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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 천년’의 기대와 반성 / 오윤희
‘초조대장경 1,000년의 해’ 기념논단
[46호] 2011년 03월 01일 (화) 오윤희 huayen@ggu.ac.kr

1. 천년의 대장경, 비판 또는 반성

   

오윤희
전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2011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고려대장경 조성을 시작한 지 천년이 되는 해, 이른바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이다. 오래전부터 꿈꾸며 준비해 오던 시간이어서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남다르다. 새해 벽두, 중앙 일간지에 천년의 해에 대한 칼럼이 실렸다. 그럴 법한 일이긴 하지만, 썩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초조대장경 조성 첫해인 1011년을 기점으로 잡으면 올해가 꼭 1000년이 된다. 불교계는 전부터 기념사업을 준비해 왔다. 노무현 정권 시절이었던 2007년에는 김명곤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 등이 참석해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선언식까지 열었다. 하지만 막상 2011년이 열렸는데도 기념행사 소식이 별로 들리지 않는다. 초조대장경 경판이 있었던 대구, 합천 해인사가 있는 경상남도에서 지자체 차원에서 각각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서로 역할 분담이 안 돼 대구와 경남의 행사는 중복된 것도 있다. 서울에서는 이렇다 할 기념행사조차 없다. 자칫 하면 지방행사 정도로 그치고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 정부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중략) 대장경 밀레니엄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살펴볼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장경 1000년을 단순한 불교계 행사로 봐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국가적 차원의 행사로 제대로 기념했으면 한다.

지난해에도 다른 언론에도 비슷한 논조의 칼럼들이 발표되었던 적도 있었고, 몇 년간 기념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면서 느꼈던 일들이어서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천년의 해를 맞는 새해 벽두부터 이런 비판의 소리를 듣자니 자괴감이 앞선다.

위 칼럼에서도 지적했듯, 2007년 4월 고려대장경연구소 주최로 ‘천년의 해 선언식’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두루 참석하여 성황을 이뤘다.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세계문화유산 고려대장경의 면모에 어울리는 지적, 문화적 가치와 잠재력, 천년의 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들을 역설했고, 문화관광부 장관은 인사말에서 빚을 내서라도 세계인들이 함께 즐기며 기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다. 기대와 말의 성찬만으로 따지자면, 그때가 오히려 천년의 정점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칼럼의 저자는 ‘단순한 불교계 행사로 봐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지만, 현실을 따져 보면 이제는 ‘단순한 불교계 행사’조차도 제대로 치루기 어려워 보인다. 지자체 차원의 지방행사, 지역축제로 끝날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 칼럼의 비판과 반성이 정말로 필요한 상황이라면 누구보다 우리 자신, 이른바 불교계 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고려대장경은 불교계의 자산이고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간 불교계는 밖에서 오는 기대와 희망에 부응하지 못했다. 선언식 이후로 여러 종류의 기회들이 있었다. 전문가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정부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불교계’는 말 그대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국가적인 행사’로 이끌지도 못했고, 천년의 대장경이 지닌 잠재력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천년이라는 시간의 구분이야 사실 유별날 것도 없다. 시간이야 언제나 흘러가는 것이고, 지나고 나면 흔적이 남을 일도 아니다. 어쨌든 천년이라는 키워드는 우리 사회에 주요한 아젠다가 되었다. 저 칼럼 안에서도 선언식을 전후해 공개되었던 천년의 키워드들을 나열하고 있다. 경남이나 대구시 등에서 큰 규모의 기념행사들이 준비되고 있고, 적지 않은 규모의 국가 예산도 집행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 대만 등, 대장경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주변 국가 어디서도 이런 규모의 행사를 치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관심도 매우 높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형식은 이미 국가적인 사업이 되었고,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는 이벤트가 될 것도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관심과 기대, 희망에 비해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통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역할 분담이 안 되고 행사가 중복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지자체 사이에서도 불교계 안팎에서도, 심지어는 대장경을 연구한다는 소수의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초기에 오가던 소통의 장치나 방법에 대한 논의도 희미해지고 말았다. 그 사이 사업들은 고립되고 있고, 사람들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요즘 여야 간에 무상복지나 부자세 등의 문제를 두고 이른바 ‘프레임’ 게임이 한창이다. 게임이라 했지만 프레임을 선점하고 지배하려는 의지는 게임을 떠나 전쟁을 방불케 한다. 특정한 프레임이 대중 가운데 한번 정착하고 나면, 바꾸기도 어렵고 대응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란다. 특정한 사안에 특정한 프레임이 고정관념이나 우상처럼 지배하기 시작하면, 사안이나 관점을 왜곡하게 되어 비판이나 소통에 장애가 생긴다는 것이다. 최근 몇 차례 크고 작은 선거를 겪으며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은 프레임 논란은 한국의 정치문화, 소통의 문화가 발전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증거로 보인다. 프레임이야 어찌 됐든 주요한 아젠다 들에 대한 논의와 이해의 지평을 넓혀 주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에도 유사한 프레임들이 작용하고 있다. 2007년 선언식에서 언급된 키워드들은 주로 지식과 문화, 미디어 등의 고려대장경이 지닌 보편적인 가치와 의의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키워드들을 두고 소통을 시작했을 때, 고정관념으로 정착한 프레임들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전쟁이나 종교적 신앙과 같은 프레임들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사회에 정착한 고정관념들이 새로운 키워드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발상, 열린 소통을 장애하기 시작했다. ‘역할 분담이 되지 않고, 행사가 중복되는’ 까닭도 천년의 대장경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프레임에 왜곡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도의 차이나 왜곡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노력만 한다면 쉽게 해결할 수도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기념사업을 이끌어 가는 주체들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일에 비판과 반성이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어떻게든 개선이 될 여지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소통의 방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불교계’가 앞장을 서야 할 일이다. 천년의 대장경은 어쨌거나 ‘불교계’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천년의 대장경이 나라와 민족의 보배라고는 하지만, 불교계를 빼놓고는 이런 얘기들을 이끌어 갈 주체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2. 고려대장경에 대한 기존의 프레임

