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불교학계에 《인도학불교학연구》라는 학술지가 있고 회원이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한국 불교학계의 역량은 초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최근 한국 불교학계의 전개와 활동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큰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학을 공부하는 대학이 처음에는 동국대학교 한 곳이었다가, 그다음에 원광대학교, 중앙승가대학교가 추가되었고, 그 뒤를 이어서 위덕대학교, 금강대학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능인불교대학원대학, 동방문화대학원대학 등이 출범하였다. 또 국립대학교와 유명 사립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학과 등에서 불교와 관련된 전공 교수가 활동하고 있다. 한국 불교학계도 과거와 비교하면 양적인 측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한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한국 불교학이 ‘양’의 측면에서 점차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 그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질’의 측면이다. 한국 불교학계에서 제대로 불교학을 연구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긍정적인 답을 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 일본, 한국의 불교학 접근방법

미국, 일본, 한국의 불교학 접근방법에 대해 대체적인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미국 학계에서는 서론에서 거창한 문제 제기를 하고 논문을 시작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 거창한 문제 제기를 결론에까지 밀고 가서 의미 있는 결실을 보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 학계에서는 문헌학 중심으로 연구하고 작은 문제를 촘촘히 연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경향을 한국 학계의 눈으로 본다면, 좀 답답하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거시적 안목, 삶과 직결된 문제를 고민하는 태도 등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에 비하면 한국 학계의 논문은 대체로 논리적 짜임새를 갖추고 있고, 관련 주제를 전반적으로 잘 설명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과연 논문 내용에 독창성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각 나라의 불교학 접근방법에 특징이 있지만, 한층 더 파고들어 가면 부족한 면이 드러난다.

그런데 미국 학계의 연구방법을 옹호하는 주장이 있다. 처음에 거창한 문제를 제기했다가 끝에 가서는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해나가면 언젠가는 의미 있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좋은 논문을 쓰지 못한다고 안달할 것이 아니라 조금 인내하고 기다려주면 의미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 학계의 연구방법을 지지하는 주장도 있다. 문헌학에 근거해서 작은 문제에 대해 천착하는 태도에 불만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연구를 중복해서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학계 전반적 관점에서 보면,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내는 측면이 있다. 하나하나의 개별적 연구는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모아놓고 보면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 학계에서는 논리적 글쓰기와 포괄적인 설명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학계 전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연구가 중복된 것이 많고 또 논문 내용의 독창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논문 한 편을 읽을 때는 잘 모르겠는데, 같은 주제의 논문 여러 편을 읽어 보면, 대부분의 논문이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학계 전반적으로 보면, 불필요한 논문이 양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 불교학계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한국 불교학이 추구해야 할 세 가지 사항

알다시피 한국에서 근대 불교학은 일제강점기에 출발하였고 해방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연구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연구인력의 부족 등으로 소수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에 이르러서 여러 편의 박사학위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불교학 연구가 제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 불교학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하고자 한다. 첫째, 학문의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언제나 맞는 말이기 때문에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 되기 쉽다. 그렇지만 불교의 경우, 다른 인접 학문, 다른 철학사상과 비교해 보아도 난이도가 높은 영역에 속한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불교학의 분야에서는 많다. 또 어학의 측면에서도 관련 전공 분야에 따라 공부해야 할 언어도 다양하다. 인도의 불교를 연구한다면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 한문은 해야 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티베트어도 해야 할 것이다. 또 영어, 일본어 등의 어학 실력도 갖추어야 관련 연구서와 논문을 읽을 수 있다.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를 연구한다고 하면, 한문을 좀 더 능숙하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실 연구자 대부분이 공감하는 바와 같이 어느 정도의 시간 투자로는 한문과 같은 고전어에 능숙하기는 어렵고 한문 강독에서 조금 진전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시간 투자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또 중국불교와 관련된 연구서와 논문을 읽기 위해서는 중국어와 일어 독해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도 말하기는 쉽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불교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변 능력’과 ‘뛰어난 어학 능력’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둘째, 한국사회에서 요구하는 연구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현대적 관점에서 불교 문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도 요구된다. 현대사회에서는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전이나 사상에 의거해서는 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현대적 안목을 갖추고 불교의 경전이나 사상을 다시 읽어낼 능력이 있을 때, 다양한 현대 문제에 대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철학과의 경우에는 불교학을 철학일반으로 승화해서 연구성과를 내는 것을 선호하고 있다. 이는 철학일반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갖고 불교 문헌을 읽어낼 때 가능한 것인데, 개별 연구자가 이런 요구를 충족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셋째, 내용은 충실하면서도, 일반 독자가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글쓰기 능력도 필요하다. 한국의 종교지형도를 보면, 불교가 주류의 종교에서 점차로 비주류의 종교로 밀려가는 추세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불교가 비주류의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로 영향력 측면에서 줄어들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때 불교학에 요구되는 것은 학문적 창의성만이 아니고 그것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소통의 역량도 포함된다. 좋은 내용을 관심 있는 독자가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글쓰기가 한국사회에서는 더 절실히 요구된다.

이상의 세 가지 사항을 연구자가 모두 충족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현실에서는 이런 학자를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역할 분담 같은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학문의 기본에 충실해서 좋은 연구성과를 내는 사람도 있고, 그 연구성과를 수용해서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며, 또 충실한 연구성과에 기초해서 일반 대중이 더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대중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좋은 능력을 가진 연구자가 나올 수 있도록 전반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좋은 연구자를 원한다면 그런 연구자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기 때문이다.

 

2021년 3월

이병욱(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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