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필자는 석가모니 부처 이래로 불교에서도 ‘지금 여기(now and here)’의 문제를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불교계에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높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특히 염불선(念佛禪)과 관련하여 이 문제가 제대로 다루어질 수 있으리라고 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질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주안을 두어서 해명해 나가겠다.  

먼저, 2장에서는 염불선의 수증(修證) 체계를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염불선이란 무엇이며, 그 수행 방법은 무엇이며, 또 수행의 효과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고찰하고, 이어서 염불선과 관련하여 강조되는 금타화상(金陀和尙, 1898~1948)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에 나타나는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에 대하여 기술하겠다. 이때 최근세 한국 선지식으로 평소 염불선을 주창하였던 청화선사(淸華禪師, 1923~2003)의 법문을 주로 참고, 인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3장에서는 염불선에서 ‘지금 여기’가 갖는 함의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염불선이 왜 시공일체선(時空一體禪)이며, 그 수행 방법이 무엇이며, 나아가 그 수행의 효과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제4장에서는 염불선 외에도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동서고금의 여러 견해들 가운데 대략 7개의 사례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통해 ‘지금 여기’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본 뒤, 한 가지 간략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2. 염불선의 수증(修證) 체계

1) 염불선이란 무엇인가?

염불선이란 중국 황벽종(黃檗宗)의 선법으로서 칭명염불(稱名念佛), 관상(觀像)염불, 관상(觀想)염불, 실상(實相)염불의 사종(四種) 염불 가운데 실상염불을 가리킨다. 이것은 중도실상(中道實相)을 관이염지(觀而念之)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도실상이란 무엇인가? 달리 진여실상(眞如實相),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도 한다. 이 중도실상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측면에서 본 상대주의 존재론’인 오온무아설(五蘊無我說)을 이해해야 한다. 오온무아설은 세 가지 명제(命題)로 구성된다. 

오온 무상(無常)−무상은 고(苦)다−고는 무아다.
이들 명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오온은 무상하기 때문에 고이지만 오온은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고 역시 실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는 소멸시킬 수 있다.

둘째, 무아의 의미는 아(我)의 부정, 아체(我體)의 부정, 아소(我所)의 부정이다. 아의 부정이란 절대적이고 무제약적인 존재로서의 자아존재의 부정, 아체의 부정은 불변적인 본체의 부정이다. 특히 아소의 부정이 중요하다. 여기서 무소유(無所有)의 관념이 성립된다.

셋째, 오온의 실체가 없다는 오온무아설은 오온으로 구성된 나의 실체가 비었다는 아공(我空)을 의미한다. 아공이면 대상의 실체도 인정될 수 없으므로 법공(法空)이 된다. 그리고 나도 비고 법도 비었다는 생각 자체도 비었으므로 이것이 구공(俱空)이다. 이 아공, 법공, 구공을 일컬어 삼공(三空)이라고 하는데, 삼공은 곧 진공(眞空)이다. 그런데 진공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주의적인 악취공(惡取空)이 아니라 곧 묘유(妙有)다. 진공즉묘유(眞空卽妙有)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묘하게 존재하는 묘유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대아(大我)요, 우주(宇宙)적 자아며, 일상(一相)이다. 이 우주적 자아의 관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고, 여기, 저기, 거기가 없으며, 너, 나, 그가 없고, 네 것, 내 것, 그의 것이 없다. 이 우주적 자아를 달리 말하면 곧 우주와 내가 하나인 일상(一相)이 된다. 이 일상이야말로 곧 중도실상이며,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불성이다. 따라서 진아(眞我)는 곧 우주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범부중생들의 자아관념, 소유관념, 시공관념이 모두 부정된다.

위에서 염불선이란 실상염불로서, 중도실상을 관이염지(觀而念之)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도실상이 곧 일상이므로, 결국 염불선은 일상을 관이염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일상을 관(觀)하는 것을 일상삼매(一相三昧), 일상을 염(念)하는 것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한다.

일상삼매가 정견, 견성, 돈오를 가리킨다면, 일행삼매는 관한 일상을 염염상속(念念相續)하는 것이다. 이때 염염상속이란 ‘잠시도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서 기억함’이다. 이것은 곧 일상에 대하여 일념(一念)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일념은 곧 무념(無念)이고, 무념이면 곧 무상(無想)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의미는 의식상(意識上)에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의 부정이요, 그것은 곧 현재진행(現在進行: ~ing) 곧현행(現行)을 가리키므로, 일상에 대하여 무념무상하다는 것은 일상과 더불어 현행한다는 의미이다.

