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신평
경북대 로스쿨 교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생을 ‘이승’이라고 부른다. 이승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군림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다. 논리상 이승 앞에는 ‘전생’이 있고, 이승 뒤에는 ‘저승’ 혹은 더 나아가 ‘후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승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으니 이승은 우리에게 절대자로 다가온다.

만약에 이승 외에 앞이나 후에 다른 생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에서 엄청난 변화가 초래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다른 생에 대한 확실한 징표가 보편적으로 제시된 일은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혹은 신이 그 존재를 인류 모두에게 알렸다면 신학이나 종교학의 이론에 관한 많은 답답한 쟁투는 따뜻한 봄날에 헌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이다. 여하튼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인류는 끊임없이 다른 생의 모습을 그려왔다. 이상하리만치 이에 집착해왔다.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만족하지 못하며 그것을 계속 추구해왔는데, 이 지극한 모순, 어쩌면 여기에 인간 존재의 숙명이 숨어 있는지 모른다.

이승과 다른 생은 우리 눈앞에는 보이지 않는데, 그것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그것을 종교적인 신념 탓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주관적인 신념만으로 이 광범하고 근본적인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때부터 생사의 경계에 관한 체험이 기록되어 왔다. 최근에는 이를 임상의학적으로 보고하는 수많은 예가 등장했다. 그 이야기들을 뭉뚱그려 임사체험(臨死體驗, Near-Death Experience)이라고 부른다. 책으로 여러 번 나왔다. 일본학자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두 권짜리 책은 그에 관한 백미(白眉)였다고 본다. 그런데 실은, 티베트 지방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사자(死者)의 서(書)에서는 진작에 이에 관한,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세계에 관한 기록이 있다.

임사체험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공통적인 요소를 다음과 같이 가진다. 영혼이 몸을 이탈한다. 육신을 내려다본다. 어두운 피스톤 같은 혹은 동굴 같은 곳을 지나 큰 빛을 마주 대한다. 아주 밝으나 전혀 눈부시지 않은 빛이다. 그 앞에서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자신의 과거를 본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임사체험을 강력하게 부인한다. “죽기 전 3분 동안 신경물질이 대량 방출되고 이로 인해 환각을 경험한 것일 뿐이다.” 이에 관한 과학적 입증도 만만찮다. 또 임사체험으로 기록된 것 중 상당수는, 내가 보기에 바로 이 환각현상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어느 쪽일까? 임사체험은 실제로 일어난 일일까? 혹은 죽기 전 일어난 단순하고 부질없는 환각에 불과한 것일까? 현재로서 양자 중 어느 쪽의 손을 확실히 들어줄 증거는 없는 듯이 보인다. 나를 앞세워서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전자의 것을 믿는다. 그에 관한 확실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임사체험에서 앞부분에 일어나는 단계의 미미한 것이기는 하지만.

먼 청년 시절, 집에서 고시공부에 열중하던 때였다. 피곤하여 잠시 낮잠이 들었다. 그런데 누운 내 몸에서 하얀 연기 같은 것이 빠져나오려고 했다. 얼굴 부분의 것이 먼저 들려지며 차차 밑부분의 것까지 몸에서 분리되는 것이었다. 자고 있었으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연기 같은 부분이 하나의 실체가 되어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방안 구석구석을 환하게 볼 수 있었다. 장롱 위에 얹힌 물체를 뚜렷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차츰 겁이 났다. 잠에서 깨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대로 연기가 몸 전체에서 분리되어 버리면 내 몸은 껍데기만 남고 결국 죽은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염려가 솟구쳐 올랐다. 고시공부가 어렵기는 하지만 이렇게 생을 마감해서는 너무 허무하다고 판단했다. 분리현상을 저지하기 위해 빨리 ‘나’의 의식을 현재화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다리를 모두고 자고 있었는데, 필사적으로 이 다리들을 움직이려 했다. 한참의 시도 끝에 약간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고, 차츰 더 그 간격을 크게 할 수 있었다. 결국 연기는 몸속으로 다시 들어가며 ‘나’는 의식을 완전히 회복했다. 당시 일기장에 이에 관해 상세한 묘사를 남겼다. 그러나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똑똑히 남아 있다.

내 육체에서 또 다른 실체인 연기가 분리되고, 그 연기는 육체가 기능하지 않음에도 모든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이 체험은 그 후 유체이탈(流體離脫)이라고 한다고 들었다. 또 임사체험에 관한 책을 읽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체험을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레 나는 유체이탈 후 진행되는 임사체험에 관한 기록들이 진실임을 믿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사실을 개인적 믿음의 차원에서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이 강변(强辯)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만 더 말해보자. 우리의 현대과학은 여전히 불충분하고, 우리의 오감은 미치는 영역이 제한되어 있다. 귀로 듣는 소리가 일정한 주파수대에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현재의 과학에서 분명히 입증되지 않는다고 하여, 동서고금을 통하여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기록들 또 그것이 어떤 작위적인 의도를 갖고 있지 않음이 너무나 분명한 기록들의 신빙성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의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억지요 강변이다. 우리는 그렇게 오만해서는 안 된다.

임사체험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빛의 존재 앞에서 참회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 이상 가는 체험은 없다. 임사(臨死)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죽었다면 그다음의 단계는 어떻게 되는가? 임사체험의 신비한 경험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다음의 단계가 있음을 알려준다고 본다. 그것이 심판에 의해 극락 혹은 파라다이스나 지옥으로 구분하여 보내버리는 것일 수도 있고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까 말한 티베트의 사자의 서에서는 윤회가 그다음 단계로 시작된다고 한다. 어느 것이 다음에 올지는, 현대의 임사체험 그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나 어찌 됐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생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승 외에 만약에 후생이 있다면, 전생도 당연히 있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나도 마찬가지이나,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본 강렬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현실로 돌아와서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떨쳐버린다. 그리고 현재의 생에서 최선을 다하며 만족하는 자세를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것을 경험하기 전보다 더 행복해졌다고들 말한다. 임사체험을 갖지 않더라도 이승 외에 다른 생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똑같이 이런 자세로 이승을 살아갈 것으로 확신한다. 이것은 불교신앙의 힘이다. ■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