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적 가치의 사회적 구현

―탐·진·치로 유지되는 사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1. 들어가는 말

윤세원
인천대 교수
현대사회는 급격한 변동 사회이다. 이 변동은 역사 발전 과정에서 늘 있어 온 전 단계의 연장선 위에서 일어나는 추가적인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문명으로 진입하는 차원의 변화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변화는 지구와 문명의 충돌이라는 내재적 성격을 가진 것이고, 그 결과는 국가와 종교의 역할뿐만 아니라 기존의 모든 관점에 수정을 요구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계몽주의 진화 과정의 끝자락에 위치한 현대사회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와 종교는 관심 영역과 목표의 실현 방법이 전혀 다르지만, 양자 관계의 심층에는 서로 분리 불가능한 연기적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다. 정치의 중심 과제는 공동체의 유지와 세속적인 삶의 문제이고, 종교의 중심 과제는 정신적인 영역의 문제이다. 그러나 어떠한 정치 공동체도 구성원의 정신적 성숙을 자신의 임무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구성원의 정신적 성숙이 국가의 존재 이유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임무를 포기한 국가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국가로서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교의 정신적 원리들이 사회적인 가치, 이상 그리고 이익의 의미로 전환될 수 없거나 혹은 가치 있는 세속적인 일들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그러한 원리들은 종교와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사회 속에서 생명력을 갖고 존재할 수 없다.

국가의 존재 이유와 정치의 필요성은 국가목적의 실현에 있다. 플라톤(Platon) 이래 국가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전체 도덕세계의 수호자”라는 국가에 대한 정의는 정치와 종교의 근원적 관계를 좀 더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비도덕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종교는 없고, 도덕적인 사회건설을 포기하는 국가도 없다는 사실은 공통의 도덕적 목적이 정치적 이상과 종교적 목표를 포괄할 수 있는 차원의 것으로 설정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정치적 관점에서 도덕적 사회의 건설이라는 명제는 최고의 국가 목표이고, 불교적 관점에서 도덕적인 사회의 건설은 최고 단계의 목표는 아닐지라도 배제할 수 없는 불교의 목표 중의 하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최고의 국가 목표와 불교가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인 불국토의 개념을 일치시키는 일이 가능하다면, 양자 간에는 서로의 간섭이나 방해 없이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방법과 수단으로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순기능의 관계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론적인 차원에서일지라도 정교분리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와 불교의 윈윈(win-win)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 주어진 글의 주제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국가와 불교’이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관건은 현대사회에 대한 이해로, 그 핵심은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내재적 특징을 이해하는 일이다. 또 그것들이 어떠한 논리와 경로로 국가와 종교에 변화를 강제하게 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 글에서는 이러한 성격 변화를 강제하는 과정을 양자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사상적 관점에서 검토해 보고, 불교적 관점에서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어느 방향으로 향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현대사회에 대한 개괄적 이해
       
현대사회의 속성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성격에서 파생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의 두 개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고, 더불어 계몽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주요 관련 정치사회 사상에 대한 유기적인 검토의 선행이 요구된다.

1) 자본주의 

정치사상은 인간관 혹은 인간관이 포함된 세계관에서부터 출발한다. 자본주의는 철학적 자유주의라는 토대 위에 구축된 정치경제사회 사상이고, 이 사상의 기저에는 원자론적이고 무관계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인간관이 자리 잡고 있다. 철학적 자유주의는 인간 이성을 무한 신뢰하는 계몽주의의 한 유형이다. 계몽주의란 인간 이성 제일주의의 다른 표현이고, 계몽주의자들은 만약 인간의 이성이 방해 없이 그 능력을 100% 발휘될 수 있다면, 인간의 진보에는 한계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와 극단적인 대립각을 세웠던 사회주의 역시 계몽주의적 인간관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사실상 이 두 사상은 같은 모태에서 태어난 일란성 쌍생아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동일한 인간관의 바탕 위에서 인간의 무한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고, 또 성취코자 하는 목표를 각자 달리 설정했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철학적 자유주의의 최고 가치인 자유를 경제원리와 활동에 적용시킨 것이 경제적 자유주의, 즉 자본주의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유로운 경제활동 결과를 재산으로 보기이기 때문에 재산권은 매우 중요한 권리가 된다. 시장에서 자유롭게 돈을 벌 수 있고,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권리로 정착된 자유는 과정상의 인간적 요소를 배제하고 소유라는 결과만 문제 삼는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사고의 바탕 위에 종교개혁에 의해 발전된 개인의 주체성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경제적 이기주의로 변형되었다.