즉, 일행삼매란 ‘우주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현행함(~ing)’이다. 《보적경(寶積經)》에서 언급한 “무심의이현행(無心意而現行)”에서의 현행이야말로 자타불이(自他不二)의 현재진행으로서 일행삼매다. 왜냐하면 무심의는 곧 무념무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염불선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일상삼매는 정견과 혜(慧)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정(正定)과 정(定)에 해당하므로, 결국 염불선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정견과 정정, 혹은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동의어라고 하겠다.

2) 염불선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염불선은 깨달음에 바탕한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수증관(修證觀)에 입각하고 있다. 여기서는 정혜쌍수와 일상삼매·일행삼매에 초점을 맞추어 그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정혜쌍수 수행으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결가부좌, 반가부좌, 혹은 반주삼매(般舟三昧)의 상태로 일상을 관이염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반야공관(般若空觀)에 입각하여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포함한 시(施)·계(戒)·인(忍)·근(勤)·정(定)의 5바라밀을 수행함으로써 지혜의 완성상태(perfection of wisdom)에 이르자는 것이다. 여기서 반야공관이란 반야공의 도리로 관하는 것이다. 이 반야공관의 내용이 곧 진공묘유이고 이때 묘유는 대아, 우주적 자아, 일상으로서의 참나이다. 따라서 이때의 5바라밀 수행이란 깨닫기 위한 수행이 아니라 깨달음을 확인하는 수행이며,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이 아니라 부처로서의 수행이다. 반야공관이 선오후수에서의 선오라면, 5바라밀 수행은 후수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일상삼매·일행삼매에 초점을 맞춘 수행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일상삼매란 여묘포서(如猫捕鼠) 혹은 여조포어(如鳥捕魚)에 비견된다. 이에 비해 일행삼매란 여계포란(如鷄抱卵), 줄탁동기[시](啐啄同機[時])에 비견된다. 여묘포서, 즉 고양이 쥐 잡듯이 하라거나 여조포어, 즉 물새가 물고기 낚아채듯이 하라는 말은 참나[眞我]와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임을 정확히 알고, 나아가 우주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현행[現在進行]하는 것이 곧 성불(成佛)임을 추호의 의심 없이 정확히,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일상삼매란 선오후수 가운데 선오에 해당된다. 여계포란, 즉 닭 알 품듯이 하라는 것은 내가 곧 우주라는 생각을 잠시도 놓치지 않고 염염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선오후수 가운데 후수에 해당된다.

이 생각을 지속적으로 놓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이 사라진다. 따라서 업장(業障)도 차츰 엷어지게 된다. 왜 그런가? 아상과 아집이란 가짜 나[假我] 혹은 에고(ego)에 대한 집착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망아(妄我)로서의 에고(ego)다. 그리고 이 망아란 탐진치(貪瞋痴) 삼독으로서, 이것이 업장을 형성한다. 업장은 업감연기(業感緣起)하여 고를 일으키고 육도윤회(六道輪廻)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업장을 소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참나 확인하기’라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참나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면 가아에 대한 집착인 아상과 아집, 그리고 업장은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치 병아리 알을 깨고 나오듯이 어느 날 내 기존 의식이 크게 변하고, 이에 따라 가치관, 인생관이 확 바뀌는 환골탈태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곧 참나가 드러나는 줄탁동기의 순간이다. 이제부터 우주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현행하는 삶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곧 성불이다.

3) 염불선 수행의 효과는 무엇인가?

이처럼 염불선 수행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본래 부처인 우리가 부처의 본성을 회복하여 깨달음의 삶, 고통과 번뇌를 여윈 희열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을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전식득지란 근본무명식(根本無明識)이 청정무구식(淸淨無垢識)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근본무명식을 유식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한다.

이것은 범부의 망정상(妄情上)으로는 있다고 여길지라도 이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정유리무(情有理無)의 망아(妄我)다. 청정무구식을 유식에서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이것은 범부의 망정상에서 보면 없어도 이치상으로는 실재하는 정무리유(情無理有)의 진아(眞我)다.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 사이에 또 다른 성이 있다. 그것이 곧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다.

