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탁오는 누구인가? 

유럽과 동아시아의 격변기인 16세기 말, 명나라의 대사상가인 이탁오(李卓吾, 본명 李贄, 1527~1602)는 중국의 동남해안인 천주항(泉州港)의 외국인 거류지에서 태어났다. 송(宋)대 이래 천주는 중국의 최대 항구일 뿐 아니라 마르코 폴로 같은 서양인도 세계 최고의 항구라고 부른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명초 영락제 시기 유명한 정화(鄭和)의 해상 항해가 여기서 출발했으며, 동남아 화교의 고향으로 중동과의 교류가 활발해서 이슬람 사원인 청정사와 함께 이슬람교도의 대형 묘지가 조성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해외문화 특히 이슬람문화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그는 27세에 지방의 과거를 통해 거인(擧人)으로서 29세에 하남성 교유로 관직을 시작했다. 원래 학문에 뜻이 있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관직을 선택했지만, 조부의 서거로 부친에 이어 고향에 돌아와 왜구와 싸우는 등 수제(守制)의 시간을 보냈다. 이 기간에 어린 딸들을 영양실조로 잃는 가난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뒤이어 북경과 남경의 국자감 박사를 거쳐 남경의 예부 사무와 형부 원외랑 등의 관직을 거치며, 강직한 성격 때문에 자주 상사와 충돌했다. 남경에서 당시 명 중기에 일어난 양명학이 온건파와 급진파로 계승되면서 그는 급진파인 왕간(王艮)의 태주학파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관직으로 운남성 요안현의 지부(知府)로서 1580년 54세에 관직을 사임했다. 그는 요안현 지부 시기에 특히 불교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퇴임 후 그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호북성 황안에 머물면서 평생의 소원이던 학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퇴임 시까지 관리로서 대과를 거쳐 대관을 역임한 것도 아니며 특별하게 학문적 성취를 해 세상에 두드러지게 알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그동안 온축되었던 그의 포부와 학문적 결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선 친구 경정리의 형으로 호부상서를 역임한 대관 경정향의 천와서원에서 자제들을 교육하면서 학문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정향과 인생과 학문 및 교육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둘러싼 이견으로 결별하고 유마암에서 머물며 본격적인 불자로서 생활하다가, 1589년 63세에 친구들이 마련해 준 호북성 마성현의 경치 좋은 용담호 옆 작은 불사(佛寺)인 지불원(芝佛院)으로 옮겼다. 지금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폐허로만 남아 있지만. 16세기 말 지불원은 당시 중국의 사상적 아카데미였던 의미 깊은 사상적 고향이었다. 이 불사에서 그는 스님 무념(無念)이나 양정견(楊定見) 등 여러 스님과 교류하며 매우 바쁘게 지냈다. 우선 세속인과의 만남으로 낭비할 시간을 줄이기 위해 주위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머리를 깎고 부인을 비롯한 가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유학의 경전을 비롯하여 문학과 역사, 철학 관련 서적을 광범하게 읽으며 토론하고 저술하며 학문을 강의하는 등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그는 1589년 63세에 지불원에서 유교의 오륜을 주제로 한 《초담집(初潭集)》을 간행하였다. 이 저서는 남북조 시대 유의경의 《세설신어(世說新語)》와 초횡(焦竑)의 《초씨유림(焦氏類林)》을 모델로 앞으로의 학문과 저술의 중요한 출발로서 오륜 중 특히 부부 관계와 붕우 관계를 사우(師友)로 매우 중요시하였다. 

다음 해인 1590년,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는 동시에 세상의 핍박을 자초한 문제의 대저인 시문집 《분서(焚書)》를 간행했다. 그는 이 저서의 서문에서, “근세 학자들의 고질이 들어 있어 그들이 죽이려 할 것이니 읽고 나서 태워버리라는 뜻으로 ‘분서’라 한다.”고 참으로 기발하고 도전적인 주제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세계 여러 곳에서 독재자들이 책을 많이 태우는 경우가 있지만, 자기의 저서를 태우라는 의미의 제목으로 출간한 것은 세계사에 흔하지 않은 사례일 것이다.

