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비불설 주창한 일본 근대불교 개척자

무라카미의 생애와 주요 업적

무라카미 센쇼(村上専精, 1851~1929)는 정토진종 오타니파(大谷派)의 교각사(敎覺寺)에서 태어났고, 본래 성은 히로사키(広崎)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토삼부경을 배우며 한학에 재주가 출중했지만, 생가인 절이 빈곤하여 8세 때 다른 절에 맡겨진 이후 고학(苦學)으로 공부하였다. 18세에 히메지(姫路)의 선교사(善敎寺)의 서당(私塾)에 들어가 불교나 한학 이외에도 구약성서·창세기 등의 기독교도 접하는 기회를 가졌다. 

1871년부터는 니가타현(新潟県)에 있는 무위신사(無為信寺)의 다케다(武田行忠)에게 약 3년 정도 유식을 배우고, 1875년에는 교토에 있는 동본원사(東本願寺)의 학림인 고창학료(高倉学寮, 현 오타니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학내 내분으로 중도에 그만두고, 같은 해 아이치현(愛知県)에 있는 입각사(入覚寺)의 양자가 되어 무라카미(村上) 성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그 후 1882년에 무라카미는 교토에서 진종대학의 교원을 거쳐, 1887년에는 동경의 조동종 대학림(현 駒沢大学) 강사를 비롯하여 같은 해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가 설립한 철학관(현 東洋大学)의 강사를 겸하여 서양철학과의 학생으로 서양철학을 연찬하였다. 다음 해는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의 인도철학 강사로 임명된 후, 1917년에는 동경제국대학 인도철학과의 초대교수로 취임한다. 그 후 무라카미는 1923년에 동경제국대학을 퇴임하고 명예교수가 되었고, 1926년부터 1928년 사이에 오타니대 학장을 역임했다.

무라카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불교통일론》과 《대승불설론비판》 등을 저술하여 당시 불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한때 종단에서 승적이 제적당하는 일도 겪었다. 사실 무라카미가 《불교통일론》 등에서 제시하고자 한 것은 호교론적 입장에서 종파불교의 분열 상황을 어느 정도 극복하여 통일적인 합동 조화를 꾀하고자 한 것이다.

최근에 이러한 무라카미의 학문적 업적은 2018년도 7월 20일에 개최된 〈동경대 불교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東大仏教学への新たな視座)〉이라는 워크숍에서 발표한 잇시키 다이고(一色大悟)의 발제에서 ‘조직불교학’이라는 명명하에 《불교통일론》을 중심으로 압축적으로 잘 조명되고 있다. 

또한 유럽의 근대불교학과 일본의 근대불교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근대기 한국불교사 서술에 내재된 특징 연구-근대성 문제를 중심으로〉라는 오기현(2024, 원광대)의 박사학위 논문은 무라카미의 《불교통일론》과 《대승불설론 비판》 등의 연구 의의를 일별하는 데 상당히 유용하다. 따라서 필자의 이 글은 주로 두 연구자의 논의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무라카미의 연구방법론과 사상적 배경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서구의 근대불교학을 수용했던 일본 불교계는 메이지유신 초기에 단행된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이나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위기의식 속에서 정부의 대외정책에 발맞추어 적극적인 해외 포교와 더불어 해외시찰단이나 유럽에 유학승들을 파견하였다. 당시에 형성된 근대불교학에 대한 수학을 통해 단순히 전통 불교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서구적 종교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불교, 즉 종교로서의 불교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적 과정이었다. 

먼저 정토진종 오타니파(大谷派)에서는 1876년 난조 분유(南条文雄)와 가사하라 겐주(笠原研寿)를 영국에 파견해 산스끄리뜨어를 익히게 하였고, 정토진종 혼간지파(本願寺派)에서도 1875년 이마다테 도스이(今立吐醉)를 미국에, 1881년 기타바다케 도류(北畠道龍) 등을 유럽에 보내 수학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토진종의 인재 파견은 이후 다른 종단의 유학생 배출에 큰 영향을 주었고, 종단에서 파견된 유학생들은 각지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후에 일본 근대불교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일본 근대불교학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한 인물들로는 난조 분유,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오기하라 운라이(荻原雲来), 와타나베 카이쿄쿠(渡辺海旭) 등이 있다.

