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1. 머리말

조선조에 의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으로 통폐합되어 다양한 종파적 특성들이 혼재되어 오던 한국불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쇠퇴를 거듭한 끝에 구한말에 이르면 은둔적 승가와 기층민중들의 기복 신앙이라는 형태로 변모해 간다.1) 소회(塑繪)란 입체적 형태를 가진 소상(塑像)과 회화(繪畵)를 통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만해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회는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불상과 탱화를 비롯해 각종 조각이나 그림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정화(淨化)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한국불교는 그 모습을 일신해 오늘날 조계종이라는 선종(禪宗)으로 다시 자리 매김하면서 종단의 체계를 잡아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근래로 오면서 수행승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선법이 융성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2)2) 1976년과 1982년에 집계된 ‘전국선원현황’에 따르면 전국 선원에서 수행 정진하는 수행승은 950여 명이었다. 그러나 1999년에 집계된 통계를 보면 무려 1,640명으로 대폭 늘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찬, 〈선원의 운영 현황과 문제점〉, 《禪院總覽》(서울: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2000), p.99.

따라서 근대 한국불교사는 조계(曹溪) 선종의 정체성을 회복해 가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구한말은 한국불교가 혼돈과 무질서를 극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런 계기를 가져 온 것은 개항 이후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적 흐름과 기독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와 서구 신문물의 전래였다.3) 3) 김경집, 《한국근대불교사》(서울: 경서원, 2000), p.19.

오랜 침체를 거듭해 온 불교계로서는 당시의 급격한 사회적 변화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불교가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나타났고 그와 함께 각종 개혁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4)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바로 이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4) 권상로는 1913년 간행한 〈朝鮮佛敎革新論〉에서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개량(改良)’, ‘발달(發達)’, ‘확장(擴張)’, ‘유신(維新)’이라는 기치를 내건 각종 개혁론이 활발하다고 기술하고 있다.(權相老,<朝鮮佛敎革新論>,<退耕堂全書8冊>,P51)

이렇게 근대 한국불교사를 불교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선종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조선불교유신론》의 개혁론은 현재적 의미로 되살아난다. 달리 말해 《조선불교유신론》은 과거 어느 시점의 개혁론이 아니라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과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한국불교에서 여전히 유효한 개혁론이며, 한국 선(禪)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고민해 보아야 할 여러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 같은 문제의식을 기초로 만해가 주창한 소회(塑繪) 폐지론이 선종에서 말하는 믿음의 문제와 어떤 논리적 당위성을 갖는지, 또 한국 선종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문제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소회 폐지론을 주창할 당시의 신행 양상을 살펴보고 소회 폐지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규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믿음에 대한 선종의 입장을 통해 만해의 소회 폐지론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구한말 불교계의 신행(信行) 양상

1) 은둔적 승가와 기복적 대중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 함께 개항이 단행되면서 한반도에는 서구 사조와 외래 종교를 비롯해 소위 신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반도는 격동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한 불교계의 상황은 오랜 탄압과 침체로 피폐해져 있었고, 종단과 승려 등 제반 여건은 국가로부터 용인되지 못한 상태였다.5)5)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조계종사(曹溪宗史): 근현대편》(서울: 조계종 출판사, 2001), p.21.

사찰은 경제적으로 곤궁했으며, 승려들은 하천한 신분으로 천대받아 도성출입마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는 사회의 주류층과 접촉할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었다.6)6) 바로 이 시기에 천주교와 개신교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영토분할이라는 국제적 질서와 궤를 같이하면서 한반도 곳곳에 성당과 교회를 설립하고 점차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승려들은 자연히 깊은 산중에 은거하면서 선(禪)과 교(敎)의 겸수를 통해 어렵게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무종산승(無宗山僧) 불교시대를 보내고 있었다.7) 이처럼 지배층으로부터 멀어지고 국가로부터 공인받지 못한 불교계의 상황은 자연히 승려들의 자질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만해는 당시 출가하는 승려들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7) 김영태, 〈근대불교의 종통 종맥〉, 《한국근대종교사상사》(이리: 원광대 출판국, 1984), p.186.

빈천에 시달리지 않으면 미신에 혹한 무리들이어서, 게으른데다가 어리석고 나약해서 흩어진 정신을 집중할 줄 몰라서 처음부터 불교의 진상(眞相)이 무엇인지 깜깜한 형편이다.8)8) 한용운, 이원섭 역, 《조선불교유신론》(서울: 운주사, 1992), p.70.

인용문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가장 하등한 사람들만을 모아놓은 집단이 불교계라는 것이 당시 승려의 자질에 대한 만해의 평가다. 출가자의 자질에 대한 탄식은 만해뿐 아니라 1913년 《조선불교월보》를 통해 〈조선불교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을 발표했던 권상로(權相老)나 대각교 운동을 펼쳤던 용성(龍城)의 글을 통해서도 한결같은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권상로는 승려들이 학식이 미천해서 시세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명리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9) 9) 권상로, 〈조선불교혁신론〉, 《조선불교월보》 18호(1913년 7월), pp.47∼49.

또 용성은 “청정한 도량이 음탕한 소굴로 변하였으며 술과 고기와 오신(五辛)이 낭자하고 또 개인의 이익에만 몰두하니 악마가 사문이 되어 불도(佛道)를 스스로 멸망케 하는 것이다.”10)라고 탄식했다.10) 용성, 한종만 편, 〈중앙행정에 대한 희망〉, 《한국근대민중불교의 이념》(서울: 한길사, 1982), p.141.

이렇게 불교가 외적으로 핍박받고 내적으로 사원 경제의 빈곤과 승려 자질의 저하는 불교를 믿는 신도들의 구성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이 시기 불자들의 특징은 권력에서 멀어진 일부 유생들과 기층민중들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특히 이들을 성별로 분류해 보면 여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만해는 불자들의 구성에 대해 “신도로 말하면 소수의 여인뿐이며, 남자는 봉황의 털이나 기린의 뿔같이 아주 드물다.”11)라고 표현하고 있어 당시 불교 신자들의 구성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1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70.

물론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불교를 믿는 거사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8∼1856)를 비롯해 월창(月窓) 김대현(金大鉉, ?∼1852) 등은 당대의 뛰어난 거사들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월창 거사는 천태지의의 《선바라밀차제법문》을 토대로 참선 입문서에 해당하는 《선학입문》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12) 12)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 pp.24∼26.

또 1872년에는 거사들이 묘련사(妙蓮寺)에서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한 신앙결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몇몇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상황은 조직적 신행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개인적 차원의 학문 탐구나 신앙활동에 그치는 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13)13) 김경집, 《한국불교 개혁론 연구》(서울: 도서출판 진각종 해인행, 2001),p.15.

