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인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1. 들어가는 말

석길암
금강대 hk 연구교수
전혀 다른 이종(異種)의 문화체계 혹은 아주 유사한 동종(同種)의 문화체계가 서로 만난다고 했을 때, 양측의 문화체계에 일어날 변화의 크기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동종의 문화체계가 서로 접촉했을 때보다는 이종의 문화체계가 접촉했을 때 일어날 변화가 더 클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 있어서 불교의 유입 혹은 전파는 이 이종의 문화체계 간에 일어난 거대한 접촉인데, 그 접촉에 소요된 시간이나 변동의 전체적인 양상을 단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우선적으로 행해진 것은 불경을 비롯한 불교 전적들의 번역작업이었다. 번역, 달리 역경이라고 불리는 사업은 1세기 전후에 시작되어 12세기 무렵까지 약 천 년에 걸쳐서 지속되었다. 이처럼 한자문화권에서 불교 수용은 불전의 번역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불교문화권과 한자문화권의 만남은 불전의 한역이라는, 대부분은 국가 차원의 지원 아래 진행되었던 역경사업을 발판으로 한다.경전의 전래라는 측면에서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동아시아 사회의 불교문화 수용은, 인도불전의 번역[역경(譯經)]이라는 1단계와 중국적 불경의 재창조[위경(僞經)]라는 2단계로 나뉜다. 그리고 그 한역된 불전이 뒷날 한자문화권이라고 불리게 되는 동아시아 세계 각지로 전파되면서 다시 2차적인 문화충돌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한국불교’라고 부르는 범주 역시 이 2차 문화충돌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불교의 전래와 수용을 기준으로 파악한다면, 한국불교는 인도불교와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한역된 불전을 통해서 불교의 문화체계와 접촉한 경우에 해당한다. 게다가 좀 더 본격적인 전래와 수용이 이루어진 6세기와 7세기를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불교는 중국화가 진전된 인도불교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분명한 이해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불교 수용은 이종문화와 동종문화의 동시적인 접촉과 수용 그리고 변용이라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점을 고대중국사회와 고대한국사회에서 불교의 정치사회적 활용, 불교신앙에 있어서 유사성 그리고 한국불교사상과 중국불교사상 간의 고중세 사상사적 변동의 연동과 단절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들이 대부분 문자기록에 의해 확인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고중세 한국사회에서 불교가 선진문물이었다는 점에서, 주로 지성사와 사회 중상층부의 불교라는 이종문화 수용양상을 확인하는 사례는 되어도, 그것이 서민층에까지 이르는 마지막 단계의 수용과 변용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교의 수용과 변용의 최종적인 단계에서 서민층 곧 기층 민중의 반응을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기록 혹은 구전으로 전하는 설화의 형태라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설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 혹은 이야기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설화는 그 설화를 전승하는 집단의 원초적 근원적 사유와 그 사유에 의해서 형성되는 많은 내적·외적 양식[문화]들을 재생산해낸다. 한국에도 역시 많은 설화가 존재한다. 설화들은 그 속에 담긴 핵심 사유체계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 혹은 전승하는 주체들을 중심으로 설화의 유형을 분류하기도 하며, 혹은 전승의 방식에 의해서 분류하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이들 설화 중에서 보통 불교설화라고 부르는 것들과 불교적 요소를 담고 있는 민간설화 혹은 무속신화 등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단 필자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 설화에 나타나는 불교에 대한 인식의 특징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그 인식들의 변화 양상을 통해서 불교가 이 땅에 수용되고 변용되는 시대사적 맥락의 일 측면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한국불교가 가진 특징의 일단을 드러내고자 한다.

2. 근원적 사유체계를 대체하는 불교적 사유체계

불교의 전래 이후 불교의 사유체계는 급격하게 이전의 사유체계를 대체하게 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불교의 전적들에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의 풍부함이다. 불전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이야기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데, 기록되면서 정형성과 완결성을 갖추게 된 불전의 이야기들은 아직은 정형성과 완결성을 갖추지 못했던 이전의 이야기들을 급격하게 대체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사유체계의 우월성을 들 수 있다. 보다 고도화된 정신체계를 갖춘 불교가 비교적 초기 단계였던 원형신화를 대체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건국신화와 같이,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신화소들은 불교의 전래에도 불구하고 지엽적인 변형 외에는 원형성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경우에는 원형신화를 그대로 두면서 원형신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신화를 도입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성골과 진골을 중심으로 하는 혈통[種姓]신화의 형성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세 번째로는 원형신앙의 대상을 교체하는 것이다. 원형신앙의 경우 그 신앙의 대상은 대부분 자연물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불교의 전래와 동반한 불교신앙의 대상들은 그 상징성과 장엄미에 있어서 원형신앙의 대상들을 압도할 만큼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형신앙의 대상들이 불교적 신앙의 대상들로 치환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여기에서는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전자의 두 가지를 논하고, 마애불 신앙의 정령거석신앙 대체를 통해서 세 번째 사례를 살펴본다.

