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전쟁과 평화 그리고 종교
1. 들어가는 말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이어진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은 근대 초기 유럽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변혁적인 분쟁 중 하나로 기록된다. 주로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분열된 영토 내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거의 모든 유럽 강대국을 종교와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로 끌어들였다. 역사가 마이런 구트만(Myron Gutmann)은 이 전쟁을 “하나가 아닌 세 개의 전쟁, 여섯 개 이상의 주요 당사자”로 묘사하며 그 복잡하고 다면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이 분석은 전쟁이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 뿌리 깊은 종교적 긴장에서 시작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성격이 점진적으로 정치적 지배와 유럽 권력 역학의 재편을 위한 광범위한 투쟁으로 변모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진화는 궁극적으로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Peace of Westphalia)으로 이어졌는데, 이 조약은 기나긴 유혈 사태를 종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국가 체제, 국제관계를 규율하는 원칙, 그리고 종교적 관용의 범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했다.
1618년 보헤미아 반란에서 시작된 이 전쟁에 유럽 주요 강대국 대부분이 개입하면서 전면전으로 확산하였다. 이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와 사회·경제적 붕괴를 초래하며, 유럽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쟁 중 하나로 남았다. 역사학자 피터 윌슨(Peter H. Wilson)은 이 전쟁을 “유럽의 비극”이라 부르며, 공동체가 자원·인구·도덕적 확신을 동시에 상실했다고 지적한다. 기근, 질병, 약탈 등으로 유럽 사회는 극심한 충격을 경험하였고, 이는 평화와 질서, 전쟁의 윤리적 한계를 요구하는 새로운 의식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종교 절대주의의 쇠퇴와 국가 주권에 기반한 새로운 국제 질서의 탄생을 이끌었다.
이 글은 30년 전쟁(1618~1648)의 역사적 맥락과 종교적 기원을 검토하고, 그 전쟁의 국제 정치적 의미와 평화 구축의 함의를 분석하고 나서,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불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을 포함한 모든 종교인에게 어떠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지 논의한다.
2. 역사적 맥락과 분쟁의 기원
1)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종교적 혼란
1618년경, 광대하고 명목상 통일된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은 로마에서 덴마크까지, 모나코에서 리투아니아까지 뻗어 있는 유럽의 심장부를 통제했다. 1452년부터 강력한 가톨릭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이 통제권을 유지하며 지배적인 제국 왕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의 웅장함은 내부의 복잡성을 감추고 있었다. 제국은 300개 이상의 개별 국가와 도시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였으며, 동시에 각기 나름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수많은 영토 내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공동체가 모두 거주하는 다양한 인구가 있었다.
이러한 분권화되고 파편화된 지역적 특성은 종교적 분열과 결합되어 분쟁에 취약한 불안정한 환경을 조성했다. 제국의 광대함과 합스부르크 왕조가 중앙집권적 통제와 종교적 통일성을 주장하려는 야망은 깊이 분열된 정치 지형과 직접적으로 충돌했다. 황제는 자신의 영토 전역에 로마가톨릭 절대주의를 강요하려 했지만, 수백 개의 반독립적인 실체라는 구조적 현실은 그러한 통제를 시행하기가 본질적으로 어려웠고 종종 광범위한 저항에 부딪혔음을 의미했다. 제국의 열망과 분권화된 정치 구조 사이의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은 신성로마제국을 내부 분쟁에 특히 취약하게 만들었으며, 그 국경 내의 분쟁이 왜 그렇게 쉽게 대륙 전체의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었는지 설명한다.
2) 아우크스부르크 화의(Peace of Augsburg)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개신교 종교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로마가톨릭과 새로이 등장한 개신교 교파 대표적으로 루터교(Lutheranism)와 칼뱅주의(Calvinism) 사이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켰다. 고조되는 종교 분쟁을 진압하기 위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Peace of Augsburg)가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군주의 종교가 곧 그 신민의 종교이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을 공식화하여 제후들에게 각자의 영토의 종교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종교적 공존을 위한 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지속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휴전에 불과했다. 그 근본적인 결함은 빠르게 성장하고 영향력이 커지는 개신교 교파인 칼뱅주의를 합법화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중요하고 확장되는 종교 집단을 그 조항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이 협정은 진정으로 지속적인 평화를 확립할 수 없었다. 대신, 칼뱅주의가 계속 확산되고 그 신봉자들이 인정과 보호를 추구함에 따라 종교적 긴장이 필연적으로 다시 불붙을 수밖에 없는 압력솥을 만들었다.