2) 염불결사와 정토신앙 중심의 신행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 불교계의 상황은 교단 내적으로 사원 경제가 피폐하고 승려들의 자질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불자들의 구성은 기층민중들을 주축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 같은 불교계의 전반적인 상황은 자연히 신앙적 측면과도 상호 인과적 관계성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교학적 체계에 근거해서 신행을 지도할 만한 승려의 부재와 기층민을 중심으로 한 신도 구성은 자연히 기복적 신앙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외연(外緣)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행해진 대부분의 신앙활동은 미타신앙(彌陀信仰)을 중심으로 한 정토신앙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14)14) 김경집, 위의 책, p.16.

이 같은 신행적 특징은 19세기부터 본격화된 염불결사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때 종합적 고찰이 가능하다.

만일염불회(萬一念佛會)로 불려지는 염불계(念佛契)는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전국 각지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범어사·유점사·건봉사 등에서 결성된 이런 염불계는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용되기 이전 시기, 즉 1895년까지만 해도 무려 21건이나 결성되고 있다.15) 15) 19세기 불교계에 나타난 염불계의 급증은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즉 일반적 계는 1800년부터 1910년까지 모두 82건의 계가 성립되고 있다. 김필동, 《한국사회조직사연구: 계조직의구조적 특성과 역사적 변동》(서울: 일조각, 1992), p.247.

전국의 대소사찰에서 결성됐던 이 같은 염불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염불계, 미타계, 관음계, 지장계 등이 중심을 이룬다.16)16)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 pp.21∼22.

이름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염불계의 주된 흐름은 극락왕생을 기원하거나 또는 현세적 복을 비는 기복신앙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염불결사의 확산은 침체한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피폐한 사원경제를 되살리는 한편 일반 대중들에게는 신앙심을 심어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17) 17)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p.21.

그러나 당시의 신행 풍토는 불교의 사상적 전통의 계승이나 자력적 수행 전통의 상승(相承)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일정 정도 거리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만일염불회가 전국 도처에서 결성되는 데는 불교 내적 상황과 신도들의 기복성이 상호 일치점을 찾는 데서 기인한다. 즉 교단 내적으로는 어려워진 사원경제를 되살리고 사찰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조직적 신행결사가 필요했다. 그 예로 신앙적 내용을 중심으로 하던 염불결사가 18세기 중엽을 거치면서 점차 사찰의 유지와 보수 등 이른바 ‘보사(補寺)’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경향이 짙어간다는 점이 이를 반증해 준다. 즉 이 시기의 염불계는 주로 계금(契金)에 대한 적립과 운영 등 신앙적 측면보다 경제적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18)18) 한상길, 〈조선후기 사찰계 연구〉(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p.40∼41.

반면에 불자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기층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외세의 침투와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19) 등으로 전통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삶의 터전이 위협받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는 곧 내세적 구원과 현실적 안녕이라는 기복신앙을 강하게 요구하게 된다. 이 같은 이해관계로 인해 도처에서 만일염불결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19) 1876년 강화도 조약과 개항,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 1905년 노일전쟁 등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격변의 연속이었다.

19세기말의 시대적 위기상황과 맞물려 본격화된 이 같은 염불결사 운동은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수도권으로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즉 1904년의 흥국사, 1910년 화계사, 1912년 봉원사와 개운사를 비롯해 1900년대에 결성된 염불결사도 확인된 것만 13개에 달하고 있다.20) 20) 한보광, 〈최근세의 만일염불결사〉, 《신앙결사연구》(성남: 여래장, ,2000),pp.272~296

이렇게 볼 때 19세기에 본격화된 염불결사와 정토신앙은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할 시점인 1910년대에 이르면 수도권 등지로 확장되면서 불교의 보편적 신앙형태로 자리잡게 된다.21)21) 이 같은 통계는 결사문을 비롯한 결사와 관련한 자료를 토대로 산출된 것이다. 그러나 결사문이 없는 결사 등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진행된 염불결사 운동의 양상은 통계 수치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보편적 신앙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만해는 당시 신행의 중심이 되었던 염불신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동일한 불성(佛性)을 지닌 엄연한 7척의 몸으로 대낮이나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을 치고 곧은 쇳조각을 두들겨 가며 의미 없는 소리로 대답도 없는 이름을 졸음 오는 속에서 부르고 있으니, 이는 과연 무슨 짓일까. 이를 가리켜 염불이라 하다니, 어찌도 그리 어두운 것이랴.22)22)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64.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만해는 당시의 신앙적 흐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스스로가 불성을 지니고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북을 두드리며 밖을 향해 구원을 비는 것은 선적(禪的) 관점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이런 신행에 대한 보편적 평가는 북을 치며 염불하는 것이 곧 연화장 세계라고 생각할 만큼 불교신행 그 자체로 이해되고 있었다.23)23) 당시 염불하는 의식은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을 치고 곧은 쇳조각을 두들겨 가며 의미 없는 소리로 대답도 없는 이름을 졸음 오는 속에서 부르고”라는 만해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성염불(高聲念佛)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고성염불은 《아미타경통찬소(阿彌陀經通贊疏)》(大正藏 37)에서 고성염불의 열 가지 공덕(十種功德)을 말하고 있는데 이같은 근거에 따라 정토종에서는 고성염불을 수행법으로 택하고 있다.(이태원,<염불의 원류와 전개사>(서울:운주사 998),pp.525~529

이번 사월 보름,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보광암에 이르렀는데 수십 명의 스님들이 향을 사르고 예불을 드리면서 북을 두드리고 경을 염송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정토의 연화법계이리라.24)24)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 p.267. “是歲巳月之望 余遊覽金剛 轉到普光庵 十數僧道 燒香禮佛 擊鼓念經 正是彌陀淨土蓮花法界.”

앞에 인용한 만해의 글과 위의 인용문은 모두 북을 치며 소리 높여 염불하는 동일한 의례를 두고 밝힌 소감이지만 두 인용문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만해와 당시의 보편적 신행관과는 상당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만해가 당대를 풍미하던 신앙적 흐름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데서 기인한다.

