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1. 여는 글

동화사와 현대불교신문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계율수행대법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계기로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율장과 계율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계율수행대법회?를 지켜본 많은 불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법회가 계율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뜻있는 자리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계율법회가 자주 개최되기를 원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법회 이전에는 한국불교계에서 계율을 주제로 한 공개적인 토론의 장(場)이 마련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동안 한국불교계에서는 계율에 관한 담론이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못하였는가? 그것은 비구와 비구니의 율에 관해서는 공개적으로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잘못된 한국불교의 전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대부분의 율사(律師)들은 ‘율장(律藏)은 금서(禁書)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무엇을 근거로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하는지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불교의 병폐 가운데 하나가 붓다의 가르침인 경(經)ㆍ율(律)ㆍ논(論) 삼장(三藏)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선사(禪師)들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하여 경전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고, 율사들은 율장이 금서라고 하여, 일반 불자들이 율장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아예 차단하고 있다. 나머지 논장(논) 중, 특히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가 전승해 온 방대한 아비달마의 논서들은 ‘소승의 가르침’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실제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경ㆍ율ㆍ논 삼장을 한국불교에서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불교가 삼장을 외면하기 때문에 붓다의 본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가 질적으로 향상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이러한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임은 말할 나위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사항은 모든 불자들이 율장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장이 금서라고 하여 비구와 비구니 외에는 열람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필자는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된 견해임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결론부터 말하면 율장은 금서가 아니다. 오늘날 다른 불교국가에서도 율장을 금서로 취급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율장이 금서라면, 그러한 전통은 2,500여 년 동안 모든 불교국가에 동일하게 전승되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남방불교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율장을 읽고 배우기를 권장하고 있다. 즉 율장은 금서가 아니라 권장도서인 것이다. 특히 출가자는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상좌불교의 승가교육은 율장을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불교계에서만 율장을 금서라고 주장하는가? 그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이런 잘못된 전통이 수립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우선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부터 검토해 보고, 율장이 금서가 아닌 근거와 이유를 하나하나 밝혀나갈 것이다. 그리고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율사(律師)들이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파계사 영산율원 율주 철우(哲牛)스님이다. 철우스님은 지면을 통해 율장이 금서임을 여러 차례 주장하였다. 그의 발언들을 먼저 살펴보자.

철우스님은 《불교평론》 최근호에서 “계율을 기록한 율장은 금서(禁書)이며, 이런 이야기가 요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관심조차 두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 이전에도 《불교신문》에 연재중인 ‘계율이야기’에서 “계의 종류를 모두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구족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계를 말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같은 글에서 “비구ㆍ비구니계에 계에 이름(戒名)과 계문(戒文)만 수록된 것을 계본(戒本)이라 하고, 계문을 상세하게 연기(緣起)와 결계(結戒)와 수결(隨結)과 해석과 지범(持犯)의 순서로 된 것이 60권 사분율장이다. 사분율장은 비구?비구니 외에는 읽지 못하는 금서(禁書)이며, 지금까지의 계율은 우리가 말하는 소승계이다. 소승계는 대승계율에 오르는 사다리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동화사 「계율수행대법회」 발제문에서도 “계법에는 내용이 공개되어야 할 것과 공개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데 힘이 들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실제로 철우스님은 자신이 쓴 책 『사분비구니계본강의초』표지에 “비구ㆍ비구니 이외는 읽지 말라”라는 경고문을 표기해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에 “비구?비구니 계율서가 일반대중이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인 줄도 몰랐으니 참회하고 또 참회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철우스님은 철저하게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율장이 금서인 줄도 몰랐다는 사실을 참회하고 또 참회해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는 율장이 금서인 이유는 “구족계를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계를 말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라고 그 근거를 밝히고 있다.

한편 송광사 율원장 지현스님은 동화사 ?계율수행대법회?의 첫 번째 논주로 나섰던 해인총림 율주 종진스님의 발제문 ?계와 율이 생긴 까닭은??에 대한 논평문에서 “출가자의 구족계는 구족계를 받은 분들만 배우고 익힐 수 있고 논의할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논의의 한계를 재가불자와 함께 나눌 수 있는 부분으로만 한정지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조심스럽게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비록 위 문장에서 ‘율장은 금서이다’라는 말은 없지만, 출가자의 구족계는 구족계를 받은 사람만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위 두 스님의 주장은 출가자의 구족계는 구족계를 받은 분들만 배우고 익힐 수 있기 때문에,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계율을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율사들이 공석 혹은 사석에서 율장이 금서임을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율장이 금서임을 증명할 수 있는 정확한 문헌적 출처나 근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계율을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율사들의 고정관념과 반대에 부딪쳐 동국역경원에서 『한글대장경』의 번역 사업을 추진할 때, 율장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율장이 번역되어 『한글대장경』 속에 포함되었다. 다른 나라 불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실소(失笑)를 금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무슨 해프닝(happening)인가.