1) 《삼국유사》 소재 설화에 나타난 불교인식의 양상

《삼국유사》는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 역사에 대한 독특한 기록이다. 체재상으로는 민족의 근원적 사유세계를 보여주는 〈기이〉 편과, 불교의 수용 과정에서 근원적 사유세계와 불교의 사유세계의 충돌과 융화를 보여주는 〈흥법〉 편, 불교가 근원적 사유체계의 성소(聖所)들을 대체하면서 안착되어 과정을 보여주는 〈탑상〉 편,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서 불교가 성숙되어 가는 모습을 서술한 〈의해〉 편과, 불교적 사유체계가 근원의 사유체계와 완전히 융합되는 한편 불교적 사유체계에 의해 구성원들의 일상생활에 적용되어 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왕력〉 편을 제외하면 대부분 ‘설화’의 형식으로 구현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대부분의 조목에서, 최소한의 역사적 정보를 제외한 나머지는 정통의 역사서에서는 채택하지 않은 정보를 채록하여 내용을 구성하는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불교의 전입과, 전입 이후 불교가 이 땅에서 융화하고 성숙해 나가는 모습, 곧 역사 이면의 정신세계의 흐름의 재구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일반 역사서와는 다른 독특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불교에 의해 공동체 구성원의 의식을 통합하려는 사고를 보이는 한편으로는, 일방적인 시각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는 점 역시 뚜렷한 특징의 하나이다. 곧 공동체 구성원의 전체 사유세계를 구성하는 불교 이외의 요소에 대해서는 포섭과 융화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으며, 결코 대등한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지는 않다. 곧 불교의 성공적인 안착의 양상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서술이 이루어지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정보의 서술 자체가 일정 범주 내에서 배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삼국유사》는 우리가 고려 말 이전의 시기에 불교가 공동체 구성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이면서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종합적인 정보원이라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삼국시대에 나타나는 불교인식의 양상을 《삼국유사》 소재 설화를 중심으로 주요 특징을 둘로 대분하여 지적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첫째, 《삼국유사》 소재 설화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불전(佛傳)의 재현이다. 논자는 일전에 〈원효불기(元曉不羈)〉 조의 분석을 통해서 불전(佛傳) 재현의 양상을 부분적으로 해명한 바 있다. 신라는 일연에 의해 ‘중고(中古)’라고 명명된 기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불교의 토착화, 불교를 매개로 한 왕권의 정당화, 불교에 의한 화합과 사회정치적 안정을 기획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일연에 의해 특히 주목받았고 〈기이〉 편의 〈천사옥대(天賜玉帶)〉 〈흥법〉 편의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厭觸滅身)〉 〈탑상〉 편의 〈가섭불연좌석(伽葉佛宴坐石)〉과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 및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조의 기사로 특기된다. 이들 기사는 〈원종흥법염촉멸신〉 조를 제외하면, 모두가 세존과 전륜성왕 그리고 아소카 왕을 크샤트리아 계급으로서 동일시하는 사고방식과 다시 이것을 사리신앙 및 불탑신앙과 결부시켜 이해하는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하고(下古)’시대의 서술에 해당하는 항목[《삼국유사》에서 〈의해〉 제5부터 〈효선〉 제9에 이르는 편]에서는 부처님의 전기[佛傳]를 직접적으로 투사하고자 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원효불기〉 조인데, 여기에는 부처님의 전기적 요소가 원효의 전기를 서술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불전만이 아니라 중국 고승전(高僧傳)의 재현 양상 혹은 연관성이 더 빈도 높게 나타난다. 원효의 경우, 불전의 재현만이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고승들(구마라집·정영사 혜원)과 대비되고 있으며, 동시대의 인물인 부궤화상 혜공의 경우는 중국 승려 승조(僧肇)의 후신을 자처하고 있는 것, 의상이 금산보개여래의 화신으로 상정되고,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의 진신상주처가 설정되는 예, 그리고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직접 미륵존불과 무량수불을 성취하는 예 등은 중고기보다 하고기에 불교적 사유세계가 이 땅의 구성원들에게 좀 더 직접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양상들은 유사성 혹은 계급의 동일성에 의한 동조의식에서 불전의 직접적·부분적 재현을 통해서 불교의 토착화를 강화시켜나가는 양상을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곧 《삼국유사》의 중고에서 하고로의 추이는, 갈등·수용의 단계에서 적용·재현이라는 단계로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 과정에는 지배층의 불교신앙에서 고승들의 ‘의해’담을 거쳐 민중들의 염불신앙에 이르는 양상으로 적시할 수도 있다. 곧 불교 수용층이 지배층에서 기층서민에로까지 확장되는 양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국토의 재현 혹은 고려가 불국토라는 공동체 의식을 지향한 일연의 의도에 따른 당연한 전개로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설화가 시대적 추이에 따라 불교가 확산되고 토착화되면서, 이전의 신앙 내지 근원적 사유세계를 대치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삼국유사》는 설화(신화·민담까지 포함한)를 광범위하게 채집하여 수록한 최초의 기록이며 《삼국유사》 이전에 그러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원형에 대한 기록으로서 위치와 원형이 재생산되는 시발점이라는 특수성을 동시에 가진다. 《삼국유사》에 특정 설화가 채록되는 순간, 그것은 기록되었다는 특성 때문에 기록된 순간의 원형을 보존하게 되고, 기록되기 이전의 원형을 기록에 의해서 변화시키게 되며, 기록된 내용은 다시 그것을 원형으로 하여 재생산의 순환과정을 거치게 된다. 곧 설화를 최초로 수집채록한 주체가 불교 승려라는 점은 한국설화의 원형에 ‘불교’라는 요소를 능동적인 입장에 각인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이〉 편에 첫째로 등장하는 〈고조선〉 조의 단군신화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개국신화이자 천신강림신화라는 특징을 가진다. 이 단군신화에서 천신을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존재가 다름아닌 ‘환인(桓因)’이다. 그런데 이 환인에 대하여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謂帝釋也’ 곧 ‘제석을 말한다’라는 세주를 붙인다. 공동체 최초의 건국신화의 대표적 존재 중의 하나인 ‘천신’은 불교의 ‘桓因帝釋’이라고 해석을 가한 것이다. 일연이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서술한 부분이기 때문에 본래 ‘환인(桓因)’이라는 명칭이었는지도 모른다. 곧 일연의 부기는 소리 혹은 문자의 동일성에 근거한 부기일지 모르지만, 그 단순한 부기는 본래 가지고 있던 근원설화의 주체를 불교적 주체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근원적 사유세계를 불교적 사유세계로 치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가지고 전체를 논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일연의 설화 채록 과정에는 이 같은 변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상 아주 간단한 지적들이지만 《삼국유사》가 가지고 있는 위치의 특성 때문에 원형의 사유세계를 보여주는 설화들이 불교적 설화들에 의해 대치되고 있으며, 다시 그것이 재생산의 과정을 거쳐 이후의 설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마애불의 출현과 정령거석신앙의 대체

