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어느덧 출가 50년이다. 시간이란 마음이 조작해 낸 관념의 산물이지만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빠르다. 나는 절집에서 반세기를 어떤 마음으로 지냈을까? 자긍심을 갖고 활력 넘치게 살아왔을까? 정직하게 내면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한국사회에서 불교 수행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 1,700년을 이어온 불교가 그리스도교에 주류를 내어 준 현실에서 복잡한 속내를 감출 길 없다. 불교가 사회정의의 담론을 주도하지 못하고 적절한 메시지를 대중에게 내놓지 못하는 무기력한 현실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불교가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못 하는 것이 늘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한편에는 자긍심이 있다. 그것은 붓다의 법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다. 붓다의 법은 나의 내면을 가꾸고 성숙시키는 동력이다. 언어와 사유로 측량하기 어려운 깊고 광대한 붓다의 교법, 저마다의 자질과 성향에 따른 다양한 수행법, 그리고 교법과 수행법을 대중과 함께하는 전법, 이것이 지난 50년 동안 수행자의 본분사를 지켜준 버팀목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의 중심에서 교법, 수행, 전법의 새로운 서사를 늘 고민하고 열망하였다. 그때, 불교평론이 다가왔다. 고요하고 뜨거운 시절인연이었다.
언젠가 평소 가까이 지내던 그리스도교 목회자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열린 마음으로 절집안과 교류하면서 경험한 불교가 좋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불교는 평화의 종교여서 좋다고 했다. 이웃종교 풍토와 다르게 불교는 다름을 배격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관용하고 포용하면서 평화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는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놀랄 정도로 보장된 종교라는 것이다. 다른 종교는 경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걸핏하면 이단의 굴레를 씌우는데, 불교는 교법에 대한 해석과 서사가 매우 자유로워서 부럽다고 했다.
듣고 보니 공감되었다. 그분은 또 불교는 그리스도교와 비교해 보면 몇몇 분야에서는 낙후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우수한 것이 많다면서 템플스테이, 《월간불광》 그리고 불교평론을 언급했다. ‘템플스테이’는 포교 목적을 두지 않고 종교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이 자신을 평온하게 성찰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월간불광》은 불교와 제반 문화를 접목시키는 고품격 불교 잡지라고 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종교에 기반을 둔 문화 잡지가 없으며 ‘말씀’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아쉽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평소 불교평론을 숙독하는데, 불교의 교법과 사상의 깊이를 느꼈다고 했다.
이웃종교 목회자의 칭찬을 듣고 나서 나는 서가에 있는 불교평론 수십 권의 표지를 다시 들춰보았다. 목차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특히 매호에서 다루는 특집 기사의 주제는 방대했다. 지구환경과 불교, 뇌과학과 불교, 공동체와 불교 등 그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공익제보자, 이주민과 사회적 소수자, AI 시대, 종교 간의 갈등과 화해, 낙태 문제, 젠더 문제, 불평등과 소외, 들뢰즈 등 서양철학과 불교 그리고 우리 사회와 인류의 문제 등을 경계 없이 넘나들며 폭넓게 다루고 있었다.
불교평론은 우리 사회 변화를 잘 살피고 더 나아가 불교가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모색해 왔다. 대승불교의 십바라밀 중에서 지혜와 방편 바라밀의 양 날개로 불교의 역할을 탐구한 것이다. 불교평론이라는 집단 지성은 우리 사회 문제를 끊임없이 진지하게 고뇌하고 있었다.
불교평론 지령 100호 발간 소식을 듣고 《화엄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비유컨대 어둠 속의 보물도
등불이 없으면 볼 수 없듯이
부처님법도 설하는 이 없으면
지혜가 있어도 알 수 없다.
譬如暗中寶
無燈不可見
佛法無人說
雖慧莫能了
불법을 설한다는 의미는 그저 교법을 그냥 원문 그대로 전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붓다의 진의를 시대 대중의 근기와 요구에 부응하여 해석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를 내는 일이다. 이러한 시대의 대작 불사를 그간 불교평론이 묵묵히 해왔다.
불교평론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말에 귀를 열고 손을 내미는 천백억화신이다. 원력을 가진 시대의 화신불, 불교평론의 논장 불사가 계속되리라고 믿는다.
법인 / 화순 불암사 주지