73세이던 1599년, 이탁오는 남경에서 역사 인물 평가의 대저인 《장서(藏書)》 68권을 출간했다. 그는 이 역사서에서 중국의 상고 시기부터 원(元)대까지 수천 명의 역사 인물을 많은 경우 전통적 평가와는 달리 나름대로 독특하게 평가하여 큰 파란을 불러왔다. 그는 역사는 맨눈으로 보기 어려워 천백 년의 훗날을 위해 책을 쓰노니 진심으로 이 역사를 이해하길 바라면서 감추어 두길 바란다고 했다. 특히 그는 자유로운 시비(是非)를 주장하면서 성리학이 한족의 사상적 정통인 도통론(道統論)을 강조하는 데 대해서, “땅 파면 물 있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도(道)가 있는 것이지, 어떻게 특별한 사람에게만 도가 있느냐?”고 강력히 부정하였다. 특히 《장서》의 서문 결론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기지만, 제발 공자의 시비로 시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경고하여 공자 천하의 중국을 뒤흔들었다. 

《분서》와 《장서》를 출간했으며, 지불원에서 사대부의 부인과 딸들과 불법을 학습하고 이 내용을 《분서》 등에 실어 시대의 윤리를 문란케 하였다는 죄목으로 1602년 76세에 북경에서 예과 급사중 장문달의 탄핵을 받아 구속되자, 이탁오는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황제 신종(神宗)은 혹세무민(惑世誣民)과 사문난적(斯文亂賊)을 이유로 이탁오의 기간, 미간의 모든 저서를 금지하고 폐기하도록 비답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시대의 문제들을 세상에 파헤쳐 비판한 이탁오의 저서들은 많은 독자들의 호응으로 더욱 널리 전파되자, 다음 왕조인 청대에 중국 서적을 총정리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주편 기윤(紀旳)은 이탁오의 저서를 금서 목록에 넣어 20세기 초까지 서고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나 청에 이어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공자 상점을 타도하자(打孔家店)”는 구호로 유교 전통을 과감하게 비판한 5·4 신문화운동이 시작되자 이탁오와 그의 사상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의 묘역도 다시 정리되고 저서들이 출판됨은 물론 16세기 말의 유교 반도와 사문난적이었던 그는 반유교와 반봉건의 진보사상과 아울러 대중문학, 역사가, 여성 평등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되면서 일대종사(一代宗師)로 추존되고 있다. 

 

2. 광선(狂禪)으로 탄핵당한 이탁오

1) 이탁오에 대한 장문달의 탄핵 상소

이탁오는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2년 예과 급사중 장문달(張問達)의 다음과 같은 탄핵 상소로 구속되었다. 

 

이지는 젊었을 때 (유자로서) 관직을 역임했는데, 만년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또 최근에는 《장서(藏書)》 《분서(焚書)》 《탁오대덕(卓吾大德)》 등의 (불온한) 서적을 간행하여 국내의 인심을 혹란케 하였다. 진(秦)의 여불위와 이원을 지모 있는 명신, 이사(李斯)를 재력 명신, (한 초의) 탁문군이 훌륭한 배필을 잘 선택했다고 했으며, 사마광이 한 초의 재정 정책가 상홍양을 논한 데 대해 가소롭다 하고, 진시황을 천고(千古)의 최고 황제라 하고 공자의 시비(是非)를 시비의 표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미친 듯한 행동은 이루 다 들을 수 없을 정도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마성에 머물면서 무량배들과 암자에서 놀면서 기녀를 끼고 백주에 같이 목욕했다. 사대부의 부인과 딸들을 암자에 끌어들여 불법(佛法)을 강하고, 금침을 갖고 들어와 자기도 했으니 참으로 미친 듯한 광경이었다. ……최근에는 근처의 사대부들조차도 불법을 염송(念誦)하고 스님을 받들며 염주를 손에 쥐고 계율을 중시하며 방에는 묘한 불상을 걸어놓아 공자의 가법을 알지 못하고 선교(禪敎)에 빠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 탄핵의 주요 내용은 곧 공자의 시비 부정, 부당한 역사 인물 평가와 더불어 불교에 귀의한 후 이탁오의 삶이 불교적이었음을 알려 준다.