이것은 마치 환영(幻影)과 같아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지고 만다는 측면에서 여환가유(如幻假有)의 가아(假我)라고 한다. 이 셋을 일컬어서 유식삼성(唯識三性)이라고 부른다. 때로 원성실성을 짚에 비유하고, 의타기성을 새끼토막에, 그리고 변계소집성을 뱀에 비유하기도 한다. 짚으로 만든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인식하는 것은 변계소집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근본무명식의 청정무구식으로 전환은 중생의 삶, 미혹의 삶을 부처의 삶, 깨달음의 삶으로 바꾸어 준다. 삶의 질적인 대전환이 일어나게 되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즉, 전식득지하게 되면 현실을 감수(感受)·감각(感覺)하는 전오식(前五識, 眼耳鼻舌身識)에서 무한한 희열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전식득지의 상태를 다섯 가지로 설명해 보자.

첫째, 전식득지란 가장 깊은 식인 무의식[제8식−아뢰야식] 단계에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확보됨이다. 그러면 잠재의식[제7식−말나식] 단계에서 평등성지(平等性智)가 확보된다. 다음으로 의식[제6식] 단계에서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발동한다. 그러면 현실을 감수·감각하는 전오식 단계에서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나와서 구체적인 언행(言行)을 통하여 염원하는 바가 실현된다. 불자가 가장 염원하는 바는 보살의 사홍서원(四弘誓願)에서 드러나듯 하화중생(下化衆生)과 상구보리(上求菩提)다.

둘째, 유식(唯識)을 가리킨다. 유식이란 ‘식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이때 유식이란 곧 원성실성이다. 원성실성이란 진여본성, 진여불성, 즉 불성으로서 광명찬란(光明燦爛)하다. 이러한 본성이 업장에 가려져 있다가 전식득지에 의해서 업장이 제거되면서 이 세상이 온통 무량한 빛, 광명으로 현현(顯現)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식을 뒷받침하는 명제가 식일원론(識一元論), 만법유식(萬法唯識), 유식무경(唯識無境), 심경일여(心境一如)다.

셋째, 청정무구식이 확보되면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여연기, 부사의연기(不思議緣起), 여래장연기가 일어난다. 이 연기는 가로적으로도 일어나고 세로적으로도 일어난다. 가로적인 연기는 인다라망(因陀羅網)의 보주(寶珠)처럼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연기함이다. 세로적인 연기는 현실을 감수·감각하는 전오식에서의 언행(言行)이 무루선적(無漏善的)인 무아행, 대아행, 자비행(慈悲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화중생이요 상구보리다.

이러한 법계연기를 잘 표현한 것이 삼국통일기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성게(法性偈)》다. 이 《법성게》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 시작하여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로 끝난다. 모두 7언 30구의 210자로 이루어져 있다. 첫 글자가 법(法)이고 마지막 글자가 불(佛)이다. 이는 법성, 원성실성 혹은 불성의 확보로 인하여 일어나는 연기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부처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부처의 무량하고 부사의한 공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때의 연기는 시간과 공간에 걸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넷째, 전식득지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사덕(涅槃四德)이 확보됨을 가리킨다. 열반사덕은 참나의 상태, 깨달음 내지 열반의 상태에 이른 이가 갖는 네 가지 불가사의한 덕이다. 이것을 일컬어 진아의 무루공덕(無漏功德)이라고 한다. 이때 열반의 상태란 사법인(四法印) 가운데 하나인 열반적정(涅般寂靜)을 가리킨다. 이 열반적정의 구체적인 내용이 열반사덕인 것이다.

여기서 ‘상’이란 참나인 우주의 상주불멸성(常住不滅性) 내지 불변성을 말한다. 우주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거듭하는데 어째서 불변한다고 하는가? 이때 불변하는 것은 우주의 순수 에너지다. 이것을 달리 우주의 신령스러운 기운 내지 우주의 영기[宇宙之靈氣]라고도 한다. 이것은 증감(增減)이 없다. 이 우주의 영기야말로 참나의 본질이다. 이런 측면에서 참나란 불변적[常]이다. ‘낙’이란 일상삼매, 일행삼매에서 드러나듯이 깨달은 이가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자각하는 데서 오는 황홀함, 희열, 지복(至福)을 말한다. 불타의 깨달음이 우리에게 준 최대의 메시지는 ‘인간은 본래로 무량한 행복과 희열, 지극한 복락을 누리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란 곧 대아, 우주적 자아, 일상으로서 신통묘용(神通妙用)하다. 이것이 곧 삼명육통(三明六通)의 신통력이다. ‘정’이란 청정무구함이다. 이것은 무아행을 가리킨다. 무아행은 무루종자(無漏種子)를 형성하여 이것이 아뢰야식에 저장되는데, 이 무루종자는 다시 무아행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무아행은 무루선(無漏善)으로서 청정무구한 것이다. 