다시 강조하지만 율장은 금서가 아니다. 만일 백보 양보하여 율장이 금서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금서는 누구만 볼 수 있는가? 율사만 볼 수 있는가? 아니면 구족계를 받은 비구?비구니만 볼 수 있는가? 그 금서는 누가 관리하는가? 만일 금서인 율장을 열람하면 어떤 처벌을 받는가? 그것을 담당하는 부서는 어디인가? 그리고 율장을 연구하는 재가 학자들은 모두 금서의 규정을 어긴 범법자들인가?

도서관에는 온갖 종류의 대장경이 다 비치되어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반드시 율장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대장경 속의 율장을 열람할 때에는 사서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율사의 열람 허가증을 받아서 보여주고 열람해야 하는가? 대장경은 불자든 비불자든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장은 금서이기 때문에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열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것과 같다. 도서관에 비치된 책은 특별한 경우, 즉 분실 혹은 마멸의 우려가 없는 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21세기인 오늘날 금서 운운 하는 것은 참으로 허무맹랑한 주장일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한국의 율사들이 그토록 공개되는 것을 꺼리고 있는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도 이미 여러 차례 출판되었다. 그리고 계율에 관한 연구서들도 계속 발행되고 있다. 만일 율장이 금서라면 왜 이와 같은 계본과 계율에 관한 서적들을 발행하는가? 그리고 그 금서인 율장을 발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로부터 그런 권한을 위임받았는가? 현재 빠띠목카(Patimokkha, 戒本혹은 戒經)의 영어 번역문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누구나 무료로 다운로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일반 독자와 네티즌(누리꾼) 중에서 그것이 금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율장을 금서로 오해하게 된 배경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율사들이 ‘율장은 금서이다’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정확한 출처를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계율을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라고만 말한다. 오직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면, 이것은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상가(Sangha, 僧伽) 고유의 갈마법(喝磨法)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갈마(喝磨)는 범어 까르마(karma, P. kamma)의 음사이며, 업(業)ㆍ소작(所作)ㆍ변사(變事) 등으로 번역된다. 여기서 말하는 까르마는 수계(受戒)ㆍ참회(懺悔)ㆍ징벌(懲罰)ㆍ의결(議決) 등의 의식이나 행위, 또는 제시된 안건(案件)에 대한 가부(可否)를 묻는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상가의 갈마법은 ①결계법(結界法), ②수계법(受戒法), ③제죄법(際罪法), ④설계법(說戒法), ⑤안거법(安居法), ⑥자자법(自恣法), ⑦분의법(分衣法), ⑧의식약정법(衣食藥淨法), ⑨방사잡법(房舍雜法) 등이 있다. 이러한 갈마법들은 모두 출가자만을 위한 고유한 행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갈마작법(喝磨作法)을 시작하기 전에 구족계를 받지 않은 자는 나가게 하고, 오지 않은 비구는 ‘못 온다는 이유(欲)’과 ‘깨끗하오(淸淨)’라고 마땅히 먼저 사뢰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상가의 여러 가지 갈마법 중에서 몇 가지 사례만 살펴보자.

첫째, 자자(自恣)와 포살(布薩)은 비구?비구니만을 위한 갈마법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는 참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자와 포살은 출가자가 자신의 허물을 다른 스님들 앞에서 고백?참회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자와 포살은 잘한 행위보다 잘못한 행위를 들추어내는 의식이다. 이것을 재가자가 보게 되면 승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저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자자와 포살 등은 승려들만 모인 자리에서 행하게 되어 있다.

