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불교학의 정체성 찾기

1. 들어가는 말

불교학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진지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전에도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1980년대말 이후 최근까지 이루어진 것처럼 지속적이거나 의식적이지는 않았다. 심재관의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은 이 같은 고민들의 연장선 위에서 성취된 성과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방법론에 대한 고민들이 방법론 그 자체에 대한 반성과 전망이었다면, 저자는 지금 우리가 왜 방법론에 대해서 고민하고 모색해야 하는지, 그 고민의 이면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를 자기 자신과 한국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 이면의 진실을 이른바 ‘근대불교학’의 학사(學史)를 추적함으로써 밝혀내려 한다. 자신이 서 있는 숲 속에서 빠져나와 숲을 다시 바라봄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추적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의 공과를 논해야 한다면, 그 공의 첫째는 이면의 사실을 끌어내어 펼쳐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당면한 현재의 진실을 환기시켜 준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그 이면의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 불교학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을 일으키게 만든다. 굳이 불교학과 불학 또는 전통적 불교학으로 불교학을 구분하여 살핀 것도 결국은 우리 불교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결과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2. 근대불교학에 숨겨져 있는 이면의 진실

사실 어떤 학문이든 배움의 첫머리에서 그 학문의 역사를 배우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불교학에 있어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평자에게 국한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불교학사에 대한 통상의 인식과 실재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 즉 우리가 연구하는 불교학―저자가 말하듯 제대로 된 근대불교학은 아닐지라도―이란 근대불교학을 말하는 것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인도에서 발원하여 중국을 거쳐 우리 선조에게 유입되어 전승되어 온 불교학을 우리가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무의식중에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불교학―근대불교학―의 정의를 내리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이것은 논의의 혼선을 방지하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불교학에 대한 세 가지 정의를 내놓는데, 이것이 책의 출발점이자 모든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평자의 생각이다. 저자의 정의를 간추려 옮겨보면, “불교학은 동양을 대상으로 하는 식민제국들의 이해방식으로 서양의 학문분과이며, 문헌학이란 특정 학문 또는 그 학문의 방법원칙에 기생해 탄생한 학문이며, 그 학문이 가진 식민지적 역사 때문에 중심과 주변, 지배와 종속의 효과를 가지고, 그 효과가 전 지구적 환경을 맞아 더 확대될 수 있다”(p.6)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우리가 그러하리라고 생각하는 불교학의 정의에 대한 사고와는 상당히 다른 것인데, 불교학을 불교라는 한국의 종교적 전통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그리고 깨달음을 지향하기 위해 스스로를 이해하고 계발시켜 나가는 학문으로 이해하는 독자라면 그 괴리감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자는 우선 전통적 불교학(佛學, Learning on Buddha)과 근대불교학(佛敎學, Buddhist Studies, Buddhology)을 구분하여 제시함으로써 전통적 불교학(불학)과 근대불교학(불교학)이 다른 성격의 학문임을 밝힌다. 그리고 한국에서 문헌학을 토대로 한 근대불교학이 시작된 것은 동국대학교에 인도철학과가 설립된 1964년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1장의 주요 내용인데, 저자의 근대불교학에 대한 첫머리의 정의와 전통적 불교학과의 구분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말하는 불교학이 낯설다는 생각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앞에서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문헌학의 도입을 한국 근대불교학이 시작되는 절대적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그 논리의 단순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왠지 성급하다고 느껴진다.

저자가 말하는 불교학에 대한 생소함은 현재의 불교학 연구가 저자가 말하는 대로 문헌학만을 그 방법으로 삼고 있지 않는 데서 오는 현실과의 괴리에서 초래된 것이다. 한국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는 대다수는 불교 신앙자로서 출발하여 불교학에 참여하게 된다. 동시에 한국불교는 여전히 전통적인 강원교육과 수행의 체계들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저자가 바라는 만큼 온전하지는 못하다고 해도. 결국 한국에서의 불교학은 전통적 방법론과 서구에서 도입된 문헌학적 방법론이 혼재한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화가 미진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장점을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더구나 문헌학적 방법이 불교를 이해하는 유일하고도 최상인 방법은 아니다.

