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불교의 초석을 다지다

아리야나트네
1. 들어가는 말

불교운동가라고 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불교 활동을 통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유지하는 데 힘쓴 사람들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불교가 사회적으로 침체하여 있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불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이들을 의미할 것이다.

스리랑카의 경우는 이 두 가지 모두 해당되는데 전자의 경우는 영국 식민지 시대에 기독교와 무력에 의해 짓밟혔던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을 의미하며 후자의 경우에는 불교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제 위치를 회복했을 때 불교를 바탕으로 사회적인 운동을 펼치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근현대는 스리랑카의 경우 적어도 스리랑카의 불교가 다시 부흥하던 시기이던 19세기부터 지금까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파나두라 대논쟁에서 기독교도들의 불교에 대한 공격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기독교에 대한 불교의 우수함을 널리 확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구나난다(M. Gunananda) 스님, 신지협회를 세운 올코트(Olcott), 또한 남아시아 지역의 민족주의의 발생을 불교의 부흥으로 연결시킨 다르마팔라(Dharmapala)와 스리랑카 독립 후에는 사르보다야 운동을 펼치고 있는 아리야라트네(Ariyaratna)를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2. 스리랑카의 불교 선각자들

1)구나난다 스님

구다난다 스님
15세기 이후 막강한 힘을 앞세운 서양 세력의 침략주의는 스리랑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톨릭을 앞세운 포르투갈인, 개신교를 내세운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이 순서대로 스리랑카 섬으로 침략해 들어와 제국주의적인 야망과 종교적인 욕망이 맞아떨어지며 스리랑카 지역을 정치적으로는 물론 종교적으로도 초토화했다.

스리랑카 전역을 최초로 지배하게 된 영국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모든 권한을 독점한 상태에서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외에도 초교파 전도회 등을 파견하여 기독교를 전파했다. 1815년 3월 2일 영국이 스리랑카를 완전히 지배한다는 내용이 담긴 켄디 협약 제5조에는 ‘승단과 불교도들의 참배 장소에 대한 불가침 및 보호’의 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이를 무시하고 승단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이런 정책의 영향으로 스리랑카인 사회 내부에서도 기독교를 따르는 새로운 계층들이 발생하여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 결과 스리랑카의 콜롬보 시내에서조차 불교도들은 자신들이 불교도인 것을 내세울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승려들에게도 탁발 행위가 금지되었다. 이것은 스리랑카의 불교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의 역사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최악의 사건이었다.

이런 상황은 스리랑카인들에게 오히려 자신들의 고유종교와 민족에 대해 각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스리랑카인들은 대중 논쟁, 포교 기구의 구성, 활자 매체의 활용, 교육 등의 방법을 통해 불교의 부흥을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미 세력이 약화된 불교로서는 가능성을 상실하고 새로운 지도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불교의 부흥에 주춧돌이 된 사람이 구나난다 스님이었다.

1823년 스리랑카 남부 발라비티여의 모히띠왓떼에서 태어난 구나난다 스님은 어렸을 때 기독교 학교에서 기독교를 배워 기독교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가톨릭 성직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인근 사원에서 온 스님을 만나고는 생각을 바꾸고 도당고다 갈라 우다사에서 콘타라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불교 잡지인 《바웃다 사호다라야》를 읽던 중 콜롬보에서 종교 간의 대화가 있는 것을 알고는 콜롬보의 고타헤나에 있는 디파두타사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종교 간 대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구나난다 스님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종교 간 대화를 진행하자 기독교 성직자들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구나난다 스님의 논리 정연함에 기독교인들조차 스님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구나난다 스님은 지속적으로 감폴라, 파나두라, 우단위따, 바데가마 등의 지역에서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하는 종교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런 일을 하면서 구나난다 스님이 불교 재건을 위해 시도한 첫 번째 활동은 싸르와즈냐 사사나비브르디다-야까 다르마 싸마가마라는 ‘불교 전파를 위한 협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 협회는 1840년 이래 스리랑카에서 맹위를 떨쳤던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한 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1862년에 결성된 단체로 기독교의 전도사들에 대항하여 불교를 표방한 첫 번째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구나난다 스님은 당시 유명한 기독교 전도지였던 고거리 목사의 ‘기독교의 징표와 교리’라는 뜻의 〈크리스티야니 프라즈냐프티〉에 대항하여 1862년 6월부터 《두르랍디 위노다니야라》는 불교 포교 잡지를 월간으로 펴내기 시작했다. 고거리 목사의 〈크리스티야니 프라즈냐프티〉는 당시 스리랑카에서 전도 활동을 하는 모든 기독교 전도사들에게 불교는 미신과 우상 숭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을 선전하는 간행물이었다. 구나난다 스님이 창간한 《두르랍디 위노다니야라》 창간호가 나오자 감리교도들 특히 고거리 목사는 《수다르마 프라까라나야라》는 새로운 잡지를 서둘러 시작했다.

