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인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1. 서론: 정의와 방법

‘정의’

불교가 종교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종교인가?

서정형
서울대 철학과 강사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자가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종교(religion)라는 말의 서양식 어원에 따라 신과 인간의 재(re)결합(ligion)이라는 식으로 창조주나 유일신격을 염두에 두고 묻는다면 불교는 종교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여전히 그런 정의를 고집하는 종교학자는 거의 없다. 특정 지역의 종교적 행태를 표준으로 다른 전통을 평가하는 연역적 방식이 아니라 전 세계에 존재하는 뭔가 종교적이라고 부를 만한 유사한 행동양식으로부터 종교를 이해하려는 귀납적 방식이 종교학 방법론의 대세이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는 종교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 뿐만 아니라, 세계의 3대(혹은 4대) 종교 중의 하나라는 지위를 갖는다.

일상의 대화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철학적 담론에서는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한정해야 언어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여기서 ‘종교적’이라는 말 역시 먼저 포괄적인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국어대사전》[이희승 편저, 민중서관]에 따르면 종교는 “신이나 절대자를 인정하여 일정한 형식으로 그것을 믿고 받들어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얻고자 하는 정신문화의 일종”이다. 좀 불만스러운 대로 이 정의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종교는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신이나 절대자이다. 여기서 ‘절대자’를 궁극적 진리라든가 원리라는 정도로 확대 해석하면 종교의 범위 역시 확장된다. 둘째, 그 절대자나 진리를 믿고 받드는 행위가 있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평안과 행복이라는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가 있다.

이상의 정의를 불교의 삼보(三寶)에 대응시키면 대략 아귀가 맞는다. 불(佛)과 법(法)은 붓다와 붓다가 구현한 진리를 의미하고, 승가(僧迦)는 붓다와 진리를 믿고 받드는 집단과 그 행위양식을 모두 지칭한다. 종교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집단은 이러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이러한 기본적인 요소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각 종교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를 구성하는 이 세 가지 요소는 궁극적으로 마음의 평화와 행복에 봉사하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비단 종교만이 아니라 인간(어쩌면 동식물까지도)의 모든 활동이 지향하는 바이다. 종교는 행복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욕구를 실현하려는 다양한 활동 중의 하나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방법’

개별 종교현상을 연구할 때, 가장 유용하면서도 일반적인 방법은 다른 종교와 비교하는 것이다. 현상적인 가치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종교로서의 한국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최근의 통계자료를 활용하여 먼저 우리나라의 종교적 풍토를 개관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주요 종교들 간의 상관관계와 차이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통계라는 것은 수치에 개별적인 특성이 매몰되는 대신 전체적인 축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고, 무엇보다도 실증적 자료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상적 논의가 도달하기 어려운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게 많은 종교와 종파가 난립해 있는 종교다원주의의 표본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세계 평균과 비교할 때 종교인의 비율이 그다지 높은 것은 아니다. 지난 20년 간 종교를 믿는 사람이 42.6%(1985)에서 53.5%(2005)로 늘어났고, 비종교인의 비율이 57.4%(1985)에서 46.5%(2005)로 감소했지만, 여전히 비종교인의 비율은 세계 평균(15%)과 비교할 때 상당히 높다. 우리나라의 종교가 다원화되어 있고, 정치사회적 영향력 또한 큰 데 비해 비종교인의 비율이 이렇게 높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그리고 많은 종교인들이 서로 다른 종교적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특정 종교 간에는 날선 반목과 알력이 상존한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종교현상은 모순적이고 복잡하기 때문에 종교야말로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지적은 참고할 만하다.

대체로 특정 종교에 귀의한다는 것은 자각하든 않든 중대한 결단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결단의 배경에는 그 종교로부터 얻게 될 포괄적인 이익에 대한 기대가 있다. ‘이익’은 세속적 언사지만, 남을 돕고 싶은 나의 바람이 충족되는 것까지 나의 이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감이나 행복이라는 말로 바꿔도 무방하다. 대중의 간택을 받은 종교가 어느 정도 기대를 충족시켜주는가 확인하고, 그렇지 못할 때 그 원인을 찾아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은 모든 종교단체가 관심을 기울여야할 문제이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불교의 정체성이 삼보(三寶)에 있다고 할 때 복전(福田)인 대중의 만족도는 승가의 존립 기반인 것이다. 또한 본고에서 ‘종교로서의 불교’라고 할 때 협의의 종교는 종교공동체인 승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21세기 초입에 들어선 우리나라 불교인들은 대체 인생과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품고 있으며 실제로 이들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또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들은 불교로부터 기대했던 이익을 얻고 있으며, 교리체계와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또 향유하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이고 근접한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토대로 향후 불교가 나아갈 바를 가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정확한 현실인식 속에는 이미 답이 배태되어 있다. 다음은 종교인과 비종교인, 불교인과 타 종교인들의 종교적 성향이 반영된 통계자료이다.