그 생소함이 더해지는 것은 근대불교학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에서도 비롯된다. 저자는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의 개설을 한국에서의 근대불교학의 시초로 파악한다. 저자가 말하듯이 인도학에서 분립되는 존재로서의 인도불교학에 대한 연구만을 근대불교학의 대상으로 한정한다면 그 말은 타당할 수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근대불교학이 인도학이라는 지역적 개념의 학문에서 분립되었기에 불교학을 한정된 지역적 개념속에 묶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적어도 한국에서 근대불교학이 산스크리트, 팔리어, 티베트어의 강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저자의 시각에 의하면, 불교학은 인도학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가지, 문헌학이라는 기준과 불교학을 바라보는 제한된 지역적 개념은 저자가 논의를 전개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한계로도 작용하는 것 같다.

‘근대불교학은 어떤 것인가’라는 근대불교학의 정체 규명을 염두에 두고 서술되어지고 있는 것이 불교학과 문헌학의 태생을 추적한 2장과 3장이다. 이 부분은 저자가 들어가는 말에서 내린 근대불교학의 정의에 대한 해명으로써 제시되어진 장인데, 제국주의 시대에 문헌학이 어떻게 도구로 활용되었는지 그리고 근대불교학이 문헌학의 일부로 출발하여 독립된 하나의 학문분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근대불교학의 헤게모니를 불교가 발생하고 성장한 토양으로서의 동양이 아니라 서구가 장악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과정이 여기에서 논의되어진다. 이 부분은 저자가 내린 정의의 첫째와 둘째 부분에 대한 구체적 사태의 파악이라 할 것인데, 불교학의 정체성에 대한 우리 고민의 일단이 근대불교학이라는 것에 기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우리는 식민시대의 불교학을 하고 있는가?

근대불교학의 정체에 대해 규명한 저자가 고민의 방향을 연장해 간 것은 역시 우리가 당면한 현실 쪽일 수밖에 없다. 실상 저자의 고민이 시작된 곳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했으므로.

4장에서 저자는 일본 근대불교학의 성립 사정을 살피고, 그것에 대조적인 한국에서의 불교학의 근대화 과정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저자는 여기에서 우리의 근대화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아직도 근대화의 여정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원인의 일 단면을 찾아서 보여준다.

저자는 일본과 한국에서의 불교학의 근대화에 나타나는 차이를 “유럽으로 유학승을 파견했던 일본과, 일본으로 유학승을 파견했던 한국 두 나라는 제국의 근대화된 힘 앞에서, 지적인 지평의 확장이 불교의 미래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는 유사한 명분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학생들이나 유학생을 파견한 사찰의 목적의식에서 일본과 한국은 선명하게 구분된다.”(p.73),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서구의 근대화를 통해 불교를 혁신한다는 것이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근대적 학문의 체계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주로 불교 수행자나 관계자를 근대적 인물로 개화하는 데 중점을 둔, 일종의 ‘인물론’이 중심이 된 것이다. …… 더 간단히 말하면 일본은 불교학의 근대화에서 학문의 제도적 인프라를 택했고, 조선은 사람을 택했다”(p.74)는 것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 근대화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차이는 인맥이나 학맥으로 나타나는 현 학계의 사정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첨언할 필요도 없겠지만, 저자의 이 같은 현 학계에 대한 인식은 불교학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인문학계 전반에 존재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불교학의 근대화 부문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는 한국사회의 근대화라는 논의와도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왜 지금 다시 식민주의인가’라는 질문은 ‘아직도 식민주의 현실은 연장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저자가 보기에 식민주의 현실은 계속되고 있다. ‘중심과 주변, 지배와 종속’이라는 효과가 계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러한 재생산의 실제 사례를 몇 군데에서 짚어나간다. 저자는 이것을 지식인과 시대의 악순환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그것이 외국인으로서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와 한국인으로서 외국에 유학하여 한국불교를 전공한 학자들의 사례를 통해서 지적되어진다.

저자가 보기에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는 동아시아 불교 전통의 해석학적 장치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공백 때문이 아니라 …… 불교인들이 다양한 교리를 주체적으로 통일된 관점 속에서 소화하려 했다는 점, 주체적인 해석의 입장에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p.121)는 것이다. 물론 지금 근대불교학의 영향을 수용한 대부분의 우리에게 있어서 교상판석이란 “제멋대로의 해석”이며 비역사적인 논의에 불과한 단지 불교사 연구의 대상일 뿐(p.122)이지만. 저자의 말대로 “교판의 성립과정을 ‘역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대 불교학자들에게, 당대 불교 수행자나 학자들이 교리의 통일적인 내면화를 위한 교판이라는 나름의 해석학적 장치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그러한 시각은 불교학의 전통이 처한 현실에도 그대로 연장되어, “근대불교학의 역사적 관점이 불교의 전통적이고 추상적인 개념까지 해체”(p.124)한 것이 현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문헌학적 방법의 도입이 우리의 전통을 해체하고, 그 문헌학적 방법을 도구로 삼는 서구에서 불교학을 배우고 도입해 온 학자들은 주변부에서 종속의 효과를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논리이다.