2) 지불원의 만년 생활 

그는 어릴 때부터 자유롭고 굽히지 않는 강인한 성격이어서, “도학을 믿지 않고, 도교를 믿지 않고, 석가를 믿지 않아서, 도학인을 보면 미워하고, 스님을 보면 싫어하고, 특히 도학 선생을 보면 미워했다.”라고 했다. 그러나 40세에 남경에서 예부사무의 직에 있을 때 이봉양, 서용검의 소개로 양명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1580년 54세 요안현 지부로 임기가 끝날 때부터는 불경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탁오는 퇴임 후 호북성 황안에서 경정향의 천와서원에서 머물다 불화를 빚어 1589년 친구들이 지어준 마성의 작은 불사인 지불원(芝佛院)으로 옮겨왔다. 이후 1600년 요승(妖僧)으로 쫓겨날 때까지 머물며, 연구 강학 저술 여행으로 명성을 높였다.

그는 비록 가족들을 고향에 돌려보내고 혼자 불사에 머물렀으나 교리와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했다. 머리를 깎았으나 수염은 남기고, 무념 주우산, 양정견 등 스님들과 땅을 깨끗이 쓸고 독서와 학습, 강의와 저서에 열중했다. 

그는 가족을 고향 천주로 돌려보내고 머리를 깎고 혼자 지불원에서 살면서 지은 최초의 저서 《초담집》의 서문에서, “내가 머리를 깎은 데도 이유가 있으니, 비록 머리를 깎아도 실은 유자(孺子)이다. 그러므로 먼저 유서(儒書)를 쓰며, 유서를 쓴 후에 다시 덕행으로 머리에 관을 씌우련다. 그러므로 유서를 잘 읽고 덕행을 잘 말하는 자 나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진정한 유자가 되기 위해서 머리를 깎은 것처럼 사리에 맞지 않은 말을 했다. 하지만 이탁오는 당시 상상계의 중요한 시대적 조류인 삼교합일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의 〈삭발가〉를 살펴보자. 

 

3) 치발(薙髮) 삭발의 노래

 

적막한 연못가의 한 못생긴 늙은이 

머리 깎고 곧장 중이 되었네. 

원하건대 갠지스강 모래알처럼 많은 중생

제도하여 해 달 같은 등불 되거라. 

 

가정이란 진정 성가신 부담이고, 

세속 어울려도 자꾸 원망이 따르네. 

떠나자꾸나 산속에 드러누워

새벽에 일어나면 죽이나 한 사발 마시고 말자. 

 

유생 노릇도 어언 반평생, 

봉록을 탐낸 지도 오랜 세월이라. 

무생인(無生忍)을 증명하고 싶어.

처자식과의 인연 다 팽개쳤노라. 

 

대정이란 은둔과 상관없는 것이지. 

혼백이 맑으면 절로 남들과 어울리게 되지

그런데 이제 응도(應度)한 사람, 부처 품에 부합하는 것

예전에 벼슬하던 그 사람이 아니구나.

 

4) 이탁오의 삼교합일과 〈삼교귀유설(三敎歸孺說)〉

그의 삼교의 동도와 병중의 합일 사상은 매우 흥미롭다. 그가 주장하는 ‘삼교가 유학으로 돌아간다’는 〈삼교귀유설〉은 마치 유교 중심의 삼교합일설 같지만, 결론은 오히려 불교 중심으로 대부분의 그의 문장처럼, 특유의 비유와 역설로 가득하다.

 

유교, 도교, 석교(釋敎)의 학문은 하나로 같은 것으로, 삼교 모두 도(道)를 들어 깨치려는 기대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유가는 부귀가 뜬구름 같고, 천하가 헌신짝같이 천해도 해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도가는 부귀를 칼, 족쇄 같은 형구로 속히 떨쳐버리려고 했다. 불가는 부귀를 함정에 빠진 호랑이 표범, 그물에 걸린 물고기로 본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고, 살려 해도 살 수 없는 지경이다. 이것이 유교, 도교, 불교의 다른 점이다. 그러나 도를 깨침으로써 세속을 벗어나려는 기대는 똑같다. 반드시 세속을 벗어나야만 부귀의 고통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실로 도학을 강론하여 유가 불가 도가가 다 같이 세속을 벗어나고자 한 뜻을 추구해서 부귀의 괴로움을 벗어나고 싶은 자들은 결연히 머리를 깎고 화상(和尙)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의 결론은 유교가 아닌 불교의 출가와 화상이었다. 유가의 무능과 무실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3. 지불원의 비구니 매담연과 이탁오의 여성관 

1) 지불원의 불법교학(佛法敎學)

이탁오가 관직을 사임한 후 머리를 깎고 불사인 지불원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가 학문을 함께했고, 그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그중에는 부녀자들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두드러지게 거론되고 이지에 대한 비난과 탄핵의 구실이 되기도 한 여인이 마성현 명가의 과부 매담연(梅澹然)이었다. 