1) 전쟁의 프레임

고려대장경에는 항상 전쟁이 따라다닌다. 거란의 침략에 맞서 초조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했고, 몽고의 침략에 맞서 재조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얘기는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이 가진 독특한 프레임이다. 전쟁의 프레임은 고려대장경에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프레임은 우리 사회 밑바닥에 깊게 깔린 피해와 압박, 소외의 프레임이다.

우리의 고려대장경은 전쟁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이규보의 〈군신기고문〉에서 시작하여 일본의 학자들이 부추기고, 우리 지식인들, 불교계가 비판 없이 수용했던 프레임이다. 전쟁의 프레임은 집요하고 완고하다. 물론 대장경을 새긴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과 같은 주요한 계기가 일정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전쟁통에 국론통일과 같은 목적도 필요했을 것이고, 종교적인 신앙심을 통한 결집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정황들을 굳이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장경 조성의 목적을 시종일관 전쟁과 연결시키는 일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전쟁의 프레임은 대장경의 역사가 지닌 여러 가지 긍정적인 특성들을 단순화시키고 침묵하게 한다. 프레임을 왜곡시키는 일이다. 건전한 비판과 필요한 소통을 장애한다.

대장경 조성이라는 일은 돈과 권력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니다. 18세기 초 일본의 학승 인징(忍澂, 1645~1711)은 고려재조대장경과 황벽대장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대교했던 분이다. 그는 고려재조대장경을 교정각판장(校正刻板藏)이라고 지칭하며, “만국무쌍(萬國無雙), 진미진선(盡美盡善)의 선본(善本)”이라고 찬탄했다.

 고려대장경의 특징과 장점을 교정과 각판, 목판 인쇄술의 측면으로 요약한 것이다. 고려대장경은 매체의 측면에서도 내용의 측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수한 대장경이란 말이다. 이런 평가에 전쟁이 끼어들 소지는 없다. 오히려 전쟁의 와중에 그런 물건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교정각판장의 지위, 그런 대장경을 만들 수 있었던 고려인, 고려문화의 역량을 돋보이게 할 뿐이다.