다섯째, 이것은 천태종(天台宗)의 일심삼관(一心三觀) 내지 삼제원융(三諦圓融)을 가리킨다. 일심삼관에서 일심이란 우주까지 확장된 우주심(宇宙心)으로서 본체계와 현상계를 아우른다. 이 일심을 세 가지 측면에서 본 것이 공제(空諦), 가제(假諦), 중제(中諦)다. 왜 그런가? 우주심을 보면 현상세계의 개개물물에는 독자적인 존재성이 비어 있다. 이것이 공제다. 그러면서 현상세계는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것이 가제다. 그러나 이들 자성이 공하면서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세계 이면에는 항상 불변적인 중도실상이 존재한다. 이것이 중제다. 이 공제, 가제, 중제는 서로를 떠나서 성립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 셋은 원융(圓融)하다. 곧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인 것이다. 이러한 일심삼관이 알려주는 궁극적인 의미는 진공묘유(眞空妙有)요, 공적영지(空寂靈智)다. 한도 끝도 없는 공간에 찬란하게 빛나는 불성광명인 것이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로 표현하였다. 즉 광명편조(光明遍照)이다.

4)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에 나타난 염불선의 깨달음과 닦음

그런데 유식의 전식득지를 천태종의 일심삼관 내지 삼제원융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지극히 이성적(理性的)이고 이지적(理智的)이다. 이것에 대해서 감성적(感性的)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특히 우리 한민족의 민족성은 매우 정감적(情感的)이고 감성적이므로 이러한 접근법이 의외로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일심 내지 우주심을 인격으로 보면 곧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 아미타불을 염염상속(念念相續)하도록 하는 수행법인 염불선이 출현하였다.

염불선에서는 참나인 우주를 인격적인 존재로서 아미타불로 본다. 나아가 이 아미타불을 삼신일불(三身一佛)로 간주하여 염염상속하고자 한다. 이러한 함의를 지니고 있으면서 수행의 방편으로 용이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시된 글이 바로 〈보리방편문〉이다.

 이 글은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선지식이었던 청화 선사의 스승인 금타 화상이 흔히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로 일컬어지는 인도 고대의 용수보살(龍樹菩薩, 150~250)의 《보리심론(菩提心論)》이라고 하는 논장(論藏)에 있는 공부하는 요령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견성오도(見性悟道)의 방편으로 지은 글이므로 자주 외우고 그 뜻을 새기기만 해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覺]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이 시대에 염불선을 부활·중흥시킨 청화 선사가 생전에 특히 강조하였다.

〈보리방편문〉은 크게 두 개의 내용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그야말로 보리방편문이고 다른 하나는 아미타불이다. 그러나 이 둘을 합하여 하나로 부를 때는 보리방편문이라고 한다.
 
‘보리방편문’
보리(菩提)란 각(覺)의 의(義)로서, 보리방편문은 견성오도(見性悟道)의 방편이라. 정혜균지(定慧均持)의 심을 일경(一境)에 주(住)하는 묘결(妙訣)이니, 숙독요의(熟讀了義)한 후 적정(寂靜)에 처하고 제일절만 사(寫)하야, 단좌정시(端坐正視)의 벽면에 부(付)하여써 관이염지(觀而念之)하되, 관(觀)의 일상삼매(一相三昧)로 견성하고, 염(念)의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오도함.

‘아미타불’
심은 허공과 등(等)할새 편운척영(片雲隻影)이 무(無)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허공적 심계(心界)를 관하면서 청정법신(淸淨法身) 인달하야 비로자나불을 염(念)하고, 차(此) 허공적 심계에 초일월(超日月)의 금색광명을 대(帶)한 무구(無垢)의 정수(淨水)로 충만한 해상(海象)적 성해(性海)를 관하면서 원만보신(圓滿報身) 인달하야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염하고, 내(內)로 염기염멸(念起念滅)의 무색중생(無色衆生)과, 외로 일월성숙(日月星宿), 산하대지, 삼라만상의 무정중생과, 인축(人畜) 내지 준동함령(蠢動含靈)의 유정중생과의 일체중생을 성해무풍(性海無風), 금파자용(金波自涌)인 해중구(海中漚)로 관하면서 천백억화신 인달하야 석가모니불을 염하고, 다시 피(彼) 무량무변의 청공심계와 정만성해(淨滿性海)와 구상중생(漚相衆生)을 공성상(空性相) 일여(一如)의 일합상(一合相)으로 통관(通觀)하면서 삼신일불(三神一佛) 인달하여 아미타불을 상념(常念)하고, 내외생멸상인 무수중생의 무상제행(無常諸行)을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인달하야, 미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사유관찰할지니라.
  