그녀는 호북성 마성현 지방의 대호족으로 장군인 매국정(梅國楨, 1542~1605)의 과부 된 딸인데, 비구니로서 여자 관음보살이었다. 당시 명문거족이었던 매국정은 명교(名敎)를 부정하고 불교를 좋아하며 세론을 개의하지 않고 고독을 해소하고 해탈을 추구하는 과부 된 딸의 출가를 허용하였다. 그의 딸과 며느리들은 매국정의 친우이기도 한 지불원의 이지와 서신을 교환하며 스승과 학생 동지로서 불도를 토론하며 마음으로 깊이 교류하였다. 담연의 영향으로 그의 올케인 자신(自信), 명인(明因), 선인(善因) 등도 함께 이지에게서 불도를 배웠다.

70 노년에 접어든 이지는 늙어 손과 붓이 얼고 글자가 어려워지고 산중에 친구가 없었던 터여서 이들 비구니를 백설(白雪)의 양춘(陽春)처럼 반기고, 아울러 세상에 도학을 배우는 사람 없는데 그들이 도를 배우니 기쁨으로 여겼다. 

2) 사우(師友)와 정인(情人)으로서 매담연 

이탁오는 그들의 사제관계를 굳이 부정하고 있지만, 불도를 가르치고 배웠던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사학자 전겸익(錢謙益)은 담연에 대해 “매국정의 과부 된 둘째 딸이 이탁오에게 불법을 배우고 매국정 역시 그에 참여하고 있으니, 그는 곧 먼 옛날 큰 불자 방공(龐公)의 후계자”라고 했다. 

이지는 여기서 매담연을 월상녀(月上女)에 비교하고, 자신은 그녀와 불도를 같이하는 동도자로 생각했다. 이탁오는 매담연의 사촌인 매장공(梅長公, 1575~1641)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와 담연을 함께 크게 칭찬하였다.

 

담연은 이로 해서 후세에 명성을 크고 넓게 떨칠 것입니다. 그녀는 참으로 총명하며, 참으로 맹렬하며, 참으로 바르고 원대합니다. 형상노인(매국정)이 이처럼 훌륭한 딸을 갖고, 이처럼 훌륭한 조카를 둔 줄은 참으로 의외입니다. 부러워하며 사모합니다. 내가 5년간 이곳을 떠나 두루 사방 몇만 리를 돌아다니면서도 단 한 사람의 최고 성인과 큰 현인을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 돌아와서 공의 형제자매(그의 사촌누이 매담연 포함)의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되니 나의 돌아옴(楚 지역으로)이 참으로 헛되지 않습니다.

 

매담연의 재능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는 이 글에서 특히 이탁오가 담연에게 성현(聖賢)에 가까운 존경을 보내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탁오에 대한 여성 관계에 대한 사회의 비난은 과부 매담연 때문이기도 했다. 한 서신에서 누군가가 이탁오에게 “그 여인의 지혜가 춘추시대의 유명한 남자(南子)에 미치느냐?”고 힐문한 것도 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지는 매담연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분서》에는 〈다시 담연사에게〉를 비롯하여 《관음문》 속의 서신 5통이 들어 있다. 그녀의 아버지 매국정이나 사촌 매지환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녀에 대해 자주 쓰고 있다. 그녀와의 사제관계에 대하여 이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는 나를 스승으로 부르니, 나도 역시 그에게 담연사(澹然師)로 부르며 내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지 않으려는 이 계율을 결코 범하지 않으려 한다. 아! 서로 만나지는 못하고 서로가 스승이 됨은 물론, 다만 스승일 뿐 아니라 서로를 스승이라 부르니 이 또한 특이하지 않은가!

 

이 서신들은 일종의 감정 교류 방식이었다. 의심 없이 이지와 매담연 간에는 스승과 제자(師生) 사이의 도에 뜻을 둔 동지 외에 실낱같은 이성 간의 애연 느낌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의 시 〈각기(却寄)〉를 보자.

 

들리는 소리마다 자기 자신을 일깨우네 

삶과 죽음은 산 같은데 속세는 꼼짝 않는구나. 

관음보상 뵙고 싶다면 지금 네가 관음이니라. 