자연 혹은 구체적인 자연물에 대한 신앙은 동북아시아와 유라시아 일대에 퍼져 있는 무격신앙 혹은 애니미즘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 중의 하나이다. 특히 거석이나 거목을 신격으로 삼아 기원하는 풍속은 현재에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현상이다. 불교의 전래 이후 이러한 거석숭배신앙은 마애불 혹은 전국 각지에 산재하는 석조미륵불 신앙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파주군 광탄면의 용미리 쌍미륵에 얽힌 설화와 안동 제비원 미륵 설화를 소개한다.

고려 13대 선종 임금은 아들을 낳지 못하여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다 몇 년째 가뭄이 들어서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떠돌아 백성들은 여기저기서 쓰러져 죽어갔다. 임금이 날마다 걱정하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도승 두 사람이 나타나서 말했다.

“소승들은 파주 원장지산 남쪽 기슭 바윗돌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흉년이 들어 시주를 구하지 못하니 부처님께 공양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소승들도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배가 고프니 밥 한 그릇만 먹여 주십시오.”

꿈에서 깨어난 임금은 이튿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원장지산에 사람을 보내 확인하게 하였다. 다녀온 사신은 그곳에는 스님은 없고 장엄한 바위 두 개만 나란히 서있을 뿐이라고 보고했다. 왕은 친히 그곳에 가보고 두 개의 바윗돌에 꿈에 본 도승들의 모습을 새기게 했다. 그리고 그 옆에 조그만 절을 짓게 하고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올리는 순간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모여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온 나라의 가뭄이 해소되고 전염병도 낫게 되었다. 또 열 달 뒤에 왕비는 옥동자를 낳았다. 이러한 사실이 온 나라에 알려지자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 병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또 나라에서는 가뭄이 들면 으레 이곳에 와서 비를 내려달라고 기우제를 지냈다. 지금도 이곳에 와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설화는 원래는 단지 커다란 두 개의 마주보는 바윗돌이었던 것을 미륵불상으로 조각하고 기도의 대상으로 삼는 과정에 얽힌 연기설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마도 전통적으로 민중신앙 곧 정령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거석을 미륵불로 조성한 이후에 따라서 생겨난 설화이겠지만, 불교국가를 표방하던 고려시대에 이전의 원형신앙들이 어떻게 불교신앙으로 대체되어 갔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신앙 대체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거석신앙은 보통 소원을 비는 대상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지역 혹은 국가수호를 위한 기원의 대상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흔하다. 다음의 은진미륵설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고려시대 북쪽 오랑캐의 침략이 빈번할 무렵, 오랑캐가 고려를 정복하고자 다시 압록강을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압록강의 깊이를 알지 못하였던 적장은 강 앞에서 머뭇거렸다. 때마침 한 중이 오더니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는 압록강을 폴짝폴짝 뛰어 건너갔다. 이를 본 적장이, “아! 무릎 밖에 안 차는구나! 돌격 앞으로.” 하고 외쳤다. 이에 오랑캐 병사들은 압록강으로 마구 뛰어들었다. 하지만 거센 물살과 깊은 물길로 인해 수많은 오랑캐 병사들이 강물에 빠져 죽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너 온 오랑캐 장수는 그 중에게 다가가 칼로 목을 내리쳤다. 그 순간 ‘쨍강’ 소리와 함께 칼이 부러지더니 중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때 오랑캐를 물로 유인한 것이 지금의 은진미륵이라고 한다. 또한 이때 오랑캐의 칼에 맞아 은진미륵 부처님의 모자가 쪼개졌다고 한다. 지금도 은진미륵 불상을 올려다보면 불상의 모자 부분이 갈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일이 있은 뒤 바로 지금의 관촉사가 있는 아랫마을 남자의 꿈에 은진미륵 부처님이 나타났다. 남자가,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묻자, “내 모자가 쪼개졌으니 내 모자를 꿰매어라. 그리하면 좋은 일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깬 남자는 새벽같이 은진미륵이 있는 곳에 가 보았다. 은진미륵을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갓 부분이 부서져 있었다. 남자는 바로 마을을 돌며 시주를 해 보수 비용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부서진 갓을 보수하였다. 이후 남자의 후손들은 아주 잘 되었다고 한다.