그 문헌적 근거는 포살일에 바라제목차, 즉 비구ㆍ비구니계본을 낭송할 때, 다음과 같은 절차를 먼저 거친다. 불타야사(佛陀耶舍)가 번역한 《사분율비구계본(四分律比丘戒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중이 다 모였습니까? ‘다 모였습니다.’라고 답하라. 화합합니까? ‘화합하였습니다.’라고 답하라. 구족계를 받지 않은 이는 나갔습니까? 구족계를 받지 않은 이가 있거든 내보내고 나서, ‘구족계를 받지 않은 이는 이미 나갔습니다.’라고 답하라. 만약 없으면 ‘이 대중에는 구족계를 받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라고 답하라.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모든 비구는 ‘못 온다는 이유(欲)’과 ‘깨끗하오(淸淨)’을 말하였는가? 법에 따라 부탁받은 이가 있으면, ‘이미 못 온다는 이유와 깨끗하나이다.’라고 답하라. 만약 없으면 ‘이 대중에는 못 온다는 이유를 말한 이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라. …… 대중이 지금 화합한 것은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계를 설하는 행사《設戒喝磨》를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답하라.

이와 같이 포살일에 바라제목차를 낭송하기 전에 구족계를 받지 않은 이를 내보내고, 오직 비구?비구니만 참석한 가운데 설계(設戒)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 때문에 ‘율장은 금서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넌센스(nonsense)가 아닐 수 없다. 갈마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율장에 대한 율사들의 이러한 태도와 주장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율장과 불교교단사를 전공하고 있는 이자랑 박사이다. 이자랑 박사는 동화사 '계율수행대법회'에서 종진스님의 발제문 〈계와 율이 생긴 까닭은?〉에 대한 논평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한국불교계의 현실을 보고 있자면, 재가자들이 율, 혹은 율과 관련하여 출가자들의 행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출가자들에 의해 극도로 기피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출가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불교교단이 출가?재가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사부대중이 함께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라면, 서로 상대방의 제언에 귀 기울이고 교단이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재가자 앞에서 출가자들이 바라제목차를 낭송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출가자들이 포살에서 바라제목차를 낭송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하는 과정에서 재가자들 보기 부끄러운 일들도 드러나기 때문에 이를 막아 승단의 정식 구성원인 비구와 비구니의 위상을 지켜주기 위한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에서 인용한 이자랑 박사의 발언 요지는 한국의 율사들이 율장을 금서로 여기는 것은 붓다께서 재가자 앞에서 출가자들이 바라제목차를 낭송하지 말라고 금지한 것을 잘못 이해하여 마치 율장 자체를 금서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이자랑 박사의 지적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여기서 필자의 설명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즉 포살을 행하면서 출가자들이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고 참회하는 장면을 재가자가 본다면 출가자의 권위가 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재자자로부터 예경과 공양 및 존경을 받는 출자자의 위상이 추락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이러한 부작용을 염려하여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비구?비구니의 포살에는 구족계를 받은 자만 참석하여 포살을 행하도록 제도화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의 다른 집단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하나의 관습이다. 이를테면 군대에서 사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교들이 잘못했다고 구타하거나 벌칙을 가한다면, 사병을 지도해야 할 장교들의 위상이 추락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장교들의 권위가 상실되어 지휘통솔을 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출가자의 위상이 지켜져야 된다는 것을 붓다는 알고 계셨다. 그래서 붓다는 재가자들 앞에서 가능한 한 출가자의 허물이 드러나지 않도록 단속하기 위해 그러한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을 확대 해석하여 ‘율장은 금서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붓다의 본뜻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구족계를 받는 수계갈마는 비공개로 실시하는 것이 상가의 전통이다. 율장에 의하면 구족계를 받고자 하는 자라 할지라도 결격사유가 있으면 승단에 들어올 수가 없다. 상가는 수행을 목적으로 구성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동생활을 파괴하거나 수행을 감내할 수 없는 사람이 입단할 경우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구족계를 받을 수 없는 사람, 즉 불수구자(不受具者)를 가려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수구자란 공동생활과 수행을 감내할 수 없는 20세 미만의 소년, 불치의 전염병 소유자, 남녀양성(男女兩性)을 가진 자, 또한 오역죄를 범한 악인, 국법에 의하여 세금, 군인 등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자, 노예, 도적, 관(官)에서 추적 받는 자, 관인(官人), 부채자(負債者),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사람 등이다. 《사분율》에서는 13차난(遮難)을 열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신체적으로 결함을 갖고 있는 사람은 구족계를 받을 수가 없다. 남전의 《팔리율장》에서는 32종의 불구자(不具者)를 나열하고 있는데, 《사분율》에서는 80여종의 불구자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부적격자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신체검사와 같은 검증과정을 거친다. 만일 이러한 검증 과정을 모두 공개할 경우, 그 사람의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염려가 있다. 그래서 수계갈마는 공개적으로 실시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계갈마는 비공개로 하는 전통이 수립된 것이다. 그리고 수계갈마를 거치면 계체(戒體)가 형성된다. 그런데 수계를 받지 않는 사람이 그 자리에 참석하면 매우 곤란하다. 그래서 비공개로 실시하는 것이다.