보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과 인류의 보편적인 진보를 담보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로 선택되었던 자유의 현실적 결과는 법적 불평등보다 더 가혹한 경제적인 불평등이라는 또 다른 장애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소유를 모든 것의 가치 척도로 삼을 수밖에 없는 내재적 요인을 안고 출발한 자본주의는 국내적으로는 전 국토의 시장화와 전 국민의 상인화 현상을 보편화시켰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국가 이기주의를 부추겨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국가 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연장시켜 놓았다.

한편,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경제적 불평등의 시정을 위해 평등이라는 가치를 정점에 놓고 출발한 사회주의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와 비인간적인 상황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놓고 사멸하고 말았다. 양 이데올로기의 대결과 실패는 그들의 공통적 토대인 계몽주의라는 근본적으로 잘못 설정된 세계관 내지 인간관에서 연유되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 역시 일찍 예견된 것이었지만, 두 이데올로기의 치열한 대결이 양자의 생명을 오히려 연장시켜 주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온 이념의 투쟁에서 모든 도전을 극복한 자유주의의 완벽한 승리로 인하여 더 이상 자유주의에 도전할 이념이 없음을 선언한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언》은 논문의 발표 시기가 동구의 몰락과 소연방의 해체라는 역사적 과정과 맞물리면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체제 사회주의의 몰락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그것은 양자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결로 난 승부라기보다는 자기 진화를 거부한 체제 사회주의의 경직성이 부른 자멸의 성격이 더 짙어 보인다.

반면에 인간의 탐욕에 편승해 자기 변신을 거듭해 온 자본주의는 윤리관 결핍에서 오는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다소간의 유용성이 있어 보인다. 때문에 이론적인 차원에서 자유와 평등의 갈등구조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원점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자론적이고 무관계적이며 이원론적인 인간관의 토대 위에서 자유는 강조할수록 구성원 간의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킬 수밖에 없고, 평등은 강조할수록 인간의 개성과 개인의 창의력을 말살시킬 수밖에 없다.

후쿠야마의 지적처럼 국가 단위나 초강대국을 정점으로 한 블록 단위의 이념 경쟁은 막을 내렸고, 대부분의 국가가 제도나 명분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각국의 정치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형식과 절차 그리고 제도로서 민주주의가 실제로 그것이 의도하고 기대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아니면 단순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인지는 다른 문제가 된다. 따라서 절차적 정당성과 그 절차를 통하여 이루어진 내용 정당성과의 관계가 정합성을 갖지 못하는 구조는 국가나 블록의 대결이 아니라, 내부 구성원 간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첨예화시켜 가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과두지배의 의사결정 구조 문제, 성(gender)의 문제, 소수자 문제, 빈부 문제 등도 자유와 평등 사이에 내재하는 갈등 구조의 또 다른 표출이라고 본다. 때문에 이념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표출 양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나의 자유가 남의 부자유로 전이되지 않는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 가치의 본질적 평등이 담보될 수 있는 인간관의 확립이다.

2) 산업사회

현대사회는 기술이 인간의 생활과 의식구조 그리고 가치관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는 사상이나 종교를 포함한 기존 정신적 권위체들의 역할이 과학과 기술로 대체된다. 심지어는 근대 이후 종교나 철학의 영역도 점점 과학과 기술의 영역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현대사회는 전통적인 종교의 역할과 가치가 점점 의미를 상실해 가는 종교의 위기 시대이다.

이러한 사회변동은 산업사회의 일반적 특징에서 추동되는 결과이고, 그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술이 사회적 행위의 판단 근거 역할을 하는 과학 제일주의 기술사회이다.

둘째,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메커니즘이 사회유지 시스템으로 작동하면서 소비가 미덕이라는 풍조를 일상화시키고, 즉석화의 생활양식을 보편화시키는 물질(물량)사회이다. 물질사회에서는 일회용이 일상화되고, 사람과 사물과의 일회적인 관계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도 전이시킨다.