인징의 대교사업만 해도 막부와 장군의 후원이 불가결한 조건이 되고, 불굴의 원력과 신앙심이 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의 일을 장군의 일, 신앙의 일로 재단하지 않는다. 남의 나라 남의 대장경에 관한 일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인징의 일은 만자(卍字)대장경을 거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만국무쌍의 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이 아니라, 대정신수대장경이다. 고려대장경은 인징을 거쳐 일본의 문화가 되고 지식이 되고, 국력이 되었다. 이런 일을 전쟁의 프레임으로 봐야 한다면, 고려대장경은 패자의 대장경이 될 뿐이다.

고려는 만국무쌍의 대장경을 조성할 수 있는 지적, 물적, 기술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지난 수년간 초조대장경 디지털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초조대장경 또한 교정대장경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적어도 초조대장경 조성을 시작했다는 1011년부터 재조대장경을 완성했다는 1051년, 그 사이 240년의 세월 동안 끊임없이 교정하고 증보해 온 일이었다. 다른 나라의 대장경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고려대장경의 정확성은 전쟁의 위기에서 급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때 묻고 좀먹은 고문헌들을 털고 닦고 앞뒤를 맞추어 교정하고 새로 써서 아름답게 목판에 새겨 낼 수 있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 기술과 노력이 면면히 이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을 일으켜 고려대장경의 조성을 촉발했고, 또 애써 만든 대장경을 태워 먹었던 무지몽매한 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해인사 팔만대장경(고려재조대장경) 안에는 거란이라는 말이 무수히 등장한다. 거란이 만들었던 대장경이 없었다면 만국무쌍의 대장경도 없었다. 교정대장경, 고려대장경은 거란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의 편집자들은 대장경 안에 교정기와 행간주석의 형태로 거란 대장경의 전통을 분명하게 새겨 놓았다. 이런 기록, 이런 전통을 전쟁의 프레임만으로 어떻게 읽고 계승할 수 있을까? 이제 거란이라는 민족도 나라도 없다. 거란대장경이 얼마간 발견되고는 있지만, 거란대장경이 없었다면 지금의 고려대장경도 없었을 것이고, 고려대장경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거란대장경의 가치도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 이런 얘기를 누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려대장경의 정점은 누가 뭐라 해도 대각국사 의천이 결집했던 제종교장(諸宗敎藏), 고려 속장경이라 하겠다. 일본의 오야 도쿠조(大屋德城, 1882∼1950)는 교장의 편찬을 가리켜 “다방면으로 발달했던 고려 문화, 불교문화의 정화(精華)요, 공전(空前)의 위관(偉觀)”이라고 찬탄했다. 이 책의 서문은 풍운의 시절, 식민지 세계의 자료들을 마음대로 골라 읽을 수 있었던 일본 제국주의 학자의 감회로 시작하고 있다. 방대한 식민지 문화를 조감하며 커다란 지식의 지도를 그려 가던 제국(帝國) 신민(臣民)의 자부심이 넘친다. 피식민지 신민의 후손들이 읽기에는 민망한 글이다. 아무튼 우리가 전쟁의 프레임에 기대어 ‘외적을 물리치기 위한 대장경의 위신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일본의 학자들은 고려대장경의 진정한 가치, 지적, 문화적, 기술적 가치들에 감탄하고 있었다.

2) 종교, 신앙이나 신념, 또는 근본주의의의 프레임

고려대장경에는 오자가 없다고 한다. 글자 하나를 쓰고 새길 때마다 세 번 절하고 정성껏 새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인사의 장경각에는 새들도 깃들지 않고, 위를 넘지도 않으며, 벌레도 슬지 않는다고 한다. 아름답고 신비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말, 이런 생각도 고정된 프레임으로 고려대장경을 왜곡시킨다. 이런 말을 들으면 신심이 지극한 불자들의 입장에서야 아름답고 고맙게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먼, 타자의 물건이 되어 버린다.

이와는 정 반대의 프레임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유생들이 가졌던 프레임이다.