셋째, 제죄법(際罪法)은 승려가 계율을 범했을 때, 그것을 판정하고 벌칙을 가하는 갈마를 말한다. 즉 세속의 법정과 같이 계율을 어긴 사람을 징계하기 위한 갈마이다. 그 과정에는 공개할 수 없는 사항도 많이 있다. 그래서 제죄법 또는 멸쟁법(滅諍法) 등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

이를테면 국회에서 국가의 안보와 직결된 중요한 사항을 논의할 때에는 비공개 회의를 요청한다. 종단의 의결기구인 종회에서 승려 개인의 비리와 자격 문제를 심의할 때에는 비공개 회의를 요청한다. 이것은 보안과 피의자의 인격 등을 보호해 주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비공개의 갈마법은 이와 같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가의 갈마법은 오직 출가자만을 위한 행사이다. 이러한 출가자를 위한 갈마에 재가자가 참석할 수 없는 것은 말할 나위없다. 그리고 이러한 갈마를 행하는 곳에 굳이 재가자가 참석할 이유도 전혀 없다. 왜냐하면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상가 내부에 이러한 갈마법이 있다고 해서 붓다가 제정한 율장 자체가 금서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율장에 나오는 이러한 갈마법들을 알아야 승단의 존귀함과 어떤 과정을 거쳐 청정한 승단이 유지되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육부(六部)의 제율장(諸律藏) 그 어디에도 율장이 금서라고 명시된 곳은 없다.

율장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

앞에서도 이미 율장이 금서가 아닌 근거와 이유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주로 왜 율장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율장이 금서가 아닌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붓다의 법(法, Dhamma)과 율(律, Vinaya)은 비전(秘傳)의 교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붓다는 《Mahaparinibbana sutta(大般涅槃經)》에서 그가 상가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상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비전(秘傳)의 교설은 없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Acariya- mutthi, 師拳)’에 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몰래 준비한 어느 것도 결코 없다고 붓다는 분명히 말했다.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선불교(禪佛敎)에서 어떤 특정한 한 사람에게 법을 전해 준다는 전법(傳法)의 계보같은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붓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놓았다. 누구든지 그 길을 따르기만 하면 궁극의 목표인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붓다는 성도 후 45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한곳에 정주하지 않고 유행하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펼쳤다. 그가 일생동안 가르친 내용은 법(法)과 율(律)이다. 이 법과 율은 현재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으로 전승되고 있다. 붓다는 자신이 가르친 법과 율이 단절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런데 율장을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이 볼 수 있도록 제한한다면, 붓다의 본뜻을 역행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붓다께서 이 사실을 안다면 통곡할 일이다.

둘째, 붓다의 법과 율은 불멸 후 제자들의 유일한 스승이 되기 때문이다. 즉 붓다의 법과 율은 붓다의 유훈이다. 붓다는 ??마하빠리닙바나 숫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여! 내가 입멸한 뒤, 너희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스승의 가르침만 남고 스승은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아난다여!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입멸한 후에는 내가 지금까지 설해 왔던 법(法)과 율(律)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니라.”

이와 같이 붓다 입멸 후 제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 바로 법과 율이다. 그런데 그 율장을 비구?비구니만 볼 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以戒爲師)’는 교훈은 율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율장을 공부하지 않고 어떻게 계를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셋째, 붓다의 법과 율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이 불설(佛設)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법과 율에 비추어 볼 수밖에 없다. 즉 경장과 율장 어디에 그러한 부분이 설해져 있는가를 판단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율장은 사전과 같이 가까운 곳에 두고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붓다는 《마하빠리닙바나 숫따》에서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다.