결국 당시의 신앙적 흐름은 교리와 경전에 근거한 체계적 신행과 수행보다는 염불과 기도라는 대중적 신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해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같은 현실은 불교의 본래성과는 거리가 먼 왜곡된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3) 쇠잔한 선풍과 경허의 선풍진작

말세사상이 만연하고 기복적 신앙과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결사가 대중적 신행운동으로 풍미할 때 조선의 선풍(禪風)은 극도로 쇠잔해 있었다. 제방에는 깨침을 인가할 스승도 없었으며 법맥을 물려받을 제자도 없었다. 경허는 “정법 보기를 흙덩어리와 같이 하며, 불조(佛祖)의 혜명(慧命) 계승하기를 아이 장난과 같이 여기고……”25)라며 당시의 분위기를 한탄하고 있다. 북소리와 염불소리는 요란했지만 선맥(禪脈)을 지켜온 선승들은 자신의 법통을 전승하지 못하고 스스로 법맥을 단절해야 하는 것이 당시 불교계의 현실이었다.26)25)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경허법어(鏡虛法語)》(서울: 인물연구소, 1981), p.250. 26)한암문도회 편,<한암일발록(漢巖一鉢錄)(서울,민족사,1995),pp.293~294.

그러나 꺼져 가는 선풍을 되살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시기에 경허(鏡虛)는 1899년 무너진 선풍을 회복하고자 해인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한다. 경허의 이 같은 수행결사는 염불신앙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본다면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반문과 함께 역사적 자각이 담겨진 운동으로 바라볼 수 있다.

경허의 눈에 비친 당시 불교의 모습은 정법이 침체되고 쇠미하여 삿된 도가 치성한 상황이었다. 염불결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자성자도(自性自度)라는 선의 본래 정신이 없었다. 대신 스스로 자신의 근기를 낮추고 구원을 빌기에 바빴던 것이다. 경허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여러 대승경전과 선문어록을 모두 살펴보아도 말세중생이 진정한 도를 구할 수 없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며 당시의 신행풍토와 가치관에 대해 강한 반문을 제기한다.

모든 도사들이 마음을 밝혀 견성(見性)을 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말세 사람은 정(定)과 혜(慧)를 익혀 배우지 말라는 것은 보지 못했도다. …… 말세 중생이 진정한 도를 참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문구가 있었던가.27)27) 경허(鏡虛),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결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쫶社文)〉, 《경허집》(양산: 극락선원, 1990), p.80.

경허는 꺼져 가는 전등의 불빛을 되살리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 바른 법을 배우고 도업(道業)을 함께 닦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결사를 추진하고 전국을 두루 편력하면서 선을 실천하고 도반을 규합했다. 이를 위해 경허는 해인사의 정혜결사 이후에도 통도사·범어사·화엄사·송광사 등을 순력하며 선원을 복원하고 선실을 개설하는 등 영남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결사운동을 확장하면서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평가받고 있다.28)28) 권상로,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서울: 동국대학교, 1959), p.293.

경허에 의해 진행된 이 같은 선풍진작 운동에 대해 한암은 “사방에서 선원을 다투어 차리고 발심한 납자들이 구름 일듯하니 마치 부처님의 광명이 다시 빛나 사람의 안목을 열게 하는 것 같았다.”29)고 술회하고 있다. 이처럼 경허의 선풍진작 운동이 근대 한국불교사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오랜 침체 속에 끊어졌던 법맥이 하루아침에 복원될 수는 없는 문제였다.29)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 p.33.

경허의 선풍진작 이후 전국 곳곳에 선방이 유행처럼 생겨나고 수행자들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결코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만해는 선실(禪室)을 사찰의 명예나 이익을 낚는 도구로 삼는 곳도 있었기 때문에 선방은 많아지지만 진정한 선객은 봉황의 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귀하다고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30) 30)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55.

이를 미루어 볼 때 오랜 침체를 겪은 당시 불교계는 비록 경허와 같은 선지식에 의해 선풍진작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수행자의 자질 면에서 보면 외형적 선방의 증가만큼이나 실질적인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할 시기의 상황은 승려와 불교 대중들의 인식은 말세관에 빠져 있었으며, 신행의 주된 흐름은 자력적 신행보다는 타력적 신행에 의존하고 있었다. 선풍은 침체되어 있었지만 활발한 염불결사 운동으로 곳곳에 염불당이 세워지고 밤 세워 고성염불을 하며 극락왕생을 비는 것이 당시 불교계의 전반적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선적 견지에 입각해 본다면 당시의 불교 현실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만해는 이상과 같은 시대적 문제를 해소하고 불교의 참다운 본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내놓고 있다.

3. 선종의 사상적 맥락에서 살펴본 믿음의 문제

1) 한국불교의 통불교성(通佛敎性)

한국불교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 형성된 모든 불교적 전통들을 계승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종파불교의 흐름과 민간 신앙과의 섭합을 통해 불교는 하나의 줄기가 아니라 다양한 신앙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이 같은 교리적 내용과 신앙의 대상에 대한 혼란은 종파불교라는 형태로써 극복되고 있다. 선종은 선종의 전통에 입각하고, 화엄종은 비로자나불을, 정토종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해당 종파의 소의경전에 따라 믿음과 신행을 규정함으로써 다양한 전통은 나름대로의 질서와 통일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권력에 의해 교리와 믿음의 대상이 서로 다른 종파를 강제로 통폐합당한 조선시대의 불교사는 한국불교를 소위 말하는 통불교(通佛敎)라는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태조의 창업을 도왔던 태종은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11개였던 종파를 7개로 통폐합했다.31) 31) 우정상·김영태, 《한국불교사》(서울: 신흥출판사, 1968), pp.134∼135.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탄압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세종대에 이르면 7개의 종파를 통폐합하기 시작한다. 즉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의 3종을 합쳐서 선종(禪宗)으로 삼고,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의 4종을 합쳐서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하면서 선교양종(禪敎兩宗)이라는 체제가 만들어진다.32)32) 우정상·김영태, 위의 책, p.136.

결국 이 같은 과정을 거친 한국불교의 모습은 상이한 종파적 전통이 서로 혼재하게 되면서 다양한 사상적 체계와 신앙적 양식들이 뒤섞이게 되었다. 따라서 종파불교의 단순하고 명확한 교리와 의례 체계는 조선시대의 불교에는 찾아볼 수 없다. 선종과 정토종의 교리가 뒤섞이고, 화엄과 정토의 가르침들이 서로의 개념적 영역을 넘나들 수밖에 없는 필연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불교의 믿음과 신행체계에 아주 복잡한 모자이크 문양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상근기 중생에게는 통합과 융섭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몰라도 중·하근기 중생에게는 혼란과 충돌로 이해되기에 충분했다.33)33) 이 같은 상황은 현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정도 사세가 갖추어진 사찰에는 다양한 경전에 출현하는 부처님을 봉안하기 위한 여러 전각들이 건립되고 다양한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는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할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만해는 “조선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가 매우 많아서 아마 백 가지도 넘을 것”34)이라고 분석한다. 그 수많은 소회의 내용은 각기 다른 종파불교에서 성립된 것에서부터 심지어는 출가 수행자를 외호해야 하는 신중은 물론이요, 불교적 신앙과 아무 상관없는 칠성과 산신령 등 민간신앙의 소회까지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35)34)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89. 35) 이 문제는 한국불교의 관용성·융통성·통합성이라는 긍정적 측면에서 읽을 수 있으며, 불교 사상의 포용성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교리적근거의 혼란은 부정할수 없는 문제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은 오랜 탄압을 거쳐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변모해 가던 구한말에는 상황이 극한에까지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논객들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소상과 탱화 등은 미신에서 나온 거짓된 모습인 만큼 전부 소각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미신적 요소를 일소하고 신앙의 본질적 모습부터 뜯어고칠 때 비로소 암흑 시대의 전통을 일소하고 참다운 불교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36)36)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89.