대장경은 이단(異端)의 책이므로, 비록 태워버린다 하더라도 가(可)합니다. 더욱이 인접(隣接)한 국가에서 구하니, 마땅히 아끼지 말고 주어야 할 것입니다.

불경을 일본에 주는 것으로 말하면, 국가에 쓸데없는 물건이라 하여 다른 나라에 버리니, 이는 우리나라가 불교를 받들지 않는 뜻을 밝히는 것이라 하겠고, 이웃 나라가 구하는 것을 부응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찾아서 주니 교린하는 의리를 두텁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진 사람은 자기가 그 지위에 서고 싶으면 남을 세우고, 자기가 그 지위에 오르고 싶으면 남을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꾀하되 충성스럽지 않은 것을 군자가 반성하는 것인데, 나에게 쓸데없는 것을 가져다가 주어서 받들게 하니, 이것이 어찌 교린을 중후하게 하는 도리입니까?  

일본에서 대장경을 달라고 하는 데 대한 의논의 일단이다. 한 사람은 태워 버려도 무방한 물건이니 아끼지 말고 줘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일본에 대장경을 주는 일을 나쁜 물건을 버리는 일이라고 한다.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남에게 권하거나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군자로서의 도리도 아니고 교린의 의리도 아니라고 한다. 태워 버려야 할 물건이건, 쓰레기 같은 물건이건, 아무튼 조선의 유생들은 대장경을 일본에 기꺼이 수출하고 만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바미안의 석불을 폭파시켜 버리는 것과도 같은 지독한 근본주의 프레임의 싹을 보는 듯도 하다.

한국 불교계 안에는 이와는 또 다른 성격의 프레임도 있다. 선(禪)과 교(敎)를 가르는 전통의 프레임이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이라는 명제 같은 것이다. 이런 명제를 프레임이라고 낙인찍는 까닭은 그 같은 전통적인 구분 안에 왜곡의 위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수행을 중시하고 말을 가볍게 여기는 전통이다. 이런 전통이 고려대장경에 이르면, 대장경은 그저 말일 뿐이라는 시니컬한 명제로 귀착하고 만다. 간화선의 전통이 강한 한국불교에서 이 같은 프레임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특히 크다.

의천은 말년에 근심이 병이 되어 경서를 읽거나 독송할 때마다 심장에 통증을 느낀다고 했다. 스물세 살에 《화엄경》 강의를 시작한 이래 이십 년을 전혀 쉰 적이 없었다던 의천이다. 그 사이 책 삼백여 권을 강의하며 우리말(方言)로 번역했다고도 한다. 40여 년의 짧다면 짧은 인생,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오천 권에 달하는 교장을 편찬했고, 《원종문류(圓宗文類)》  《석원사림(釋苑詞林)》과 같은 대규모의 결집을 해냈다. 대각국사 문집 안에 보이는 의천의 삶은 전형적인 학승의 것이다. 어려서 말씀에 대해 발원을 했고, 평생을 책에 집착했다. 송과 요의 학승들, 멀리는 서역이나 일본의 학자들과 교류하는 까닭도 뜻이 모두 책이나 말씀에 있었기 때문이다.

간화선의 전통, 수행의 가풍이 강한 한국불교에서 의천과 같은 인생은 역시 낯선 인생이다. 고려대장경 안에는 의천과 같은 꼬장꼬장하고 소심한 학승들이 이어 온 종교와 신앙의 전통이 담겨 있다. 담대한 선승들의 어록은 남의 돈이나 세고 남의 노래나 따라 하면서 인생을 허송하는 일에 대한 경고들로 넘쳐난다. 의천 자신도 반복해서 비슷한 경고를 되새기고, 수행의 부족을 반성하지만 아무튼 그는 남의 말을 정리하는 학승의 삶을 선택했다. 의천은 교장의 조성을 말세에 무너진 가르침의 그물, 교망(敎網)을 수선하고 복구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늘그막에 가야산 해인사의 물과 숲이 주는 즐거움에 빠지기도 했지만, 누구도 하기 힘든 일,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런 일이 일본의 학자들이 찬탄했던 만국무쌍의 일이었고, 공전의 위관을 드리우는 일이었다.