이에 스리랑카 남부 도시인 갈레에 있던 히까두워 수망갈라 스님도 잡지 발간에 참여하여 향후 수년간 기독교와 불교는 서로의 간행물을 통하여 자신들의 종교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이 기간 동안 나온 불교계 간행물로 불교계에서는 1862년부터 1863년까지 구나난다 스님에 의해 간행된 《크리스티야니 와-다 마르다나여》, 1863년부터 1864년에 간행되었던 《삼먁 다르샤나여》가 있고 히까두워 수망갈라 스님에 의해 간행된 잡지로는 1863년에 간행된 《바웃드하 와악샤라여》, 1864년에 간행된 《수마띠 상그라하야와 라브디 뚤라-와》 등이 있다. 한편 감리교단에서 제작한 잡지로는 1863년에 출간된 《바웃드하 와-꺄 칸다나야》와 1863년부터 2년간 출판된 《사트야 드와자야》 등이 있다.

고거리 목사가 사망한 후 영국으로 유학했던 하디 목사가 스리랑카로 돌아와 불교를 공격하는 데 선봉의 역활을 했다. 하디 목사는 다른 목사들과는 달리 불교와 기독교 간의 논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하디 목사는 자신의 신학적인 지식의 토대 위에 불교를 직접 학습하여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빨리어 경전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콜롬보에서 오랫동안 버티지를 못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는 불교를 직접 학습하는 동안 목사임에도 신앙적으로 흔들림에 봉착했다 한다. 그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런던으로 돌아가 버렸고 그의 후임으로 하디 목사의 사위인 존 스콧 목사가 부임했다. 이렇듯 마땅히 불교에 대해 나서는 목사들이 없는 상황에서 감리교단에서 임명한 목사가 바로 구나난다 스님과 파나두라에서 대토론을 벌렸던 실바 목사이다. 초기에 정기간행물에 의한 불교의 보호 유지에 확신을 얻은 구나난다 스님은 이제 개방된 자리로 나올 것을 결심했다.

구나난다 스님은 다섯 차례에 걸쳐 기독교 목사와 대논쟁을 벌이게 된다. 세계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스리랑카에서의 불교 부흥은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불교와 기독교 간의 종교적 논쟁이다. 이 논쟁들은 식민지 지배하의 불교도들의 호교적인 위기의식과 식민정책과 결합한 기독교인들의 우월적 복음 전도의 사명감이 격돌한 것으로 불교도의 입장을 대신하여서는 주로 구나난다 스님이 주도했다.

일반적으로 파나두라 논쟁으로 대표되는 다섯 가지 대논쟁은 1864년 11월 21일 밧데가마, 1866년 2월 1일 우단위따, 1871년 6월 7일부터 10일까지 감폴라, 1873년 8월 23일부터 28일까지 파나두라, 1899년 9월 3일부터 9월 10일까지 콜롬보에서 열렸다. 이중 가장 특이할 만한 논쟁은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소도시 파나두라에서 열린 불교와 기독교 간의 종교 논쟁이다. 이 논쟁의 발단은 1873년 6월에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가 파나두라 감리교회에서 행한 설교에서 ‘불교에는 영혼의 문제가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논쟁 당일에는 스리랑카 방방곡곡에서 논쟁을 보기 위해 올라온 불교·기독교 양측의 참관인들이 약 5,000명 내지 7,000명에 이르렀다.