이러한 각 종단의 유학생 파견과 함께 일본에서는 새로운 교육령에 의해 1877년 최초의 관립대학으로 동경대학이 설립되었다. 동경대는 1886년 제국대학, 1897년 동경제국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 대학에서 불교 관련 강좌가 처음으로 개설되었다. 동경대에서 최초의 불교 강의는 1879년 조동종의 승려였던 하라 탄잔(原坦山)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이후 불교학 강의는 인도철학이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학문적 전통이 꾸준히 이어졌다. 난조 분유도 1885년 동경대 강사로 임명되어 산스끄리뜨어 강의를 담당하였고, 그의 강의를 계기로 동양의 전통적인 불교 이해를 바탕으로 유럽에서 배운 문헌학을 접목한 새로운 불교학이 뿌리내렸다.

인도철학·불교학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데 기여한 인물은 다카쿠스 준지로인데, 그는 1890년 영국에 유학하여 1897년에 귀국한 후 동경대 강사가 되었다. 1901년 동경대에서 최초로 산스끄리뜨어 강좌가 개설되고 그가 교수로 임명되었다. 동경대에서 다카쿠스에 의해 인도철학·불교학 강좌가 체계화되었는데, 이후 그의 제자들인 기무라 다이켄(木村泰賢), 우이 하쿠주(宇井伯寿)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처럼 동경대에서 정착된 인도철학·불교학의 학문적 체계는 다른 제국대학은 물론 불교계의 사립대학 등에도 영향을 끼쳐 근대불교학의 본격적인 전개로 이어졌다.

특히 무라카미는 동경대 강사를 하고 있던 1901년에 《불교통일론 제1편 대강론》을 저술하고, 동경대에서 조직불교학을 연구하는 조류의 효시가 되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자신을 불교 각 종파가 아니라, 불교를 연구하려고 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①교리안(敎理眼) ②논리안(論理眼) ③역사안(歷史眼) ④비교안(比較眼) ⑤비평안(批評眼)’이라는 5종의 연구법에 의해 모든 불교 교리를 ‘석가 대오의 열반’이라는 체험에서 전개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무라카미의 연구를 계승한 제2대의 교수인 기무라 다이켄은 대승불교 사상의 연원을 원시불교에서 찾는 《원시불교사상론》(1922)이나 기무라의 사후에 《대승불교사상론》으로 정리되는 듯한 여러 논고를 저술했다. 기무라는 ‘원시불교주의’를 제창하고 근대화고자 했다. 기무라의 후임인 우이 하쿠주는 《불교사상연구》(1943) 《불교범론》(1947~48)을 저술하고, ‘상의연기(相依緣起)’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불교 교리의 전체상을 그리고자 하였다. 

또한 미야모토 쇼손(宮本正尊)은 ‘조직불교학’이라는 명칭을 적극적으로 제창하면서, 《불교학의 근본명제》(전 5권)의 출판을 기획했다. 하지만 미야모토는 태평양전쟁을 일본불교에 의해 뒷받침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이 《불교학의 근본명제》는 일본 패망과 함께 간행 계획이 중단되어, 2권만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구의 흐름이 조직불교학으로 불린다. 이른바 조직불교학은 역대 동경대 인도철학 교수, 즉 당시 불교학의 제1인자로 불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행해 온 연구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평가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조직불교학은 불교 내부에서 불교를 말하려고 하는 학문, 환언하면 폐쇄적인 학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주지하듯이 무라카미와 미야모토는 정토진종, 기무라와 우이는 조동종의 승려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저서에는 어느 것이나 자기 자신을 일본불교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한 호교론적 입장에서 불교를 말하는 자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무라카미의 《불교통일론》은 일본불교 각 종파를 통합하려는 취지를 갖고 있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반면에 미야모토의 시국적 발언이라는 것은 일본불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기무라도 원시불교에서 자파의 입장을 도출하는 것이 일본불교도들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우이의 《불교범론》은 범론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에 전해진 불교만을 논하고 티베트불교나 빨리 불교를 도외시하였다.