서산 대사는 “공부하는 사람은 먼저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종파의 가풍(家風)부터 자세히 알아야 한다.”37)고 했다. 이는 복잡한 종파적 전통이 혼재된 한국불교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더욱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1개의 종파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빚어낸 한국불교의 문양은 ‘불교는 비체계적이고 상호 모순적’이라는 인식을 낳기에 충분하다.37) 《선가귀감(禪家龜鑑)》, 韓佛全 7책, p.644 上. “大抵學者 先須詳辨宗途.”

따라서 한국불교를 바라볼 때 나름대로 정리된 교판적(敎判的) 판단 기준이 없다면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학적, 실천적 가치관의 부재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합리적이라는 미명 아래 미신과 비불교적 요소마저도 불교라는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문제는 보다 구체적인 고민들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렇게 볼 때 만해의 소회 폐지론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기반해서 올바른 신앙적 체계를 정립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2) 선종사(禪宗史)를 통해본 믿음의 대상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될 때 불법의 진리성은 경전으로 대표되는 철학적 내용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문화적이거나 신앙적인 증거는 경전에 근거한 불상을 통해 제시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는 모습은 곧 불상과 경전을 통해 이루어졌다.38) 38) 권기종 역, 《중국불교사》(서울: 동국역경원, 1985), p.21.

이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 나라에서 경전과 불상은 새로운 사상체계와 문화로 받아들여지면서 불교는 국가적 차원에서 수용된다. 그러나 선종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달랐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시작되는 선종사를 살펴보면 믿음의 대상에 대한 선의 입장이 드러난다.

달마가 처음 중국으로 왔을 때 그는 불상도 경전도 없이 홀홀 단신으로 선법을 전하러 왔다. 금빛 찬란한 부처님에게 예배하는 것이 불교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은 불상도 경전도 없이 불법을 전한다는 달마를 기이하게 생각했다.39) 소문은 황제에게까지 미쳤고 마침내 달마는 양무제와 만나게 되지만 서로의 인연이 맞지 않아 소림사로 들어가 면벽하게 된다.40) 39) 阿部肇一, 최현각 역, 《인도의 선 중국의 선》(서울: 민족사, 1990), p.116.40) 《전등록》(서울: 동국역경원, 1986), p.98.

고승이라면 국가적 차원에서 맞이하던 중국에서 달마는 예외적으로 은둔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는 진리에 대한 경전적 근거나 불상으로 대표되는 신앙적 근거에 의지하지 않는 달마의 선법을 당시 불교계나 중국사회가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에 선법이 처음 전래될 때도 이 같은 상황은 재연되었다. 가지산문의 개산조로 서당지장(西堂智藏)의 선법을 전래한 도의 국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달마에게 가해졌던 것처럼 마설(魔說)이라는 비방이었다. 결국 도의국사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강원도 오지의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가 달마처럼 시절인연을 기다리며 은둔해야 했다.41)41)최현각,<선학의 이해>(서울,여시아문,2002)pp.162~163.

이상의 두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선(禪)은 그 전래 초기부터 일반적 불교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거나 전법의 증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전통은 선종이 율종 사찰에서 독립해서 자체적인 전통을 수립하는 청규(淸規)가 제정되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즉 선림(禪林)의 가람, 직위, 수행 등의 항목을 담고 있는 청규에는 법당(法堂), 승당(僧堂), 방장(方丈), 요사(寮舍) 등만 기록되어 있고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은 아예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다.42)42) 최법혜, 《고려판 선원청규 역주》(서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출판부, 2001), p.37.

불전을 건립하지 않는 것에 대해 《선문규식(禪門規式)》에서는 “불전을 세우지 않고 법당(法堂)만을 두는 것은 불조(佛祖)께 친히 전해 받은 이로서 당대의 존중할 곳임을 표시하는 것이다.”43)라고 기록하고 있다.43) 《전등록》(서울: 동국역경원, 1986), p.244.

이처럼 선종이 독자적 사원을 짓고 선종만의 전통을 형성할 수 있게 되자 아예 부처님을 모시는 불당을 짓지 않고 그 자리에 법을 설하는 법당을 지었다. 그리고 부처님이 봉안되어야 할 설법전의 법상(法床)에는 부처님 대신 조사가 올라가 상당설법(上堂說法)하는 장소로 대체되었다.

이에 대해 백장은 “일산(一山)의 주지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하는 것”이라고 할 만큼 선종은 믿음의 대상에 대해 기존의 불교 종파와는 철저히 독자적 입장을 견지한다.44) 물론 만해가 이 같은 선종의 역사를 예로 들어 소회폐지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불교유신론》이 담고 있는 내용을 분석해 보면 결국 선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44) 불전을 짓거나 불상을 모시지 않는 당대(唐代) 선종 사찰의 구조와 정신과는 달리 신라 선종사찰에서는 불전(佛殿)을 세우고 주존불로서 비로자나 불상을 봉안한다. 이는 신라의 선종이 화엄교학을 기초로 발전한 것에서 기인하는 부분이다. (이기선, 〈고려시대 선종가람과 불교미술(1)〉, 《韓國禪學》 4호(서울: 韓國禪學會, 2003), p.166) 특히 긍양(兢讓)이 중창한 선종 사찰 봉암사의 전각을 보여주는 자료에 따르면 ‘대웅광명보전’, ‘약사전’, ‘설법전’, ‘관음전’, ‘응진전’, ‘금색전’, ‘지장전’, ‘시왕전’, ‘극락전’ 등의 전각이 보이고 있다.(한기문, 〈新羅末 禪宗 寺院의 形成과 構造><韓國禪學>2호(서울,한국선학회,2001)p287)이상의 내용을 미루어 볼때 신라시대의 선종사찰에서는 불전을 비롯해 시왕전까지 대부분의 전각을 두루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수 있다.