사대교법(Mahapadesa)이란 ①이것은 붓다로부터 친히 들었다. ②이것은 승단으로부터 들었다. ③이것은 많은 장로들로부터 들었다. ④이것은 한 사람의 유능한 장로로부터 들었다.라는 것이다. 이 “사대교법은 불교경전이 어떻게 불설로서 성립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어떤 견해가 불설이라고 주장될 때 4종의 근거가 제시된다. 즉 붓다, 승가, 일군의 장로, 일개의 장로의 이름을 들어 불설이라고 주장할 때 그 진위 여부는 경과 율에 의거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주장되는 바가 경과 율에 합치하면 불설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비불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장은 불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준거인 것이다. 따라서 율장이 금서라는 주장도 경장과 율장에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넷째, 율장은 불교의 법전(法典)이기 때문이다. 율장은 승단 내부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판가름하는 판례집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율장에는 멸쟁법(滅諍法)에 관한 사항이 아주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종쟁사(四種諍事)와 칠멸쟁법(七滅諍法) 등이 그것이다. 또한 율장의 건도부(健度部)는 교단의 제도와 규정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승단은 율장에 규정된 범위 내에서 운영되어야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율장에 의해 운영되지 않고, 종헌?종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특히 율장의 규정에 어긋나는 종헌?종법을 제정함으로써 초기교단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처럼 율장은 승단의 모든 제도와 규정의 근거가 되는 모법(母法)이기 때문에 모든 불자들이 숙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섯째, 율장은 삼장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교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팔리삼장(Pali Tipitaka)은 한역의 대장경과는 달리 율장?경장?논장의 순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것은 삼장 가운데 율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남방 상좌부의 전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방 상좌부에서는 실제로 승단에서는 경장보다 율장을 더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 팔리삼장을 일본어로 번역한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은 총65권이다. 이 중에서 1권부터 5권까지가 율장이다. 이처럼 중요한 율장을 제외하고 불교를 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섯째, 율장은 출가자만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남방불교에서는 율장을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 예로 태국 마하출라롱콘불교대학교에 입학한 자는 누구나 반드시《위나야 삐따까(Vinaya Pitaka, 律藏)》를 2학기에 걸쳐 이수하도록 교과가 편성되어 있다.

출가자에서 율장을 가르치는 이유는 계율이 제정된 배경과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출가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재가자에게 율장을 가르치는 까닭은 출가자는 자신들이 도저히 지킬 수없는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기 때문에 출가자를 더욱 존경하고 승단을 보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율장은 출가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원래 상가는 어떤 특정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폐쇄된 집단이 아니다. 결격사유가 없는 한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열린 공동체이다. 실제로 태국에서는 단기출가 제도가 일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태국의 남성은 거의 대부분 일생에 한두 번 승려생활을 체험한다. 오늘 당장 발심하여 재가의 삶을 포기하고 출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율장에 명시된 율을 도저히 지킬 수 없을 때에는 언제든지 청정한 승가공동체를 위해 환계(還戒) 또는 사계(捨戒)하고 다시 재가의 신분으로 돌아온다. 한마디로 율장은 출가자만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다.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하는 진짜 이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율사들이 율장을 금서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상가의 갈마법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면 의외로 문제는 간단하다. 인식의 전환만 있으면 곧바로 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사들이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하는 이면에는 어떤 다른 진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 숨은 의도를 지면을 통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를 전개할 수가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것은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인 추측이기 때문에 아니라고 반박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정말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첫째는 율사들의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율장은 율사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어떤 특권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율사들의 우월의식에서 율장이 금서라고 주장한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불교사에서 모든 파승(破僧, 승단의 파화합)과 분파의 원인은 율사들의 우월의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꼬삼비(Kosambi) 사건이다.

꼬삼비 사건은 붓다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최초로 상가에서 일어났던 가장 큰 분쟁이었다. 이 사건은 지율자(持律者)들이 어떤 한 지법자(持法者)가 계율을 어겼다고 징계를 내림으로써 발단되었다. 징계를 받은 비구는 이에 승복하지 못하고 다른 지법자들에게 동조를 구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지율자와 지법자간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붓다께서 지율자들에게 함부로 징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붓다의 충고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붓다는 이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재가자들은 이들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꼬삼비 사건이다.

그리고 제2결집과 제3결집도 결국 엄격한 계율주의자들이 계율에 느슨한 사람들과 함께 포살의식을 거행할 수 없고, 함께 살 수 없다는 이유로 부동주(不同住)를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생긴 사건들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같이 불교교단에서 일어났던 모든 분쟁은 지율자들의 우월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둘째는 한국불교 승단의 모순을 감추기 위한 것은 아닌가? 필자가 동화사 〈계율수행대법회〉에서 주장했던 것과 같이 한국불교는 근본적으로 계율과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다. 즉 한국불교의 승려는 율장의 바라제목차를 그대로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종헌?종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계율은 18부파 가운데 하나인 법장부의 《사분율》에 의지하는데 반해서 추구하는 이상은 대승불교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모순된다.