잘 알려진 설화인데, 호국불로서 미륵불에 대한 신앙이 투영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안동 제비원미륵이 있다. 이처럼 정령거석신앙이 하필이면 미륵신앙으로 많이 대체되었던 것은 경전 속의 미륵에 대한 묘사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미륵하생성불경》에 의하면, 미륵불이 오는 세상은 용화세계로서 완성된 이상향인데, 이때 그 세상에 오시는 미륵불은 ‘신장석가모니불팔십주(身長釋迦牟尼佛八十肘, 三十二丈)’ 곧 몸은 석가모니 팔뚝길이의 80배인 32장에 이른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에게 지목된 미래불이면서, 미래의 이상세계인 용화세계를 건설하는 부처, 그러면서 그 몸이 아주 크고 장대하기에 거석숭배신앙을 대체하기에 적절했다. 여러 요소가 맞아떨어지면서 더욱 쉽게 미륵불신앙이 거석정령숭배를 대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려시대 중엽을 넘어서면서, 이와 같은 미륵불신앙은 관음신앙과 아미타신앙 등 기존의 신앙을 대체하는 신앙으로서도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곧 기층의 민중이 기성의 권력을 대변하는 신앙이 아닌 현실을 개선하거나 혁파하는 기원의 대상으로서 미륵불신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원래의 숭배 대상이었던 거석에 투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 더욱 강화되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고려시대의 다음 기록도 그러한 일단의 예가 된다. 

권화는 우왕 때에 청주 목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고성에 사는 요민 이금이 자칭 미륵불이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유혹하여 말하기를, “나는 능히 석가불을 모시고 올 수 있다. 무릇 귀신들에 기도를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는 자, 말·소의 고기를 먹는 자, 돈과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나의 말을 믿지 않거든 3월에 가서 보라! 해와 달이 모두 빚을 잃게 될 것이다.” 하였다.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여러 사람을 유혹했다는 것은 기층민을 포함한 당시의 고려인들이 지니고 있었을 미륵신앙의 양상을 짐작하게 한다. 유혹이 가능할 정도로 미륵신앙이 널리 그리고 깊이 민중의 사유세계에 각인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3. 근원적 사유체계로의 침잠을 위한 진통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설화 속에 포함된 근원적 사유세계가 불교적 사유세계의 영향을 받거나 대체되어 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의 교체가 이루어진 이후인 조선 전기를 넘어서면서 설화 속의 불교에 대한 인식 양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적어도 고려시대까지의 설화 혹은 기록에서는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양상은 극히 미미했다고 평가할 만하지만, 숭유억불의 기조가 완연해지는 조선 전기를 거치면서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양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물론 한편으로는 불교가 더 이상 기성의 권익을 대변하지 않게 되면서 기층 서민의 신앙으로서는 좀 더 깊이 침잠하고 융화하는 긍정적인 현상 역시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의 불교 관련 설화에 나타난 불교 인식의 양상을 지배층에 의해 저술된 문헌속의 설화, 사찰문헌속의 설화, 기층민중에 의해 불려졌던 무가에 구현된 설화의 세 경우를 통해서 살펴본다. 이 중 무가에 구현된 설화에 나타난 불교 인식에 대해서는 장을 바꾸어 상론한다.

1) 조선시대 문헌 소재 불교설화 속의 승려에 대한 인식

근대 이전 사회에서 기록은, 기층 민중의 것이기보다는 지배층의 것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승려들이 8천의 하나로 전락한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지배층에 의해 수집 기록된 문헌들에 나타나는 불교에 대한 인식이 호의적이지 않을 것임은 익히 추측된다.

박상란에 의하면, 조선시대 문헌에서 확인되는 불교설화는 《대동야승》 105편, 《어우야담》 36편, 《천예록》 7편, 《기문총화》 16편, 《청구야담》 13편, 《동야휘집》 3편, 《연려실기술》 3편, 《성호사설》 5편, 《동패낙송》 1편, 《한거잡록》 2편, 《소문세설》 3편, 《연행일록》 1편 등으로 대략 200여 편을 헤아린다고 한다. 박상란은 이 내용들을 승려(고승/이승/요승/속승)와 사찰(탑상/의례와 풍속), 영험, 신앙(숭불/배불)으로 나누어서 검토하고 있다.