대체로 조직불교학은 불교 내부적인 시선을 취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최근에 동경대 인도철학의 역사를 연구한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나 가타오카 케이(片岡啓)는 모두 동경대 인철 출신이지만, 조직불교학을 객관적인 학문의 전 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스에키는 조직불교학을 ‘불교 일관론에 선 호교론이고, 많은 호교론자에 공통된 협소한 일본불교 우월론’에 물든 것으로 간주하고, 가타오카는 ‘인도학의 문헌학적 수법을 접목한 교리적·사상적 연구(체계적·교판)’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는 일본의 근대불교학은 유럽의 ‘불교’ 연구와 에도 시대의 실증적인 불교 연구가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 합류한 것으로 본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이전에도 실증적이고 지금 보더라도 유의미한 불교 연구가 나타났었다. 그는 이러한 전통적인 불교학에 유럽에서 일어난 티베트어, 빨리어, 중국어, 산스끄리뜨어의 문헌에 근거한 유럽의 ‘불교’학이 합류한 것으로 본다.

여기서 시모다가 강조하는 것은 유럽에서 연구된 불교는 유럽인이 본 괄호의 ‘불교(Buddhism)’였다는 점이다. 당시의 유럽인으로서는 불교가 현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시아 각지에서 여러 언어로 쓰인 불전을 수집했다. 이러한 불전의 독해를 통해 유럽은 불교를 연구해 왔다. 그 결과 각지의 불전에 공통된 불교가 ‘발견’ 혹은 ‘창출’된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를 연구하는 학문, 이른바 유럽의 근대불교학은 1820~1830년대의 석학 외젠 뷔르누프(Eugene Burnouf, 1801~1852)에서 시작되었다.

결국 시모다의 견해를 정리하면, 그러한 불교에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문헌에 쓰인 역사적 붓다의 사상만을 불교의 본질로 하는 점이다. 둘째, ‘불교’를 설한 붓다가 이상화된 것이다. 셋째, 현존하는 각종의 불교는 ‘불교’의 타락으로 간주되는 점이다. 결국 문헌 연구에서 불교는 시작되었기 때문에 읽힐 수 있는 사상과 그것을 설한 인물만이 불교의 본질이 되어, 그것에 해당하지 않는 현실의 불교는 타락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유럽에서 유래하는 ‘불교(Buddhism)’의 연구는 메이지 시대에 유럽에 유학한 사람들, 구체적으로는 난조 분유(南条文雄),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郎),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아네사키 마사하루(姉崎正治) 등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 그들이 동경대에서 교편을 잡은 결과 근대불교학은 관학 아카데미즘 안으로 침투하게 되었다.