그리고 한국의 승려들은 형식적으로 《사분율》의 구족계를 받고, 다시 《범망경》의 보살계를 받는다. 《사분율》은 한국의 율사들이 말하는 소승계이고, 보살계는 대승계이다.

철우스님은 “소승계는 대승계율에 오르는 사다리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두 계율은 전혀 다른 사상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사분율》의 비구ㆍ비구니 계목과 《범망경》 보살계의 십중사십팔경계(十重四八輕戒)의 계목을 비교해 보면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계율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처음 한국에 계율을 도입할 때, 이 문제 때문에 많은 스님들이 고심했다. 그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율사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사실 바라제목차가 공개될 경우 가장 곤욕스러울 사람이 율사들이다. 일반적으로 율사라고 하면 바라제목차에 언급된 계율들을 모두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 지키기 어렵다. 왜냐하면 고대 인도에서 제정한 계율 중에는 현재의 한국에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바라제목차가 공개되는 것에 대해서 율사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붓다가 제정한 계목은 고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새로운 해석이나 정법(正法)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냥 덮어두고 쉬쉬할 일이 아니다. 사실 한국불교의 계율과 계맥 등에 대해서는 조금만 파고들면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된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금서라는 명목으로 계율에 관한 논의 자체를 터부시해서야 되겠는가. 비록 한국불교의 치부가 일부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극복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끝으로 계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계율지상주의를 추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엄격한 계율주의를 지향하지 않았다. 계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계(持戒)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지 결코 종착점은 아니다.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는 붓다께 모든 출가자가 엄격히 계율을 준수하는 상가공동체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붓다는 데와닷따의 제안을 거절했다. 붓다는 자기 자신이 원해서 두타행(頭陀行), 즉 고행을 실천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당시 불교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자이나교에서는 엄격한 계율주의를 지향했다. 하지만 붓다는 중도적 입장에서 상가를 운영했다.

즉 계율과 수행은 너무 느슨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엄격해도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결과적으로 엄격한 계율주의를 지향한 자이나교는 인도라는 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교는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세계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계목에만 너무 집착하면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법을 널리 전하라고 부촉한 붓다의 본뜻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닫는 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율장은 금서가 아니다. 오히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한국불교의 승단이 지금보다 청정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불자들이 율장을 배우고 읽혀야만 할 것이다. 오늘날 상가에서 계율의 정신이 퇴색되어가는 것도 율장을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출가하여 의무적으로 율장을 공부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지계정신이 공고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율에 위배되는지 모르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율장을 공부하기 전에는 어떤 행동이 계율에 위반되는 것인지 전혀 몰랐던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율장을 공부하면 수행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왜 이런 계율이 제정되었는가를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계율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행자에게 어울리는 행을 익혀 나가게 될 것이다. 한편 재가자들도 출가 전에 율장을 공부하여 출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이 어떤 것이며, 상가 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한다면 처음부터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갖고 출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율장에는 비구?비구니가 지켜야 할 바라제목차도 있지만, 교단의 제반 규정과 멸쟁법 등 사부대중이 꼭 알아야 할 사항들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경장이 붓다의 사상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율장은 붓다의 사상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출가자가 율장을 배우고 익히면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게 되고, 재가자가 율장을 배우고 익히면 출가자를 더욱 존경하고 외호(外護)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승(假僧)은 점차 발붙일 곳이 없게 되고, 진승(眞僧)은 부처님처럼 존경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계율을 지키지 않는 스님들의 운신의 폭은 점차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어떤 승려가 계율에 어긋난 행동을 했을 때에는 곧바로 재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출가자는 자연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계율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만과 남방불교 국가들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어떤 스님이 계율에 어긋난 행동을 저질렀을 때에는 그것을 본 재가자가 반드시 지적하여 출가자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임을 일깨워준다. 특히 남방불교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청정한 승단을 2,500여 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다. 한국불교가 발전하려면 지금 당장 승려는 물론 재가자들에게도 율장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김은종
원광대학교 강사.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현재 UBC(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 교환연구원, 주요논문으로 <샌프란시스코의 조동선 연구 - 마운틴 레인 젠 커뮤니티의 운영사례를 중심으로>, <나옹의 공부십절목 연구>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