3) 선(禪)에서 믿음의 의미

선종의 역사에서 볼 때 부처님이나 보살상 등을 향한 신앙행위는 앞서 살펴본 대로 불교의 일반적 전통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종 역시 불교 테두리 내에 있는 만큼 불상이나 보살상을 향한 믿음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불설선생자경》45)에서 전의설법(轉意說法)을 통해 기존의 종교 의례를 부정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규정했던 것처럼 선종에서도 믿음의 대상에 대해 선종의 시각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45) 《불설선생자경(佛說先生子經)》, 大正藏 1, p.252下.

적어도 초기 선종이나 당대(唐代)의 선종에서 믿음이란 절대자를 향한 경배를 인정치 않으며 그 같은 믿음의 대상도 인정하지 않는다. 선에서 믿음의 대상은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조단경》에서는 참다운 귀의란 “스스로 깨쳐 스스로 닦음이 곧 돌아가 의지하는 것”46)이라고 정의하고 만약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않으면 돌아갈 바가 없다.”47)고 못박고 있다. 46) 성철 편역,<돈황본단경>(서울,장경각,1988),p.145."自悟自修 卽名歸依也“ 47) 성철 편역,위의 책,p.157."自性不歸 無所歸處“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귀의(歸依)는 눈앞에 있는 대상화된 불상이 아니라 바로 불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에게로 방향이 전환된다. 《육조단경》에서는 이 같은 믿음의 방향전환을 ‘스스로에게 귀의함’이라는 ‘자귀의(自歸依)’48)로 규정한다. 따라서 선종에서 믿는 삼보란 내면의 삼보를 의미하는 자성삼보(自性三寶)가 된다.48) 성철 편역, 위의 책, p.142.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 하느니라.(自歸依者 除不善行 是名歸依)”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自性)의 삼보(三寶)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覺)이요 법이란 바름(正)이며 승이란 깨끗함(淨)이니라.49)49) 성철 편역, 위의 책, p.155. “善知識 歸依自性三寶 佛者 覺也 法者 正也 僧者 淨也.”

믿음이라는 행위가 스스로에게 돌아가 의지하는 ‘자귀의(自歸依)’이며 그 믿음의 대상이 스스로의 성품에 내재된 ‘자성삼보’로 규정된다면 전통적 불교에서 해왔던 것처럼 믿음의 대상을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이 밖을 향해 찾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임제는 스스로 믿는 것이 요체인 만큼 밖을 향해 의지할 대상을 찾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설사 밖을 향해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다운 의지처가 아니라 육진 경계를 반연(攀緣)한 삿된 길이기 때문이다.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제 스스로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밖으로 찾지 말라. 모두가 저 부질없는 육진 경계를 반연(攀緣)하여 도무지 삿되고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50)50)<임제록臨濟錄>,大正藏47,p.499上합. “如今學道人 且要自信 莫向外 總上他閑 塵境 都不辯邪正”

이처럼 밖을 향해 찾는 것이 삿된 도라면 우리가 의지해야 할 믿음의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그것은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기 때문에 그 대상은 바로 우리의 내면에 있다. 혜능(慧能)은 우리 내면 속에 있는 그 믿음의 대상을 ‘자성(自性)’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성이 드러난 바이기 때문에 그 자성이 미혹하면 중생이 되고 자성을 깨달으면 부처님이 된다고 가르친다.51)51) 성철 편역, 위의 책, pp.200∼201.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佛是自性作 莫向外求 自性迷 佛卽衆生 自性悟 衆生卽是佛).”

따라서 혜능도 밖을 향해 찾지 말 것을 강조한다. 임제는 이 부분에 대해 더욱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즉 우리들이 “조사나 부처와 다름이 없고자 한다면 밖으로 구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52)는 것이다. 이것을 깨우치기 위해 임제는 우리가 방황하며 찾는 그 믿음의 대상을 부정하기에 앞서 그 대상을 찾아 질주하는 바로 ‘나’의 정체를 반문한다. ‘나’의 정체, 즉 스스로의 자성을 밝히는 것이 곧 부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2) 《임제록》, 大正藏 47, p.497中. “횝要與祖佛不別 但莫外求.”

대덕들이여! 그대들은 똥자루를 짊어지고 바깥으로 달음질치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데, 이렇게 내달려 구하는 바로 그놈을 그대들은 아느냐?53)53) 《임제록》, 大正藏 47, p.501中. “大德 횝擔鉢囊屎擔子 傍家走 求佛求法 卽今與? 求底 彌還識渠?.”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육조단경》과 《임제록》을 비롯해 수많은 어록(語錄)과 선전(禪典)에서 말하는 믿음의 대상은 밖을 향한 귀의가 해체되고 내면으로 돌아오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특징을 보여준다. 결국 선에서 바른 믿음은 밖을 향해 내달리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믿음이란 밖에서 구하지 않고 자성을 바로 믿은 것을 말한다.

바르다 삿되다 한 것은 무슨 차이인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믿는 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하고, 마음 밖에서 법을 얻으려는 것을 ‘삿된 믿음’이라 한다.54)54) 박산화상(博山和尙), 《참선경어(參禪警語)》(합천: 장경각, 1988), p.35. “邪正者自心卽佛名正信 心外取法名邪信.”

이렇게 밖에서 찾지 않고 자성을 바로 보아서 부처님을 찾고 그 주인공이 그대로 부처임을 철저히 밝혀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바른 믿음’55)이라는 믿음에 대한 선의 일관된 가르침이다.55) 박산화상, 《참선경어》(합천: 장경각, 1988), p.35. “卽佛要究明 自心親履實踐 到不疑之地 始名正信.”

이상과 같이 믿음과 믿음의 대상에 대한 선(禪)의 입장을 통해 만해의 소회 폐지론을 바라보면 만해의 주장이 개인적 주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조사가 정전(正傳)해 준 가르침에 따라 선종의 본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개혁론임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왜곡된 시대적 상황이 극복해야 할 현실이라면 선사상에 입각한 종풍(宗風)은 만해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는 관계성을 이루게 된다.