3) 라이벌 연맹의 형성
가톨릭과 개신교 진영 간 수십 년 동안의 상호 불신과 적대감은 17세기 초에 더욱 심화하였다. 이러한 확전은 특히 가톨릭 합스부르크 가문이 자신들의 종교적 견해를 강요하고 교회를 이전의 지위로 회복시키려는 단호한 노력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는 광범위한 가톨릭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운동의 핵심 목표였다. 이러한 노력은 지역 및 지방 개신교 지도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고조되는 적대감은 1608년 개신교 세력을 대표하는 조직인 ‘개신교 연맹(Protestant Union)’을 결성한 것에 대항하여 가톨릭 세력의 연합체인 ‘가톨릭 연맹(Catholic League)’이 1609년에 결성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라이벌 연맹의 형성은 단순한 조직적 발전 이상이었다. 그것은 갈등의 제도화에서 중요한 단계를 나타냈다. 이들이 설립되기 전에는 종교적, 정치적 긴장이 국지적이거나 비공식적일 수 있었다. 종교적 정체성에 명시적으로 기반을 둔 공식적인 무장 동맹을 만듦으로써, 대립하는 측은 확산된 적대감을 조직화된 군사 블록으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제도화는 어떤 국지적인 갈등을 대규모 분쟁으로 만들고, 고립된 분쟁을 대륙 전체의 전쟁으로 변모시켰다. 이러한 발전은 임박한 분쟁의 가능성과 잠재적 규모를 크게 높였다.
4)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
30년 전쟁 발발의 즉각적인 촉매제는 1618년 5월 23일에 발생한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Defenestration of Prague)’이었다. 프라하의 가톨릭 당국에 대한 폭력적인 시위로 묘사되는 이 사건은 보헤미아 개신교도들이 두 명의 가톨릭 제국 대표를 궁전 창밖으로 던져버린 사건이다. 이 저항 행위는 개신교 교회 폐쇄와 미래의 신성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가 보헤미아 국왕으로서 자신의 영토에 로마가톨릭 절대주의를 강요하려 한 시도로 촉발되었다.
이 ‘창밖 투척 사건’은 30년 전쟁의 즉각적인 촉매제로 작용하였지만, 분쟁의 근본 원인은 아니었다. 대신, 그 사건은 수십 년간의 상호 불신과 적대감의 정점이었다. ‘창밖 투척 사건’은 시민 및 종교 당국의 완전한 붕괴를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이고 공개적인 행위였다. 그것은 합스부르크 통치와 가톨릭 강요에 대한 폭력적이고 명백한 거부였으며, 보헤미아 개신교도들이 더 이상 평화적 협상을 실행 가능한 선택지로 여기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따라서 이 행위는 지역적 불만을 공개적인 반란으로 확대하여 다른 유럽 강대국들을 빠르게 끌어들여 더 넓은 분쟁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였다.
3. 전쟁의 주요 단계와 중요한 사건
길고 파괴적인 분쟁인 30년 전쟁은 다음의 네 단계로 구분된다. 보헤미아 단계(1618~1625), 덴마크 단계(1625~1629), 스웨덴 단계(1630~1635), 프랑스 단계(1635~1648).
1) 보헤미아 단계(1618~1625)
전쟁은 1618년 5월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Defenestration of Prague)’ 직후 보헤미아 단계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개신교 귀족들이 페르디난트 2세의 가톨릭 절대주의 강요 시도에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중요한 저항 행위로 개신교 지도자들은 팔츠 선제후(Elector Palatine) 프리드리히 5세(Frederick V)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했다. 초기 교전에서는 개신교의 승리도 있었지만, 1620년 백산 전투(Battle of White Mountain)는 개신교 군대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제국군과 가톨릭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혔고, 이는 보헤미아의 가톨릭 재개종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이 지역에 대한 수 세기 동안의 통치 확보로 이어졌다.