논쟁은 기독교 측, 불교 측 각각 4회로 이루어졌다. 기독교 측에서는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가 3회, 스리만네 목사가 1회 참가했고 불교 측에서는 구나난다 스님만이 4회 연속 참여했다. 이들의 논쟁의 내용과 당일의 상황은 당시 스리랑카의 유력지였던 〈The Ceylon Times〉에 의해 상세히 보도되었다. 논쟁에 들어가기 앞서 기독교와 불교 양측은 논쟁을 평화롭고 질서 정연하게 진행하기 위해 논쟁은 구술로만 한다, 양측의 논쟁을 기록한 다음에 논쟁자가 기록문에 증명할 만한 서명을 해야 한다 등과 같은 10가지 조건에 합의하여 진행했다. 이 논쟁을 통해 불교가 사상적으로 우위에 있음이 확인되고 이 파나두라 논쟁을 계기로 그동안 기독교세 앞에서 침체의 길을 걷던 스리랑카의 불교가 다시 부흥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2) 올코트 경

올코트 경
미 육군 대령 출신으로 영국 정부의 문관이며 신지협회의 초대 이사장으로 활약했던 헨리 스틸 올코트 경은 1832년에 태어났다. 그는 최초로 불교로 개종한 첫 번째 유럽인이었으며 서구적 시각으로 불교의 부흥을 위해 애썼다. 스리랑카에서는 그를 보살이라고까지 칭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콜롬보와 남부의 도시 갈레 지방에 있고 그의 동상이 콜롬보 기차역 앞에 세워져 있다.

그가 불교를 위해 스리랑카에서 한 노력은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스리랑카에서 그는 불교와 불교적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했으며 그의 이런 노력은 스리랑카인으로서 스리랑카 불교의 큰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다르마팔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국에서 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인도의 마드라스와 스리랑카의 콜롬보를 관장하던 관구의 총독부에 근무했었다. 올코트는 신지협회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후일 불교신지협회를 만들기도 했으나 그 문제로 인해 다르마팔라와 결별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올코트 경이 보여준 불교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이다.

올코트의 열정을 볼수 있는 대표적인 일이 소위 ‘고따헤나의 폭동(Kotahena Riot)’과 관련된 일이다. ‘고따헤나의 폭동’은 1883년 3월 25일 스리랑카의 수도인 콜롬보 교외에 있는 작은 마을인 고따헤나에서 발생한 가톨릭교도의 불교도에 대한 공격이다. 그날 구나난다 스님이 머무르고 있던 디파두따사에는 새로이 조성된 불상의 점안식이 거행될 예정이었으며 이에 수백 명의 불교도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행진이 진행되던 중 오후 1시가 되었을 때 인근의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리면서 성당의 주변에서 이마에 흰 십자가를 그린 띠를 두르고 장갑을 낀 건장한 청년들이 손에는 막대기를 들고 사방에서 몰려나와 광장 한편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불교도들의 행렬이 가까이 오자 광장 한쪽에 몰려서 있던 청년들이 불교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방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행진하던 불교도들은 갑자기 피습을 받고는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다쳐 쓰러지기 시작했다. 일부 젊은 불교도들은 근처의 목재상으로 도망쳐 들어가 손에 잡히는 대로 목재를 집어 들고 저항하였다. 경찰은 가톨릭교도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흩어지도록 명령을 하면서 불교도의 행렬로 다가가서는 불교도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해산을 명령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도들이 흩어지지 않자 경찰은 그제서야 강제 진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경찰은 군대의 진압을 요청했다. 가톨릭교도들에 의해 포위된 불교도들은 우마차를 타고 가톨릭교도들의 저지선을 뚫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들은 소를 잡아 죽이고 마차는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동안에 부총경 홀랜드는 가톨릭교도들에게 성당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부탁했다. 그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고 현장을 정리하기 위한 군인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해서 불교도들도 물러났다. 이상은 고따헤나에서 불교도들이 가톨릭교도들로부터 당했던 폭행의 내용이다.