이 〈보리방편문〉은 삼신일불(三神一佛)인 아미타불을 공성상일여(空性相一如)의 일합상(一合相)으로 통관(通觀)함으로써 아미타불이야말로 중도실상이고 불성 그 자체라고 보는 것이다. 대략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청공심계(淸空心界)-공-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 -타심    
     정만성해(淨滿性海)-성-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     -미     불
     구상중생(漚相衆生)-상-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석가모니불 -아

여기서 아미타불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아미타불은 한국의 불자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부처다. 오래전부터 애송(愛誦)되어 왔던 ‘나무(南無)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을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염불선에서의 아미타불은 타력신앙적(他力信仰的)인 대상인 서방정토에 계시는 그런 부처가 아니라, 바로 진아(眞我)로서의 자성미타(自性彌陀)다.

여기서 심은 자성미타가 계시는 곳으로서의 자심정토(自心淨土)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심즉불(心卽佛)이므로 자심정토와 자성미타가 다른 것이 아니다. 결국, 중도실상(中道實相)이나 일상(一相)을 인격적인 아미타불로 보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염불선에서의 아미타불이 본래의 무량광불(無量光佛)이고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는 그 사실에는 하등의 다름이 없다.

3. 염불선에서 ‘지금 여기’가 갖는 함의

1) 시공일체선(時空一體禪)이란 무엇인가?

염불선에서는 참나[진아]가 우주며, 이 우주를 인격으로 표현하면 아미타불이 됨을 깨닫고 이 아미타불을 그리움 즉 사모(思慕)의 대상으로 삼아서 염염상속함으로써 드디어 아미타불과 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현행하는 성불에 이르고자 한다. 이것이 곧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다. 그런데 참나인 아미타불은 우주이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나인 아미타불을 가장 크게 말한다면 무한공간, 무한시간으로서의 우주가 되지만, 가장 작게 말하면 ‘지금 여기’가 된다. 이때 참나가 둘이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우주와 ‘지금 여기’는 등가(等價)요 하나다. 즉, 우주건 ‘지금 여기’건 그것이 ‘절대유일(絶對唯一)의 실체(實體)’라는 측면에서는 똑같다는 것이다. 

우주와 지금 여기가 등가임은 신라시대 의상대사의 《법성게》에서 말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는 말은 가장 작은 공간인 ‘여기(here)’에 가장 큰 공간 즉, 무한공간이 들어 있다는 의미이고, ‘한 생각이 일어나는 찰나의 순간이 곧 무한대의 시간과 등가이다[一念卽是無量劫]’는 말은 가장 짧은 시간인 ‘지금(now)’이 가장 긴 시간 즉, 무한대의 시간과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지금 여기(now and here)’가 무한공간, 무한시간이라는 우주와 똑같다는 진리를 중(中)과 즉(卽)의 논리로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염불선은 일상삼매, 일행삼매이고, 그것은 여묘포서[여조포어](이상 일상삼매), 여계포란, 줄탁동기(이상 일행삼매)로 이루어진다. 이제 가장 작은 참나인 ‘지금 여기’의 측면에서 염불선을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삼매의 여묘포서[여조포어]란 지금 여기가 곧 참나임(지금 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임)을 아는 것이요, 나아가 지금 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현행, 현재진행하는 것이 곧 성불임을 아는 것이다. 일행삼매의 여계포란이란 ‘지금 여기 알아차리기 수행’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참나인 지금 여기를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고 확인하면, 가짜 나[假我]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아집과 아상 즉 망아(妄我)가 사라지고 업장이 소멸된다. 그러면 마치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 광명한 새 세상으로 나오듯이, 언젠가는 나의 의식과 가치관, 인생관이 확연히 달라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곧 참나가 드러나는 일행삼매의 줄탁동기다. 그러면 이제 ‘지금 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현행하는 성불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알아차리기’ 수행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지금 여기 알아차리기 수행이란 지금 여기 ‘호흡(呼吸)’ 알아차리기 수행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호흡’이야말로 시공이 일체인 지금 여기를 가장 정확히 알려주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 여기 호흡 알아차리기 수행’을 ‘시공일체선(時空一體禪)’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불교 수행에 있어서 호흡의 중요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호흡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로 요약된다. 태어나서 숨을 거둘 때까지 누구나 다 배우지 않고 할 수 있고 잠시도 떠날 수 없는 호흡이 곧 ‘지금 여기’를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고 또한 참나를 되찾기 위한 핵심이라는 그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너무 비근(卑近)하여 허탈하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진리란 고원(高遠)한 곳에 있어서 쉽게 포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란 일상생활 속에 존재하며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임은 이미 동양의 많은 성자(聖者)들이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2) 시공일체선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시공일체선 수행의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날숨−앉아 있음−들숨−앉아 있음−날숨’의 순서로 하면 되는 것이다. 숨을 내쉬면서 날숨이라고 알아차리고 그리고 나서 앉아 있음이라고 알아차린다. 또 숨을 들이쉬면서 들숨이라고 알아차리고 그러고 나서 앉아 있음이라고 알아차린다. 다시 숨을 내쉬면서 날숨이라고 알아차리는 이런 과정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여 염염상속하면 된다.