2) 덴마크 단계(1625~1629)
보헤미아의 패배 이후, 독일 내 영토적 이해관계를 가진 루터교 통치자인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는 1625년에 개신교 대의를 지원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개입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4세는 1626년 루터 암 밤베르크 전투(Battle of Lutter-am-Bamberg)에서 “갑옷을 입은 수도사”라고 불린 틸리(Tilly) 백작에게, 그리고 나중에 볼가스트(Wolgast)에서 보헤미아 사령관인 발렌슈타인(Wallenstein)에게 중요한 패배를 당하는 등 상당한 좌절을 겪었다. 덴마크의 전쟁 참여는 1629년 뤼베크 평화조약(Peace of Lübeck)으로 사실상 끝났는데, 이 조약으로 덴마크는 독일 개신교 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고, 이 분쟁에서 주요 유럽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이 하락했다. 이 단계는 합스부르크의 승리를 굳혔고, 종교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킨 복원 칙령(Edict of Restitution)의 발표로 특징지어졌다.
3) 스웨덴 단계(1630~1635)
1630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Gustavus Adolphus) 의 참전은 개신교 측에 새롭고 더 성공적인 단계를 열었다. 뛰어난 군인이자 경건한 루터교도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침공하여 고도로 훈련되고 혁신적인 군대를 분쟁에 투입했다. 그의 군대는 1631년 제1차 브라이텐펠트(Breitenfeld) 전투에서 최초의 위대한 개신교 승리를 달성하여 스웨덴 군사 조직과 전술의 우월성을 입증했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의 작전은 뉘른베르크와 뮌헨을 포함한 상당한 영토의 정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개신교 부흥기는 1632년 뤼첸(Lützen) 전투에서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전사하면서 비극적으로 단축되었는데, 이는 스웨덴에게 값비싼 승리였다. 1634년 뇌르틀링겐(Nördlingen) 전투에서는 가톨릭이 스웨덴-독일 연합군에 대승을 거두어 개신교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
4) 프랑스 단계(1635~1648)
전쟁의 마지막이자 가장 긴 단계에서는 가톨릭 프랑스가 스페인과 중앙 유럽의 가톨릭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여 참전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개입은 전쟁이 종교적 갈등에서 정치적 목표에 따른 갈등으로 변모했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의 권력을 봉쇄하고 자체적인 전략적 이익을 확보하고자 했다. 프랑스의 개입은 전쟁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 전환점이었다. 가톨릭 프랑스가 가톨릭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여 스웨덴과 네덜란드 공화국과 같은 개신교 세력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한 것은 분쟁이 초기 종교적 동기를 초월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만약 종교적 연대가 가장 중요했다면 프랑스는 가톨릭 동맹국들을 지원했을 것이다. 국가 이익, 영토적 야망, 그리고 세력 균형을 우선시하기로 한 그들의 전략적 선택은 이러한 세속적 목표가 참여의 주요 동기가 되었음을 명백히 보여주며, 전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30년 전쟁은 세속적 정치 논리가 전통적인 종교적 충성심을 점차 능가하면서 유럽 외교와 전쟁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실용적인 지정학적 고려 사항이 갈등과 동맹 형성의 주요 동인이 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 통치의 등장을 알렸다.
이 단계의 주요 전투로는 1643년 로크루아 전투(Battle of Rocroi)가 있었는데, 이는 스페인 세계 지배의 상징적인 종말을 알리고 프랑스의 중요한 승리를 보여주었다. 전쟁은 1642년 제2차 브라이텐펠트(Breitenfeld) 전투와 1645년 얀코프(Jankov) 전투와 같은 다른 주요 교전으로 계속되었으며, 30년 전쟁이 1648년 최종 종결될 때까지 그 분쟁은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성격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4. 베스트팔렌 평화조약(Peace of Westphalia)과 그 영향
길고 파괴적인 30년 전쟁은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Westpha-lia)에서 세 개의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통칭되는 이 협정들은 유럽 강대국을 대표하는 109개 대표단이 참여한 광범위하고 복잡한 협상의 정점이었다. 이 전례 없는 외교 회의는 다자간 외교 회의를 통한 평화 달성의 새로운 선례를 세웠으며, 국제관계의 중요한 진화를 나타냈다. 이 조약들은 신성로마제국 내 30년 전쟁을 종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간의 80년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고,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참여 규모와 구조화된 협상 과정은 현대 외교의 청사진을 확립하여, 파편화된 임시 협정에서 벗어나 유럽 안보 및 분쟁 해결에 대한 보다 집단적이고 구조화된 접근 방식으로 나아갔다.
