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은 ‘모든 생명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 관계성은 어울림을 기본 모토로 삼고 있다.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고,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댈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너와 내가 분리된 개념이 아닌 우리라는 공동 의식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관계성, 이는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연기법의 원리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무아(無我)의 상태를 깨닫는 순간,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이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수도자와 같은 구도의 삶을 살게 한다. 이 수행 과정은 내 작품의 근간이 되었고, 내 작품의 명제들인 무제(無題), 중생, 어울림, 하모니, 블랙홀, 그리고 너와 나 시리즈에는 모두 연기의 원리가 담겨 있다.
내 삶에서 불심은 외할아버지인 우촌(牛村) 전진한 선생과 경봉 큰스님의 유발상좌 같으셨던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쉽게 지나치지 않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기심보다 이타심으로 사셨던 어머니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자비가 깃든 불교와의 인연으로 연결되었다.
1975년 해외 유학 시절, 어머니가 보내주신 소포 상자를 열어보니 누런 종이로 싼 목장갑 한 꾸러미가 보였다.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고국과 어머니의 대한 그리움은 물론 추운 새벽 리어카를 끌며 구멍 난 면장갑을 끼고 청소하던 아저씨들의 손, 공사 현장에서 땀 흘리는 노동자들의 손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함께 의사소통을 위해 수화를 하는 손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장갑을 끼면 모두가 평등해지는 손 등이 연상되었다. 허드렛일할 딸의 손을 걱정하시는 어머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감사의 마음을 담아 면장갑을 작품으로 만들어 어머니에게 선물하고자 했던 작업이 오늘날 내가 ‘장갑 작가’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목장갑은 때로 캔버스와 동일시되기도 하고, 작품 속 하나의 오브제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서민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끌렸다. 그것은 한민족의 소박한 정서와도 연결되어 있다. 나는 장갑은 손이라고도 생각했다. 손을 통해 우리는 의사소통하고 의미를 표현한다. 한편, 손은 마음의 표정을 담기도 한다. 이를 감싸는 장갑은 곧 마음을 감싸는 것으로 비유할 수도 있다. 장갑은 기능적으로 손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의미가 있다.
장갑에 내재한 깊은 의미를 현대적 감성의 조형미로 풀어내며, 그 속에 담긴 휴머니티의 얽힘을 불교 연기법의 순환 고리에 응용하였다.
《반야심경》의 공 사상과 연기의 원리 또한 내 창작의 근원이자 모티브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는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성과 연결성을 의미한다. 홀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 모든 존재와 시공을 넘나드는 관계의 그물 즉, ‘인드라망(Indra網)’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감사, 존중, 자비의 마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자각은 나와 타인의 관계를 더욱 조화롭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창작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연기의 원리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연구하면서 작품을 통해 무와 유, 우주와 자연, 무아와 자아, 무시무종과 같은 생사를 넘나드는 조화의 관계를 표현하였다. 이 또한 우리 중생들의 삶이라고 여겨진다.
창작 소재로서 장갑을 집적하는 행위를 통해 비움과 채움, 그리고 여백의 미를 점, 선, 면으로 이어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유아독존(唯我獨尊)이나 인과응보의 법칙처럼, 모든 순환이 따로 행해지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나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기도 하다. 대만역사박물관에서 전시할 때는 나의 작품이 ‘천수관음 환생’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 30대에 백련암에서 삼천 배를 하며 성철 큰스님께 관음행이란 법명을 받은 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만 40년을 제자들을 지도해 오며 이런 어울림의 미학과 함께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아우르는 확장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 또한 섬유 예술을 전공했지만, 섬유에 국한하지 않고 한지를 이용한 설치 작업 및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성 강한 다양한 매체를 수용하였다. 종이 등을 이용한 전통과 현대의 기법들을 응용한 것도 불교의 연기 철학에서 비롯되었으며, 설치미술 작품을 통해 현시대 포스트모던의 ‘탈장르’ 역시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일찍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우주와 자연,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상상의 나래는 점과 선과 면이 모여 형체를 이루는 지극히 단순한 방식이지만, 이 또한 중생살이의 한 단면이다. 자주 나는 “그 실체는 무엇인가?”를 화두처럼 스스로 되묻고는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련의 내 작업 행위들이 ‘작가라는 옷을 입고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자 고뇌가 아닐까?’ 하고 사유하며 오늘 하루도 인연의 소중함, 그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하여, 남은 생을 수도자의 자세로 회향하고자 한다.
정경연
화가·전 홍익대 미술대학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