셋째, 고도의 산업화, 공업화의 결과는 인구의 도시집중을 심화시켰다. 넷째, 조직사회이며, 다섯째, 대중이 역사의 객체에서 서서히 역사의 주체로 부상하여 권력의 원천이 된 대중사회이다. ‘대중의 반란’이라는 표현이 이 특징을 잘 대변해 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대중은 상호 간에 유대의식이 전혀 없는 철저히 고독한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로서의 군중에 불과하다. 여섯째 특징은 기술, 지식, 인구, 도시, 조직의 폭증과 각종 제도의 혼란 등의 요인으로 급격한 변동을 겪는 사회이다. 급격한 사회변동은 가치관의 갈등, 불안한 삶 등으로 심각한 정신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산업사회는 대량생산 체제의 작동원리로 신속화·기계화 ·자동화 ·물량화 ·규격화 내지 주물화 · 대중화 등의 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속성들은 인간성의 상실과 도덕적 사고력을 마비시키는 역기능을 수행하는 요인들로 지적되고 있다. 현대인의 무반성, 무책임을 조장하는 도덕적 사고력의 결여, 인간 존엄성의 상실, 비판 능력을 상실한 도구화된 인간형의 양산, 자기동일성(self-identity)의 상실로 이어지는 교환가치로 측정되는 인간 가치, 개인의 창조성이나 개성이 무시되는 의존적 인간형의 출현이 바로 대량생산 체제 작동원리들의 역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새로운 통신기술의 발달로 정보전달과 소통 매체가 진화를 거듭하면서 익명성을 무기로 무차별로 행해지는 언어폭력,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유전자 조작, 물질적 풍요에 대한 지나친 강조 등도 무시할 수 없는 반문명적 현상들이다.

극단적인 소유와 쾌락의 추구 및 결과 제일주의는 자본주의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산업사회 유지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쾌락과 소유의 극대화를 행복 추구로 착각하는 반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시대정신은 사회적인 것으로 치장된 사회 파괴적 속성들이다. 산업사회는 탐, 진, 치를 제거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부추겨야 자체 유지가 가능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산업사회가 승자독식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사고의 연장선 위에 구축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시장 실패자는 인생의 실패자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현대사회는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시장 실패자들을 정치적 · 경제적 ·사회적 · 육체적 소수자나 약자로 편입시키고, 반복적으로 이러한 현상을 확대 재생산하는 무자비한 사회라는 특징을 갖는다.

 3. 국가 역할의 축소와 성격의 변화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조화와 협력에 바탕을 둔 행위만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을 야기시키는 행위도 하는 존재이다. 때문에 인간의 공동생활에는 불가피하게 갈등의 요소를 축소 내지 제거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질서와 안정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여기서 정치의 필요성이 등장하고, 정치과정을 통하여 갈등을 조정 관리하기 위한 집단적 행위나 제도적 장치로서 국가나 정부를 필요로 한다.
현재 지구상에는 192개의 유엔 회원국을 포함하여 약 220여 개에 달하는 국가가 있다.

또한 역사상에는 국가라고 호칭되는 정치조직들이 흥망을 계속하고 있다. 이 모든 국가들의 형태와 기능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저마다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의 개념 규정을 어렵게 하고, 그 기원과 역할에 대한 의견을 다양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이는 국가의 기능이나 성격 그리고 정부의 형태도 제행무상의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된 정치 혹은 국가에 대한 개념 정의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국가나 정치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정치사상 혹은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이고,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인간 본성에 관한 내용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공통점들은 사실상 가설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지만, 각각의 이론 내에서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는 공통의 도덕적 목적을 도출하는 철학적 근거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격상 정치적 사유의 본질은 윤리적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됨의 고유한 가치는 모든 정치사상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국가 혹은 정치에 내재된 이러한 자체 목적은 어떤 시기의 어떤 국가도 물질적 번영의 중요성과 필요성뿐만 아니라, 도덕적 정신적 발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외면할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된다. 