연꽃은 원래 꽃을 닮은 사람에게 속하나니,14)

 

거리에 성인이 가득하다(滿街道聖人)는 말 그대로 이탁오의 관음은 매담연인데, 이는 매담연에 대한 애모의 정이 넘치는 표현이다. 이 시는 농후한 정과 두터운 뜻이 곳곳에 담겨 있다. 

이지는 그 시기 불교 신자인 한 과부를 방문했다고 비난받았는데, 사대부의 젊은 여인인 과부와 서신으로 교환하며 불법을 논한다는 것은 온 마성 안의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지는 실로 400여 년의 시대를 앞서 살았던 사상가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봉건적 유교 사회의 비난과 탄압 

이렇게 순수한 불법(佛法)의 사제관계는 매국정의 집안을 시기하는 마성 선비들의 심한 비방에 직면하였다. 드디어 만력 1600년, 이지의 나이 74세에, 마성의 선비들과 지방관이 결탁하여 “여승의 음탕한 행동” 운운하며 비방하고, 이탁오가 머무는 용호의 지불원을 부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법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이러한 비방 탓에 이탁오가 1602년 체포되었다가 옥중에서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자, 절망한 매담연도 울분과 실망으로 형용이 고고(枯槁)하여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실 이지와 매담연 등의 왕래는 그 시대에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현대의 상황에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지만, 정주학의 어용 철학이 보편적 도덕이었던 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건으로 큰 논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그들이 주고받은 서신들을 이지는 《분서》에 수록해서 큰 비난을 자초했다. 뒷날 76세에 탄핵을 당할 때, “사대부 집 부인과 딸들을 절로 데려와 불법을 강하고, 금침을 갖고 와 자기도 했다”라고 비판받은 빌미가 되었다. 《분서》의 출간 이래 이지와 불화하던 마성의 대관료 경정향과 당시의 당권자들은 특히 이 점을 크게 문제 삼았다. 이지가 사대부가의 여자들을 유인했으며, 그릇된 도로써 민중을 현혹시킨 요망한 사람이라고 경멸했고, 심지어 이지에게 폭도를 보내기까지 했다. 

 

4) 〈도를 배움에 여자 식견 부족의 견해에 대한 답서〉

      (答以女人學道爲見短書)〉

이 글은 “여자가 재주 없는 것이 바로 덕(女子無才便是德)”이란 명대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에 항의해서 쓴 유명한 서신으로, 이탁오의 진보적 여성관을 가장 잘 표현한 글이다. 그는 뛰어난 여자 제자인 과부 매담연에 대한 칭찬을 서슴지 않았고 그에 대한 비난을 부정하면서, 그러한 학문적 또는 남녀 간의 교류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인데 왜 용납되지 않느냐고 항의하였다. 자신에 대한 비난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인간성을 들어 반격하였다. 이지는 이때 논란이 된 여자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홀아비, 과부, 고아, 및 독신자들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성인도 불쌍히 여겼었고, 이 여인들의 도덕과 문장은 앞선 철학자(현인)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산에 살며 들에 있는 사슴과 돼지들도 오히려 서로 짝을 찾아 즐기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며 거침없이 반박했다. 이러한 과부 비구니와 노인 이탁오 간의 편지와 친절을 주고받는 것은 전통 관념에서 당시 봉건사회의 사람들에게 가장 민감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이 소문은 사람들에 의하여 멀리 퍼지고 온 성안에 풍우를 몰고 와 머무는 불사인 지불원에는 큰 분란이 일어나고, 이지는 비판을 퍼붓는 대중들의 표적이 되었다. 

당시 사대부 학자 중 어떤 사람은 이지에게, “여자는 견식이 모자라는데 학문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서신을 보냈다. 아마도 이지의 논적 경정향 측에서 매담연을 향한 이지의 칭찬을 지적했던 듯하다. 이지는 이에 대해, “여인의 도를 배움에 남자보다 못하다는 데 대한 답서”란 명쾌하고 도전적인 명문의 답서에서 이를 논리적이고 격정적으로 통박하였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럴까요!”라면서 대체로 여자들은 문지방 밖을 나가지 않고 집 안에만 머물러 있는 데 비해, 남자는 활을 다려 사방을 쏘듯이 밖에 나가 활동을 하니 이런 상황에서 식견의 뛰어남과 모자람을 함께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사람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고 하면 옳지만, 식견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또 말하건대 사람의 식견에 있어서 우월함과 모자람이 있다고 하면 옳지만, 남자의 식견은 모두 우월하고 여자의 식견은 모두 열등하다고 한다면 또 어찌 그것이 옳겠는가? ”라며 아주 명백한 논리로 시원하게 그의 주장을 들어 공격하였다. 