무엇보다도 베스트팔렌조약은 유럽 전역에 새로운 종교와 정치 질서를 확립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 조약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확장하여, 통치자들이 “군주의 종교가 곧 그 신민의 종교이다(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원칙을 통해 자신 영토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결정적으로, 베스트팔렌조약은 칼뱅주의를 가톨릭과 루터교와 함께 허용 가능한 그리스도교 형태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진정한 종교적 다원주의를 촉진했다. 또한, 영토 내에서 지배적이지 않은 교파의 그리스도교인들은 할당된 시간 동안 공개적으로, 그리고 원하는 대로 사적으로 신앙을 실천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이 조약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 조약에 참여한 정치 공동체가 각각 자신의 영토와 국민에 대한 배타적 주권을 인정받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 조항은 신성로마제국을 근본적으로 약화시켜 독일 제후들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신성로마 황제의 중앙집권적 권위를 약화시켰다. 황제는 모든 독일 국가가 제국 의회에서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사실상 다양한 독립국가들의 의례적인 통치자로 변모했다. 이러한 계층적이고 보편적인 제국에서 독립국가 체제로의 전환은 근본적인 체제 변혁을 의미했다. 강력한 황제 아래 통일되고 종교적으로 동질적인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중세 및 근대 초기의 이상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 자리에는 개별 국가들이 규모와 관계없이 내부 문제와 외교 정책에 대한 독립적인 권위를 갖는 체제가 등장했으며, 이는 유럽과 그 너머의 정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장기적으로 미쳤다. 베노 테슈케(Benno Teschke)가 잘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이 조약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치적 분립을 제도화하였으며, 신학적 우위를 세속적 주권 개념으로 대체했다.”
이러한 영토 주권 개념의 확립은 유럽 사회에 근대 국제 체제를 빠르게 형성시켰다. 이 개념은 국가가 자신의 영토에 대한 배타적 권한과 외부 간섭 없이 통치할 권리를 주장했다. 또한 다른 국가의 국내 문제에 대한 불간섭 원칙과 모든 국가의 규모나 권력과 관계없이 법적 평등을 확립했다. 이 틀은 국가 경계와 관할권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영토 통제에 대한 갈등을 줄이고 보다 안정적인 국제 질서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스트팔렌 주권 원칙은 단순히 법적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국가 체제가 구축된 기반이 되었다. 국가가 자신의 국경 내에서 최고이며 외부 간섭으로부터 대체로 면제된다는 사상을 확립함으로써, 이 조약들은 종교 세력 또는 제국의 주장이 다른 통치자의 영역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시대를 효과적으로 종식시켰다. 이 원칙은 유럽의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국제법과 지배적인 세계 질서에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수 세기 동안 국제관계의 조직 원칙을 확립하여 국가 자율성과 불간섭을 우선시함으로써 세계 거버넌스와 국가 상호작용의 본질을 형성했다.
30년 전쟁은 근대 국민 국가(nation-state)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는 프랑스와 스웨덴과 같은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국민 국가의 건설과 부상 과정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신성로마제국을 약화시켰다.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 확고히 확립된 주권과 불간섭 원칙은 근대 국제법 및 관계의 기초가 되었다. 이 변혁적인 시기는 또한 국가 이익과 권력의 실용적인 추구에 점점 더 기반을 둔 현대 외교와 국가 통치, 즉 ‘현실 정치(realpolitik)’의 발전을 위한 길을 열었다. 이러한 현실 정치에 기반한 국제관계에서 국민국가들은 종교적 통일성을 강요하기보다는 영토분쟁 해결과 세력 균형 확립에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요약하면, 베스트팔렌조약은 국제 정치의 세속화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종교적 고려 사항보다 영토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장 중요시했다. 베노 테슈케(Benno Teschke) 가 잘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베스트팔렌 체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치적 통일을 해체하고, 신학적 일체성을 세속적 세력 균형으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 국제법과 외교 질서의 토대가 되었다.