4. 소회 폐지론과 선종의 정체성 회복

1) 소회의 기능과 선별적 폐지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종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수많은 소상을 모셔놓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불법의 대의로 생각하는 것은 왜곡된 불교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선종으로 보는 만해56)가 복잡한 소회(塑繪)의 정리를 통해 신행을 개혁하고자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해는 당시 논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소회를 일거에 소각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반대한다. 만해는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신봉해야 할 믿음의 대상이 교리적 근거가 있는지를 따져서 폐지해야 할 것과 보존해야 할 것을 구별하고 있다.56) 만해는 임제종 운동에 대해 “조선(朝鮮) 고유(固有)의 임제종(臨濟宗)을 창종하여……”(韓龍雲, 〈佛敎靑年同盟에 대하야〉, 《佛敎》 86호)라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뒤 곧바로 임제종 운동에 뛰어들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만해가 선별적으로 소회를 폐지하자는 이유는 소회가 갖는 신앙적 기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만해는 자신이 어린 시절 공자묘에서 만난 석상이나 관공묘에서 관우의 그림을 보고 받은 정신적 감동을 회상하면서 소회가 갖는 신앙적 기능을 인정한다.57) 57)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1.

따라서 소회 그 자체는 비록 ‘거짓 모양’이지만 중생들의 모범이 되고 부처님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하는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회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소회에 대한 신앙이 본래적 의미에서 벗어나 마치 불교의 본질처럼 본말이 전도된 상황 때문이었다. 따라서 만해는 소회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민지(民智)가 미개해서 자기가 받들 신이 아닌데도 상(相)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 공연히 모셔 놓고 아첨해 제사를 드려 화복(禍福)을 빌고 망령되이 길흉(吉凶)을 물으니, 이에 있어서 폐단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58)58)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2.

중생의 사표로서 소회의 기능이 큰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것이 길흉화복을 비는 대상이 되고 그와 같은 의례가 불법의 본질로 인식될 때 소회의 기능은 불교의 본래성을 전복하는 미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 만해의 생각이다. 따라서 폐단을 낳는 소회를 일제히 폐지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더 많은 왜곡과 사법(邪法)이 뒤따르기 때문에 모두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회폐지론의 표면적 이유는 미신적 내용을 폐지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소회 폐지론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2) 미신적 소회의 폐지

첫째, 불교적 교리에 맞지 않는 비불교적인 소상과 탱화 등은 모두 폐지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소상들은 소승(小乘)의 소견으로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탐닉하는 나한독성, 자연의 일부인 별을 신봉하는 칠성(七星), 망자의 죄를 심판하는 시왕(十王)을 비롯해 천왕(天王), 신중(神衆), 조왕(?王), 산신(山神), 국사(國師) 등을 꼽고 있다.59) 59)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7.

만해는 이런 소상들은 정법을 받드는 출가자가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것들로써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난신(亂信)’이라고 한다. 종교는 믿음을 필요로 하지만 그 믿음의 대상이 미신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미신을 받드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면 수많은 난신을 받드는 조선불교가 가장 발전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60)60)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8.

만해가 난신으로 분류한 각종 미신적 소회를 폐지하자는 본뜻은 각종 민간신앙이나 미신적 요소가 담긴 비불교적 요소를 배제하고 불교가 가진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해는 불교의 본질은 “허황하고 신통치도 않은 신들 앞에 종처럼 무릎 꿇어 아첨하는”61) 미신이 아니라 깨달음을 준칙으로 삼는 종교이며, 부처님은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시는 분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6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6.

불교는 그렇지 않다. 중생이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경에 “깨달음으로 준칙을 삼는다.” 하셨고, 또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으며, 정각(正覺)·정변지(正遍知)의 주장이 모두 그런 취지였으니, 이 점에서 부처님이야말로 철저하였다.62)62)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18.

만해는 문명한 새 시대는 진보의 이상을 완전히 실현하지 않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따라서 이 같은 시대적 변화 앞에서 낡은 미신을 불법(佛法)이라고 믿는 것은 마치 옷 속에 보화를 감춘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거지노릇 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불교의 소회를 정리하자는 것은 단지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자는 것이 아니라 불교가 가진 본래적 위대성을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때 시대적 변화를 넘어 불교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정도가 날로 향상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는 그릇된 철학적 견해나 그릇된 신앙 같은 것이야 어찌 다시 눈에 띌 까닭이 있겠는가.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착실히 하게 될 것이다.63)63)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29.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잘못된 철학과 미신적 종교는 살아 남을 수 없기 때문에 불교는 본래의 위대한 종교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 만해의 입장이다. 따라서 참다운 진리의 종교를 미신의 종교로 전락시킨 미신적 “소상들을 불살라 날려 보내고, 물에 던져 가라앉혀서 다시는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리 종교의 진리를 되살려서 흠이 없게 해야 한다.”64)는 것이다.
64)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7.

불교에 대한 만해의 기본적인 관점은 불교는 철학적 종교이며 미래 사회의 도덕과 문명의 원천이 될 위대한 종교라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질곡과 내적 빈곤이 만들어 낸 불교의 왜곡된 모습을 정리하고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 만해의 개혁론에 담긴 인식이다.

3) 교학적 내용에 맞지 않는 소회의 폐지

둘째, 비록 불교적 요소를 담고 있는 소상일지라도 교학적 내용에 비춰볼 때 경배의 대상으로 적절치 못한 소회도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신중(神衆)이다. 이런 소상들은 비록 불교 경전에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본래 의미는 불법과 수행자를 외호(外護)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소상들이다. 그럼에도 신중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전후 본말이 전도된 상황에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65)65)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6.

신중이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출가자와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의미는 띠고 있다. 그런데도 신중을 향해 기도하고 공양 올리는 것은 무엇이 참다운 믿음의 대상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만해는 신중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소상을 모시고 공양하는 기본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써 정사(正邪)에 대한 기본적 가치관의 빈곤을 드러내는 문제로 바라본다.

자신들이 받들 대상인지 자신들을 외호하는 하인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하는 것에 대한 만해의 질책은 주인과 나그네를 구분하지 못하고 대상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무리를 경책하는 임제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마치 양(羊)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머슴인지 주인인지 가리지 못하고 나그네인지 주인인지 구분치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에 들어왔으므로 번잡스런 곳에는 들어가지 못하니, 어찌 진정한 출가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66)66) 《임제록》, 大正藏 47, p.498上. “今時學者 總不識法 猶如觸鼻羊 逢著物蘗在口裏 奴郞 不辯 賓主 不分 如是之流 邪心入道 鬧處卽入不得 名爲眞出家人.”

참다운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집착하고 물들기 때문에 번잡한 곳에 갈 수 없다. 그들은 입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염소처럼 주인과 머슴을 구분하지 못하고 대상을 향해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참다운 출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임제의 가르침이다.

만해는 소상이 갖는 기능에 대해 “한 거짓 모습으로 된 대상을 만들어 중생들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소회가 발생한 원인이다.”67)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소회는 복을 비는 기복의 대상이 아니라 소회가 나타내는 참다운 지혜와 덕상을 배우기 위한 표상이라는 의미를 띤다. 67)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0.