무라카미가 《불교통일론》을 쓴 1901년은 이노우에의 귀국으로부터 약 10년이 지나고, 아네사키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던 시기였다. 결국 그 무렵이 유럽의 타자로서 타락으로 간주된 일본불교가 유럽에서 도래한 괄호의 ‘불교’ 즉 ‘근대불교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사실 무라카미의 《불교통일론》에 제시된 사상은 근대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고전의 재해석에 의해 나름대로 대답을 시도한 모습이 엿보인다. 그것은 불교도로서의 반응이고, 일반인에 해당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시대의 변화를 맞이할 때 무라카미의 태도는 어쩌면 평범한 방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이 근대에 직면한 때의 한 사례로서 가치는 여전히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무라카미는 이 근대불교를 일본불교의 입장에서 받아들였다고 생각된다. 무라카미는 고학(苦學)으로 종립학교를 나왔지만, 유학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스에키가 지적하듯이, 무라카미는 동경대에서 전통적인 교학을 근대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을 지녔는데, 그 근저에 있는 가치관은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불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무라카미의 입장은 유럽의 근대불교학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일본의 불교도 입장에서 절충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후 1990년 이래 이노우에의 강의 노트가 출판된 결과, 이노우에는 동경대에서 최초로 인도철학 강의를 행한 인물로서 재평가되었다. 이노우에가 행한 ‘불교’학의 도입은 강의에 그치지 않았다. 그중에 불교 연구법을 다뤘던 것이 그가 전하려고 한 ‘불교’관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노우에에 의하면 불교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 때문에 그는 ①역사적 연구, ②비교적 연구, ③비평적 연구라는 세 가지 연구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①역사적 연구란 산스끄리뜨 문헌 등의 독해에 의해 불교의 역사적 변천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 불교가 전승된 과정에서 혼입된 오류를 제거하고, 진실의 불교를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고 보았다. ②비교적 연구란 자신의 종파만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문교나 그리스도교 등도 비교·검토하여 공평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 불교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종교가 된다고 보았다. ③비평적 연구란 텍스트 비평을 행하여 교설의 진위를 확인하여, 하늘을 난다든가 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배제하는 것이다. 이노우에에 따르면 비판적 연구 없이는 불교가 하층사회의 종교로 전락하지만, 종교가가 이러한 3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한다면, 불교는 제국대학의 지식인층조차도 지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노우에가 내세운 불교 연구법은 시모다가 지적하고 있는 유럽의 불교학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구에 의해 명확해지는 것은 바로 역사적인 붓다의 사상이다. 이러한 이노우에의 불교관은 같은 시기에 동경대에서 강의하고 있던 무라카미에게도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른바 무라카미가 《불교통일론》에서 제시한 ‘①교리안(敎理眼) ②논리안(論理眼) ③역사안(歷史眼) ④비교안(比較眼) ⑤비평안(批評眼)’이라는 5가지 연구법은 이노우에의 3가지 연구법에 교리와 논리를 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무라카미의 《불교통일론》은 이노우에가 유럽의 근대불교학에 따라 제시한 문제, 즉 그것은 일본에 존재하는 불교는 타락한 것으로 믿음의 대상으로서는 부족하다는 지적에 대해 시의적절하게 대답한 저서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불교통일론: 제1편 대강론》 〈여론〉 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대불교학과 대승비불설론

조성택(2012)이 《불교와 불교학》에서 이미 지적하고 있듯이, 불교의 역사는 문명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 흐름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흐름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세계 각 지역으로 전파되어 전개된 것이다. 두 번째 흐름은 19세기 유럽에서 출현한 근대불교학이 동아시아로 역수입되어 불교 이해가 새롭게 제시된 것이다. 

전자는 불교가 인도에서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지역문화와 결합하면서 초창기 불교의 모습을 벗어나 새로운 불교적 특성이나 세계 보편종교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준다. 후자의 경우는 역으로 불교가 서구인들의 시각에 의해 기독교처럼 하나의 종교로 인식되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들에 의해 세계 각국에 전개된 다양한 불교의 가치가 외면되고 인도에 원류를 둔 불교 즉 초기불교를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불교로 인식하는 근대불교학을 형성했다.