이 고타헤나의 폭동은 스리랑카 불교사뿐 아니라 세계 불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후일 경찰은 공격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처벌하는 데 필요한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반면에 불교도들에게는 폭력사태를 야기한다는 이유로 이후부터는 행렬을 금지한다고 했다. 이에 불교도들은 냉정하게 경찰의 조처가 있기를 기다리며 3주간을 기다렸다. 경찰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자 4월 16일 불교도들은 총독에게 사건을 해결해 줄 것을 진정했다. 그러나 총독도 역시 중재할 것을 거절했다. 이에 수일을 기다린 불교도들은 회의를 열고는 법원에 제소하기로 했다. 하지만 법원 역시 불교도들의 편이 되어 주지는 못했다. 불교도들은 부상으로 인한 치료비를 제외하고도 소송 비용으로 5,000루피 이상을 썼으나 공격자들은 아무런 조처도 당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기화로 불교도들은 그동안 수세에 있던 자세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제해 왔던 여러 가지 사항들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1884년 초에 위디요데야 피리웨나에서 열린 회의에서 ‘불교방위협의회’ 구성이 제안되었다. 이때 인도에 가 있던 올코트는 급히 스리랑카로 와서 켄디에 있던 고든 경을 만났다. 올코트는 고든 경의 편지를 가지고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 올코트는 영국 정부의 고위층에게 그간 고따헤나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며 스리랑카인들이 원하는 사항을 전달했다. 즉 고따헤나에서 발생한 사건의 소송 문제를 게을리했던 검사는 파면한다, 영국 정부는 인도를 포함한 지배 지역의 모든 종교에 관해 중립을 지킨다, 부처님의 탄신일인 5월의 만월일 즉 웨삭 포야데이는 공휴일로 한다, 이날은 불교도뿐 아니라 다른 종교 신도들에게까지 공휴일로 한다, 그동안 식민지 정부가 취해 왔던 국가나 종교의 음악의 사용과 연주에 대한 제한을 완전히 해제한다, 그동안 불교도들에게 조차 강요했던 목사 앞에서의 결혼 서명을 혼인 당사자들의 자율에 맡긴다, 1856년에 제정된 사원과 사원의 토지에 관한 법률을 파기한다는 등 모두 6가지의 확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1884년 11월 스리랑카로 돌아온 올코트는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했으며 영국 정부가 약속한 대로 1885년 4월 28일 웨삭 포야데이는 드디어 식민지가 된 이래 불교 기념일이 최초로 공휴일이 된 날이었다.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이날, 콜롬보의 페타로부터 위디요데야 피리웨나에 이르는 대규모 행렬을 벌여 축하앴으며, 구나난다 스님은 웨삭 포야데이의 공휴일 선포식을 가졌다.

또한 고따헤나의 디파두따사에서는 세계 최초로 불교기를 사용하는 등 역사적인 날을 기리는 행사를 했다. 불교기의 모양이 최초로 공개된 것은 1885년 4월 17일 자 사라사위 산다라사 에서였다. 그들은 불교기 게양 선포문에서 “불타에 대한 최고의 경의의 표시로, 그리고 불타의 탄신 즉 ‘광명의 날’을 기리기 위해서 불타의 몸으로부터 여섯 가지 색을 취하여 제작된 불교기를 금년 웨삭 포야데이부터 게양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올코트는 불교기를 푸른색, 노란색, 붉은색, 흰색, 오렌지 색, 혼합색의 6가지의 색으로 도안하였다. 푸른색은 부처님의 머리카락에서 따왔으며, 노란색은 부처님의 가사의 색에서, 붉은색은 입술에서, 흰색은 치아에서, 오렌지 색은 피부색에서 따온 것이다.