그러므로 불교의 소상은 중생들의 사표가 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 소상을 보고 ‘우리들도 저렇게 되겠다’는 서원을 세울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이처럼 소회가 중생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닮아가야 할 대상이라면 잘못된 믿음의 대상은 우리의 서원을 왜곡하고 불교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임제가 말하는 것처럼 주인인지 나그네인지 모르고 밖을 향해 치달리는 믿음은 불교의 본래성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중을 경배의 대상으로 받드는 것은 소상을 모시는 근본적인 취지를 왜곡하고 소상을 복 비는 대상으로 전락시킨 데서 비롯된 문제다. 따라서 이런 류의 소상을 없애자는 주장에 담긴 만해의 취지는 불교 신행에 담겨진 기복적 요소를 일소하고 불교의 본래적 성격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4) 석가모니 한 분으로 충분하다

셋째, 비록 미신적 대상도 아니고, 교리적 내용으로 보아도 전도됨이 없는 불·보살의 소상일지라도 수많은 소상을 다 모실 필요가 없으므로 석가모니 한 분만 모시자고 주장한다. ‘종교는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에 대해 만해는 설사 종교가 미신을 믿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의 대상이란 부처님 한 분을 믿는 것으로 족하다고 답한다.68)68)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7.

그러나 대승불교에는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등장한다. 일례로 《화엄경》에서는 우리가 신앙할 믿음의 대상인 부처님이 무수히 많다고 한다. 따라서 대승보살의 서원을 담고 있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서는 그 수많은 부처님께 모두 예배, 공경하는 것이 보살의 큰 행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한다는 것은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일체 불찰, 극미진수, 모든 부처님을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눈앞에 대하듯이 깊은 믿음을 내어서 청정한 몸과 말과 뜻을 다하여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되…….69)69) 《보현행원품》(서울: 보련각, 1991), p.7. “言禮敬諸佛者 所有 盡法界虛空界 十方三世一切佛刹極微盡數 諸佛世尊 我以普賢行願力故 深心信解如對目前 悉以淸淨身語意業 常修禮敬.”

인용문에서 보듯 대승불교의 부처님은 불찰 극미진수로 많고 대승행자는 그 모든 부처님께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을 드려야 한다. 그러나 만해는 이 같은 경전적 근거에 따라 모셔진 수많은 불·보살상일지라도 다 모실 필요는 없다고 한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이름이 다양할지라도 그 본질은 한 부처님의 본성이 드러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해는 “불·보살로 말하자면 이름은 달라도 이치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그러기에 어느 한 분을 들어 다른 여러 불·보살을 통합함이 좋다.”70)라고 주장한다.70)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8.

여기서 만해의 소회 폐지론은 단순히 미신적 대상을 일소하자는 의미를 넘어서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러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불 보살상은 미신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만해가 주창하는 소회 폐지론의 논거가 미신(迷信)과 정신(正信)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향한 믿음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선적(禪的) 입장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주장은 만해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선사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임제는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이 모두 한 생각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들 한 생각 마음 위의 청정한 빛은 그대 집 속의 법신불(法身佛)이며, 그대들 한 생각 마음 위의 분별 없는 빛은 그대 집 속의 보신불(報身佛)이며, 그대들 한 생각 마음 위의 차별 없는 빛은 그대 집 속의 화신불(化身佛)이다. 이 세 가지 부처는 지금 눈앞에서 법을 듣는 그 사람인데, 그것은 다만 밖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71)71) 《임제록》, 大正藏 47, p.497中. “횝一念心上 淸淨光 是횝屋裏法身佛 횝一念心上 無分別光 是횝屋裏報身佛 횝一念心上 無差別光 是횝屋裏化身佛 此三種身 是횝卽今目前聽法底人 祇爲不向外馳求 有此功用.”

이처럼 법신불인 비로자나불과 보신불인 노사나불, 그리고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이 모두 한 마음에 계신다는 것이 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72) 72) 삼신(三身)에 대한 《육조단경》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즉 《육조단경》에서는 삼신을 ‘자삼신불(自三身佛)’이라고 하여 삼신이 스스로에게 구족되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귀의도 이 자삼신불을 향해 하는 것이다. (성철 편역, 《돈환본 단경》(합천: 장경각, 1988), ),p.139

이는 참다운 믿음의 대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밖을 향해 치달려 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한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즉 자신의 자성이 참다운 삼신불(三身佛)이라는 믿음의 부족은 결국 본래의 불성을 버리고 밖을 향해 치달리며 모양을 추구하게 만든다.

오늘날 공부하는 이들이 그렇게 못하는 것은 그 병통(病痛)이 어느 곳에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믿지 않는 데 있다. 그대들 스스로의 믿음이 부족하면 망망하게 경계따라 전변(轉變)하여 온갖 경계에 휩쓸려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한편 생각 생각 치달려 구하던 마음을 쉴 수만 있다면, 조사나 부처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73)73) 《임제록》, 大正藏 47, p.497中. “如今學者不得 病在甚處 病在不自信處 횝若自信不及 卽便忙忙地 徇一切境轉 被他萬境回換 不得自由 횝若能歇得念念馳求心 便與祖佛不別.”

믿음에 대한 선의 가르침과 만해의 주장을 상호 비교해 볼 때 만해가 수많은 불 보살상을 폐지하자는 것은 그가 불교적 신앙심이 부족해서이거나 또는 불교를 메마른 이성적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니라 선(禪)의 입장에서 참다운 믿음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참다운 믿음의 부족이 미신을 부르고, 자성(自性)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 밖을 향해 치달리며 모양을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의 현실은 자성에 대한 믿음은 이미 신화적 사실이 되어버렸고 눈앞에 펼쳐지는 믿음과 신행이란 수많은 소상을 향해 절하며 복을 비는 것으로 대변되고 있었다. 따라서 만해가 제기하는 믿음의 문제는 대상적 소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적 믿음의 부재를 확인하고 이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경허(鏡虛)는 당시 승려들이 갖고 있던 내면적 믿음의 부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개 미혹한 자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조종(祖宗)의 말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은 성인들의 높은 경계라고 밀쳐버리고 다만 현실적인 함이 있는 것에만 힘을 쓰는데 혹은 손에 염주를 잡으며 입으로 경을 외우고 혹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거나 그리고 공덕만을 바라니 보리(菩提)와는 틀렸고 도에는 멀어짐이로다.74)74) 경허,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 《경허집》(양산: 극락선원, 1990), p.82.