이어서 고대 여자의 성인처럼 추앙되던 주나라 무왕의 왕후였던 읍강(邑姜)과 문왕의 왕후 문모(文母), 태사는 한 성스러운 여인으로서 문왕의 네 친구(四友)로 함께 일컬어졌다고 칭찬했다. 특히 당나라 시대 장안의 유명한 기녀였던 설도는 촉(蜀) 지방 출생으로, 그녀와 같은 문학적 재능을 가진 기녀는 원미지 같은 대문인으로 하여금 천리 밖에서도 사모하도록 했다고 그녀의 능력을 찬양했다. 

5) 이탁오와 매담연과 여성관

이탁오가 그의 가족을 귀향시키고 깊은 산속 불사인 지불원에서 고독한 구도와 저술, 강학의 생활을 매우 열정적으로 계속하고 있을 당시는 몸과 마음이 몹시 피로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분서》의 발간 이후 가까운 친우마저 그로부터 떠나버리고, ‘성인의 가르침에 대한 이단자’라는 박해는 날로 증가했으니, 그에게는 종교에 가까운 신념은 물론 다른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의 도를 구하며 도를 실천하는 생활은 보다 열기를 더해 가고, 그의 붓끝은 더욱 날카로워져, 〈독서락〉에서는 중국 역대의 인물을 종횡무진으로 높이거나 깎아내리는 등, 역사 속의 사건과 인물들과 대화하면서 파묻혀 살고 있었다. 이러한 때 그를 존경하며 따르는 총명한 여제자인 매담연에 대한 애착과 기대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즉 담연은 이탁오의 고독한 투쟁적 생애에 용기를 주게 된 제자이며 동시에 학문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런 관계는 이탁오가 그의 서신이나 시에서 죽은 부인 황 씨에게 그처럼 애타게 갈구했으나 얻을 수 없어 아쉬워했던, “스승과 학문적 동도자” 즉 사우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매담연이야말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단테(1265~ 1321)의 이상적인 여인상인 베아트리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탁오의 삶이나 여성관에 중요한 의미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문과 이상 추구에 머물렀던 그들의 관계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보기 드문 이상적 만남은 매우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통념을 초월하여 남녀의 벽을 뛰어넘은 것으로 그의 여성관이나 사회사상에 실현되는 자유의 의지였고, 실험이기도 했다. 명말 같은 어려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 여성을 그의 강학에 참여시켰고 아울러 함께 학문을 논하고, 그것을 출판했다는 사실 역시 중국 여성 교육사에서 획기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탁오는 그러한 여성 제자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그 나름의 여성관을 형성·심화시키고, 그 시대의 진보적 여성관의 촉매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4. 맺는말 

중국에서 성리학이 국가 및 사회적 정통 이념으로 교조화하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크게 위축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견해는 명대에 자주 거론된 “여자는 재주 없는 것이 바로 덕”이란 말이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한서》에서 《금사》에 이르는 13개의 정사 속에 보이는 ‘정렬(貞烈)’의 여인이 245명이며, 《송사》에 55명, 《원사》에 187명인 데 비해, 《명사》에만 308명이나 된다는 점에서 더욱 뚜렷하다.

사실 유교 사상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중국 사회에서 구성원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 등의 편견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결혼의 자유와 교육의 기회를 박탈한 데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던 여성의 전족(纏足) 등, 여성에 대한 차별과 병폐는 이미 수없이 지적되었다. 

이탁오 여성관의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해 보겠다. 

1) 여성의 결혼 자유 긍정

그는 《장서》의 〈사마상여를 논한다〉라는 글에서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자유로운 결합을 열렬히 긍정하고 있다. 즉 전한 무제 때, 집을 뛰쳐나가 부모의 허락 없이 자유로이 결합했던 과부 탁문군을, “훌륭한 배필을 잘 선택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시집 잘 가는 방법”이라고 칭찬했다. 이러한 이탁오의 주장은 경정향 등 그의 논적으로부터 ‘여색을 좋아하기(悅色)’ 때문이라고 비난당했고, 탁문군이 집을 뛰쳐나가 부모의 허락 없이 결혼한 것도 ‘성품대로 따르는 것(率性)이냐’고 힐난을 받았다. 그는 또 마성의 지불원에 있을 때, 아들 귀아(貴兒)가 용호에 빠져 죽은 후, 며느리에게 개가를 권유하는 등 결혼에서 여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주장하였다.