베스트팔렌조약의 중요한 결과는 유럽에서 종교전쟁의 현저한 감소였다. 1648년 이후 주요 유럽 전쟁은 종교적 차이 때문에 벌어지지 않았고, 이는 갈등의 본질에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이는 대륙 전역에서 세속주의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종교는 개인과 사회에 그 중요성이 계속 유지되기는 했지만, 정치 문제와 국제 문제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제도의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30년 전쟁 이후 정치적, 경제적 동기가 정치 및 사회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점차 종교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선택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 통치의 세속화는 국가의 권위가 점차 자명하고 실용적으로 되었으며, 명시적인 종교적 명령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의미했다. 마크 그린그래스(Mark Greengrass)가 잘 요약한 것처럼, “베스트팔렌은 유럽에서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지만, 종교가 전쟁의 주된 명분이 되는 시대를 끝냈다.” 베스트팔렌 이전에는 신성한 권리, 종교적 진리, 또는 특정 신앙의 방어가 종종 국가 행동과 개입의 주요 정당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베스트팔렌조약 이후에는 정치적 권력이 더 이상 신성한 의지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국가 이익과 안보를 추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5. 30년 전쟁과 현대 평화론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중앙 유럽을 황폐화시킨 대재앙이었던 30년 전쟁은 해결되지 않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긴장이 가져올 수 있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비록 근대 이전 국가 운영의 역사적 특성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 전쟁의 지속적인 유산, 특히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국제관계를 계속해서 깊이 있게 형성하고 있으며 현대 평화론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첫째,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협정은 현대 국제법의 초석이자 현실주의 평화론의 주요 초점인 국가 주권의 근본 원칙을 확립했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개별 국가의 주권적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종교 갈등으로 발생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단순화하려고 했으며, 특히 종교 내부 문제에 대한 외부 간섭을 제한했다. 이는 독립적이고 공존하는 국가 체제로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 현대 민족국가 시스템의 기반을 형성했다. 특히 현실주의에 뿌리를 둔 현대 평화론에서 이 역사적 선례는 안정적인 국제 질서가 명확한 국가 경계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불간섭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강화한다. 비록 냉전 이후 인도주의적 개입과 국제 거버넌스에 의해 절대 주권 개념이 도전받고 있지만, 베스트팔렌의 경험은 어느 정도의 국가 중심 질서가 광범위한 분쟁을 예방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인식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둘째, 30년 전쟁은 이념적 절대주의의 위험성과 다원주의 및 타협의 필수적인 필요성을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30년 전쟁은 비록 다면적인 갈등이었지만, 이 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강렬한 종교적 열정으로 인해 촉발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데, 각 측은 종종 자신들의 교리가 절대적인 진리이며 신성한 승인을 받았다고 믿었다. 이 전쟁의 경험은 이념적이든, 종교적이든 절대주의는 인류사회에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배타적 진리에 대한 확고한 고수는 대화와 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반대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군주의 종교가 곧 그 신민의 종교이다(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원칙을 도입하여, 각 영주가 자신의 영토 내 종교를 결정할 수 있도록 했으며 소수 종교에 대한 일부 조항도 포함했다. 비록 불완전했지만, 이는 종교적 다양성을 수용하고 종교가 주요 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을 줄이기 위한 실용적인 단계였다. 현대 평화 구축에 있어 이 역사적 경험은 깊은 이념적 차이가 존재하더라도 다원주의를 포용하고 관용의 문화를 조성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경쟁하는 정치 이념, 민족주의, 급진적인 종교적 해석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대의 갈등은 17세기의 절대주의적 충동을 떠올리게 한다. 베스트팔렌의 교훈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론은 포괄적인 거버넌스, 소수자 권리 존중, 그리고 다양한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외교적 틀을 옹호한다.
마지막으로, 30년 전쟁은 대규모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어 다자 외교와 협상의 필수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이어진 평화 과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길었으며, 수백 명의 다양한 국가 및 단체 대표들이 수년간 모임을 했다. 전례 없는 규모의 이 광범위한 외교적 노력은 방대한 파괴 이후에도 지속적인 대화, 복잡한 협상, 그리고 새로운 법적 틀의 확립을 통해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조약 자체는 단순한 휴전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재편하고, 영토 분쟁을 해결하며, 미래 분쟁 해결 메커니즘을 확립한 포괄적인 법적 문서였다. 이 역사적 경험은 국가 간 관계를 관리하고 갈등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국제기구, 조약, 외교적 규범의 창설 및 강화를 강조하는 현대 제도주의적 평화 접근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유엔, 지역 안보 기구, 국제 법률 기구는 모두 부분적으로 국익을 초월하고 집단 안보를 달성하는 데 집단 외교와 제도화된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베스트팔렌의 이해에서 비롯된다.