1880년 5월 17일 신지협회의 창시자인 올코트 경과 발라왓스키가 콜롬보로 왔다. 신지협회는 1875년에 뉴욕에서 창설된 단체이다. 그들의 스리랑카 도착은 기독교의 전도에 대응하는 불교도의 행동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올코트 경과 발라왓스키의 도착 이전에 이미 불교의 부흥 가능성−이것을 불교로의 재개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은 스리랑카 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그 기반이 다져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올코트 경은 이미 1879년 5월에 인도에서 구나난다 스님과 수망갈라 스님을 만난 적이 있었으며 구나난다 스님의 재가 후원자 중의 한 사람인 실바는 이미 뉴욕의 신지협회 본부의 회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올코트는 1879년 《The Theosophist(신지론자)》라는 저널을 펴면서 구나난다 스님과 수망갈라 스님의 글을 싣게 하는 등 불교에 최대한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사전에 스리랑카의 불교도들과 충분한 교감이 있었던 올코트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스리랑카 도착 이후 올코트의 활약은 “불교의 서양인 최우수자(a Western Champion of Buddhism)”라는 칭호를 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스리랑카에 도착하자마자 삼귀의와 오계를 수지하는 불교도가 되었다. 그는 첫 방문의 해인 188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인 1907년까지 불교를 위해 활기찬 일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법률가로서, 남북전쟁 당시 군의 연대장으로서,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반전도를 위한 전도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기독교의 공격으로부터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간파한 그는 “만일 당신들이 우리의 힘을 어떻게 조직화하느냐고 물어 온다면 나는 우선 우리의 커다란 적인 ‘기독교’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종교를 전도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아주 풍부한 양의 바이블, 포교용 소책자, 일요 학교, 전도 협회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들과 비슷한 기구를 만들어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력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도들은 불교를 파괴하기 위해 수백만의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교를 보호하고 번식시키기 위해서 돈을 써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정을 도와줄 소수의 부유층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국민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호소했다. 그의 이런 호소는 스리랑카 인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했다. 이를 통해 모금을 한 올코트는 불교청년단체인 YMBA(Young Man Buddhist Association) 운동, 사찰마다 일요 어린이 학교를 운영하였고 불교적인 색채를 띤 찬불 대중가요인 박띠 기를 널리 보급하기 시작했다.

또한 신지협회 실론 불교 지점은 소위 ‘프로테스탄트 불교(Protestant Buddhism)’라는 것을 표방했다. ‘프로테스탄트 불교’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많은 규범과 조직의 형태를 기독교로부터 따온다는 뜻이고, 또 다른 뜻은 기독교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거절 항변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의 영향으로 스리랑카의 불교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880년 이후에 그동안 승단만이 이끌어 오던 불교계를 재가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이끌기 시작했다. 신지협회 실론 불교 지점은 두 가지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각 지역에 다시 지점을 가지고 있었던 재가자 집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승려들로만 구성된 성직자들의 집단이었다. 수망갈라 스님을 의장으로 하는 성직자 집단은 종파에 관계없이 모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승려들이 참석했다. 이때 올코트는 각각 다른 종파의 승려들을 원만하게 결속시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1860년대가 지나면서 승려들은 대동단결하여 행동했기 때문에 기독교도와 대론에서도 큰 효과를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속도 승려 간의 결속만을 의미한 것이었지 각 종단 간의 결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어서 무언가 큰일을 같이 수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승려들이 결속하고자 하는 의견은 1865년부터 1874년까지 팰마둘라에서 있었던 빨리어 경전에 대한 재복습 기간 동안 잘 반영되어 행사를 원만하게 마칠 수 있었다. 각 종단에서 빨리어 경전에 대해 우수한 능력을 가진 승려들과 닐라메 등 몇몇 재가 학자들이 함께 참가했다. 이렇듯 승려와 재가자의 결속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승려와 종단 간의 결속을 나타낸 것은 올코트의 의견이 반영되면서부터라 하겠다.

또한 재가자들의 결속은 처음부터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콜롬보의 본부와 각 지역의 지부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하여 더욱 결속력을 다져 나갔다. 지도자적 위치에 있던 재가자들은 사실 그전부터 사회에서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던 사람들이었다. 위디요데야 대학의 후원자로서 크게 활약한 디 에이 페레라와 그의 아들 디 에스 페레라, 그의 사위 돈 카롤리스 등은 콜롬보의 본부의 유능한 회원들이었다. 후일 다르마팔라라고 개명하고 대각회를 세웠던 돈 데이비드는 사업에도 수완을 발휘하여 올코트의 여행을 알선하거나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는데 돈 카롤리스의 아들이었다. 이러한 재가 지도자들은 콜롬보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라트나푸라의 잇다말고다, 켄디의 파나복케, 파나두라와 갈레의 구나라트네 등이 올코트를 도왔다.