2. 통계와 분석

1) 분포와 비율

우리나라 종교 인구의 대부분은 불교(24.4%), 개신교(21.4%), 천주교(6.7%)에 분포되어있다. 불교가 최대 종단이라고는 하지만, 개신교와 천주교를 통합한 범기독교인의 비율이 28.1%로 불교를 능가한다. 통계청과 한국갤럽의 통계자료에서는 토속신앙을 따로 분류하지 않았고, 한국갤럽에서는 유교를 종교로 취급하지 않았다. 통계적으로는 토속신앙과 유교가 기타 항목(6.7%)에 포함될 정도로 수적으로 미미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단 유교와 토속신앙을 종교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고, 넓은 의미의 종교에 포함시켜서 카테고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설문할 경우에는 통계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여러 가지 종교적 특성을 공유하는 한국인의 상호침투적인 종교성향을 감안할 때, 토속신앙과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인구수가 독자적으로도 상당한 비율을 차지할 것이지만, 그런 인구가 다시 불교나 기독교(여기서 ‘기독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하는 의미로 쓰겠다)를 종교로 가진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한국인의 생활양식으로 볼 때 토속신앙이나 유교적 전통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종교로 생각하지 않는 다수의 인구가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본고에서 이 문제는 논외로 하고 주로 불교와 기독교 인구의 분포와 성향에 주목하겠다.

(1) 종교인구의 증감
최근(1985~2005) 10여 년간 개신교 인구는 2%정도 감소했으나 천주교 인구가 4.6%(1985)에서 10.9%(2005)로 2배 이상 급증하는 바람에 기독교 전체 인구 대비 불교인구의 비율은 20.7% : 19.9%(1985)에서 29.2% : 22.8%(2005)로 격차가 더 벌어졌다. 천주교가 급증하게 된 원인은 현대 한국인의 종교성향이 점차 ‘개화’되고 현실화하는 추세에 비추어볼 때, 1980년대를 전후한 우리나라 민주화에 대한 일정한 기여와 사회활동으로 추단할 수 있다. 종교인구가 증가한 것이 반드시 더 종교적으로 되어 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한국인의 종교적 성향은 오히려 약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2) 종교인구의 연령과 교육
연령이 높을수록 종교를 믿는 비율이 높아지는 한편 무종교 비율은 낮아지고 있다. 종교인 중에서도 불교와 유교 인구는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크게 증가하고 있지만, 기독교 등 다른 종교는 비교적 고른 분포를 보인다. 고령인구의 교육 수준은 대체로 낮은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불교와 유교 인구의 전반적인 교육수준과 대체로 일치한다. 실제로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저학력 인구비율은 불교 26.1%, 개신교 16.6%, 천추교 13.9%이며, 대학(전문대 포함) 졸업 이상의 고학력 인구비율은 불교 21.7% 개신교 34.1% 천주교 38.0%를 차지한다. 이렇게 불교와 기독교의 학력 수준의 격차가 큰 것은 불교의 고령인구가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30~39세 사이의 인구를 보면 종교별 평균 교육연수의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물론 차이가 가장 작은 연령대에서도 1년 이상의 차이가 나긴 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불교의 저학력 비율이 높은 것만큼 고학력 비율이 낮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농어촌의 고령층이 상대적으로 많은 불교인구의 특성을 감안하면 전체적으로 고학력층이 얇은 편은 아니다. 대체로 불교 인구는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고 고령층에 분포되어 있으며, 연령이나 교육에 있어서 양극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불교인구의 분포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남성에 비해 여성 불자의 비율이 높은 것도 현대 한국불교의 지형을 형성하는 주요 변수이지만 본고에서는 따로 다루지 않는다.