사실 유럽의 근대불교학은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 등으로 쓰인 원전 자료의 수집과 문헌학적 이해를 중시하며, 문헌을 벗어난 역사적 맥락이나 전통에 대한 내재적 이해는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른바 근대불교학은 태생적으로 역사성이나 현재성과 단절된 문헌 위주의 인식론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서구 근대불교학이 가지는 한계는 문헌을 통한 ‘책상 위의 불교’ 혹은 ‘책상 위의 상상력’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른바 유럽의 근대불교학은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해 제기된 서구적 우월주의에 입각한 오리엔탈리즘의 사상적 지배하에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하튼 일본의 ‘근대불교학’ 혹은 앞에서 언급한 괄호의 ‘불교’란 일본 정부의 대외 팽창 정책과 맞물려 해외 선교사와 시찰단을 비롯한 유학승 등을 해외에 파견하여 유럽의 근대불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과연 일본 근대불교학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스에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일본의 근대불교학이 산스끄리뜨 연구의 수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난조 분유와 가사하라 겐주가 메이지 9년(1876) 영국에 유학한 일, 아니면 메이지 17년(1884) 귀국한 난조 분유가 오타니교고(大谷教校, 현재는 오타니대) 교수가 되고 이듬해 동경대 강사가 되어 산스끄리뜨어를 처음으로 가르친 때 시작됐다고 말한다.

 

필자는 스에키가 제시하는 위의 두 입장 중 후자에 해당하는, 즉 난조 분유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885년 무렵 동경대학에서 산스끄리뜨를 가르치며 직접적으로 유럽의 근대불교학을 일본 국내에 정착시키기 시작한 것이 일본 근대불교학의 태동으로 본다. 이러한 일본의 근대불교학은 동경대와 각 종단의 사립대학에서 산스끄리뜨 등을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강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일본의 근대불교학 성립과 관련하여 조성택(2012)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메이지 유신 초기 비난과 축출의 대상이었던 불교는 ‘불교학’으로, 승려는 ‘학자’로 변신해 일본 근대화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신은 한편으로 일본불교 근대화의 주요 내용이면서, 동시에 불교가 일본에서는 전통과 근대, 더 나아가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각 종단의 유학승으로 유럽에 파견되어 익혀 온 서구의 근대불교학, 즉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 등을 기반으로 한 문헌학이나 실증적인 연구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정착시킨 일본의 근대불교학은 긍정적인 측면과 더불어 태생적 한계도 지니고 있었다. 사실 유럽의 근대불교학은 유럽의 지성이 형성해 온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론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19세기 유럽의 식민지 팽창과 더불어 역사적 근원을 추구하는 낭만주의적 분위기도 한껏 더하여, 빅토리아 시대 전반까지 풍미했던 이집트학 대신에 인도학(Indology)의 열풍이 근대불교학의 출현에 일조하였다.

당시 유럽의 언어학, 문헌학적 연구는 역사 발전의 근원을 탐색하고 규명하는 고전주의 혹은 낭만주의의 흐름 속에 있었고, 이런 흐름이 불교 연구에도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당시 유럽의 인문학이 고전 문헌학을 통해 새로운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견하려고 했듯이, 불교학자들은 산스끄리뜨 문헌을 통해서 불교를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럽 근대불교학의 창립자인 뷔르누프가 불교의 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빨리어와 산스끄리뜨 문헌들의 연구를 강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뷔르누프 이후 유럽의 근대불교학은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티베트어의 해독과 더불어 불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성과를 축적해 왔고, 이러한 성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다국적 협력의 산물로서 ‘근대불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불교는 하나의 타자로서 문헌 안에 존재하였고, 아울러 불교 전통의 내재적 맥락을 벗어나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정체성이 추구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자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던 불교는 현실과 괴리된 채 ‘타자에 대한 상상’이라는 유럽의 시각에 맞추어 변형되었다. 사실 근대불교학의 폐단은 역사적 인물로서 붓다와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불교의 원형으로서 문헌을 통해 이해되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전승된 대승불교의 경우에는 철학에서 신앙으로 변질된 역사적 전개 과정으로 보는 부정적 인식이 농후했다.

한편 서구 불교학계를 대표하는 학자 중 프랑스 출신의 선불교 학자인 베르나르 포르(Bernard Faure)는 근대불교학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인류학적·사회학적 접근을 통한 인접 인문·사회과학과의 소통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라는 저작은 근대불교학의 한계를 성찰하는 데 다음과 같이 유용한 관점이 제시되고 있다.