그런데 앉아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말 앉아 있어서가 아니라, 이는 내 의식이 본래면목 자리, 중도실상[진여실상] 자리, 참나의 자리에 제대로 놓여있음을 말한다. 이 자리는 일체의 생각을 떠난 자리이다. 이 자리에 제대로 앉아있다면 어떠한 사량심(思量心), 분별·차별심도 일어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앉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날숨과 들숨을 알아차리고 앉아 있음을 확인하는 가운데, 분별이나 차별의 망념(妄念)은 점차 사라지고 의식이 깨어나 성성(惺惺)해진다. 에크하르트 톨레가 ‘선(禪)’에 대하여 한 말은 이 시공일체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겠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선의 핵심은 칼날 위를 걷듯 예리하게 깨어 있는 것으로 ‘지금 여기’에 현존(現存)하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완벽하게 깨어 있음으로써 어떠한 문제도, 어떠한 고통이나 번민도, 진정한 당신이 아닌 것은 그 무엇도 당신 안에 살아남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은 달리 말하여 ‘지금 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현재진행, 즉 현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진정한 당신이 아닌 것’이란 곧 ‘참나’가 아닌 것을 가리킨다. ‘지금 여기’야 말로 절대유일의 실체이므로 이것 외에 모든 것은 부정되고 만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의식 외에 어떠한 것도 살아남지 못하도록 하자면 망념이 일어날 때 그것을 지켜보는 주시(注視)가 필요하다. 이처럼 호흡을 알아차리고, 앉아있음을 확인하고, 망념을 주시하는 가운데 나의 의식은 순수하고 완벽하게 깨어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금 여기와 내가 현행하는 성불의 삶이 가능해진다.

이제 시공일체선의 입장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돈오(頓悟)란 지금 여기가 곧 참나임(지금 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임)을 확실히 아는 것이며, 나아가 지금 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현행(現行)하는 것이야말로 성불임을 아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돈오란 해오(解悟)며, 또 선오후수에서의 선오다. 이것을 달리 정견, 견성이라고도 한다.

돈수(頓修)란 무념수(無念修),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을 가리킨다. 무념수란 상념(想念)에 젖거나 끄달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염오란 일체에 물들지 않음이다. 좋음과 나쁨, 기쁨과 슬픔은 물론이고, 과거심과 미래심, 그리고 현재심에도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젖거나 끄달리지 않고 물들지 않으면서 시공일체선을 수행하는 것이 곧 돈수다.

이것은 가장 완벽한 닦음, 최고의 닦음이기에 곧 ‘부처로서의 닦음’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에크하르트 톨레의 말 가운데 “어떠한 문제도, 어떠한 고통이나 번민도, 진정한 당신이 아닌 것은 그 무엇도 당신 안에 살아남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무념수, 무염오수행으로서의 돈수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점수(漸修)란 무엇인가? 이러한 돈수를 하다 보면 돈오의 상태도 차츰 바뀌는데, 그것은 해오(解悟)에서 증오(證悟)로, 증오에서 성불(成佛)로 바뀐다. 이것을 일컬어 점수라고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해오란 지금 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임을 이해한 깨달음이라면, 증오란 지금 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임을 온 몸으로 느끼는 깨달음이며, 성불이란 드디어 지금 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현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돈수즉점수(頓修卽漸修)다.

돈수와 점수가 다른 것이 아니다. 염불선에서의 닦음은 무념수, 무염오수행으로서의 돈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깨달음의 수준이 심화되어 간다는 측면에서 점수라고 부르는 것 뿐이다. 돈오돈수든 돈오점수든 그것은 선오후수(先悟後修)며, 나아가 이것은 부처로서의 닦음이라는 측면에서 곧 성태장양(聖胎長養)이기도 하다.