불교계 안에도 이처럼 낯선 프레임들이 존재한다. 낯선 만큼 왜곡의 가능성도 크다. 공전의 위관과 같은 찬탄이야 달콤할 수도 있지만, 그런 찬탄이나 키워드들을 통해 수행의 길이나 종파 사이의 차이를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이 일을 두고도 그런 프레임들이 작용하고 있다. 

3) 민족, 또는 국가의 프레임

20여 년 고려대장경 일을 하면서 여러 종류의 프레임에 직면했던 경험들이 있다. 대장경과 관련하여 국가의 지원을 호소하고 다닐 적에, 불교의 일을 왜 국민의 세금으로 하려 하느냐는 이른바 이교도 공무원의 질책을 받은 경험도 있다. 또한, 대정신수대장경이 대세인 세상에서 왜 고려대장경에 집착하느냐는 국내외 학자들의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고려대장경에 집착하는 일은 천박한 민족주의, 국수주의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멀리 갈 일도 아니다.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기념사업이 진척되어 가면서 외국의 학자들이 보인 태도는 한결같이 ‘의아하다’는 것이었다.

천년이라는 시점에 보인 호기심과 기대는 점차 시들해지는 반면, 수백억의 국가 예산이 배정되고, 여러 곳의 지자체에서 대규모 행사들이 기획되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지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품고 있는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의심스럽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지자체마다 서로 다른 성격의 학술회의를 독자적으로 추진하면서 얼마 되지도 않는 외국의 학자들을 저마다 초청하는 상황에까지 닥쳐서는 민족주의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의 양상으로까지 비치기도 했다.

해인사의 장경각 앞에 서면 누구나 장엄함을 느낀다. 고려대장경은 분명 우리 민족,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고, 값진 불교의 자신이다. 장경각이나 팔만 장의 목판이 주는 위엄은 한국 사람이나 불자들에겐 국가나 민족, 자신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일 수 있지만, 외국사람, 이교도에게는 더 큰 보편적인 가치일 수 있다. 이런 느낌이나 가치에는 분명 차이가 나다. 하지만 차이가 난다고 해서 꼭 대립하거나 배척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차이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프레임을 얘기하는 것이고, 프레임의 왜곡을 경계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천년의 대장경이, 나아가 천년의 일을 이끌어 가는 주체들이 민족이나 국가를 앞세우며 작은 우리, 소아(小我)의 프레임에 갇히지는 않았던가 염려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다 젖혀 놓더라도, 무엇보다 고려대장경은 고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나 대한민국만의 소유가 아니다. 고려초조대장경은 송나라의 개보대장경을 뒤집어 놓고 새긴 복각본 대장경이다. 재조대장경도 정교하게 교정이나 편집을 했다지만 기본적으로는 초조본을 베낀 것이다. 베끼는 역사, 짝퉁의 역사를 빼놓고 고려대장경을 얘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민족적인 우월감을 앞세우며 고려대장경을 덮어놓고 자랑하면 할수록 송나라 개보대장경의 후예들에게는 가소롭고 불편한 마음만 더해 줄 것이다.

내용을 따져 보자면 더 그렇다. 고려나 대한민국이 혼자서 저작권을 주장할 처지가 아니다. 인도에서 시작하여 서역의 여러 나라, 여러 민족들이 번역하고 유통시킨 문헌들이다. 그 하나하나의 과정에 많은 돈이 들었고, 정성과 공력이 담겼다. 중국 장안에서 집대성되어 대장경이라는 명칭으로 묶인 후에도,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쌓이고 쌓여 형성되어 온 물건이다. 고려대장경에는 그런 노고의 숨결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누구도 거기에 값을 치러 본 적이 없다. 고려대장경은 그저 고려에 있었던 대장경이라는 뜻 외에 더 이상의 뜻은 없다.