박상란의 분류 내용을 따라 살펴보면, 우선 승려라는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①학덕이 높아서 그것으로써 주변에 선행을 베풀거나 영이한 행적을 보여 존경받을 만한 승려로서 고승(高僧), ②승려이되 도교적인 신선술이나 풍수나 관상 등 온갖 잡술을 행하는 승려로 묘사되는 이승(異僧), ③일반인보다 못한 인성으로 인해 악행을 일삼는 것으로 묘사되는 요승(妖僧), ④앞의 세 분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평범한 승려는 아닌, 승려의 행색이면서도 그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생업에 종사하는 중으로 묘사되는 속승(俗僧)의 네 가지가 그것이다. 이 분류를 따르면 ①을 제외한 나머지의 경우는 정상적인 승려의 모습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②의 경우는 도술에 능하거나 주역의 뜻을 깨우쳐주고 운명을 점쳐주거나, 천대받는 승려에게 각별한 은혜를 베풀자 부친상에 나타나서 풍수로 묘터를 잡아준 승려 등의 이야기에서 확인되는 사례이다. 이 중 설화에서 제일 흔하게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풍수, 관상을 행하는 승려의 모습이다. 이 같은 승려의 모습은 승려의 본분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기이한 술법 때문에 설화로 채록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더 이상 불교 본연의 승려로서 가져야 하는 학덕을 승려에게서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조선시대 풍조의 반영이라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③의 경우는 권세가들과 결탁하여 악행을 일삼는 모습(《기문총화》), 왕실의 힘을 빌려 불사를 크게 벌리고 세인을 현혹한 보우(《대동야승》 24권, 석담일기 上), 권력과 사치를 누린 보우(《어우야담》 종교편 승려), 절 안팎에서 도둑질을 일삼는 중 이야기(《소문세설》) 등과 부녀자와 간통하거나 강간을 일삼는 중 이야기 등, 권력과 패악 및 부도덕한 행위를 중심으로 승려의 부정적인 모습이 부각되어 기록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요승은 반드시 실제에도 그런 모습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앞의 권승으로 묘사된 명종 대의 보우나 세종 때 불사를 많이 일으켰던 천태종 승려 행호를 요승이라 간주하여 주살하라고 상소를 올린 예 등을 고려하면, 요승의 항목은 척불을 배경으로 하는 조선시대의 특성 때문에 등장하게 된 승려상인 경우가 많다.

④는 지나치게 물욕을 채우거나 하는 경우보다는 그야말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업에 종사하는 승려의 이야기들이다. 종이를 팔아 생계를 꾸리는 중(《기문총화》), 신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중(《청구야담》), 기근에 아침밥을 먹기 위해 물건을 팔려는 중 이야기(《어우야담》) 등이 대표적이다. 이 경우는 출가한 승려이지만 세속의 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이야기들이다.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사원이 철폐되면서 승려들이 거리로 내몰리거나, 종이나 산나물 등의 특산물이나 특수 기술인 인쇄업 등으로 세금이나 부역을 감당하고 남는 것으로 사찰의 경제를 이어나가야 하는 형편 등을 반영하는 경우이다.

이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이 같은 설화들은 대부분 승려의 본분을 지킬 수 없는 시대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승려라는 신분이 이 시대에는 정상적인 신분이라기보다는 행색으로 구분될 뿐인 천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유자(儒者)였던 양반층에 의해 기록된 문헌에서 부분적으로라도 고승류의 이야기가 채록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반대로 심심찮게 고승을 요승(妖僧)으로 몰아세운 것을 사실처럼 기록하거나, 승려의 본분보다는 풍수나 관상 혹은 점복과 같은 잡술을 매개로 승려가 그려지는 모습, 강간·패악의 주체로 묘사되는 승려상에서 이 시기의 설화에는 불교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관점이 기본적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아니라 유교가 기성의 권익을 대변하게 된, 근원의 사유체계를 거의 전면적으로 대체해가던 불교를 배제하고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유자(儒者)들의 사회에서 형성된 설화에서 불교 승려들의 모습이 고승이건 그렇지 않건 호의적으로 묘사되기는 당연히 힘들었을 것이다.

2) 사찰연기설화의 확대재생산

그러나 기성의 권익을 대변하지 않게 된 불교가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불교의 확대 재생산을 이룩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기층 민중에 더욱 깊숙이 침잠하면서 공동체 본연의 사유세계에 융합되는 계기로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부분적으로 지배층의 동의를 얻어내어 불교의 부흥을 일구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더 이상 지배층이 아니게 된 불교의 주체들이 그 명맥을 잇는 방법은 당연히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의 사유세계와 융화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피지배층의 사유세계와 융화한다는 것은 두 가지 변화를 수반한다. 첫 번째는 고도의 철학적 사유체계로는 더 이상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그러므로 자연 피지배층인 기층 민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도입 혹은 특화된 형식의 집중적인 재생산이 필요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도의 철학적 사유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불교적 사유가 가지는 최소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 점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 사찰연기설화였다. 사찰의 창건이나 중건의 과정에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담아내고, 그 과정에서 공덕 쌓기와 영험이라는 인과화복적 사유와 신앙적 권유가 이루어지는 형태로 사찰연기설화는 형성되고 전승되었다. 이 외에 새롭게 등장한 포교와 전승의 방식으로 불교가사가 있는데, 이것은 다음 장에서 언급한다.