3) 시공일체선 수행의 효과는 무엇인가?

이제 이 시공일체선 수행을 하게 되면 어떠한 효과가 나타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에 필자는 ‘지금 여기’가 갖는 두 가지 함의에 주목하고자 한다. 하나는 지금 여기가 참나를 가장 작게 표현한 말이지만 그것이 절대유일의 실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가 참나를 가장 크게 표현한 말인 ‘우주’를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우주세포(宇宙細胞)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여기서 이 두 번째 견해를 수용하게 되면, 우주란 무수히 많은 ‘지금 여기’라는 세포로 이루어진 유기체, 생명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생명체라면 그 최소단위[부분] 속에 전체의 특성과 정보가 들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라는 세포 속에는 우주의 영기[宇宙之靈氣]와 함께 우주의 정보가 온전히, 고스란히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공일체선 수행을 하면 먼저 우주의 영기(靈氣)가 내면에 들어와서 그것이 정력(定力), 혹은 집중력이 된다.

이처럼 나의 내면에 집중력[定力]이 증장(增長)되면 될수록 불교의 정혜일체(定慧一體)의 원리에 따라서 혜(慧) 즉, 통찰력과 관찰력도 동시에 증장된다. 그만큼 우주의 정보를 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의 정력이 최고조에 이르면 자연히 그 통찰력, 관찰력도 최고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우주의 정보가 온전히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자각된다. 그러면 여기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의 신통력도 가능해진다. 이 상태가 곧 줄탁동기의 성불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공일체선 수행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계율의 그릇이 튼튼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이 고이고 지혜의 밝은 달이 바야흐로 나타난다.”는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시공일체선 수행 이전에 지계(持戒)가 반드시 요청된다고 하겠다. 이제 지계를 바탕으로 시공일체선 수행을 하면 우주의 영기가 내면에 들어와서 정력이 되고 아울러 동시에 우주의 정보가 자각되는 삶이 가능해짐으로써 견성오도(見性悟道) 내지 성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음에 바탕한 성불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내 의식이 소아의식(小我意識)에서 대아의식(大我意識)으로 확실히 바뀌고, 이에 따라 나의 가치관과 인생관 역시 크게 바뀐다. 둘째, 우주의 정보에 대한 끊임없는 자각이 가능해진다. 셋째, 우주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현행하게 됨으로써 희열의 삶, 지복의 삶이 가능해진다’가 그것이다. 

4. 나오는 말: ‘지금 여기’에 대한 동서고금의 여러 견해 및 제언

이상에서 주로 불교의 염불선과 관련하여 ‘지금 여기’의 문제를 시공일체선이라는 이름으로 살펴보았다. 필자는 지금 여기가 곧 참나(지금 여기와 내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러한 자각에 바탕하여 호흡에 따른 시공일체선 수행을 동반한다면, 이것이 의외로 한국의 현대인들에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은 물론이고 진리에 부합하는 깨달음의 삶을 열어 줄 수 있는 방편으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시공일체선은 과거처럼 불교의 가르침이 너무 어려우니 부처의 명호를 되풀이하여 염송(念誦)함으로써 부처의 가피력(加被力)에 의존하려는 그런 타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부처님의 정신과 가르침에 부합하는 자력적인 방법이면서도 얼마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 행주좌와어묵동정의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든지 수행과 활용이 가능한 염불선에 속하는 수행법의 하나라고 하겠다.

이상의 고찰에서 지금 여기가 갖는 중요성은 불교의 염불선뿐 아니라 교종에서도 강조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선종에서는 염불선 외에 간화선(看話禪), 묵조선(黙照禪)의 경우도 지금 여기를 매우 중시한다.

최근 서울 시내에 문을 연 금차선원(今此禪院)은 조계종이 간화선의 세계화를 위해 추진해온 국제선센터다. 여기서 금차란 금시차처(今時此處)의 의미로서 바로 ‘지금 여기’를 가리킨다. 이는 간화선 역시 ‘지금 여기’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 준다.

묵조선은 그 수행의 근저에 본래성불(本來成佛)에 대한 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본래성불을 바탕으로 하여 그것의 자각을 좌선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 묵조선 수행의 근본 구조다.

