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동네에 차를 몰고 갔다가 호되게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근처에 주차장도 없었고 차를 세울 곳이 마땅찮아 잠깐 공터에 차를 세웠다. 차에 전화번호를 적어 놓고 갔는데, 잠시 후 전화가 왔다. 자기네 차가 못 빠져나가니 차를 빼달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욕설을 퍼부었다. 차를 빼러 나갔더니 욕설은 계속됐다.

같이 있던 동료가 욕을 하는 상대에게 “전화번호를 남겨 놓았는데 이건 좀 심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욕설은 멈춰지지 않았다. 차를 빼고 나온 후, 같이 있던 동료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붓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느 날 석가모니에게 화가 난 바라문이 찾아왔다. 다른 종교를 믿고 있던 그는 집안의 젊은이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 붓다에게 욕을 퍼부었다. 붓다는 그가 욕하는 동안 묵묵히 듣고 있었다. 바라문은 화를 내다 제풀에 지쳐 조용해졌다. 한참 후에 붓다가 말했다.

“그대의 집에 손님이 찾아와 음식을 대접했는데 손님이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바라문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저의 것이지요.”

붓다가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당신이 뱉은 말도 이와 같습니다. 저는 그 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한 말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잡아함 42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유독 잘 기억하는 이유는 욕설을 많이 듣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직업상 매일같이 글을 써야 하고 이 글은 모두 공개된다. 자신이 공개하지 않고 싶다고 해서 글이 공표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글이 방송매체로, 인쇄매체로 나가던 시대는 곤혹스러움이 덜했다. 이때 기사의 반응은 주로 전화나 엽서 등으로 나타났다. 기사에 대한 항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란 직업을 선택하게 된 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글이 인터넷에 오른다. 신문사의 홈페이지에 실릴 뿐 아니라 수많은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에서 퍼간다. 어떤 기사에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린다.
댓글을 묵묵히 읽는다. 여기에는 물론 칭찬도 있지만 욕설도 많다. 욕설의 글에다 댓글을 달지 않는다. 분노를 분노로써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후배 기자 중 한 명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댓글에 답글을 올린다. 하지만 역시 되돌아오는 댓글은 더욱 후배 기자를 화나게 만든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온통 갈등으로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다. 좌우 이념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충돌하고 있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갈등이 존재한다. 종교 간의 갈등도 심하다. 최근 일부 기독교계의 봉은사 땅밟기가 대표적이다.

갈등 사회에서는 목소리를 높여야만 자신의 주장을 알릴 수 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작은 목소리는 이내 세상의 소란에 묻혀버린다.

불교계 언론인 불교텔레비전을 떠나 중앙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위클리경향(경향신문 시사주간지)에 근무하게 되면서 우리 사회의 여러 곳을 폭넓게 취재할 기회를 가졌다. 특히 여의도 국회에서 정치 담당 기자로 주로 활동하면서 온갖 사회적 현안과 만났다. 최근 TV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대물〉에서와 같은 상황을 현장에서 맞닥뜨렸다고 할 수 있다.

취재 현장에서 종종 공업(共業)이라는 불교적 사유를 떠올린다. 공업은 개개의 중생이 짓는 별업(別業)과 대비되는 용어이다. 공업은 더불어 짓는 업이다.

공업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 사회에 ‘사회적 분노지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2007년 대선, 2008년 촛불 시위처럼 정치적·사회적 갈등이 고조될 때에는 사회적 분노지수가 올라간다. 언론, 인터넷 등에서 고조된 갈등은 인화성이 있는 물질로 가득 찬 사회를 만든다. 여기에서 누군가 불을 붙이기만 한다면 사회는 거대한 폭발물이 된다. 2009년 용산참사가 대표적이다. 공업의 결과이다.

2010년 대한민국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 우리 사회의 보수·진보 세력은 서로 상반된 시각으로 충돌했다. 한쪽은 북한의 소행이라며 북한에 대한 증오심을 고취시켰다. 한쪽은 아직 정부 발표를 믿지 못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4대강 사업을 찬성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있다. 사람들이 만나면 이런 이야기로 다툰다. 이것이 사회적 분노지수를 높이는 요인이 된다.

종교는 어떤가? 일부 기독교계에서 ‘장로 대통령’이라 칭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정부와 불교계 간, 기독교계와 불교계 간의 갈등이 심심찮게 터져 나온다. 최근 봉은사 땅밟기 동영상에서 사회적 분노지수는 더욱 높아진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은 결국 공업이 된다. 그래서 사회적 분노지수가 공업의 척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흉악한 연쇄살인범이 잡힌 후 일부 보수 신문에서는 살인범을 마치 괴물처럼 표현한 적이 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성장 과정까지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기사화했다. 이런 살인을 막기 위해서는 온 거리에 CCTV를 설치하고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용의자에게는 전자팔찌를 채워야 하며, 범인에게 극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괴물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공업이다. 그 사람이 왜 사회에 대해 분노하게 되었는지에 주목해야 하고, 그 분노의 요인을 없애야 한다. 그것이 CCTV와 전자팔찌와 극형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래야 선한 공업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가 살아 있다면,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 어떻게 말할까? 누군가는 낮은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온전한 논리로 설득해야 한다.

높은 목소리로 사람들을 흥분시켜서는 안 된다. 물론 그런 목소리에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자신의 집에 손님을 초대해 놓고 음식을 차렸지만 받지 않으면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사회적 분노지수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선한 공업을 짓는 일이다. 우리가 발을 내딛고 있는 사회를 더욱 희망적인 세상으로 만드는 길이다. 석가모니 붓다는 오래전 이 길을 지나갔다. 이제 그가 걸어간 길을 더듬어 찾아가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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