정치에 대한 수많은 관점 중에서 본고가 이 견해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하는 이유는 도덕적 목적의 실현이라는 국가 목표와 반도덕적인 산업사회 속성과의 상치성 때문이다. 필자는 국가 목표와 산업사회 속성 사이의 이 간극 가운데 종교의 역할과 정치의 역할을 변증법적 합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불교의 역할 공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정치가 반정치로 가는 길목을 도덕적 차원에서 차단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정치와 반정치를 모두 정치로 혼동하는 오해가 일상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국가 혹은 통치자가 소유한 정치권력은 국가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는 힘이다. 국가목적의 실현과 관계없이 행사되는 권력은 정당한 권력이 아니고, 정당성이 배제된 권력은 반정치적인 폭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오거스틴(St. Augustinus)은 “정의가 배제된 국가는 강력한 도둑의 집단으로 전락”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모든 권력은 정당성의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절차상의 정통성이 확보된 통치권력일지라도 그 권력이 반정치적으로 행사될 경우, 그것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반도덕적으로 행사되는 무뢰배의 폭력과 차이가 없어진다.

이러한 원론적이고 원칙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국가 기능이나 정치현상에는 반정치적이고 정치 파괴적인 힘들이 정치라는 이름으로 행사되고, 그것이 정치현상과 국가 기능에 대한 오해를 불러오게 한다. 특히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산업사회는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 온 사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변화가 일어난 사회이고, 국가에도 질적으로 다른 기능을 강요하게 된다. 문제는 이 강요되는 변화의 내용이 원론적인 관점에서 반정치적인 방향이라는 것에 있다.

사회의 변화는 삶의 조건을 달라지게 하는 것이고, 국가나 종교의 전통적인 역할과 기능으로는 이해나 대처가 불가능한 현상들을 다반사로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또한 그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분야의 기능이나 역할의 성격 변화를 강제한다. 지금까지는 국가나 종교의 영역이 아니었던 곳에까지 국가와 종교의 기능과 역할이 요구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반대로 매우 중요했던 국가나 종교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가 국가와 종교에 새로운 영역으로 기능과 역할의 확장을 요구하는 일인 동시에 기존의 기능과 역할의 축소 폐기를 강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매우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경우이건 중생들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고를 유발하는 일들이라면, 국가와 불교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점점 빨리 지구상의 가용자원을 고갈시키는 방향으로, 환경의 질을 더 빨리 생명체가 존재하기 어렵게 하는 방향으로 삶의 방식을 강화해 가고 있다. 또한 행복을 추구한 삶의 과정은 행복이 아니라 점점 인간의 도덕적 사고력을 마비시키고, 인간 자체를 소외시키며, 인간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는 귀책사유가 한 국가나 특정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 지구와 인위인 문명의 충돌이라고 해야 마땅한 표현이 될 것 같다. 많은 국가들이 ‘지속가능한 개발’을 외치고 있지만, 이는 정직하게 말하면 일종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국가도 경제적 풍요보다 생존의 길을 택하자고 국민을 설득하는 정부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야말로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을 확대, 심화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경제는 풍요로운 삶,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이지 그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목표와 수단의 전도 현상을 국가 정책 혹은 지도자들이 선도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국가 기능의 반정치적인 방향으로의 확장은 도덕적 사회 건설이라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점점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시키거나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고, 비정치적인 수단이나 방법이 권력의 토대가 되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사회의 속성에 연유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정 정도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통치자 선출 방식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일면이 있다.

자원고갈, 생태학적 위기, 환경오염 그리고 비인간화 등으로 표현되는 현대의 위기들은 바로 현대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반도덕적이고 탐욕적인 삶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사회는 상업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사회가 되었고, 그것은 인간을 체계적으로 개발시킨 끝없는 욕망의 확장 시스템 속으로 무차별 편입시켜 왔다. 이 욕망 확장 시스템의 체계적 개발은 교묘하게 탐·진·치의 순환구조를 만들어 낸다. 소유에 대한 탐욕을 부추겨 소유의 이유를 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하고,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가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하여 구매력의 증가로 연결시키는 구조이다. 이 과정은 광고라는 이름으로 매스미디어가 매개한다. 이러한 일을 앞장서서 이끌고 가는 주체는 기업이고, 기업활동은 경제발전, 생산성 향상, 일자리 창출 등의 구호로 미화된다.

