚜렷이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은 계·정·혜 세 가지를 어느 정도는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과 삼학(三學)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삼십칠조도품의 일곱 항목 중에서 일승도(一乘道, ekāyana magga)로 알려져 있는 것도 있다. 일승도는 한 가지 수행법만으로도 깨달음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초보의 수행에서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까지를 일관되게 행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이를테면 사념처(四念處)나 사여의족(四如意足)은 일승도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오온(五蘊)과 사제(四諦)를 관찰하는 수행법도 일승도에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사념처(四念處)·오근(五根)·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 등에 의해서도 성자로서의 네 가지 깨달음[四果]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삼십칠조도품의 7항목 37종 모두를 행할 필요는 없다. 같은 수행도를 여러 가지 형태로 제시한 것은 붓다가 제자들의 성격이나 능력에 따라 적합하도록 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곱 항목 가운데 자신의 성격에 적합한 어느 항목을 선택해서 수행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미즈노 고겐은 “이와 같이 어느 항목의 수행법도 그것만으로 좋은 것이지만, 다시 몇 개의 항목을 단계적으로 수행시키는 경우도 있다. 당시의 수행자들은 어느 하나만 선택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여러 가지 수행법들을 병용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삼십칠조도품은 모두 팔정도에 포함된다. 팔정도의 각 항목과 대비해 보자. 정진(精進)의 덕목은 사정근(四正勤)에 속하는 것 전부가 여기에 해당되고, 또 정진여의족(精進如意足)·정진근(精進根)·정진력(精進力)·정진각지(精進覺支)·정정진(正精進)도 그것이다. 즉 아홉 가지 모두가 정진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염(念)은 사념처의 전부, 염근(念根)·염력(念力)·염각지(念覺支)·정념(正念) 등 여덟 가지가 이에 해당되고, 정(定)은 심여의족(心如意足)·정근(定根)·정력(定力)·정각지(定覺支)·정정(正定) 다섯 가지를 포함하며, 혜(慧)도 사유여의족(思惟如意足)·혜근(慧根)·혜력(慧力)·택법각지(擇法覺支)·정견(正見) 등 다섯 군데에서 그것을 들고 있다.

삼십칠조도품은 각 항목에 따라 별도의 독립된 수행체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팔정도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은 배우는 자의 지혜나 성격에 따라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수행 체계는 아니다. 미즈노 고겐은 부파불교에서 이것을 통틀어 삼십칠보리분(三十七菩提分)이라고 불렀지만, 이것을 수행법으로 채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와는 다른 새로운 통일성 있는 수행법이 각 부파에서 고안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상좌부(上座部)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설하는 갖가지 상세한 수행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부파불교의 수도론(修道論)의 선구를 이룬 것이 이미 초기경전에 보인다.