 

불교는 실제로 시대·장소·전파된 문화권에 따라 영향을 받으며 끊임없이 변화해 왔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불교는 세속적인 근원을 통해서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동시에 오늘날까지도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전통이다.

 

이러한 근대불교학의 오리엔탈리즘적 성격에 대한 비판과 성찰로 인해 최근의 불교학은 문헌 속의 불교에서 벗어나 역사적 현장 속에서의 불교, 사회적 현실 속에서 부단히 변화하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불교의 모습을 다루고자 한다. 최근의 불교 연구는 분야별로 문헌에만 의존하던 과거의 연구 경향을 어느 정도 탈피하여 민간 구전이나 전승, 그리고 현지 조사에 의한 연구가 함께 병행되고 있다.

사실 무라카미의 《불교통일론》에 제시된 5가지 연구방법론과 ‘대승비불설론’에 대한 그의 견해는 유럽의 근대불교학이 제시하는 원전주의나 근본주의적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실천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불교도의 입장에서 절충적으로 받아들이는 유연하고 주체적인 자세를 어느 정도 보여준다. 

특히 무라카미가 《불교통일론》에서 제시하는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에 나타난 설법의 주체로서 붓다는 법 그 자체로서 법성신(法性身)이고, 또한 붓다에 대응하는 보살도 이상적 인물일 뿐이므로 대승 경전의 붓다를 인간으로 볼 수 없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대승불설론 비판’ 관련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승비불설론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 문제로서 교리 문제가 아니다. 교리 방면에 있어서는 한 사람도 대승이 불설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 만일 교리적 관찰로 하자면 대승은 실로 진실한 불설로서 소승보다도 더 한층 수승한 것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소승은 응화신(應化身)의 설이고, 대승은 진보신(眞報身)의 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무라카미는 대승불교를 이해할 때, 역사적 입장 이외에 교리적 입장에서 대승비불설론을 다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제시한 대승비불설은 역사적 입장에서 붓다의 직설이 아니라는 점을 논한 것이고, 교리적인 측면에서 대승은 불설(佛說)이 가지는 특성을 지닌 점에서 불설로 인정된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일찍이 인도의 부파불교 시대에 부파불교의 가르침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제기됐던 ‘부파불교 비불설’의 논쟁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부파불교의 가르침도 법성(法性)과의 부합성 등의 관점에서 불설로 간주된다. 

결국 이러한 원전 중심적인 대승비불설론의 귀착지는 ‘근본불교’였다. 이러한 근본주의적 입장은 붓다의 원음(原音)을 비교적 온전히 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동남아시아 상좌부불교의 가르침도 불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인 엄격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 대승비불설론 논쟁은 실증적인 역사 연구의 도입과 관련된 담론으로 초기에는 적지 않은 갈등과 혼란을 야기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을 통해 대승불교가 비로소 학문적인 엄밀성으로 초기불교와 대비하여 자신의 교리와 사상을 선명하게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무라카미는 1898년 《일본불교사강(日本佛敎史綱)》을 간행한 후, 1901년 《불교통일론》을 지어 불교에 대한 문헌학적·역사학적 접근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실 무라카미가 그 당시에 주체적으로 수용한 유럽이나 일본의 근대불교학은 오리엔탈리즘의 내재적 속성이나 제국주의적 과거의 행적으로 인해 일면 부정적인 영향과 그 한계가 명확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부단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인류 보편의 지적·종교적 가치를 공유하고 구현하기 위해 비판적으로 재해석되어 다각적으로 변용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김재권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 일본 용곡대학 대학원 불교학과 문학박사, 인도철학회 회장,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역임. 공저서로 《깨달음 총론》 《치유하는 붓다》 《번뇌,끊어야 하나 보듬어야 하나》 등이 있고, 역서로 《대승불교의 실천》 등이 있으며, 현재는 유식학과 현대 심리학 등의 학제적 연구에 천착하고 있음. 능인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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