현대사회에서 기업은 내용상으로는 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킨다. 게다가 고도산업사회에서 기술혁신은 고용 없는 성장을 가능케 하여 일자리를 오히려 줄이게 하고, 기술혁신의 속도는 기업의 투자를 유보시키는 결과로 귀착된다. 이러한 구조는 기업과 기업주의 이익은 증가하지만, 대중은 일자리를 잃고 구매력을 상실하여 가난을 대물림하는 양극화를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유럽의 선진국가들이 심각한 국가부채에 시달리면서도 기업에 부과하는 세금인 법인세 인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업의 자국유치를 위하여 오히려 법인세 인하 경쟁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욱 강화되어야 할 환경규제는 기업활동을 위축시킨다는 반격 앞에 맥을 못 추는 형국이다. 바로 기업의 직간접적인 압력이 작용한 것이고, 국가 위에 기업이 존재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4. 불교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사회는 다양한 영역의 하위조직들이 결합된 하나의 거대한 구조이다. 국가는 이 구조를 전체적으로 지배하면서 특정 영역을 확대 재생산하기도 하고, 축소 재편하기도 한다. 이 전체 과정과 결과를 정치라고 한다. 정치는 ‘한 사회에서 희소한 자원의 권위적 분배’라는 고유의 기능을 통하여 이러한 일을 한다. 그리고 개인 혹은 하위단위의 조직들에 분배되는 몫은 국가목적 실현이라는 명분에 따라 정해지는 우선순위와 각 영역의 역할과 기여도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각자에게 그의 몫’이나,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의 ‘권위적 배분’은 공정 혹은 정의와 관련되는 것이다. 같은 몫을 놓고도 누구의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응분의 몫’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으며, ‘권위적’일 수도 있고, 권위적이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 사회와 정부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불교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반대 방향으로 구조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대부분의 자유 진영 신생국들과 같이 우리가 건설하고자 한 국가의 역할모델이 미국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사회적 관행과 가치는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불교적 가치들에 대한 사회적 의미부여 작업이 없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최고 가치는 ‘사람과 하늘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대자유와 인간 가치의 무차별 절대 평등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들이 사회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어떻게 현실에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아직도 없는 상태이다. 필요를 못 느끼면 요구가 있을 수 없다. 때문에 새로운 사회가 정초되는 과정에서 불교도의 역할이 미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불교를 신앙하는 개인들이 큰 역할을 한 경우는 많았다. 그러나 불교를 정체성으로 내세우고, 불교가 지향하는 사회건설이 용이하도록 법률을 만들고, 정부를 조직하자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요구나 노력은 없었다. 요구가 없는 곳에는 응분의 권리도 없다. 이 부분에서 자신들이 한 역할 이상의 몫을 배분받은 곳이 개신교였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자신의 상징과 가치를 반영한 법체계와 사회구조를 만들 때 불교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사고, 제도, 의식 등에서 자기진화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불교는 1,600년 전에 이 땅에 전래되어 농경사회에 알맞은 형태로 토착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아무리 잘 형성된 종교적 제도와 의례 등이라도 무상의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세상이 변하면 주장과 실천 방법과 소통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여말선초나 19세기 말의 개항기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 시기 등이 불교계가 자기 혁신을 해야 할 기회였는데 이를 놓친 것이다. 그 결과로 번역된 경전은 아직도 고색창연한 문투이고, 법문은 신세대들이 이해하기에는 곤혹스러운 어투이며, 법회와 포교도 참여와 체험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양식들을 고수하고 있다. 산업사회에 맞는 혁신이 이루어지 않은 농경시대의 모습이 아직도 연장되고 있는 것이 불교계의 자화상이다. 때문에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도 사회적 자원의 배분을 요구할 수 있는 불교계의 정치 사회적 역할은 미미했다. 이후 불교는 점점 희소한 자원의 분배과정에서 소외되었고, 분배의 몫에서 차별받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현 정부와 조계종단 사이에서 일어난 템플스테이 예산 삭감을 비롯한 일련의 갈등 사태는 이러한 저변 흐름의 한 부분이 수면으로 노출된 사례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불교는 왜 ‘희소한 자원의 배분’ 과정에서 소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는 불교의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이 있을 것이지만 이 글에서는 내부적 요인을 논의의 중심으로 한다. 현대 한국사회가 반불교적 가치추구의 사회로 된 첫 번째 이유가 외부적 요인이라면 두 번째 이유는 내부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도에게는 삶의 현장을 불교적 가치가 실현되도록 바꾸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구체적인 행동강령 혹은 윤리강령이 없다. 불국토 건설이라는 염원은 있지만 ‘어떻게?’라는 질문에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대답이 없었다는 말이다. 불교도들은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 대신 ‘마음 한 번 돌리면’이라는 심리적 환원요법으로 해소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는 사이에 우리 국토는 점점 예토(穢土)로 변해 갔다. 국토가 한 번 예토가 되면, 예토에서 기득권을 획득한 중생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보존할 수 있는 법률과 제도를 만들어 그 국토를 영원히 예토로 지속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기득권이 도전받는 경우가 생기면 더욱 공고한 법률과 제도 등의 억압기재를 만든다. 이렇게 되면, 불교도가 낸 세금과 정토 건설의 염원이 예토를 유지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당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인데도 불교도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우리의 후손을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불국토 건설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자기기만의 헛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제한된 자원을 두고 각자의 몫을 챙기기 위하여 이전투구하는 아비규환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불교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치와 불교는 본질적으로 무관계하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불교에 대한 부당한 오해일 뿐만 아니라, 정치를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필자는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그리고 필자는 지금 이 문명 전환기를 불교가 그 진면목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인들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 불교적 원칙에 충실한 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상황인식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종교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근본정신은 계승하되 형식과 제도 그리고 방법을 시대정신의 구현에 알맞도록 재정비하고, 교리와 중요한 가치의 해석학적 지평을 확대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은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핵심 주제는 다음과 같이 것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아의 인간관에 정치사회·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론을 개발하는 일이다. 이는 해탈과 무상정등각이라는 불교적 용어의 외연을 정치사회적인 용어인 자유와 평등으로까지 해석을 확장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리고 오계가 정치윤리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몇 가지의 매개개념이 개발된다면, 불살생을 비폭력의 윤리로, 불망어를 인터넷상의 악플까지 포함하는 언어폭력의 정화 대안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붓다의 인간 주체성 선언을 소외와 도덕성 상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외연을 확장시키고, 무상의 세계관으로 고령화에 대비하는 지혜를 함양시키고, 연기적 안목을 키워서 쾌락과 소유의 극대화가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서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지금부터 해야 한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한마디로 불교인들에게 각성된 시대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들의 근본고(根本苦)에 맞서는 처절함으로 사회고와 시대고에 대응해야 한다는 뜻이고, 이것이 내가 보는 불교계의 중생과 국토를 안고 가는 자비로운 자기혁신이다.