대장경은 아시아인들의 함께 만들어 온 공동의 창작물이다. 우리 민족이, 우리 선조가 혼자서 창조한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고려대장경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아시아인, 세계인들이 우리에게 그런 선물을 조건 없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고려대장경을 자랑할 수 있다면, 그 까닭은 우리의 선조 고려인들이 받은 선물을 잘 포장하여 세상에 다시 선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나긴 종교적인, 지적인, 문화적인, 기술적인 우호와 교류의 역사에 우리도 동참하여 한 수 거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몫을 주장하려 한다면 그저 그 중의 한 표만 가져오면 된다. 고려대장경 목판을 우리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긴 시간을 몽땅 우리 것이라고 우길 수는 없다. 대장경은 우리 민족, 우리나라보다 더 큰 우리가 함께 만들고 가꿔 왔던 물건이다.

북경 올림픽, 문방사우를 주제로 장이모 감독이 그린 이야기는 중화의 이야기였다. 세계의 손님들이 주시하는 자리에서 그는 중화민족을 자랑했다. 중국인들에겐 감격스러운 장면이었겠지만, 같은 동네에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살아왔던 주변의 나라, 주변의 민족들에겐 특히 불편한 장면이었다. 그런 일은 좋은 일에 손님을 대접하는 좋은 태도가 아니다. 장 감독은 중화의 프레임, 민족의 프레임에 왜곡되어 있었다.

그는 그런 좋은 기회에 민족의 이야기보다는 조금 더 큰 얘기, 보편의 얘기를 그렸어야 했다. 그런 게 손님을 맞이하는 좋은 주인의 태도이다. 주인이 좋아야 손님들도 함께 공감하고 기뻐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게 국가나 민족을 자랑하는 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프레임에 갇혀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하겠다.  

4)문화재의 프레임

고려대장경, 우리 사회에서 고려대장경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가리킨다. 아무튼 그 팔만대장경은 13세기의 유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려대장경은 오래된 고려적 문화재의 프레임에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얼마 전 개신교에서 대구시의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기념사업 계획을 비판하면서 “Old Korea”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었다. 상투적인 프레임 게임이라고 하겠다. 최근의 탬플스테이에 대한 처치스테이 계획도 비슷한 프레임을 싸고도는 것 같다.

지자체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천년의 해 기념행사 또한 비슷하다. 말하자면 관광이라는 키워드이다. 지자체에서 기념행사를 주관하는 부서는 모두 관광을 담당하는 부서이다. 지역에 소재한 문화재를 통해 지역의 관광산업을 활성화시켜 보자는 뜻이다. 천년의 해가 관광산업에 가져올 부가가치가 오천억이니 일조니 하는 연구 결과들도 있었다. 이 또한 나쁜 일도 비판할 일만도 아니겠다. 문제는 이런 프레임 덕택에 좀 더 큰 기념, 좀 더 큰 산업의 가능성, 잠재력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광으로 왔던 손님들, 왜곡된 프레임에 의해 불편해하지 않으며, 함께 감동하고 좋은 기억을 남기도록 해 주는 일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려대장경에 대한 연구는 서지학이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문화재로서의 ‘물건’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뤄왔다. 다시 말해 옛날 책, 옛날 문화재에 관한 연구였다. 관심을 가진 학자들도 드물었고, 연구 환경 또한 열악했기 때문에 그나마도 충분한 결과를 내기도 어려웠다. 초기의 연구는 일본의 선행연구들을 보완하는 수준이었고, 이제 겨우 주체적인 연구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정도라고 하겠다.

예를 들어 초조대장경에 대한 연구가 그렇다. 한국의 서지학자가 초조대장경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 1965년이었다. 일본 교토의 남선사에 소장되어 있던 천팔백여 권의 초조본. 그 후로 국내에서도 삼백여 권의 초조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선사의 초조본이 아니었다면, 우리 주위에 굴러다니던 초조본 또한 확인할 길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볼 수가 없다면 연구 또한 가능하지 않다. 아무튼 이제 우리도 볼 수 있고 연구도 할 수 있다. 그사이 서지학자들의 꾸준한 노력을 통해 이제 초조대장경이나 속장경에 대해서도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천년의 해 또한 그런 노력과 환경의 소산일 뿐이다.