위빠사나 수행의 문제점

앞에서 간화선 수행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 대안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위빠사나 수행법이 국내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법도 붓다가 가르친 초기불교의 수행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미얀마에서 정치적 여러 사정에 의해 나름대로 고안된 수행법이다. 황순일은 구스타프 하우트만(Gustaaf Houtman)의 글을 인용하여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민족적인 자긍심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식민지 미얀마에서 명상수행이 대중화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 군부는 국내에서 군부의 입김이 강해지자 미얀마의 국민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권유하여 나와 주변과 세계가 무상하며 공하고 자아가 아니란 것(無我)을 끊임없이 알아차릴 것을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이 세속적 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해지도록 유도하였고 심지어는 교도소에서까지도 위빠사나 수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큰 단점은 사마타 수행(samatha, 止)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학자는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의 위빠사나는 선정을 머금고 있는 통찰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찰라삼매(刹羅三昧)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법이 이처럼 초기불교의 수행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얀마의 정치적 여러 배경에서 태어난 변형된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전후 사정도 모른 채 무비판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받아들여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어떠한 수행법이라도 모두 기본적으로 삼학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는 사념처관(四念處觀: 身·受·心·法)도 크게 사마타 수행(samatha, 止)과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 觀)의 둘로 이루어져 있다. 사마타 수행은 ‘평온 수행’이라고 하고,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 수행’이라고 하는데, 지관(止觀)으로 한역된다. 역대로 수행은 지관겸수(止觀兼修)야말로 진정한 수행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의 수행은 모두 지(止)와 관(觀)의 수행을 통해 성자의 네 가지 계위(階位), 즉 예류과·일래과·불환과·아라한과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불교의 수행법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약간 변형되었다. 이를테면 “초기불교의 수행 관련 논의에 따르면, 니까야(Nikāya)와 주석서(Aṭṭhakathā) 사이에 일정한 간극이 존재한다. 예컨대 니까야에서는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 수행을 동시에 병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후대의 주석 문헌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들 양자를 개별적인 것으로 해설한다. 또한 니까야에는 나타나지 않은 술어들이 후대의 주석서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라든가 본삼매(appanāsamādhi) 따위의 수행 관련 용어들을 비롯하여, 마음부수법(心所, cetasika)에 관련된 중간적인 상태(tatramajjhattatā), 마음의 경쾌(cittalahutā), 마음의 작용(cittakammaññatā) 따위가 그러하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ā, 觀)가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상좌부의 스님들이 위빠사나 수행에 집착하는 것이나 한국의 선객들이 간화선에 집착하는 것이나 똑같다.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수행법이야말로 최상의 수행법이라는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수행법에 확신을 갖고 수행에 전념하는 것은 수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부심이 지나쳐 다른 수행법을 아주 낮은 근기의 사람들이 행하는 수행법이라고 비하하거나 잘못된 수행법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간화선만이 최상의 수행법이라는 집착은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비대승적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수행도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그 다양한 방식이 중생들의 능력과 의향에 달려 있다는 자각이 요구된다. 이에 대해 안성두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수행이란 하나의 치료약과 같은 것으로, 자신의 능력과 관심에 맞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모든 사람에 맞는, 모든 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만능의 치료약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극히 비역사적일 뿐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극히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반야와 방편(또는 대비)이라는 대승의 두 기둥 중에서 방편을 제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보살도를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Anāpānāsati-sutta(安般隨意經)》에 바탕을 둔 수식관법(數息觀法)을 닦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Mahāsati-paṭṭhāna-sutta(大念處經)》에 근거한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닦을 수도 있다. 어느 한 수행법이야말로 최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도그마에 빠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근기와 수준에 따라 선택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불교의 폭을 넓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최상의 수행법은 아닐까?

한편 어떤 사람은 한국불교의 수행법을 타력신앙으로 승화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초기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타력신앙을 권장하는 것은 붓다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대승불교적 가르침에 의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편적인 세계의 불교도들에게 권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타력신앙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간화선 수행에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은 한국불교의 수행법이 계·정·혜 삼학의 체계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수행은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른바 지계(持戒)·선정(禪定)·지혜(智慧)가 그것이다. 지계 없이 선정을 이룰 수 없고, 선정 없이 지혜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간화선 수행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초기경전에 나타난 불교수행의 핵심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살펴보았다. 특히 초기불교의 수행체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불교수행의 핵심은 계·정·혜 삼학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붓다는 최초의 설법에서 불교수행의 핵심은 중도(中道, Majjhimā-paṭipadā)라고 선언했다.

붓다는 지나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는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또한 붓다는 일생 동안 중도적(中道的) 삶을 몸소 실천했다. 《Dhammacakkapavattana-sutta(轉法輪經)》에 의하면 중도(中道)는 곧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한다. 따라서 팔정도가 불교수행의 근간임은 말할 나위 없다. 또한 팔정도는 계(sīla)·정(samādhi)·혜(paññā) 삼학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전통설이다.

사실 현존하는 초기경전에는 다양한 수행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붓다는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각기 다른 수행법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기경전에 나타난 다양한 수행법들은 모두 상섭(相攝)의 관계에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통일된 수행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팔정도와 삼십칠조도품의 분석을 통해서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한마디로 초기불교의 수행체계는 계·정·혜 삼학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계·정·혜 삼학의 수행체계에서 벗어난 수행법이라면 불교의 수행법이 아닌 외도(外道)의 수행법임을 의심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람의 능력과 근기,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비록 붓다가 직접 제시한 것일지라도 자신의 근기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올바른 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느 한 가지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이것이 불교 수행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선수행(禪修行)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하나의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에는 수많은 수행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어느 길이든 올바르게 따르기만 하면 동일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마성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태국 Mahachula-longkornrajavidyalaya University 박사과정 재학 중이며 팔리문헌연구소장이다. 저서로는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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