묵조(墨照)에서 묵이란 몸의 수행 즉, 지관타자(只管打坐)의 좌선을 통한 정(定)이라면, 조는 마음의 깨달음으로서 본증묘수(本證妙修)와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는 지혜[慧]의 현현이 될 것이다. 이때 묵조는 일여[墨照一如]요, 정혜는 일체[定慧一體]다. 이 말은 지관타좌의 좌선이 곧 본증묘수와 현성공안이라는 말이다. 이 좌선은 ‘부처의 좌선’으로서 몸과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신심탈락(身心脫落)이다. 여기서 본증묘수란 ‘본래의 깨달음은 반드시 스스로 드러나서 묘하게 닦아 나간다’는 의미다.

이것을 수증일여(修證一如)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현성공안은 무엇인가? ‘현성이 곧 공안’이라는 말이다. 현성은 현전성취(現前成就)를 가리킨다. 공안은 진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현성공안이란 ‘지금 여기의 현실 그대로가 완전히 성취된 진리’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지금 여기가 곧 진리라는 것이다.

이 시대 남방불교가 낳은 대표적인 고승대덕인 틱낫한 스님의 경우도 위빠사나와 선을 결합한 마음챙김(mindfulness) 명상에서 호흡에 의거한 지금 여기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 여기는 불교에서만 강조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차치하고라도 가까운 근현대만 하더라도 동서 사상가들의 사상 속에서 그 중요성이 쉽게 확인된다. 몇 개만 열거해 보자.

첫째, 조선조의 19세기 기철학자이자 실학자인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1803~1877)의 기학(氣學)에서 강조한 방금운화(方今運化)는 지금(여기)의 운화를 말하는데, 기학에서는 이것을 학문의 근기(根基)와 표준(標準)으로 간주할 정도로 중요시한다. 기학은 기존 유학의 복고주의적인 성향을 지금 여기를 중시하는 현재위주의 성향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둘째, 조선조 19세기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성경신(誠敬信)의 마음으로 21자 주문을 외움으로써 수심정기(守心正氣)하고 나아가 시천주(侍天主)할 것을 강조하는데, 이때 21자 주문을 구성하는 강령주문과 본주문 가운데 강령주문은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다.

이것의 의미는 “지극한 기운이 지금 여기에 항상 이르러 있으니, 원컨대 크게 내려주소서”이다. 여기서 ‘지극한 기운이 지금 여기에 항상 이르러 있다’는 ‘지기금지(至氣今至)’야말로 동학이 지금 여기를 매우 중시하는 사상임을 알게 해 준다.

셋째, 인도의 근대 사상가인 라마나 마하리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명상수련에 있어서 지금 여기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 역시 지금 여기의 기준으로서 호흡에 주목하고 있다.

넷째, 서양의 실존철학에서는 특히 하이데거가 현존재(現存在)를 강조하는데, 이는 지금 여기에서의 존재를 가리킨다. 실존철학에서의 현존은 곧 지금 여기와 나와의 현행에 다름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다섯째, 독일의 영성 체험가인 에크하르트 톨레는 일련의 저술에서 ‘지금 이 순간(now)’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때의 지금 이 순간은 지금 여기와 동의어로 쓰이며, 톨레 역시 호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들 사상에서 제시된 지금 여기의 인식 방법은 무엇인가? 대략 라마나 마하리쉬, 에크하르트 톨레가 호흡을 중요한 인식 수단의 하나로서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시공일체선과 상통한다. 이에 반해 최한기의 기학에서는 추측법(推測法)을 제시하고, 동학에서는 주문수련법을 제시한다. 이처럼 지금 여기를 자기화시키는 방법은 사상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처럼 근대 이후로 동서양 사상가들이 지금 여기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다 같이 지금 여기야말로 그들이 찾고자 하는 진리의 당체(當體) 내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본고에서 제시한 시공일체선은 불교 또한 지금 여기의 문제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에 나온 수행법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에 필자는 앞으로 한국 불교계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고 보다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서 제대로 된 수행법으로 요약하고 제시함으로써, 한국 불자들의 뜨거운 구도열정(求道熱情)에 무언가 의미 있는 기여를 해 줄 것을 강력히 건의하고자 한다. ■

 

손병욱 
경상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경상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한국학대학원 한국철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저술로는 《기학》(역서), 《서산, 조선을 뒤엎으려 하다》(저서) 등과 〈동학의 삼칠자 주문과 다시개벽의 함의〉 〈한국유학의 정좌법〉 〈한국의 미래비전 실현을 위한 인성교육적 방안 탐구〉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의 효율적 운영방안 고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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