(3) 종교인구의 직업
교육수준의 분포는 직업에서도 거의 그대로 나타난다. 관리자급 이상과 전문직을 합한 종교인구의 비율은 불교(9.8%), 개신교(18.1%), 천주교(19.9%) 순으로 거의 두 배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교육수준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농어촌 인구 비율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단순 수치로만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큰 차이임에는 틀림없다. 농업과 어업, 임업 등 1차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불교(21.3%), 개신교(10.6%), 천주교(7.6%) 순으로 크게 차이가 나서 아직도 불교는 도시형이라기보다는 농어촌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 노무직 종사자의 비율은 불교(7.8%), 개신교(6.7%), 천주교(6.1%) 순으로 불교가 다소 많지만 유의미한 차이라고 볼 수는 없다.

2) 종교적 성향과 가치관

일반적으로 종교적 성향은 감소하는 추세이다. 여기서 종교적 성향이라 함은 개별 종교가 표방하는 교리나 주장에 대한 공감과 신뢰의 정도를 말한다. 기독교 교리에서 창조론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은 종교인 비종교인 포함해서 46.1%(1984)에서 35.4%(2004)로 줄었고, 절대자에 의한 심판설 역시 34.5%(1984)에서 22.1%(2004)로 크게 감소하였다. 소위 ‘과학적’ 사고가 교조적 권위를 잠식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불교의 교리 중 해탈사상 역시 49.4%(1984)에서 29.9%(2004)로 크게 줄어든 것도 비슷한 추세라고 볼 수 있는데, 유독 윤회설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 20.7%(1984)에서 27.4%(2004)로 증가한 것이 이채롭다. 특이한 것은 윤회설에 동의하는 종교인들의 비율은 천주교인(39.7%)이 개신교인(21.5%)은 물론 불교인(36.8%)보다 많다는 점이다. 종교적 성향의 전반적 감소가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다. 바람직한 요소가 줄어드는 건 나쁜 것이고, 부정적인 요소가 줄어드는 건 좋은 것이다. 한국인들의 특정 종교적 성향은 감소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다음의 조사 결과를 볼 때 전체적으로 볼 때 대체로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1) 종교를 믿는 이유
종교인들이 특정 종교를 가지는 이유 중에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 비율은 57.8%(1984)에서 67.9%(2004)로 20년간 큰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종교의 정의와 목적을 생각할 때 놀랄 일은 아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종교관이 맹목적 신앙의 형태에서 보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다음으로 복을 받기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는 비율이 13.3%(1984)에서 15.6%(2004)로 소폭 증가했다. 사실 마음의 평화나 복은 엄밀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후의 영원한 행복을 구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한다는 응답은 11.4%(1984)에서 7.8%(2004)로 감소했다. 이 역시 현세중심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낮은 연령에서는 마음이 평화를 종교를 갖는 가장 큰 이유로 생각한 데 비해 고연령에서는 복을 구하는 마음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종교에 대한 인식
종교를 믿는 이유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마음의 행복이며, 그 비율 역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인의 종교관이 현실적이고, 현세중심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종교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다 비슷하다고 보는 종교인들의 비율이 불교(81.7%), 천주교(74%), 개신교(53.1%) 순으로 생각보다 매우 높다. 마찬가지로, 반드시 특정 종교를 믿어야 천당/극락에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비율 또한 불교(84.1%), 천주교(71.8%) 개신교(31.1%) 순으로 나타난다. 개신교의 비율이 특히 낮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으며 종교(인)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추세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천국 내지 불국토는 나의 행동과 마음에 달렸다고 보는 종교인들의 비율이 불교(74.8%), 천주교(71.5%), 개신교(41.9%)로 나타나는 데서도 그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3) 종교에 대한 만족도
종교에 대한 기대가 적은 만큼 종교가 정신적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평가는 낮을 수밖에 없다. “종교가 정신적 문제 해결해 주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불교인들은 38.1%가 그렇다고 답하는 것을 볼 때 불교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천주교(44.8%), 개신교(59.2%)는 비교적 만족한다는 답변을 했다. 이러한 응답은 당연히 종교의 역할에 대한 불만과 반비례하는데, 종교가 삶의 해답을 못 준다는 불교인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67.3%), 천주교(61.3%)와 개신교(52.2%)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이것은 종교가 비단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현세적 삶에 있어서도 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종교생활 양태
개별 종교의 특성에 따라 종교생활 또한 판이하게 다르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종교의례에 참여하는 종교인의 비율은 개신교(71%), 천주교(42.9%), 불교(3.5%) 순으로 어느 정도 예상된 수치이다. 종교 의례에 대한 헌신의 정도는 기도나 경전공부 등 종교생활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즉 하루 한 번 이상 기도하는 비율은 개신교(59.3%), 천주교(27.8%), 불교(13.8%)의 순이며,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경전을 읽는 비율 역시 개신교(21.9%), 천주교(7.4%), 불교(3.1%) 순으로 나타난다. 불교의 경우, 타 종교에 비해 종교의례에도 별로 참석하지 않고, 기도도 거의 안 하고, 경전도 그다지 읽지 않는다는 것인데, ‘종교생활’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3) 분석