사찰연기설화는 서민층의 의식이 성장하기 시작하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단순히 사원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내부의 전승과 재생산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재생산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관음사연기설화〉의 경우이다. 〈옥과현성덕산관음사사적(玉果縣聖德山觀音寺事蹟)〉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충청도 대흥현에 맹인 원량(元良)이 아내를 잃고 홍장(洪莊)이라는 딸과 살았다. 홍장은 아름다웠고 그 효행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런데 읍에 나갔던 원량이 홍법사 법당을 경영할 시주를 구하는 성공(性空) 스님을 만났다. 성공의 권유를 받은 원량은 딸 홍장을 팔아 시주하기로 하였다. 홍장은 중국에 닿자마자 신인의 계시를 받은 황제의 사자를 만나 황후에 오르게 된다. 이후 홍장은 탑과 불상 등을 조성하여 봉안하여 정업을 닦았다.

어느 날 별궁의 재물을 모아 관음상을 조성하여 돌배에 실어서 동국에 보내게 하였다. 이 배가 멈추는 곳에 불상을 봉안케 하였는데, 옥과현에 사는 성덕(聖德) 처녀 앞에 멈추었다. 성덕 처녀는 관음상을 업고 가다 무거워진 곳에 안치하고 관음사를 창건하였다.

한편 성공 스님은 재물을 얻어 법당불사를 한 달에 마쳤고, 원량은 딸과 이별할 때 흘린 눈물 때문에 눈이 밝아졌다. 홍장과 성덕은 관음의 화신이며, 석가모니가 나투신 것이다.

이 관음사 연기설화는 훗날 〈심청가〉로 거듭나게 되는데, ‘결핍→보시바라밀의 실천→효행의 실천→충족’이라는 동일한 서사 모티프의 구조를 공유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 관음사 연기설화를 근원설화로 하는 《심청전》이 불교사상의 배경 아래 ‘참된 보시에 의한 효행의 실천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 《심청전》의 내용은 심청굿으로 동해안 별신굿이나 남해안 별신굿 안에 심청굿거리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다시 무가 속에까지 전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보시바라밀의 실천과 효행의 실천을 설화 속의 주요 모티프로 등장시키는 것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별신굿 안의 말미-바리공주거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예에서 사찰연기설화를 바탕으로 불교의 사유체계가 일반의 구전설화나 무가로까지 점차 확대재생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곧 정상적으로 불교의 전승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불교는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하는 새로운 통로를 민중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 혹은 인접한 ‘무가’를 통해서 확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4. 근원적 사유체계로의 침잠, 그리고 확장

1) 불교가사의 확대재생산

불교가사는 조선 후기에 많이 등장한 새로운 포교 도구였다. 억불의 시대 상황에서 불교전승의 어려움과 불교 포교의 어려움에 대한 극복은 물론, 이전 시대와는 달리 지식이 있는 사회지도층이 아닌 지식과 소양이 빈약한 부녀층과 기층 민중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들에 적합한 전파의 양식이 개발될 필요가 있었다. 불교가사는 이 같은 여러 배경에서 출발한다.

김종진은 불교가사의 창작과 확산 곧 유통의 단계를 3기로 구분하는데, 제1기는 침굉(枕肱, 1616~1684)의 《침굉집》 간행을 기점으로 《보권염불문》이 활발하게 유통되는 18세기 말까지로, 제2기는 교학승의 불교가사 창작과 대중적 유통이 이루어진 시기인 18세기 말부터 경허 선사 이전까지로, 제3기를 경허 선사 이후로 구분한다. 이 중 제1기는 침굉의 가사가 판각되는 시기부터 〈서왕가〉 〈인과문〉 〈회심가〉 등이 유통된 시기이다. 일반에 유행하던 장르인 가사를 통해 불교계의 현실을 폭로하는 한편, 불교가사의 대중성과 전승력에 주목하여 구비전승되어 오던 〈서왕가〉 〈인과문〉 〈회심가〉 등을 판각하여 적극적으로 유통하려고 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교학승에 의해 주로 가사가 창작되고 유통된 시기인데, 이 시기에는 탁발승, 걸립패, 독경무, 향두꾼 등에 의해 불교가사가 대중 속으로 확산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회심곡〉과 〈자책가〉 〈백발가〉 등이 널리 확산되었다. 제3기는 경허 스님의 〈참선곡〉에서 보는 것처럼 불교혁신에 가사를 활용하였던 시기인데, 본 글에서는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많이 알려진 것들로는 〈서왕가〉 〈회심곡〉 〈백발가〉 등이 있다. 이 중 〈서왕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장부로서 아직 마음속의 불성을 깨닫지 못한 자가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 실존적 고뇌의 과정을 거친 후, 일도양단 출가의 길을 택하여 고행한 다음, 여러 수행의 경로를 거쳐 피안(彼岸)에 도달하며, 피안에 도달한 뒤에는 다시 중생계로 되돌아와 염불을 권하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는 가사이다. 또 〈회심곡〉은 본래 귀했던 인간이 겪는 무상함을 설파하고, 시왕사자의 손에 끌려가는 저승길의 억울함과 안타까움, 시왕의 심판을 따라 선악업에 상응하는 과보받음을 밝히는 내용을 핵심 이야기 구조로 가진다. 〈백발가〉는 《석문의범》에도 실려 있는데, 백발도래가 불가항력임을 밝히고, 늙고 추한 모습을 읊조린 다음,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세상사는 모두 꿈이라는 탄식, 세간탐욕의 모습을 드러냄, 적선적덕과 극락왕생을 기원하라는 권유의 이야기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것이나 사람의 존귀함과 인생사의 무상함을 일반적인 삶의 현실을 들어 강조하고, 적선적덕과 염불왕생을 강조하는 서사구조를 가지는데, 화자와 청자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체의 도입 등, 노래로 불리는 가사이면서도 그 안에 서사를 담는 형식으로 확장되는 특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가사들은 서민층이나 걸립패 향두꾼 등에 이르러서는 서로 뒤섞여 불리기도 하는데, 주제와 내용에 있어서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속의 제의에서는 이들 불교가사를 그대로 차용하여 무가로 연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불교가사는 많은 경우 천도의식에서 주로 연행되었는데, 이와 동일한 의도를 지닌 무속의 해원굿에서 자연스레 수용되어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제의에서 쓰인 불교가사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무가로 전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부분적으로는 듣는 사람 곧 청자를 사람들이 아니라 조상신 곧 죽은 사람으로 대체하는 변용이, 불교가사의 무가 채용에서 종종 보이는 부분이다.