5. 맺는 말

기술발전을 토대로 작동하는 산업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이고, 노동시간의 절약, 생산성의 증대, 질병의 퇴치, 수명의 연장 같은 혜택을 인간에게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순한 본능과 충동이 아닌 어떤 도덕적, 정신적 가치 요소의 합리적 적용, 즉 궁극적으로 말하면 소위 ‘사회적 유대라는 인간도덕’에 의하여 함께 살아가며 서로에게 구속되는 존재이다. 때문에 사회적 유대가 배제된 산업 사회적 혜택을 마냥 행복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산업사회의 물질적 풍요는 인간 가치의 상실, 도덕성 퇴락 같은 정신적 빈곤을 유발하는 이중성을 갖는 사회이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 자체 내에 지구의 존속과 문명의 진보가 양립하기 어려운 엄청난 재앙을 안고 있다.

현대사회는 바로 스스로를 파멸시켜 가는 과정 위에서 스스로를 생존, 번영(물론 이것은 잘못된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만)시키는 자기파멸과 자기생존의 동일 궤도 위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패러다임을 전환시킬 수 있는 지식의 재조직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필자는 불교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요건들을 가장 적절하게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 전환의 방향과 내용에 긴밀하게 관련된 것이다. 첫째는 시장적 가치체계를 자기실현의 장으로 전환시켜야 하고, 둘째는 생존경쟁의 관계를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어주는 연기적 협동의 관계로 바꾸어야 하며, 셋째는 효용의 극대화를 인간 가치는 물론이고, 존재가치의 극대화로 전환시켜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에는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통합적으로 조망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 토대가 요구될 것이다. 필자는 존재의 법칙으로서의 연기론이 이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기론은 당면한 문제에 대한 개별적인 합리화가 아니라, 총체적이고 본질적 정당성을 제공해 줄 철학적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윤세원 / 인천대학교 교수.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석사, 박사. 주요 논문으로 〈원형적 관점에서 본 불교의 정치적 이상과 교육의 역할〉 〈法(dhamma)의 社會性과 中道의 政治倫理的 性格〉 〈전륜성왕의 정치사상적 의미에 관한 연구−통치자질이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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