다음은 2011년 3월에 발표된 불교미래사회연구소(소장 퇴휴)의 보고서의 일부로서 불교의 미래에 대한 위기감이 표출되고 있다.

이상의 응답 내용을 종합해보면, 수도권에 거주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청장년 화이트칼라 계층에서는 상대적으로 불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다.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계층 가운데서도 여론 형성이나 소득 수준 면에 있어 핵심부에 속하는 이들 계층에서 불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향후 불교의 교세가 줄어들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함께 사회 속 종교지형의 주변부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은 통계청과 한국갤럽의 통계치에 대한 분석결과와 일치한다. 불교인구는 분포상으로 다른 종교에 비해 고령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반적 교육수준이 낮은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수준이 높은 계층이 다른 종교에 비해 절대수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건 사실이다. 이렇게 양극화되어 있는 구조에서는 중간층이 얇을 수밖에 없고 이것이 불교가 안고 있는 구조적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인 의미에서든 문화적인 의미에서든 건강한 사회는 항아리 모양으로 상층과 하층의 양극단이 적고 ‘건실한’ 중간층이 많을 때 안정감이 있고 성장 잠재력도 갖게 된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취약한 데다가 종교생활 역시 타 종교에 비해 열정적이지 않고, 따라서 사찰이나 종단에 대한 소속감도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불교 신앙을 통한 사후의 행복에 대한 기대도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적다는 것(1.8%)은 불교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신앙의 귀의처로서 역할과 기능이 축소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불교인에게 신행생활은 주로 방생법회나 성지순례와 같은 이벤트성 여가활동이요, 취미생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3분의 2가 넘는 불교인이 종교가 삶의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고 답한 것은 전체 조사결과로 봐서 당연한 결과지만 여전히 충격적이다. 이것은 일반인들의 부정적 견해(64.3%)를 상회하는 수치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살아 있는 동안에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사후 세계에 희망을 붙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식 장례와 천도재 같은 사후 의례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기보다는 그저 전통과 습관을 반복하는 ‘삶’의 한 양식에 불과한 것 으로 보인다. 

불교가 전통적인 의미의 종교적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다. 전통은 순간순간 변화해가는 것이다.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종교의 기능과 역할 역시 대중의 욕구와 기대에 부응해서 부단히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많은 불교 인구(84.1%)가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극락에 가는 것은 아니며, 시주한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89%) 생각한다. 이것은 불교인들이 종교 그 자체보다는 개인의 덕목을 더 중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불교인들의 종교관은 대체로 현실적이요 현세 중심으로 이행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사실 일반인은 불교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불교 ‘철학’ 자체가 어렵다. 이 어려움은 사람의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를 거스르기 때문에 더욱 심화된다. 개인의 현실적인 욕망에 배치되는 철학이 다수의 철학이 되기는 어렵다. 교육수준이 높거나 전문직을 가진 일부 지식인 계층은 불교를 학술적으로 공부하거나 참선수행을 통해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반면, 교육수준이 낮은 다수는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부르는 주술적 의례나 자신에게 적합한 형태의 염불이나 주력에 의지한다. 연령이 많고 지식 수준이 낮을수록 복을 구하는 비율이 높아진다는 조사결과도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불교의 신행생활 역시 이렇게 양극화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의 미래가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종교를 갖지 않은 일반인들의 불교에 대한 호감도(37.4%)는 천주교(17%)나 개신교(12.3%)보다 월등히 높다. 물론 구조적인 문제는 상존한다. 불교를 선호하는 사람들 중에는 농수축산업자(43.2%)가 많고 천주교나 기독교는 화이트칼라의 선호도가 높다. 불교인구 구성의 특징과는 별도로 전반적으로 불교 교리에 대한 호응도는 높은 편이다. 앞서 말했듯이 윤회를 받아들이는 인구가 의외로 높고(전체 인구의 48.3%) 업보를 수용하는 인구 또한 예상보다는 높다(73.4%). 이것은 점차 합리적으로 이행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전체적인 종교성향에 비춰볼 때 무비판적인 믿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업보의 수용은 나름대로의 경험과 추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상당한 이유가 있다.