이상에서처럼 불교가 정상적으로 전승·전파될 수 없는 곤란함을 당하였을 때, 불교가 채용한 방식 중의 하나가 바로 불교가사이다. 이때 불교가사는 단순히 사원 내에서만 전승된 것이 아니라 걸립패, 향두꾼, 심지어는 무격에까지 채용되어 불렸기 때문에 핵심의 이야기 구조만을 유지한 채 다양한 주체에 의해 전승이 이루어지게 된다. 판각된 경우에도 사원을 벗어나면, 판각본에 의하기보다는 구연에 의하기 때문에 자연스런 변용이 일어난다.

다만 어느 경우이든 이야기의 기본적인 서사구조를 유지함으로써 원래 목표로 삼았던 불교적 사유체계의 전승과 전파라는 의도를 달성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는 점이 특징이며, 그 강렬한 이야기 구조는 무격에 차용될 경우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불교를 확대 재생산하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조선 후기의 경우 무속의 불교 수용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보여주는데, 그만큼 무속의 불교화가 진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무가 가사의 불교 채용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상대적으로 무속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보다는 불교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훨씬 강렬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2) 무속신화와 불교

조선 후기 이후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채록된 무가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 전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당대의 현실의식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은 쉽게 부정하기 힘들다고 생각된다. 무가는 그 속에 강렬한 원형성을 담지하고 있는 만큼이나 강렬한 현실성 역시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신화에서 대별왕과 소별왕이 경쟁해서 이승을 차지하는 이야기와 미륵과 석가가 경쟁하여 인간세상을 차지하는 경쟁을 하는 창세가의 이야기를 대비해서 보면, 창세가의 화소(話素)들은 더 이상 불교적 요소들이 근원적 요소에 대한 대체요소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미륵님 세월에는,/ 섬두리 말두리 잡숫고,/ 인간세월이 태평하고./ 그랬는데, 석가님이 나와서서,/ 이 세월을 앗아 뺏자고 마련하와,/ 미륵님의 말씀이,/ 아직은 내 세월이지, 네 세월은 못 된다./ 석가님의 말씀이,/미륵님 세월은 다 갔다,/ 인제는 내 세월을 만들겠다./ 미륵님의 말씀이,/ 너 내 세월 앗겠거든,/ 너와 나와 내기 시행하자.//
더럽고 축축한 이 석가야,/ 그러거든, 동해(東海)중에 금병(金甁)에 금줄 달고,/ 석가님은 은병(銀甁)에 은줄 달고,/ 미륵님의 말씀이,/ 내 병의 줄이 끊어지면 네 세월이 되고,/ 네 병의 줄이 끊어지면 네 세월 아직 아니라./ 동해중에서 석가 줄이 끊어졌다./ 석가님이 내밀어서,/ 또 내기 시행 한 번 더 하자./ 성천강(成川江) 여름에 강을 붙이겠느냐./ 미륵님은 동지(冬至)채를 올리고,// 석가님은 입춘(立春)채를 올리소아,/ 미륵님은 강이 맞붙고,/ 석가님이 졌소아.//
석가님이 또 한 번 더하자,/ 너와 나와 한 방에서 누워서,/ 모란 꽃이 모락모락 피어서,/ 내 무릎에 올라오면 내 세월이오,/ 네 무릎에 올라오면 네 세월이라./ 석가는 도적(盜賊) 심사를 먹고 반잠 자고,/ 미륵님은 참잠(眞眠)을 잤다./ 미륵님 무릎 위에,/ 모란 꽃이 피어올랐소아,/ 석가가 중동 사리로 꺾어다가,/ 제 무릎에 꽂았다./ 일어나서, 축축하고 더러운 이 석가야,/ 내 무릎에 꽃이 피었음을,/ 네 무릎에 꺾어 꽂았으니,/ 꽃이 피어 열흘이 못 가고,/ 심어 십년이 못 가리라.//
미륵님이 석가의 너무 성화를 받기 싫어,/ 석가에게 세월을 주기로 마련하고,/ 축축하고 더러운 석가야,/ 네 세월이 될라치면,/ 쩌귀(門)마다 솟대 서고,/ 네 세월이 될라치면,/ 가문마다 기생 나고,/ 가문마다 과부 나고,/가문마다 무당 나고,/ 가문마다 역적 나고,/ 가문마다 백정 나고,/ 네 세월이 될라치면,/ 합들이 치들이 나고,/ 네 세월이 될라치면,/ 삼천(三千) 중에 일천 거사(居士) 나느니라./ 세월이 그런즉 말세(末世)가 된다.
—김쌍돌이 구연본 〈창세가〉 중에서