초조대장경 이미지들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이후 외국의 학자들은 말 그대로 열광적인 환영의 뜻을 표현해 왔다. 초조대장경 이미지를 통해 동아시아 목판대장경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조본과 재조본 그리고 교정별록을 기준으로 다른 판본들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한문대장경 교정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다. 저들 고려대장경 이미지 안에는 11세기로부터 13세기 사이 고려인들, 고려 불자들의 노력과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아시아 지식 문화의 큰 비밀 하나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들이다. 이런 일은 종교의 문제만도 아니고, 민족이나 국가의 문제만도 아니다.

교장에 대한 연구 또한 마찬가지이다. 고리타분한 옛날 책의 대한 얘기가 아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있었던 일, 공전의 위관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화재의 프레임, 서지학의 프레임으로는 풀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동아시아 지식과 문화에 대한 큰 그림, 큰 지도를 그려가는 일이다. 오야 도쿠조가 제국 신민의 감회를 앞세우는 까닭도 그런 것이다. 제국의 위력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는 자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국의 위세를 앞세워 고려 속장경, 교장의 자료들을 볼 수 없었다면 《고려속장조조고(高麗續藏雕造攷)》라는 노작 또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이나 팔만대장경, 초조대장경이나 재조대장경, 이런 표현 안에는 특정한 사실만이 담긴다. 고려 때 만든 대장경, 처음 새긴 대장경, 팔만 장의 대장경 등으로 얼마간의 사실만을 담을 뿐이다. 이에 비해 고려각판대장경, 만국무쌍, 진미진선, 공전의 위관과 같은 표현에는 가치에 대한 평가가 함께 담긴다. 가치에 대한 평가는 볼 수 있는 사람들, 알 수 있는 사람들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평가를 내려 본 적이 없다. 국가나 민족, 종교를 떠나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평가하고 주장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를 계기로 외국 학자들의 관심이 한국으로 쏠리고 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때가 있고 인연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때나 인연은 원하고 바란다고 찾아와 주는 것도 아니다. 천년의 해는 참으로 좋은 때이고 인연이다. 고려대장경이 지닌 보편적인 가치들을 힘을 모아 함께 따져보고 의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소수의 서지학자나 역사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의논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열려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풀어가고 아젠다를 이끄는 주체는 아무래도 불교계이고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불교계나 불교학자들의 관심 부족이 특히 아쉽게 느껴진다. 어찌 보면 주인과 손님 사이에 프레임의 역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느긋한 불교계나 불교학자들의 태도에 비해 외부의 기대와 희망은 갈수록 날이 선다고나 할까?                

3. 천년의 일, 프레임을 넘어 미래를 향하여

고려 고종 19년 임진년(1232년) 몽골의 군대가 부인사의 대장경을 태워 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이런저런 가정을 대는 일이 부질없다고는 하지만, 상상까지 막을 필요는 없겠다. 당시 부인사에는 초조대장경과 고려교장을 합하여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두 배에 달하는 목판들이 말 그대로 공전의 위관을 떨치고 있었을 것이다. 저들 달단의 무리들이 부인사의 장경각을 불 지르던 순간, 고려인들의 결집, 고려인들의 대장경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대장경이었다.

그 후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다시 조성했다지만, 이는 절반의 조성이었을 뿐이다. 초조대장경을 저본으로 교정, 개선하였지만, 제종교장 부분의 복원에까지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종교장이야말로 한문대장경 역사의 정점이다. 한문대장경의 역사는 오히려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 부인사의 고려대장경이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면, 그래서 고려인의 결집이 고려교장을 넘어 꾸준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아시아는 물론 인류 지식 문화의 지형도 또한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서구가 르네상스로 깨어나고 종교개혁, 산업혁명을 겪으며 변혁과 진보를 거듭하는 동안, 동아시아가 거듭 내리막길을 걷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동아시아는 내리막길을 겪는 동안,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동아시아는 화혼양재(和魂洋才)니, 중체서용(中體西用)이니, 동도서기(東道西器)와 같은 명제를 앞세우고 생존과 적응에 급급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동아시아의 약진은 경제성장을 넘어 지식과 문화의 역사조차 바꿔가고 있다. 또 다른 변혁의 시대, 매체가 뒤집히는 시대, 디지털의 시대에 고려대장경의 나라, 아이티 강국을 자부하는 나라에서 천년의 해를 맞이하는 일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고려대장경 또한 매체가 뒤집히던 시대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은 한 자 한 자 손으로 써서 전달하고 소통하던 시대로부터, 인류 최초의 인쇄술, 대량복제의 길을 열었던 목판 인쇄술의 시대를 상징한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생물학적 유전자, 진(gene)에 빗대어, 문화의 유전자, 밈(meme)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썼다. 미디어의 나라, 한국. 우리 안에는 만국무쌍, 공전의 위관과 같은 고려대장경의 밈들이 담겨 있다.

