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합성의 불교학에서 종교성 부재의 극복 대안?"

“서구의 불교접근은 단순한 경로를 거치지 않았다. 중국을 위시한 동양 여러 국가가 겪은 문화, 정치, 사회적 여건 못지않은 경유과정이 있었다. 더욱 근대라는 짧은 시간의 집약된 변화와 이질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근대성이 가져다준 여러 분야의 나름대로의 난제들을 해결하려하고 자기극복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민용 한국불교연구원 원효학당교수(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대표)가 10월 21일 열린 불교평론 열린논단에서 ‘서구의 불교이해의 틀 전환/ 불교신학(Buddhist Theology)의 시도와 전망’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불교평론 주최 열린논단에서 발제를 하고 있는 이민용 교수

‘서구에서 불교는 어떻게 수용되고 이해되는가’를 다룬 이 논문에서 이민용 교수는 “이제 서양은 더 이상 동양으로부터 불교를 수입하기보다는 자신들이 해석한 불교를 세우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이민용 교수는 이 논문에서 ‘근대 불교학의 극복의 틀’로서 ‘불교신학(Buddhist Theology)’이라는 개념을 서구의 불교학 연구동향을 근거로 제시했다.

불교신학(佛敎神學, Buddhist Theology)이란 말은 우리에게는 낯설다. 어쩌면 우리에게만 낯선 어휘가 아니라, 이 말을 창안한 서구 불교전문인들에게마저 애매모호한 기형의 창안물로 비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동양의 불교와 서구 기독교의 학문근거인 신학이 결합되어 있는 불교신학이라는 말은 무슨 뜻을 지니고 있으며, 무엇을 의도하는 말일까? 불교와 기독교 간의 대화를 위한 체계화란 말일까, 아니면 불교를 기독교적인 틀에 의해 설명하거나, 아니면 그 역(逆)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지난 날 격의불교(格義佛敎)에서 경험한 것처럼 서양 땅에 불교를 이식시키거나 동양 문화에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상호 문화적 틀을 이용하겠다는 것일까.

이민용 교수는, 여러 가지 의문과 부조화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조어(造語)로서 불교+신학(Buddhism+Theology)이란 이종교배적인 말을 창안하고 있는 것은 불가피한 면이 분명히 있다고 진단했다.

불교 교설의 어떤 부분이든 그것을 서구어로 표현하려고 시도할 때 그 불교 내용은 서구적 개념으로 전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피하기 위해 서구어에는 없는 혼성어가 만들어지는데, 그 혼성어는 서양의 교양인들마저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통칭 혼성영어(Hybrid English)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라고 밝힌 이 교수는 “그러한 노력을 들인 과거의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는 어째서 새삼 다시 불교신학이라는 말을 차용하여 과거로 역행하려는 듯하고 있을까라는 점에 대해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곧 불교신학이란 어휘가 가져다주는 혼란과 새로운 전환을 위한 창의성은 서구 불교학의 연구 방향을 재평가하는 하나의 비판적 시각이고 이러한 비판을 거치면서 학문의 틀을 전환시켜 가기를 원하는 새로운 시도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어휘가 주는 혼동보다는 내용이 가져다 줄 이익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또한 이제 동양학의 한 부문으로 불교학이 겪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곤경을 극복하는 한 시도로도 생각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지적이다.
이민용 교수의 서구의 불교이해 흐름에 대한 발제를 토론 참석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다.

이민용 교수는 이어 “미국에서의 티벳 불교의 출현과 부활은 또 하나의 불교 연구의 현장을 개발시킨 것이 아니라, 불교학 연구의 새 차원을 여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양 승려 겸 학자들 밑에서 연구하였거나 그 다음 세대로 지칭되는 일군의 학자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들의 학술활동은 서구불교학 연구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 고메즈(Lewis Gomez, 미시간대학교 불교학 및 심리학 교수), 로페즈(Donald S. Lopez Jr. 미시간대학교 불교학 및 서장학 교수), 카비존(Jose Ignacio Cabezon, 일리프 신학대학 철학박사), 마크란스키(John J. Makransky, 보스톤 칼리지 불교학, 비교신학 교수), 그로스(Rita M. Gross, 위스콘신대학교 철학과, 종교학과, 비교종교 교수), 잭슨(Roger R. Jackson, 칼튼대학 종교학과 동남아시아 종교 교수), 앤 클라인(Ann C. Klein, 라이스대학 종교학과 교수) 등과 같은 신진학자들을 꼽았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한결 같이 제국주의적 분위기, 절대적 권력, 기독교적 전통에서 자유로워진 불교학 및 종교학의 새로운 세대이며, 대부분 수계를 받았거나 각자가 전공으로 삼는 해당 지역의 불교 사원에서 종교적 체험을 거쳤으며, 특히 리타 그로스나 앤 클라인과 같은 여성 불교학자는 불교학 연구에서의 여성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삼아 여성, 불교신앙 그리고 학문이라는 삼원적(三元的)) 차원의 연구를 동시에 시도한다.