3. 과제

이상의 분석을 통해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세 가지 관점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첫째, 종교를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일반적인 성향과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 대중의 불교에 대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불교를 현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본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불교 본래의 장점과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현대인들이 내세보다는 현세를 중시한다는 것이 세속화의 관점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삶과 무관한 내세가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는 충분히 고무적이다. 따라서 불교가 복지나 사회운동 등 대중들의 현실적인 요구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셋째, 불교인구는 상대적으로 지식 수준이 낮거나 높은 연령층이 많은 편이다. 불교는 이들의 능력과 욕구에 맞는 건강한 신행생활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대중의 근기의 차이를 존중해서 불교 신행생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1) 불교의 현대화

불교의 현대화는 통시적 가치이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종교는 적어도 살아 있는 종교는 아니다. 불교가 현대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그 안에 인류의 지적, 물질적 자산과 성취를 담아내고 또 활용하는 것이다. 불교는 과학을 포용해야 하고 포용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조차 과학과 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는 관점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물론 종교적 체험은 일상에서 늘 겪는 경험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수천 년에 걸쳐 불교는 여러가지 설명의 도구와 방식을 고안해왔고, 그것은 언제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교는 뭔가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이며 비합리적인 구식 종교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인층의 선호도가 낮고 불교가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는 듯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런 편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인 자세와 과학적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 불교의 활로가 있다고 믿는다.

사실 불교는 새삼스럽게 과학화할 필요가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본래 경험에 근거한 것으로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흔히 불교설화나 영험담에 나오는 신이한 현상이나 수행 도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비일상적인 ‘신비체험’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것이 과학적인 태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종교적 신비주의도 마찬가지지만 불교적 수증(修證)체계 역시 적절한 방법을 통해 모든 사람이 추체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고 경험적인 현상이다. 용수의 이제론(二諦論)에서 진제(眞諦)는 바로 그러한 종교적 체험의 영역이지만, 진제를 나타내고 가리키는 속제(俗諦)는 과학적이고 논리의 영역 안에 있다. 선불교의 격외도리(格外道理)가 사유와 언설이 끊어진 경지를 가리키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무심(無心)의 경지 또한 이성의 영역 밖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가리키는 언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일 수 있다. 말하자면, 격외도 도리요, 이치이다.

초기 기독교 교부인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기독교의 이성적 접근을 강조하는 유파에 대한 반론으로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한 바 있다. 이때 불합리하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검증할 수 없는 현상(‘신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 등)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에서는 이와 같은 의미의 불합리가 용납되지 않는다. 불교의 믿음은 이치와 합리에 대한 믿음이지 불합리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아니다. 누구나 귀 있는 자는 듣고 확신이 생겨서 그 길을 따를 때 스스로 검증할 수 있는 가르침인 것이다. 불교에서 흔히 보이는 ‘불가사의하다’는 표현은 생각(과 언어)으로는 알기 어렵고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지 체험 자체가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체험 자체는 자명하고 동류의 추체험이 가능하며 이것이 사자상승의 전등사(傳燈史)이다. 한 번 깨치면 영원한[一得永得] 열반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고기를 잡은 자는 통발을 잊고, 강을 건넌 사람은 뗏목을 버린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아직 고기를 잡지 못하고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 더 촘촘한 통발과 견고한 뗏목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불자들을 위한 경전의 현대적 해석과 승가의 혁신이 필요하다. 승려의 교육에 대해서는 선각자들이 오래전부터 목소리를 높여 왔고, 승가 조직의 개혁 필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앞서 통계자료에서 본 바와 같이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승려의 자질만 문제 삼을 일도 아니다. 말 그대로 대승적인 차원에서 재가불자들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계가 힘을 모아 역량을 갖춘 인력을 양성하고 승가의 운영에도 동참해서 역할분담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불교가 현대화하고 과학화하기 위해서는 사부대중의 화합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2) 불교의 현세적 기여