신지협회 실론 불교 지점의 기치 아래 재가자들은 각자의 지부 사업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지부와 어깨를 맞대고 공동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약은 비단 싱할라 인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었다. 이민족인 버거 족에게도 영향을 끼쳐 불첸 같은 이는 버거 족이면서도 아난다칼리지의 영어 교사와 올코트가 발행한 간행물인 〈The Buddhist(불교도)〉의 편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880년에 창간된 〈사라사위 산다라사〉는 격주간으로 발행되었는데 영어를 배우지 않은 싱할라 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불교 지침서가 되었다. 1888년에 창간된 〈The Buddhist (불교도)〉는 불교와 서양에서 들어온 자연과학과 심리학 등과 연관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영국식 교육을 받았거나 영어를 배웠던 신지식층들에게 불교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유럽, 인디아, 미국, 호주, 일본 등에서도 상당수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올코트는 불교도들이 안고 있는 가장 커다란 부담 중의 하나가 종교적으로 적대적인 기독교 교회와 기독교 재단의 학교에 아이들이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신지협회 실론 불교 지점의 재가자들에게 불교를 건학 이념으로 하는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호소하여 다소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자 여러 마을을 순회하며 승려와 재가자들에게 불교를 재단으로 하는 학교를 세울 수 있는 기금을 만드는 데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학교 건립 기금을 만들기 위한 이 운동에는 신지협회 실론 불교 지점의 재가 회원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처음에는 이 운동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869년 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바뀐 이래 후원 종교 단체별 학교 현황의 변화를 보면 얼마나 불교도들의 노력이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다. 1886년에 기독교에서 후원하는 학교의 수는 모두 806개교였는데 반해 불교가 후원하는 학교의 수는 스리랑카 전체를 통털어 12개교뿐이었다. 하지만 학교 세우기 운동이 시작된 불과 10년 사이에 스리랑카에 불교도가 운영하는 학교는 신지협회 실론 불교 지점 운영 63개교, 사원에서 직영하는 학교 13개교, 부유한 불교도가 운영하는 학교 27개교 등 모두 103개 학교로 늘어났다.

올코트는 외국인(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다른 어느 스리랑카 인들보다 제약을 덜 받으면서 인도, 영국, 스리랑카 등지를 오가면서 불교 부흥을 위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3)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

다르마 팔라
다르마팔라(1864~1931)는 외세의 지배로 침체에 빠져 있던 스리랑카의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불교를 부흥시킨 국민적 영웅이며 다방면으로 불교를 전파시키기 위해 노력한 현대인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르마팔라의 집안은 가구상을 하는 부유한 집으로 전통적으로 열심히 불교를 믿었다. 그는 영국식 교육을 하는 교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것이 그가 나중에 불교에 대해 더 많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어려서 구나난다 스님과 수망갈라 스님을 만나 불교와 민족주의에 관해 영향을 받고 올코트 경의 영향으로 불교의 세계화를 꾀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884년 올코트 경의 두 번째 스리랑카 방문을 계기로 다르마팔라는 신지협회 실론 불교 지점의 일원이 된다. 발라왓스키의 권고로 신지와 빨리어를 깊이 학습하게 된 그는 이때부터 넓고 풍부한 지식과 불교와 스리랑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불교와 스리랑카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특히 나이 20이 되어 재가 독신 생활(Anagarika)을 결심하고는 그때부터 국가와 불교를 위하여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부친으로부터 신지협회 실론 불교지점에 머무를 것을 허가받은 그는 신지협회 실론불교지점은 ‘불교의 복지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방을 청소하고, 자신의 침대를 손수 만들었으며, 사무에도 참여하여 문서도 스스로 만들고 그것을 우편으로 부치는 일조차 손수 했다.

1886년 올코트 경이 학교 설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스리랑카에 왔을 때 3개월간 그를 수행한 다르마팔라는 올코트 경의 이야기들을 통역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스리랑카 인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스리랑카 인들의 나약함과 절망과 퇴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깨달은 그는 단순히 올코트 경의 말만을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포함시켜 국민에게 자신감을 고취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그는 기독교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많은 파괴적인 만행을 깨달았다. 그는 서양에서 기독교를 등에 업고 들어온 비행, 육식, 음주, 외국을 모방한 이름, 외국식 복장의 애용 등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국민자각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불교에 기초한 그의 이런 운동의 전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1885년부터 1889년까지 그는 〈산다라사〉의 경영자, ‘불교 방위 협의회’의 간사등으로 종사하면서 〈산다라사〉 확대 정책의 일환으로 불교계 최초의 영자지였던 〈The Buddhist〉를 창간했다.