2) 여성에게 남자와 동등한 교육 기회 부여

위에서 본 장문달의 탄핵문에서 이탁오는 기녀 및 사대부가의 여자들을 강학에 참여시켰다고 혹독하게 비난받고 있음을 살펴본 바 있다. 여자들의 능력이 결코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강조하여 물의를 빚었던 그는 마성의 지불원에 있을 때 여자들을 그의 학문 교학에 참여시켰으며, 여성 제자들과 서신을 교환했고, 함께 《관음문》 같은 글을 《분서》에 실어 간행하기도 했다. 

3) 여자의 재능 긍정

위에서 서신 외에도 여성들의 능력을 긍정하는 내용을 담은 이탁오의 글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초담집》에서 〈부부〉 〈부자〉 〈사우(師友)〉 〈형제〉 및 〈군신〉의 오륜 관계를 분류하면서 〈부부〉 편 4권을 맨 앞에 놓고 있다. 

목차 내용을 보면 〈합의에 의한 결혼〉 〈죽은 혼령 간의 결혼〉 〈배필을 잃음〉 〈투기하는 부인〉 〈재주와 식견〉 〈언어〉 〈문학〉 〈현명한 남편〉 〈현명한 부인〉 〈용감한 남편〉 〈속된 남편〉 〈고통 속에 사는 여인들(苦海諸媼)〉 〈불제자의 여인들(彼岸諸媼)〉로 구분하고 있다. 〈부부〉 편을 제일 먼저 다룬 〈부부 편 총론〉은 아주 훌륭한 논문이다.

부당하고 편파적인 여성관에 대한 이탁오의 반박은 여인의 요망한 목소리와 자태가 사람(특히 군주)을 미혹시킨다는 논의에 대해 문제의 본질을 통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한의 무제(재위 B.C 140~87)는 웅대한 재능으로서 만여 리의 땅을 개척하고 위의 무제 조조(155~220)는 영웅으로서 중원에 할거하였지만, 이들이 어찌 여인의 목소리와 아름다움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내 이로써 보건대 만약 하 왕조에 말희나, 오에 서시(西施)가 없었더라도 나라가 서고 멸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화민국 초의 저명한 문인 임서(林紓, 1852~1924)가 당시의 진보적 사상가들이 측천무후를 성왕, 탁문군을 유명한 여자라고 한 것을 통렬히 비난하면서, 원매와 이탁오를 짐승과 같다고 한 것은20) 이탁오와 그의 저서가 역사 속에 영구히 묻혀버릴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이탁오는 물론 유교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해 비판하고 이의를 제기한 유일한 인물은 아니었다.21) 그러나 그는 이 당시에 그 문제를 매우 ‘명확한’ 언어로 저서를 통해, 남녀의 공학을 통해 실천적으로 표현했던 사상가였다. 물론 이탁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아주 근본적이고 조직적으로 개혁을 시도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서 여성의 교육을 실천에 옮겼고, 교류를 시도했으며, 그의 저서 속에서 문제점을 지적했고 고발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언어로 개선을 촉구하였다. 이 점에서 이탁오는 중국 여성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선구자적 자유인이었다. 

이처럼 원래 유학자이면서도 유교를 깊고 광범하게 비판한 이탁오는 머리를 깎고 불교의 스님으로 20여 년을 불사에 머물렀다. 그는 불교 사원에서 그의 학문과 사상을 정리하며 저술하였음은 물론 여성 신자들과 불교적 교리를 학습하고 그의 논의를 〈관음문〉으로 《분서》에 넣어 출간한 것은 그의 진보적 여성관이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신용철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경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중국 사상사와 독일 근세사로 석사와 철학박사 학위 취득. 주요 저서로 《이지의 사회비평(독문)》 《동양의 역사와 문화》 《홍콩은 어디로 가는가》 《마카오 1999년》 《공자의 천하 중국을 뒤흔든 자유인 이탁오》 《이탁오와 조선의 실학》 《운허 스님의 큰 발자취》 《현대중국정치사》 《역사를 속이면 역사에 속는다》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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