선(禪)은 언제나 지금 여기를 강조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순간 밖에는 다른 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更無時節) 과거와 미래는 관념으로만 존재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 순간밖에 없다. 내세도 결국 현세의 연장 안에서 사유되고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며 종교는 그것을 우회적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추구한다. 안락과 즐거움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 욕구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면한 현실의 문제이다. 설문조사에서 나타났듯이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현세의 괴로움을 견디며 내세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대승불교는 불이(不二)를 설하고 일심법계(一心法界)를 논한다. 하나의 법계 밖에 따로 극락과 지옥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같은 경지를 두고 보는 바가 달라지는 것은 각기 그 업식(業識)을 따르는 데 있을 뿐 어찌 딴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부처님의 처지에서 보면 정토 아님이 없고, 중생의 처지에서 보면 예토 아님이 없는 것이다. 사바세계가 곧 연화상품이건만 중생이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 모두어 말하면 내 마음이 정토일 따름이다. 경에 이르기를 “중생의 마음이 곧 보살의 정토다.”라고 하셨다. 자기 마음이 정토임에도 불구하고 정토를 바라는 이들이 제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딴 데서 구한다면 이야말로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구하고…… 

설사 ‘내 마음이 정토’라는 것을 믿지 못해서 마음 밖에서 정토를 구한다고 한다면 대체 어떤 이치로 정토에 왕생할 것인가? 예컨대, 한국인의 반 정도가 ‘믿고’ 있는 윤회의 교설을 보자. 만약 내가 윤회하게 된다면 정토든 어디든 내생에 태어나게 될 나는 현재의 연속이거나 혹은 연속이 아닐 것이다. 만약 윤회가 현재 삶의 연장이라면, 어제와 오늘, 조금 전과 지금과 같이 부단하게 변화해가는 순간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생이 결국 지금 이 순간의 고락(苦樂) 구조와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만약 윤회가 현재의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라면 내가 다음 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즉 윤회에 대한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한국인들 중에서도 불교인들의 종교 성향은 상당히 현세적이다. 그것은 미혹된 믿음의 가능성이 적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세속적이라는 것은 흔히 비난의 뉘앙스를 풍기지만, 실로 세간과 출세간이 둘로 나뉘어 있지 않은 바에야 훌륭한 세속주의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오히려 현실을 제대로 딛고 있지 못한 내세 지향적인 삶이야말로 건강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 위험하다. 현대인의 다수가 종교에서 찾고자 하는 마음의 평화는 시시각각 변화해가는 현실 속에서 얻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불교는 현실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운동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타 종교에 비해 복지시설이나 사회참여 등 대사회적 기여가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불교는 은둔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실제로 그러한 평가를 받는다. 한국불교가 참다운 의미에서 대중들의 귀의처가 되기 위해서는 무게중심을 현실세계로 좀 더 옮겨 놓을 필요가 있다.

3) 불교 신행의 문제: 기복불교에 관하여

《법화경》에는 보우(普雨)의 비유가 있다.

크고 작은 수목이 하늘을 덮은 거대한 구름이 만들어내는 비를 제각기 크기와 필요에 따라 머금고 생장하듯이 중생들 또한 자신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 붓다의 보편적인 가르침(圓音)을 받아 지니고 성숙한다는 실로 아름다운 비유이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일 뿐 그 가르침의 본의를 제대로 살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한국불교를 비판할 때 빠지지 않는 메뉴가 ‘기복불교의 폐단’이다. 신불(神佛)에 대고 복을 비는 모습이 천박하고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는 있다. 그러나 복을 구하는 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알고 보면 누구나 복을 바라고 심지어 붓다조차도 복을 구한다.

아누룻다(Aniruddha, 阿那律)는 육신의 눈 대신 천안(天眼)을 얻은 아라한이다. 눈이 먼 아누룻다가 바늘귀를 꿸 수 없어서 누군가 자기를 도와 복을 짓지 않겠느냐고 하자 마침 곁을 지나던 붓다가 얼른 바늘귀를 꿰어준다. 나중에 그것을 알고 놀란 아누룻다가 물었다. 부처님도 복이 더 필요하시냐고. 그러자 붓다는 세상에서 당신보다 더 복을 열심히 구하는 자는 없으리라고 대답한다. 붓다가 복을 구하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복을 구한다. 구한다고 해서 얻어진다면 다행이려니와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복을 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복을 구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찾지만 그릇에 따라 찾는 방법과 열정이 다르다. 해탈은 복 중에서도 큰 복이니 참선을 하는 것도 결국 복을 구하는 일이요,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하고, 진언을 외고, 갓바위에 절하는 것도 모두 복을 구하는 행위이다. 현우(賢愚)와 우열(優劣)의 차이는 있을망정 복을 구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힘들고 괴로운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복을 찾는 마음을 어찌 나무라겠는가. 고해의 중생들에게 종교는 어쨌든 귀의처가 되어야 한다. 붓다도 해탈의 즐거움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심으로 천상에 태어나는 복을 쌓기를 권했듯이 각자의 근기에 맞는 방식으로 복 찾는 일을 도와줘야 한다.