바로 이들 학자에 의해 불교신학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모임이 형성되고 있으며, 지난 1996년 미국 종교학회(America Academy of Religion)의 연례대회에서 새로운 분과로서 불교신학(Buddhist Theology) 연구 그룹을 발족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민용 교수는 또 서구에서는 불교전통 자체 내에서의 적합한 용어를 색출하는 작업이 활발하다고 소개했다. “전 시대의 유물로 사용된 불교의 서구어 표현인 부디즘(Buddhism)이 얼마나 부적절한 표현인가는 새삼 다시 지적될 필요가 없다”고 언급한 이 교수는 “‘Buddha’(佛)에 주의를 갖다 붙인 무분별성을 다시 검토한다고 하여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불교학은 ‘Buddha’(혹은 깨달음)에 대한 연구이니, ‘Buddho/alogy’(佛學)은 어떨까 하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이것은 실제로 학자들에 의해 불교학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 불법(佛法, 부처님의 진리)에 관한 연구이니 ‘Dharmo/alogy’(佛法學)으로 표시하면 합당하지 않겠느냐 하는 주장도 있다”고 서구 불교학 흐름의 일단을 소개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작업을 행하는 사람들을 불교학자로 표시하였으며, 통속적 영어 표현으로 ‘Buddhist Scholar’란 말을 사용하였으나 이 말 역시 적절한 표현이 되지 못하며 ‘Buddhist Studies Scholar’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Buddhist Scholar’는 불교 내부인을 지시하고 ‘Buddhist Studies Scholar’는 불교에 대해 학문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이기는 하지만 그는 불교 내부인일 수도 있고, 외부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일례로 유럽 등지에서 가톨릭 신부로서 저명한 불교학자로 평가받는 경우를 들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과거의 불교학 연구 유산을 제국주의적 산물이거나, 오리엔탈리즘적 창안이거나 ‘나이브’한 비교주의의 산물로 거부할 수는 없다”며 “과거가 전수한 전통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이 이 시대의 불교학자들의 과제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지금 말하는 ‘Buddhist studies scholar’(불교학자)가 지녔던 한계성과 이중성을 극복하는 길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민용 교수는 “불교신학은 외형상 현대신학이 물려준 기술적인 장점들인 문헌학, 비판적 관점, 현대적 해석이라는 틀을 흡수하며, 종교로서의 역할을 재생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며 “불교학은 학문만의 대상이 아닌 신학을 귀감으로 하는 재생성이란 새 차원의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불교학은 종교적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은 해묵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진행형이라고 밝힌 이민용 교수. 이 교수는 이런 우문(愚問)이 여전히 제기된다는 사실은 거꾸로 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이미 종교성을 상실한 것으로 진단될 조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종교적 관심보다는 객관적 접근이 강조되고 신앙상의 양심과 도덕성 보다는 합리적 정합성을 추구하는 불교학에서 종교성의 부재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한 종교학자나 불교학자가 연구하는 전통이 종교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종교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라거나 그렇게 규정된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의당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는 단선적인 답변은 효과적인 대답이 될 수 없는 듯 보인다. 혹 호교론적 입장에서의 한 종교 전통의 변호적인 내용은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종교학적인 관심을 중심에 두고 한 종교에 대한 연구의 종교성을 문제시하고 있다.”

이 시대에서 불교학이 종교적일 수 있는 가능성은 단순할 수 없으며 기성의 종교전통과 일치시키는 일이거나 객체화된 종교현상 찾기가 종교학의 종교성이고 불교학의 종교성은 아닐 것 같다고 지적한 이민용 교수는 신학이 호교론이나 변호학을 벗어나며 겪는 문제점만큼이나 불교학이 종교적으로 되는 과정은 다면적이고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불교전통에 대한 해석과 그것을 적응시켜가며 불교의 가치를 재발현시키는 작업은 단순할 수 없다”며 “종교학과 불교학이 이 과정을 지켜보며 참여적인 동참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 일단의 학문적 표현이 불교+신학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건다”고 말했다.

이민용 교수는 논문의 결론부에서 ‘계속 검토되고 우리와 함께 공동의 과제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이슈로 ▲서구는 신승(Navayana)의 문제, 참여불교의 문제, 여성불교의 문제, 불교와 psychotherapy의 문제 등 새로운 변용 가능한 불교를 창안하고 있는가 ▲서구적 근대성으로의 전환은 무엇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Lost in translation) ▲서구적 개인체험과 명상주도의 불교전환은 우리에게서 위대한 전통의 혜택을 차단하는 것은 아닌가 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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