1891년 초 불교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부다가야의 폐허를 보고는 세계 각국의 불교도들에게 ‘어찌 우리가 불타 세존께서 도를 이루신 이곳 부다가야를 이렇게 황폐한 상태로 방치할 수 있는가?’라는 호소문을 보냈다. 콜롬보로 돌아온 그는 1891년 5월 31일 수망갈라 스님을 의장으로 하는 대각회(Mahâ Bodhi Society, 大覺會 또는 大菩提會)를 결성했다. 그는 스리랑카 내의 문제로 머무르던 불교 부흥 문제를 외국으로까지 시야를 넓힌 것이다.

또한 그는 불타가 최초로 설법을 하신 애살라 포야데이에는 승려들이 부다가야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해 7월 10일 스리랑카의 승려 4명을 부다가야에 머무르게 했다. 그후 부다가야의 부지를 불하받아 대각회에서 사용하려 했으나 힌두교도를 앞세운 인도 정부의 비협조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다르마팔라는 임종의 자리에서 다음 생에는 힌두교도 브라만의 가정에 태어나 불교도가 부다가야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겠다고 했다. 이듬해 대각회의 사무실을 콜롬보로 옮긴 그는 《The Mahâbodhi(大覺)》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불교 국가들의 소식과 불교의 국제 교류 내용 등을 게재했다.

1893년 9월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종교의회’에서 그는 상좌부 불교권의 대표로 ‘불교에 대한 세계의 부채’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미국인 스트라우스는 그의 연설에 깊은 감동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여 오계를 받고 후일 대각회의 충실한 후원자가 된다. ‘세계종교의회’가 끝난 후 일본과 중국을 여행하기 위해 호놀룰루 항구에 갔을 때는 중년의 호스터 부인을 만나 백만 루피에 달하는 거금을 기부받아서 스리랑카에 사원, 학교, 병원 등을 지을 수 있었다.

1895년 2월 일본의 도움으로 부다가야에 불상을 봉안했는데 힌두교도들이 그 불상을 길가에 내다 버렸다. 이에 다르마팔라가 법정소송을 제기하니 비록 소송에 승리하지는 못했으나 이것이 유명한 부다가야 소송이다.

1898년에 그는 스리랑카인들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다시 나라 전체를 순회하며 종교적, 문화적 자부심을 호소했다. 그 후 북인도와 남인도를 차례로 방문해 불교를 중심으로 한 평화와 문화의 재창달을 호소하면서 특히 남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와 불가촉천민들에 대우의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1902년부터 3년간 미국 방문에서 그는 하버드, 보스턴 대학교 등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불교심리학 강의를 했다. 그는 불교의 포교에만 그치지 않고 스리랑카 민족자본의 형성을 위한 노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의 지원을 받아 직조 공장과 직업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었다.

1906년에는 주간지 〈싱할라 붓다〉를 시작하여 스리랑카인들에게 참다운 상좌부 불교를 다시 알리기 시작했다.

1913년 하와이로 포스터 부인을 방문했던 다르마팔라는 귀국길에 한국을 들렀다. 이때 한국 불교계에서는 그를 융숭히 맞아주었으며 당시 한국불교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던 다르마팔라는 한국불교에 대한 감명의 표시로 자신이 모시고 다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기증했다. 그 사리는 조계사 앞뜰의 사리탑에 모셔졌으며 지금은 새로이 사리탑이 조성되어 많은 이들의 경배 대상이 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여러 도시에 대각회의 지부를 결성하여 수시로 드나들면서 포교에 힘쓰던 그는 1931년 7월 13일 드디어 아나가리까(Angarika, 재가 독신 생활)를 청산하고 승단에 입문하게 된다. 바루가무워 레웨따 스님을 은사로 아나가리까가 아닌 스리 데와미따 다르마팔라라는 사미승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승려가 되어서도 그는 캘커타에서 불교 강의를 하면서 그해 말까지 물라간다꾸띠사를 완성시켰다. 1933년 1월 16일 많은 승려들의 축하를 받으며 구족계를 받았다.

1933년 4월 28일 마하트마 간디와 더불어 남아시아 민족주의의 기치를 내걸었으며, 스리랑카 불교의 부흥뿐 아니라 불교의 세계화에 정열을 바쳤던 다르마팔라는 임종을 맞았다.

