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에 새긴 최치원의 문장을 읽다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발상지인 문경 봉암사에 중요한 3기의 비가 있다. 신라 경명왕 8년(924)에 건립된 ‘지증대사 적조 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정진대사 원오 탑비(靜眞大師圓悟塔碑)’, 조선 숙종 42년(1716)에 건립된 ‘상봉당대사 정원 탑비(霜峯堂大師淨源塔碑)’가 바로 그것이다. 당대 최고의 국제적 지식인 최치원(崔致遠, 857~?), 고려 초의 대문장가 이몽유(李夢游),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각각 쓴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고대사와 사상사, 신라 말 고려 초의 불교계 상황, 조선 중·후기의 불교계 정황 등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고 방증(傍證)하는 귀중한 자료들인 이 〈비명〉을 번역한 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명〉에 인용된 구절의 경전적·문헌적 근거와 그 의미, 〈비명〉에 담긴 불교적 맥락 등을 정확하게 짚어내며 설명한 것은 매우 드물다.
3기의 비를 처음 본 때는 1996년이었다. 27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2023년 7월의 어느 날 ‘봉암사 비’를 다시 만나 우리말로 옮겼다. 도서출판 맑은소리맑은나라에서 최근 간행한 《봉암사 비명(鳳巖寺 碑銘)》은 이 역주(譯注)의 산물이다. 역주에 앞서 석전(石顚, 1870~1948) 스님이 1935년에 완성한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 영인본, 봉암사 비명의 탁본들,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며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상세한 주석을 달기로 했다. ‘고사(古事)’와 ‘성어(成語)’가 〈비명〉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게다가 불교, 유교, 도교, 제자백가, 음운학 등의 문헌들에 나오는 구절들도 종횡으로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 ‘인용문’을 반드시 ‘원문’과 대조해 보기로 했다. 이것이 두 번째 원칙이었다. 석전 스님이 찬술한 〈지증대사 적조 탑비명 주석(注釋)〉(《정주사산비명》에 수록)에도 많은 문헌의 글들이 인용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원문과 비교했다.
셋째 가급적 쉬운 말로 옮기려 노력했다. 같은 의미의 여러 단어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을 골랐다. 넷째 ‘비명’과 ‘주석’의 모든 한문 문장에 표점을 찍었다. 현토나 구결이 아니고 ‘표점’을 택한 것은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주석이 있는 역주문[주석본]’과 ‘주석이 없는 역주문’을 책에 함께 싣기로 했다. ‘주석이 있는 역주문’을 읽은 뒤 ‘주석이 없는 역주문’을 보면 내용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읽어도 된다.
〈지증대사 적조 탑비명 역주문〉 〈정진대사 원오 탑비명 역주문〉 〈상봉당대사 정원 탑비명 역주문〉 등은 네 가지 원칙에 따른 결과물들이다. 이와 함께 서산(西山, 1520~1604) 대사가 쓴 〈사바교주 석가세존 금골 사리 부도비문 역주문(娑婆敎主釋迦世尊金骨舍利浮圖碑文譯注文)〉, 조선 숙종 대를 대표하는 문장가 채팽윤(蔡彭胤, 1657~1710)이 찬술한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 사리 부도비문 역주문(娑婆敎主釋迦如來靈骨舍利浮圖碑文譯注文)〉,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이 지은 〈양주 통도사 석가여래 사리지기(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 등을 ‘부록’으로 실었다. ‘사바교주 석가세존 금골 사리 부도비’는 1603년 평안북도 묘향산 보현사에 세워지고, 1706년에 건립된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 사리 부도비’는 통도사 금강계단 옆에 현존하며 〈양주 통도사 석가여래 사리지기〉는 1380년에 쓴 글이다. 우리나라 사리 신앙의 시작, 전개, 그리고 전파 과정 등을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소중한 기록들이다.
‘지증대사 적조 탑비’의 〈비명〉 역주가 ‘3기의 비명’ ‘2기의 비문’ ‘1편의 기문(記文)’ 가운데 가장 어려웠다. 완성에 8년이 걸린 이 〈비명〉은 종교, 문학, 역사, 철학 등 다양한 문헌에서 채집한 방대한 내용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불교에 대한 고운 선생의 관점이 잘 표현된 뛰어난 글이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지식인의 글이라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선진 시기(先秦 時期)의 문헌에서 길어온 ‘고사’, 위진남북조 시대의 인물과 역사에서 뽑아온 ‘성어’, 불가·유가·도가의 다양한 전적에서 추출한 ‘내용’, 이들을 융합해 고운 선생 특유의 문체로 표현한 ‘수사(修辭)’ 등에 여러 번 자지러졌다.
《시경》 《서경》 《논어》 《노자》 《장자》 《열자》 《전국책》 《사기》 《한서》 《후한서》 《고승전》 《홍명집》 《광홍명집》 등에서 가져온 내용들을 정교하게 엮은 표현들이 ‘비명’에 가득했다. 근세 최고의 석학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석전 스님이 붙인 ‘주석’을 번역하는 것 역시 쉽지는 않았다.
‘정진대사 원오 탑비’의 〈비명〉에는 후삼국 당시의 정황, 정진 대사가 900년부터 924년까지 중국의 강남·강북 지역에서 수행한 내용, 고려 초기의 정세, 정진 대사와 고려 태조·혜종·정종·광종과의 관계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구절’, 문장의 멋인 ‘문채(文彩)’, 표현 기법인 ‘사조(辭藻)’ 등은 〈적조탑비명〉에 뒤지지 않아 보였다. 〈적조탑비명〉을 역주하며 단련된 덕분인지 그렇게 ‘심한 고통’을 겪지는 않았다. 조선 숙종 42년(1716)에 건립된 ‘상봉당대사 정원 탑비’의 〈비명〉은 분량 면에서 앞의 두 비명에 미치지 못한다. 내용은 상대적으로 평이했으나 ‘문채’나 ‘사조’는 앞의 두 비명에 견줄 만하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세워진 ‘사바교주 석가세존 금골 사리 부도비’의 〈비문〉은 84세의 서산 대사가 혼을 기울여 쓴 명문이며 조선 숙종 32년(1706)에 건립된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 사리 부도비’의 〈비문〉은 18세기를 대표하는 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3기의 비명’ ‘2기의 비문’ ‘1편의 기문’ 등에 대한 나의 역주가 완벽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비명〉 〈비문〉 〈기문〉의 문맥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번역한 오류에 대해서는 강호에 산재한 현인들의 가르침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고쳐나갈 생각이다. ■
조병활 chobyunghwal@naver.com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북송 선학(禪學) 사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취득. 중국 중 앙민족대학 티베트학 연구원에서 티베트불교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성철사상연 구원장 역임. 《바세연구》 《조론연구》 《불교미술기행》 《다르마로드》 등의 저서를 출간했고 《조론오가해》(전 5권), 《조론》 등의 역주서(譯注書)를 펴냈으며 우리말, 중국어, 티베트어로 쓴 논문 다수가 있다. 퇴옹학술상, 불교출판문화상 붓다북학 술상, 《불교평론》 뇌허불교학술상 등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