말세의 하근기 중생이라 스스로 구제할 수 없다는 말세적 가치관은 자성(自性)이 참다운 귀의처이며, 삼신(三身)은 자성에 있다는 조사들의 말씀은 수용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말세의 중생으로 근기가 하열(下劣)해서 스스로 구제할 수 없기 때문에 타력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세관이 이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다.

이 같은 말세관은 결국 선적(禪的) 믿음의 약화로 나타나고 그와 반비례해서 대상적 믿음에 대한 집착은 점점 강고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당시 불교계의 상황은 자연히 “염불(念佛)이나 송경(誦經)·송주(誦呪)를 일삼고 있으며, 참선하는 사람은 극소수”75)가 되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75)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하편(서울: 보련각영인본, 1972), p.951.

그렇다면 수많은 불·보살상은 모두 폐지하고 모든 불·보살의 근본이 되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실 때 그 부처님은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만해의 입장에서 볼 때 소상(塑像)으로 드러나는 믿음이란 바른 믿음이 아니라 단지 겉으로 드러난 상(相)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비록 석가모니 한 부처님만을 신봉한다 할지라도 실은 그 부처님조차도 거짓 믿음의 대상일 뿐이지 진리의 당체는 아니다. 다만 중생들의 근기에 다라 신행(信行)의 구심점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시는 것이지 그 자체가 부처님은 아니다.

무릇 현상은 진리의 거짓 모습(假相)이며, 소상(塑像)은 현상의 거짓 모습이니, 진리의 처지에서 바라본다면 소상은 ‘거짓 모습의 거짓 모습’이 된다.76)76)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89.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이 선의 정신이므로 부처님이라는 상(相)을 갖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그 거짓 모양을 본 따 다시 소상을 만드는 것은 ‘거짓 모습의 거짓 모습’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겉으로 형상을 짓고 그것을 믿음의 대상이라고 하고 진리의 화현(化現)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빈주먹에 누런 잎사귀를 쥐고 돈이라고 속여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77)이라는 《임제록》의 말씀처럼 그 자체에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77) 《임제록》, 大正藏 47, p.499中. “空拳黃葉 用쮱小兒.”

다만 근기에 따라 중생들에게 믿음의 표상으로 제시된 것일 뿐이다. 때문에 수많은 전각을 짓고 그 속에 수많은 불 보살상을 조성해 모시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이런 행위들은 선에서 바라보는 참다운 믿음의 대상인 자성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결과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진짜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그대들은 이처럼 변화로 나타난 허깨비들 위에서 이런 저런 모양을 짓는구나. 그렇게 구해서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여우 도깨비들이며 결코 참된 부처가 아니니, 이는 외도의 견해이다.78)78) 《암제록》, 大正藏 47, p.500上. “道流 眞佛無形 眞法無相 횝祇큯幻化上頭 作模作樣 說求得者 皆是野狐精魅 幷不是眞佛 是外道見解.”

부처님은 형상이 없지만 중생들은 외형적 모양을 찾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금강경》에서는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므로 모든 형상이 실체가 없다고 보면 곧 여래를 본다.”79)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들은 수많은 형상으로 부처님을 조성하고 복을 빈다. 임제는 설사 그렇게 해서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다운 부처님이 아니라고 한다.79) 《금강반야바라밀경》, 大正藏 6, p.749下.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처럼 선(禪)의 관점으로 만해의 소회 폐지론을 볼 때 그것은 단순히 미신적 소상의 폐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해의 소회 폐지론은 불교의 본래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 선(禪)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만해의 불교개혁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올바로 세우자는 자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맺음말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이 탈고될 시기 한국불교는 쇠퇴를 거듭한 끝에 선풍(禪風)이 쇠진하고 참선하는 수행자가 드물었다.80) 자연히 불교 신행의 주된 흐름은 타력적 신행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사찰은 사원경제의 유지를 위해, 또 대중들은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내세적 구원과 현세적 안녕을 위해 기복신앙에 몰입하고 있었다. 쇠퇴해진 선풍은 이 같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더욱 외면 받게 되었고 불교계에는 말세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80) 제방(諸方)의 선교의 승려 수를 비교하여 보면 30본산의 전후 주지 50여 인 가운데 선종에 속하는 자는 불과 3, 4인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교종에 속한다. 만약 조선의 승려 7000인을 들어서 말하면 10중 8, 9는 모두 교종에 속하며, 선도 아니고 교도 아닌 사람이 실은 다수를 점하고 있다.(이능화, 《조선불교통사》 하편(서울: 보련각영인본,1972),p.951.

이 같은 교단적 흐름을 대변해 주는 것이 바로 만일염불회로 불리는 정토신앙의 성행이었다. 이 운동은 쇠락한 한국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염불신앙의 성행이 곧바로 불교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선법(禪法)의 전승(傳承)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면 더욱 그랬다.

만해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임제종으로 보고 임제종 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쳤던 인물이다. 그는 임제종 운동에 대해 “조선 고유의 임제종을 창립하야……”81)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임제종으로 보고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82)81) 한용운, 〈불교청년총동맹에 대하야〉, 《불교》 86호, 1931. 8.박한영도 “조선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서 발하얏슨즉 일본 조동종과 련합 수 없다.”(동아일보, 1920. 6. 28)라고 하고 있어 임제종 운동을 펼칠 시점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임제종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82) 만해는 1911년 1월 15일 전남 송광사에서 열린 총회에서 임제종 관장 대리로 선출 된 이후 1912년 서울에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 건립시기까지 임제종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임제종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이 같은 만해의 삶에 비추어 본다면 당시의 불교 상황은 끝없는 자기 부정이 요구되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만해는 그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선(禪)의 본질적 입장에서 해법을 찾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개혁이라기보다 본래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을 갖게 된다.83) 83) 당시 불교계 상황이 극복되어야 할 현실이라면 그가 추구할 이상은 선(禪)의 본래성이다. 여기서 만해는 현실적 타협보다는 이상적 가치관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만해의 개혁론이 결코 쉽게 현실 속에 뿌리내릴수 없는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아쉬운 점은 그가 주도했던 임제종 운동이 일제에 의해 무산됨으로써 이같은 개혁론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회 폐지의 문제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염불신행이 주된 흐름이 된 당시 상황에서 석가모니불만 남기고 다른 모든 소상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미는 당시의 보편적 신행 형태를 부정하고 선(禪)의 사상적 내용성을 회복하자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해가 제기한 개혁론은 제도적, 행정적 차원의 개선책을 넘어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본질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불교유신론》의 핵심은 미신과 은둔적 모습의 불교를 지양(止揚)함으로써 불교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것으로 현대적 불교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

서재영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 박사과정 수료. 동국대 강사. 한국선학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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