4) 아리야라트네

아직도 불교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이상 구현을 위해 애쓰고 있는 아리야라트네는 1931년에 스리랑카 남부 갈레 지방의 우다와뜨나에서 태어나서 갈레에 있는 마힌다칼리지에서 교육받고, 콜롬보의 나란다칼리지에서 1972년까지 교사를 지냈다. 그는 그동안 위디요다야 대학에서 경제학 학사와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필리핀 에밀리오 아구이날도 대학에서 인간학 명예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58년에 사르보다야 샤르마다나 운동을 시작했으며 이 운동을 통해 불교도로서 스리랑카의 정치는 물론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1969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고 1996년에 인도 정부가 수여하는 간디평화상, 1992년에는 니와노평화상, 2007년에는 스리랑카의 최고의 상인 스리랑카 비마니야를 수상했다. 1994년 미국 미네소타의 험프리 학교에서 험프리 국제인권상을 수상할 때는 페트릭 멘디스 박사가 그를 ‘스리랑카의 간디’라고 칭송했다.

간디의 비폭력, 지역 발전과 자신의 만족이라는 원리를 믿는 아리야라트네는 발전의 대중적인 원리와 무아와 연민이라는 불교적 이상을 연결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독실한 불교도로서 스리랑카는 물론 다른 국가들에서도 수만의 ‘가족 공동체’와 참선을 하는 이들을 이끌고 있다. 사르보다야 운동은 처음에 40명의 나란다칼리지 학생들과 12명의 교사들이 참석하여 소외되고 있는 지역민들을 지역민들과 융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불교에 기초한 ‘교육적 실험’으로 시작한 운동이다.

이 운동은 간디의 이상과, 불교의 철학과 보편적 영성주의라는 세 가닥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이의 복지’라는 산스크리트어 사르보디야를 불교적 입장에서 ‘모든 것을 깨움’이라는 뜻으로 재해석한 사르보디야 운동은 사람이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 있음을 강조하며 조그만 마을이 국가의 심장이며 영혼과 도덕적 비전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운동은 각각의 마을의 정치적 힘의 증대. 불교도들의 각성과 지역적 발전을 초점으로 하고 있다. 이 운동은 사회 질서의 기초로서 구조적인 폭력을 대신할 비폭력 영혼의 혁명을 부른다. 이 영혼 혁명이 빈곤이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불교적 가치를 의미한다.

아리야라트네는 사르보다야 운동을 비폭력, 무상함, 무아와 사성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불교도는 스스로 명상적 훈련을 통해 탐욕이나 미움이나 어리석음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긍정적으로 사회 속으로 몰입되게 하는 체계적인 자세인 비폭력의 자세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비폭력의 생각을 사르보다야 사르마다나의 주요 항목인 마을의 발달에 가난과 같은 고통을 제거하는 데 적용시키려 했다.

아리야라트네는 자신의 운동에는 마을에서는 승속을 막론하고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을은 아리야라트네가 스리랑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심지였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도 아주 중요하게 취급했다. 아리야라트네의 경제에 대한 인식은 불교 경제라는 원칙에 입각했는데 그는 ‘인간의 경제적 삶이란 그 스스로의 궁극적 삶과는 다른 것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이 이런 성스러운 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 행복의 길을 좇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했다.

3. 맺는 말

이상으로 스리랑카에서 근·현대에 불교를 부흥하기 위해 또는 불교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이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은 스님이 한 명, 재가자 세 명이며 국적을 따지면 스리랑카인 세 명 외국인 한 명이다. 시기적으로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 세 명 그리고 스리랑카 독립 후에는 아리야라트네 한 명이다. 이들 중 구나난다 스님과 다르마팔라는 가톨릭과 인연을 맺을 뻔하다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공통적 특징이 있는데, 그들과 인연이 될 뻔했던 가톨릭이 오히려 그들이 불교에 대해 확신을 갖는 데 영향을 미친다. 구나난다 스님, 올코트, 다르마팔라는 기독교를 표방하는 영국의 식민지라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스리랑카와 불교를 위해 애를 써서 오늘날 스리랑카 불교의 초석을 다져 놓은 이들이라 하겠다. ■

 

송위지 
성원불교대학 교수. 한국외국어대 졸업. 스리랑카 국립 켈레니야대학 철학박사. 을지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역서로 《불교 선수행의 핵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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