목판 인쇄술은 아시아 매체 문화를 상징한다. 그 정점에 한문대장경이 있고, 그 위에 고려대장경이 있다. 매체라는 게 무엇인가? 매체가 발달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매체는 문자 그대로 소통을 위한 매개이고 도구이다. 매체가 발달했다는 사실은 소통이 열려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이야기할 때, 그가 인쇄했던 성경을 거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연히 종교적인 선입견이나 편견이 개입할 여지도 없다. 인쇄술이라는 혁신적인 테크놀로지가 가져온 결과에 주목할 뿐이다. 매체의 혁신이 지식과 문화, 나아가서는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런 까닭에 〈타임〉은 2천년 밀레니엄에 앞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인류 최대의 사건으로 꼽았다.

밀레니엄으로 치자면 고려대장경 천년도 밀레니엄이다. 천년의 해 선언식에 참석하여 기조연설을 했던 이어령 선생도 그런 얘기를 했다. 당시 문화부 장관으로 밀레니엄 기념행사를 주관했던 당사자로 고려대장경의 밀레니엄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의 밀레니엄이 서구의 밀레니엄이었다면 고려대장경의 밀레니엄은 우리의 밀레니엄이고, 아시아의 밀레니엄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고려대장경은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물건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과 나라를 대표할 수도 있고, 아시아 문화를 상징할 수도 있고, 인류가 겪어온 역사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천년에 걸리는 기대와 희망은 단순히 천년이라는 시간적 구분에 걸린 것만은 아니다. 의천은 교장조성을 서원하면서 천년 뒤의 미래를 예견했다. 과거 천년을 이어 온 지혜와 지식을 결집하여 미래 천년으로 넘겨주는 일이라고 했다. 말씀의 결집이 미래의 중생들을 위한 것이었듯, 고려대장경의 조성도 미래를 향해 있었다.

아무튼 천년의 해는 밝았고, 불교계가 되었건 지자체가 되었건 기념행사들은 성대하게 열릴 것이다. 굳이 프레임이라는 또 다른 프레임을 설정하면서까지 고려대장경 얘기를 다시 꺼내는 까닭은 기대와 희망이 있기 때문이고 비판과 자성의 소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밑에 고려대장경에 대한 완고한 시각의 프레임들이 존재한다. 저런 프레임들은 진실 여부를 떠나 열린 소통, 미래를 향한 꿈을 왜곡하고 장애한다. 비판이나 자성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저 같은 프레임들을 깨뜨려야 한다. 불교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다면 그런 일을 앞장서서 과감하게 해 주길 바라는 일일 것이다. 불교계가 할 수 없다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큰 얘기는 그만두고라도 적어도 고려대장경에 대한 얘기만큼은 원 없이 충분히 오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

 

오윤희 / 전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 봉선사 월운 강백 문하에서 한문 불전 사사. 1993년 해인사에서 고려대장경연구소 설립에 참여했으며 2005년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에 취임했다. 그동안 ‘한일공동고려초조대장경 디지털화 사업’ ‘고려대장경지식베이스’ ‘고려대장경이미지연구지원시스템’ ‘고려대장경−돈황사본 대조연구지원시스템’ 등의 프로젝트를 기획, 추진했다. 저서로 《매트릭스, 사이버스페이스, 그리고 선》 《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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