6. 나가는 말: 30년 전쟁과 한반도 평화
30년 전쟁은 종교적 대립이 정치적 야망, 경제적 이권과 결합하여 인류에게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 비극적인 역사이다. 이 전쟁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유럽 대륙을 황폐화했으며, 종교적 신념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인류애와 공존의 가치가 어떻게 유린당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반도의 평화와 더 나아가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불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을 포함한 모든 종교인에게 30년 전쟁은 과거의 단순한 사건을 넘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중요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첫째, 30년 전쟁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절대주의와 종교적 광신주의가 낳은 파괴적인 결과를 명확히 보여준다. 30년 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교리 충돌에서 촉발되어 유럽 전역을 폐허로 만든 참혹한 종교전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오히려 신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결과 대량 학살, 기아, 불관용의 극치를 낳았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각자의 교리가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며 서로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했다. 이러한 배타적 신념은 타협 불능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결국 무력을 통해 상대방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로 발현되었다. 이러한 비극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의 공존을 추구하는 불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을 비롯한 종교인들에게 깊은 교훈을 제공한다. 종교가 갈등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자산이 되기 위해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 되묻는 계기가 된다. 이 비극은 종교인들이 교리의 절대성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평화라는 보편가치에 귀 기울여야 함을 보여준다. 한반도도 분단 이후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오늘날에도 종교적·이념적 이분법이 평화 담론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30년 전쟁은 종교가 국가 폭력에 동조할 때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경고한다.
30년 전쟁은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종교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종교적 신념을 통해 궁극적인 진리와 평화를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만이 절대적이며 타인의 신념은 오류라고 단정 짓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불교의 자비(慈悲)와 연기(緣起) 사상, 그리스도교의 사랑(Agape)과 용서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공존과 포용을 강조한다. 30년 전쟁은 이러한 보편적 가치가 종교적 광기에 의해 어떻게 쉽게 잊힐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자신의 신념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동시에 다른 신념 체계를 가진 이웃에 대한 겸손과 관용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나의 신념이 옳음을 증명하는 싸움이 아니라, 다양한 신념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둘째, 30년 전쟁은 종교가 세속 권력과 유착될 때 발생하는 위험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종교를 자신의 영토 확장과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의 명분으로 삼았다. 종교 지도자들 역시 정치적 이득을 위해 종교적 정체성을 훼손하며 전쟁을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종교적 대의명분 뒤에는 종종 권력과 부를 향한 인간의 탐욕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종교가 정치적, 경제적 이권과 결합하여 갈등을 심화시키는 사례를 여전히 목격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존엄과 평화를 가르치지만, 때로는 정치적 편향에 휩쓸리거나 특정 세력의 도구로 전락하여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기도 한다. 30년 전쟁은 종교인들에게 종교의 초월적 역할을 상기시킨다. 종교는 세속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세속 권력이 정의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인도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려는 유혹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평화 건설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조약은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내정 불간섭과 국가 주권을 제도화함으로써 종교전쟁의 종식과 외교의 길을 열었다. 이 조약은 오늘날 국제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종교 관용’과 ‘다자 협상’이라는 평화 원칙의 시초가 되었다. 종교인은 교리의 우월성을 주장하기보다, 타 종교의 존재 자체를 평화의 조건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 구조가 지속되는 유일한 지역이다. 이때 불교인과 그리스도교인 등 종교인은 분열의 경계선에 서서 중재자, 화해자, 치유자가 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종교인은 전쟁의 기억을 되새기며, 기억을 분노가 아닌 치유와 대화의 언어로 번역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단순히 정전협정을 종전선언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념과 종교의 벽을 넘는 ‘관계의 회복’을 통해 가능하다.
30년 전쟁은 종교가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진정한 평화는 관용과 공존의 윤리를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도 함께 보여준다. 한반도와 세계가 직면한 분쟁 속에서, 종교인은 더 이상 침묵하거나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 30년 전쟁의 역사적 경험은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불교인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강력한 경고이자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30년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이 새로운 질서를 모색했듯이, 우리 종교인들은 과거의 비극을 거울삼아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30년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이다. ■
이병성 bslee734@gmail.com
연세대 경제학과를 거쳐 캐나다 맥길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기독교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으로 동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술로 《한국전쟁 70년과 ‘이후’ 교회》 《폭력개념연구》 《평화의 신학》 등의 공저서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