불교는 한마디로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는 것”인데, 괴로움을 벗어나서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그 마음이 바로 초발심이요, 향상심이며 보리심이다. 불보살에 기도를 하고 염불을 하면 복이 오는가?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불상에 대고 절하고 염불하지만 모든 부처는 자성불(自性佛)이기 때문에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을 해서 불보살에 감응한다면 그것은 곧 자성에 감응하는 것이다. 불보살에 감응하면 모든 사람이 불보살의 화신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복을 구하는 사람은 향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향상의 길로 이끌고 그 이치를 깨우쳐 주는 것이 모든 종교의 신성한 사명이다.

향상이라고 했지만 실은 본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고, 전체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그것이 참된 의미의 복이다. 그것을 얻고자 하는 열망과 지혜를 모든 중생이 두루 갖추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대전제이며,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불성(佛性)사상이다. 복을 구하는 것이 곧 불성을 구하는 것이다.

4. 남은 말

종교에 관한 통계자료를 훑어보면서 느낀 것은 여전히 불교에 대한 오해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불교 안팎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이러한 오해가 불교가 정체되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오해는 대부분 단순한 무지 때문에 생겨난 것이지만, 때로는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편견에서 시작된 것도 적지 않다. 그 중에 하나가 불교는 미신적이라는 혐의이다.  

포르(Bernard Faure)는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라는 책 서문에서 “‘미신’적 요소가 없는 ‘순수한’ 불교에 대한 믿음이 편향된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실제로 미신이라고 하는 요소는 서구 현대사회에 불교의 영향력이 미치기 전까지 오랜 세월과 문화권에 걸쳐서 전해져 왔던, 불교가 갖고 있는 여러 모습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여기서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필자는 그가 ‘미신’이라고 말한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궁금해서 책을 뒤져봤지만 명확한 규정은 발견하지 못했다. 과연 무엇이 미혹된 신념(迷信) 혹은 비합리적인 믿음(superstition)일까?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은 종교를 가진 사람의 모든 행태가 비합리적이고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것, 즉 미신으로 보일 것이고,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은 다른 종교를 미신적으로 볼 것이다. 불교도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 미신적일 것이고, 기독교도는 염불로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구하는 사람이 미신적으로 보일 것이다. 현대 양의학자는 자연의학을 비과학적(미신)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의학자는 양의학도 잘못된 신념체계(미신)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입증이 불가능한 종교적 교리는 일단 과학에서 말하는 가설(hypo-thesis)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윤회와 삼계의 실재성, 불보살의 존재, 그리고 업의 이론 같은 것도 지금까지의 ‘과학적’ 도구로 입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과학의 사각지대로 간주하고 잘못된 신념체계(즉 미신)로 보는 경우가 많다. 입증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반증할 수도 없는 문제에 대해 쉽사리 단정하는 것이 독단이다. 입증되지 않은 것, 즉 진위를 판별할 수 없는 것이 곧 틀린 것, 잘못된 것은 아니다. ‘모르는 것’과 ‘아닌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고전물리학이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미시세계에서는 그 가설이 적용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이렇게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신앙행태나 제의에도 비합리적인 요소가 스며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모습이 불교에 대한 선입견을 형성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부차적인 요소이지 불교의 본령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관음신앙이나 미륵신앙 등 불교의 신앙 형태나 주술적으로 보이는 불교제의의 성격에 대해 논의할 여유는 없다. 다만 유독 불교신앙과 미신을 결부시키는 것은 무지와 함께 배타적이고 교조적인 미신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

 

서정형 / 서울대 철학과 강사. 서울대 철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학원 불교철학 전공(ph. D). 주요 논문으로 〈자아가 없는데 누가 윤회하는가〉 〈선과 있는 그대로의 세계〉 등이 있고 주해서로 《중론》 《금강삼매경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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