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홍신선
시인
칠월 지나 처서 무렵이 되면 산과 들의 나무나 풀들은 기색이 완연히 수상쩍어진다. 널리 알려진 대로 처서는 더위가 물러가기 시작하는 반환점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푸나무들이 물 긷는 일을 막 접기 시작하는 절기로 생각한다. 봄부터 한여름 내내 푸나무들이란 목숨을 영위하기 위해 수액을 밀어 올리는 일에 열중해 왔다. 그 수액들이 밀려 올라와 짙푸른 녹음을 빚었고 싱싱한 생의 열기를 대기 중에 마음껏 내뿜어 왔던 것이다. 특히 나무들은 이 무렵이면 어김없이 노란 신생의 작은 잎들을 우듬지에 내걸곤 한다. 그 잎 모양새를 유심히 보노라면 연록의 꽃과 혹사(酷似)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그들은 정생(頂生)을 하고 있어 더더욱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같은 모습과 빛깔을 짓기 위해 그동안 푸나무들은 얼마나 많은 자양과 물들을 길어 올렸을까.

그런데 이즘 나는 이러한 푸나무들이 자연 가운데 많은 원소나 기운들이 순환하는 배수관이나 통로라는 생각을 한다. 푸나무로서는 제 생명을 영위하는 일이겠으나 물, 공기, 햇볕 등이 흡수되고 또 그것들이 날숨처럼 다시 뱉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이는 어김없는 자연계의 순환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환이 이뤄지고 있는 푸나무들은 영락없는 일종의 통로이고 배관들이 아닌가.

얼마 전 일본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가 강진에 이은 쓰나미 탓에 폐허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녹아내린 원자로에서 방사능들이 바다로, 인근의 푸나무나 흙으로 숱하게 유출됐다고 한다. 세슘을 비롯한 일련의 방사성 물질들이 상당량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가운데 바다로 흘러든 방사성 물질은 해초나 어패류에 흡수되고 다시 그다음 포식자들에게 옮겨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흙으로 녹아든 방사성 물질 역시 풀이나 다른 미물들에게 흡수될 터이다. 그리고는 다음 단계의 포식자에게 또 옮겨 흡수될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다 보면 푸나무나 어패류들이 저들 방사성물질의 통로이자 파이프라인 구실을 한다고 가늠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잇다 보면 생태계의 최종 포식자인 인간 역시 뭇 물질의 통로이자 파이프라인이란 추정에까지 이른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나는 이런 시도 만들게 된다. 지금도 한 주일에 두세 번을 기웃거리는 고향 이야기도 겸해서 말이다.

불볕더위에 하의실종 된 몇몇 계란꽃 끌밋한 줄기와
그 위에 걸린 속팬티만 한 홑겹 그늘,
그 그늘 위에는 층고 두세 길로 낮게 뜬 구름장,
양생 끝난 시멘트 골조 외벽의 배관들처럼
이들 모두는 허공 벽면에 가설된 웬 파이프라인들인가
때때로 허공집 벽 속에서 벽 속으로 안보이게 연결된
PVC 배관 어디쯤서 들리는
여름날 물 빠지는 소리
후쿠시마 원전 고농도 세슘도 통과하는 소리
         —졸시 〈자연〉 일부

이즘 신도시로 환골탈태한 고향은 내게는 너무 낯설기만 하다. 마치 오래된 낡은 지도처럼 신도시 이전 고향의 산야들은 내 기억 속에나 깊숙이 각인되어 있을 뿐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어디가 어딘지 가늠이 서지 않는다. 그 산야에 남은 몇몇 무심한 계란꽃 무리를 만났을 때 나는 위의 시를 생각해 봤다. 계란꽃이거나 구름장이거나 또 그걸 어리둥절 지켜보고 섰는 나거나, 문득 따져보니, 이들 모두는 순환하는 자연계의 한 통로일 뿐이지 싶었다. 이른바 살아가는 것, 변화하는 것들이란 너나없이 들숨 날숨처럼, 아니 먹고 배설하는 행위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과정의 배수관 같았던 것이다.

이 지구상의 뭇 것들이 단지 뭇 것들의 통로일 뿐이라는 생각을 짓다 보면 과연 우리네 삶이나 세계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당도한다. 이 해묵은 물음은 그런데 언제나 인간 편에서, 인간이란 입장에서 물어지는 질문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인간중심주의의 물음인 것이다. 나는 그래서 생각한다, 우리가 이 주관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객관을 견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일찍이 선사들의 가르침대로라면 이는 ‘나’를 버려야 하는, 인간의 편을 버려야 하는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붙잡고 있는 분별과 집착을 훌훌 털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와 인간을 버리고 순수 객관이라는, 뭇 것들이 한 가솔인 마을에 다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을에 앉아 삶이나 세계를 새삼 들여다본다면, 그렇다, 이 경우 삶이나 세계 모두는 역시 순환하는 자연계의 한 통로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저 자연물의 통로 가운데 과연 어느 매듭점, 어느 단계의 속 빈 통로일까.

아파트 단지 수벽(樹壁) 밑에는 지리한 우기에 계란꽃들만 신바람을 낸다. 이따금 구름장들도 와 이들과 하늘 땅에서 서로 어우러져 논다. 그러다 계란꽃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문득 내리는 빗줄기들을 경주마처럼 타고 달려오는 방사능의 소리 없는 발소리라도 듣는 것일까. 기상이변으로 무시로 비가 오락가락하는 여름날 이제나저제나 내 생각은 하염없이 길어진다. ■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