4. 우리 불교학의 현재진행형은?

여기에서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불교학의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한쪽에서는 근대불교학이라는 미명 하에 식민주의 불교학의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한쪽에서는 전통적 불학 찾기라는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가.

불교학을 하는 입장, 나아가 불교를 공부하는 입장에서의 우리―사실 한국적 전통에서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은, 그것이 수행자로서이든 학자로서이든, 불학(佛學)과 불교학(佛敎學)의 구분을 인식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계발하여 깨달음의 길에 이를 수 있는 잣대를 찾기 위해서라는 것이 평자의 생각이자 불교학을 공부하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가진 기본적인 자세일 것이다.

이 같은 자세가 견지되고 있는 한, 우리는 문헌학이라는 잣대에 좌우되는 근대불교학을 도구로는 삼고 있을지라도 거기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학하기’라는 일련의 고민들은 근대불교학의 중심 주제에서 벗어나 있는 불교 본연의 주제들을 중심부에 되돌려 놓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것이다. 반면에 저자의 말대로 우리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근대불교학을 수용하고 추종하는 입장에 있다면 우리는 고민의 자취를 다시 한번 더듬어 볼 수밖에 없다.

저자가 탈식민시대를 지향하면서 근대불교학의 이름 뒤에 숨겨진 식민주의적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도 결국은 우리 현실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기 위함일 것이다. 저자의 글이 내게는 이렇게 읽혀진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불교학의 현실은 이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불교학의 정체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심과 주변, 지배와 종속’이라는 효과를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라고.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저자가 했음직한 첫번째 고민이 무엇이었을지 되새김질해 보아야 한다. ‘중심과 주변, 지배와 종속’이라는 효과를 재생산하는 도구가 아닌, 주체성을 가진 불교학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
‘내부의 식민지에 저항하기’라는 제목의 맺는 말 속에서 저자는 식민성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대항적 글쓰기의 일례를 제시한다. 그러나 저자도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그것은 확고한 대안이나 전망으로서 제시된 것은 아니다. 현실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첨언일 따름이다. 앞만 보고 치달려 온 우리에게 이런 저런 변명으로 묻어두고 싶었던 화두를 던지고는 함께 고민하자고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5. 아쉬움

저자의 의도가 우리 불교학의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드러냄과 그것에 대한 자각에 있었다면, 저자의 의도는 상당 부분 성공적으로 독자에게 전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저자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내딛고자 의도하였던 것 같다. 그것은 저자의 제목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저자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은 아마도 유보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다만 책 속에서의 근대불교학에 대한 논의들의 반면으로만 남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불학의 전통은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올바른 이해방법이거나 유일한 접근 방법이 될 수 없고, 근대불교학은 더 근대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p.29). 하지만 이후의 논의들을 보면 근대불교학은 그것이 강화되면 될수록, 중심과 주변·지배와 종속의 효과를 증대시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불교학이 더 근대화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우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는 없다.

‘오랜 경학적(經學的) 자습에서 소화된 경전의 이해와 설명으로 이루어진 이한정의 글쓰기’는 저자가 제시하는 독자의 갈증에 대한 해소책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현대의 급변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해방구를 찾지 못한, 더 이상 불교의 올바른 이해방법이거나 유일한 접근 방법이 아닌, 불학의 전통에 속하는 것(p.29)임을 잊고 있는 듯하다. 불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필요조건은 될 수 있겠지만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대안이 될 수 없음은 이미 저자도 단언한 바 있다. 더구나 저자가 예로 든 ‘이한정의 글쓰기’는 저자가 말한 것과는 달리 읽혀지기도 어렵고 당연히 이해되어지기도 어렵다. 읽혀지기도, 이해되어지기도 어렵다는 것은 시대와 동떨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우리는 불학의 전통을 뛰어넘는 동시에 근대불교학의 식민주의적 속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것’을 기대한다. 그 ‘어떤 것’이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다는 것은 저자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불교학을 공부하는 우리 전체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불학의 전통에 속하는 방법론에 대한 탐구가 근대불교학을 추적하는 것만큼 충실히 다루어지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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