이 무가에서 미륵님과 석가님은 더 이상 외래에서 전래된 신격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냥 우리 창세신화의 신격으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원래의 창세신격이 미륵님과 석가님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히 볼 것만은 아니다. 곧 단순히 창세신격을 석가와 미륵으로 대체한 것만이 아니라, 불교에서 석가와 미륵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석가는 현세의 부처님이고 미륵은 미래세의 부처님이다. 그리고 석가불의 세계는 중생이 고통받는 사바세계이고, 미륵불의 세계는 일체의 고통이 다한 용화세계이다. 석가님과 미륵님으로 창세신격을 대체한 것이 조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면, 여기에는 불교의 현실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더구나 무격이나 승려나 다 함께 천대받는 존재였지만, 승려와 무격은 엄연히 격이 다른 존재이기도 했다. 앞서 본 것처럼 조선 후기의 불교가사들은 모두가 염불을 중심으로 하는 극락왕생의 권유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불교가사들의 출발점은 선승이나 교학승이다. 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서민들 속을 떠돌았던 혹은 민란에 가담했던 승려들의 신앙은 대부분 미륵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곧 현재세의 주재자로서 석가님이 언급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부정의식을 가지고 있는 미륵 지향의식의 반향일 수 있는 것이다.
기원의 대상이자 수호의 주체로서 존재했던 거석과 그 거석에 대한 숭배신앙이 미륵신앙으로 대체되었을 때, 기층 민중의 수호신 수호불은 이미 미륵불이었던 것이다. 전국에 산재하는 거석의 미륵불이나 아무렇게나(?) 새겨진 조그만 돌미륵에 이르기까지 미륵은 수호자이자 기원의 대상으로 민중에게 수용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이루어야 할 나라는 미륵의 나라 미륵의 세상이었고, 그에 반향하여 자연스럽게 떠오른 대조군은 석가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미륵과 석가가 창조신격으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불교가 원형적 사유의 핵심을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읽어도 좋은 것이 아닐까?

〈당금애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반도 전 지역에서 전승되는 이 무가는 〈삼태자풀이〉 〈제석풀이〉 등으로도 불린다. 내용은 법술이 높은 중이 어느 집에 혼자 있는 딸아기를 찾아와서 시주를 받으며 수작하고 사라진 후 그 딸이 잉태하게 되는데, 이 사실을 안 가족에 의해 추방된 딸아기는 아들 삼형제를 출산하고 중을 찾아갔는데, 딸아기는 삼신이 되고 아들들은 제석신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당금애기〉에 이르면 불교적 요소들은 이제 자연스럽게 무속신화의 곳곳에 배치되어 한 자리를 차지하는 형국이 된다. 당금애기와 연분이 나는 존재는 구연에 따라서는 천상의 고귀한 존재인 삼한 시준님이기도 하고, 법술 높은 중이기도 하고 석가여래 시주님이기도 하다. 또 당금애기와 연분이 나는 존재는 법술은 높은지도 모르지만 처녀와 연분이 나는 요망한 중이기도 하다. 한편 당금애기는 전통신인 삼신이 되지만 그 아들들은 제석신이 되며, 아들 삼형제를 아버지에게로 이끌어가는 것은 석가여래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당금애기〉에서도 역시 다양한 신화적 화소들이 불교적 요소로 대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불교는 더 이상 근원적 사유세계를 대체해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근원적 사유세계 그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체화되고 있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5. 맺는 말

이상으로 우리 설화의 변천 양상 속에 나타난 불교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보통 ‘한국불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그 한국불교라는 다양하면서도 어떤 일관되는 사유체계의 특징을 다른 불교전통과 구분하여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가 이 땅의 공동체에 전래된 이후 어떻게 표상화되어 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한국불교 전통의 특징을 드러내는 데 대단히 유효한 지표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본 글을 처음 시작할 때는 설화에 나타난 한국불교만의 특징적인 양상들을 드러내 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흐름의 단면들만을 그것도 부분적으로 제시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불교가 이 땅에 형성되었던 공동체의 무의식에 침잠해가는 맥락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그리고 거기에 일면 보편적이었을 불교적 사유체계가 이 땅의 무의식과 융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보편적이지 않은 어떤 양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교전통 더 좁게는 한국불교전통의 외적 범주를 우리 스스로 너무 좁혀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잔상으로 남는다. ■    

 

석길암 / 금강대학교 HK교수. 외국어대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하였다. 주요 논문으로 〈원효의 보법화엄사상 연구〉 〈금강삼매경의 성립과 유통에 관한 재고〉 〈지론종 남도파의 아리야식 이해에 대한 일 고찰〉 등 다수와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지론사상의 형성과 변용》(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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