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는 폭력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으로 타인을 헤아려 남을 해치거나 살해하지 말라.
— 《법구경》 130
지금 이 순간에도 우크라이나에서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스러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서는 단 열이틀 만에 1,000명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기술의 발달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율적인 살인을 가능하게 했지만, 어떠한 갈등도 종식시키지 못한 채 고통의 상황만을 증폭시키고 있다. 고통의 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이때, 과연 종교는 어떠한 방식으로 응답해야 하는가.
불교는 그 교리의 근간에서부터 일관되게 폭력을 거부해 온 종교다. 특히 개인의 의지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 폭력인 전쟁은 더욱 명백한 거부의 대상이 된다. 전쟁은 그 자체로서 폭력을 전제로 하며 그 현장에 놓인 모든 생명에게 직접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초래한다. 고통의 소멸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불교가 생명의 존엄을 강조하고 비폭력을 실천의 기반으로 삼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전통적으로 비폭력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이 개인적인 수행과 교리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불교는 때때로 개인의 해탈과 고요한 내면 수행에만 집중하면서 고통받는 세계의 현실과 거리를 두어 온 것이 사실이다. 남아시아의 상좌부불교에서는 승려가 사회적 문제에 깊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승적을 포기해야 한다. 항거할 수 없는 폭력의 장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교의 교리를 저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가 말하는 평화란 기껏해야 ‘관념화된 평화’ 즉 현실을 도외시한 채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데에서 멈추고 말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모른척하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불교는 개인의 수행만큼이나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metta)을 강조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붓다를 따르는 이들은 개인의 수행에 전념하는 한편 일상 속에서 평화와 비폭력을 실천함으로써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야 한다. 《자애경》에서 “누구라도 분노와 악의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Sn 1.8)라고 설한 것은 단순히 수행자 개인의 덕목일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고통을 덜어내라는 윤리적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불교가 자비를 말한다면, 참혹한 현실에 침묵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는 자비의 종교라는 불교의 정체성을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특히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보살도를 설하는 대승불교에서 현실에 대한 무자각이나 무관심은 그 자체로 사견(邪見)이다. 대승에서는 진정한 보살의 길, 진정한 깨달음이란 중생의 구제를 통해 완성된다고 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교도의 적극적인 사회적 개입은 수행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 전쟁의 심층에는 불교 전통에서 고통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삼독(三毒), 즉 탐욕·성냄·무지가 자리하고 있다. 무지와 욕망이 뒤엉킨 전쟁을 멈추는 일은 곧 삼독의 고리를 끊는 일이자 고통받는 중생의 구제를 통해서 보살도를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승을 따르는 수행자는 자신의 내면에서 삼독을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속에 구조화된 탐욕과 증오를 인식하고 그것을 해체하려는 외적 실천에도 함께 나서야 한다. 평화는 마음의 평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전쟁의 상황에 종교는 어떠한 방식으로 응답해야 하는가’라는 최초의 질문은 단순히 수행자의 계율 해석의 타당성 여부 검토를 넘어 ‘불교도는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저 외부자의 관점에서 관념적인 평화를 외는 것이 아니라면, 대승을 따르는 이들의 사회적 개입 방식 중 하나는 적극적인 비폭력, 소위 ‘비폭력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폭력에 입각한 사회적 개입은 틱낫한 스님이 제창한 참여불교(Engagement Buddhism) 운동에서 구체화하였다. 참여불교는 불교의 교리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불교의 관점과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사회에 확산시키고자 하는 실천적 운동이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서 설립된 미국의 ‘비폭력을 위한 자비 센터(Metta Center for Nonviolence)’는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개인의 힘(Person Pow-er), 건설적 프로그램(Constructive Program), 비폭력적 저항(Non-violent Resistance–Satyagraha)으로 나아가는 사회변화의 점진적인 로드맵(Roadmap)을 제안하고 있다.
이 중 첫 번째 단계인 개인의 힘은 디지털 디톡스, 명상과 같은 개인의 수양을 의미하며, 두 번째 단계인 건설적 프로그램은 수양으로 길러진 내면의 힘을 교육·공동체 조직·자급자족·생태농업 등 구체적인 제도를 통해 지속 가능한 사회 구조로 전환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불교의 사회적 참여의 핵심은 세 번째 단계에 있다. 수행으로 다져진 개인과 그들이 고안한 제도가 기존 체제로부터의 반발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힘을 기르는 데에서 비폭력 저항으로 나아가야 한다(We move on, from a position of strength, to nonviolent resistance).”
여기에서 비폭력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방법으로 재해석된다. 비폭력은 종교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윤리적 무기이며, 근대사회에서도 간디와 마틴 루서 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것을 삶으로 증명해 왔다. 전쟁은 미움을 확산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하며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다. 반면 비폭력은 이해를 촉진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공동의 생존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불교는 이 비폭력의 길을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길의 실천은 소수의 출가 수행자뿐만 아니라 재가 신자를 포함한 더 넓은 불교 공동체에 부여된 임무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물론 비폭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의(~ism)’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비폭력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모든 사회적 참여는 또 다른 폭력을 낳을 가능성을 언제나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견지에서 평화의 추구 또한 ‘평화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갈등의 해소가 없는 평화는 또 다른 고통을 낳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폭력 저항의 실천은 특정한 이념에 경도된 운동이라기보다,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절망하거나 휩쓸리지 않고, 상황을 관조하며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마음 챙김’의 실천이다. 비폭력은 바로 그런 자리에서 요청되는 지혜와 자비의 실천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위험성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현장에 대한 관심과 개입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번 호 특집은 ‘전쟁과 평화 그리고 종교’를 주제로 마련되었다. 전쟁의 공포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절망은 곧 우리의 절망이며, 그 고통은 무관심으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모든 보편종교의 합의된 입장일 것이다. 그렇기에 때때로 종교가 전쟁의 참상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직시해야 한다.
이번 특집은 종교의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점검하며, 근본을 되살리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 특집이 미래에 더 올바른 관심과 개입을 위한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평화는 단지 이상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는 침묵이 아니라 참여를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5년 9월
이상민 (본지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